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냈던 사절.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믿음(信)을 전제하여 통(通)하는 사신(使)'을 의미하지만 실제 당시에는 '통신'에 믿음을 통한다는 의미는 없었다. 통신은 단순한 왕의 뜻을 전하는 사절단이라는 의미를 넘어가질 못한다.
사실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사(日本王国使)'[1]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칭했을 뿐, 정확한 명칭은 간단하게 '通信使(통신사)'이다.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일본에도 막부로 파견한 대규모 외교사절단. 당연히 조선에서는 이를 가리켜 조선통신사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왕래했다가 왜란 직후 당연히 일본과의 외교를 단절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지 채 10년밖에 안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관련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해왔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해오다가 수락을 하게 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조선으로써는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아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놈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일본 측에서는 새로 집권한 도쿠가와가 기존의 도요토미 파벌을 비롯한 다른 적들을 제압할 겸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 후 1811년을 마지막으로 3번의 회답겸쇄환사와 9번의 통신사 파견이 있었다. 보통은 새로운 쇼군의 취임 기념차 일본의 초청으로 사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가게 되었다. 쇼군은 임기제 관직이 아닌 왕과 같은 사후 세습이므로 통신사는 비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통신사의 여정을 담은 기행가사로 일동장유가가 있다.
마이너 버젼(?)으로 류큐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인 류큐사절(琉球使節)이 있으며, 이들의 에도 방문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라고 했다. 류큐 왕국은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궁금해했던 많은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졌다.
진짜 마이너 버전으로, 쓰시마까지만 다녀오는 소규모 통신사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의 번주가 바뀌거나 중요 행사가 있을 적에, 혹은 조선 조정과 막부간에 충돌이 있을 경우 이를 조정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약 50여 차례 파견되었다. 규모도 훨씬 작아서 100여 명에 불과했고, 사절의 격도 낮았다. 당장 아래에서 설명한 해난사고 당시의 정사 한천석은 역관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는 통신사라 칭하지 않았지만 쓰시마 번은 이를 통신사라 칭하여 내부선전용으로 써먹었다.
그중에 1703년 2월에 도착한 통신사는 전멸(!)이라는 안타까운 결맞을 맞이했다. 이들은 죽은 쓰시마 번주의 조문 및 새로운 번주의 승계를 축하하러 온 사절이었는데 쓰시마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풍랑이 불면서 통신사 일행은 물론 이들을 안내하던 쓰시마 번 예인선 및 가신들-정사 한천석, 부사 박세양에 마중나간 쓰시마 번의 가신 야마가와 사쿠자에몬 등 고위급이 모두 사망했다.
조선 통신사의 방문은 한양 → 에도까지 대략 8개월에서 1년 가량 걸렸는데,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제발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당첨(?)된 사람의 일가족은 당연히 눈물바다. 여-몽 연합군의 2차례의 대원정이 무려 태풍때문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고 허무하게 끝났다는걸 생각하면, 전원 침몰을 두려워하는것이 정상적인 반응인 셈이다.
일본에선 조선 통신사가 지나갈 때마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 통신사의 서예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고,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심지어는 조선 사신들이 오히려 중국 사신들보다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천황 즉위식이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230억 정도 였는데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냥, 대략 670억에 가까운 돈을 썼다. ㅎㄷㄷ 그러자 일본 내에선 이에 반발하는 '국학파'라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센코쿠 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일본인들은 조선 →일본에서의 파견은 있었으나 일본 → 조선으로의 파견이 없었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도 조선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다. 대신 한양에 입성하지는 못하고 동래, 즉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역까지만 왔다갔다 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사신의 한양 입성을 허용했고, 한양에 동평관이라 하여 일본 사신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물론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 사이인 전국시대에는 전혀 일본 쪽에서 사신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그대로 침공로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왜인들이 동래 왜관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했다. 수도까지 접대하는 사신과 대강 사신관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사절의 차이는 나름 있는 것이다. 일본이 난학을 배울 때도 네덜란드인들을 이렇게 융숭한 대접은 하지 않았다. 이런 후한 대접은 특히 1682년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 절정을 이루었다. 항목 참조. 애초에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조선이 후금에 행한 것처럼 교린이었지 사대가 아니었다. 차라리 깔보면 깔봤지…
그런데 이러다 보니 횟수에서는 확연히 조선이 밀려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지식이 늘 한박자 늦는 엇박자를 치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
요즘 듣건대, 전하가 새로 서통을 이어받아 해내를 편안하게 다독거린다 하니, 이웃 나라의 의리로 보아 기쁨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상례에 따라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경하를 드리고 화목을 닦노니, 예는 그런 것 이지만 양국의 교린의 기쁨이야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애오라지 정성을 표합니다.
초기의 (그리고 오늘날 와서 강조되는 문물교류의) 통신사와 달리 최후의 통신사는 훨씬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에서 열리던 통신사를 쓰시마로 옮기기를 희망했고(1794),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통신사는 없었다(여담으로 바로 그 해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이에나리 자체가 재임기간이 길어 헌종 때인 1841년에야 죽었으므로 양국이 딱히 통신사를 보낼 이유도 없었고.
전성기 때는 이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자존심 대결의 성격도 띄고 있었던 탓에 투입된 예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경상도 지방의 예산을 몽땅 투입해야 했고, 일본에서도 조선 통신사 접대비용 예산문제로 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 당시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다고 하며(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 통신사를 맞이하는 장소를 에도에서 쓰시마로 옮기자 한 것도 교통비와 기타 등등의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보면 별 의미없는 뻘짓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나라와 교린을 맺는 것이 국제관계의 도리라는 점도 있었고, 서로 교린관계를 나누면서 혹시 모를 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덜자는 점도 있었다. 실제로 왜구 토벌을 같이 하기도 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이라는 정치적인 성과와 더불어, 공공연하게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종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양 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고,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교린을 통해 변경이 편해질 수 있고,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유사시에 제압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수 있고, 대마도 등지에서 활개치는 왜구들의 폐해를 줄일 수 있고 궁극적으론 자신들의 '예'로 일본을 교화시킬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신사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 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는 일본의 먼 미래 정세, 특히 덴노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경우 덴노의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다. 대놓고 막부, 도쿠가와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몇몇 일본 지식인들이 덴노와 구게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에는 또한 정통성을 갖춘 진정한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