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우리는 생활을 해 가면서 종종 하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다. “왜 이리 오래 걸리게 하십니까”. “왜 돌아가게 하십니까.” “왜 편안한 길도 있는데 험난한 길을 주십니까.” 전도를 할 때도 하나님의 능력을 팍팍 부어 주셔서 병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게 하시고 시험을 보는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합격하고 사업도 했다하면 돈도 착착 벌리고 하나님이 다 해 주시면 어려운 것이 없을텐데...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시간이 걸리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땀을 흘리게 만드시고 긴장하게 만드시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으면 바로 주실 것이지 그렇게 뜸을 들일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만들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걸어서 한 일주일이면 갈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서는 전세기 띄워서 수 시간이면 갈 것 같은데... 왜 굳이 40년의 세월을 빙빙 돌게 해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는가?
II.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 그 땅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준비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라도 가나안 땅은 축복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신명기 8장 7 - 9을 보면 그 땅에는 물이 흐른다고 했다. 우리는 좋은 곳을 물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강남이 물이 좋다. 이곳 독일은 물이 안 좋다. 칼크가 많다. 또한 결실이 많은 곳이다. 밀과 보리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 그리고 감람나무들의 소산지라고 한다. 그리고 철과 동을 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땅은 축복의 땅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준비를 하고 계셨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 들어갈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40년의 세월을 준비기간으로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땅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주시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그 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는 이미 축복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예)부르스 윌킨슨이 쓴 [야베스의 기도]에 보면 천국에 간 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죤은 천국에 갔다. 베드로가 그를 안내하기 위해 천국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죤은 베드로가 보여주는 황금길과 아름다운 저택을 구경하고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을 들었다. 그런데 한 곳에서 이상하게 생긴 건물 하나를 보았다. 창고 같은 그 건물은 창문은 없고 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죤이 안을 보고 싶다고 하자 베드로는 좀 꺼려하면서 “안 보는 게 나을 거예요”라고 했다. “천국에 무슨 비밀이 있고 실망시킬 일이 있어서인가” 궁금한 죤은 베드로의 공식적인 안내가 끝난 후에도 베드로에게 그 건물 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베드로는 그 건물을 보여주었다. 그 큰 건물 안에는 바닥부터 천정까지 선반으로 들어차 있었고 그 선반에는 빨간 리본으로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감개무량해진 죤은 “전부 이름이 씌여 있네요 제 것도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베드로가 ”있지요“ 라고 말하자 죤은 바로 자기이름의 첫 알파벳인 J를 찾았고 자기의 상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죤이 열어본 그 하얀 상자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었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 원하셨던 많은 복들이 담겨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고자 예비하신 많은 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죤은 구하지 않았고 받지를 못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죤이나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복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다. 문제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축복에 준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지 않고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이 되어있지 않으면 주님도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해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무한히 그의 하늘 창고에 쌓아두고 있지만 우리가 준비되지 않을 때는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기 전에 주실 때 그것을 담을 만한 그릇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실 수 없다. 주시기 전에 그릇을 준비하라고 하신다. 넓히는 작업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가 되었으니 우리만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다.
2) 혹, 무자격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자. 자격이 되어 있지 않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어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 축복을 유지하지 못한다. 감당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 축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고 빈그릇으로 쓰여지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으신다. 자격을 갖지 못한 자는 축복에 합당치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예)아이들은 애완견을 갖고 싶어 한다. 나도 이전에 애완견을 갖고 싶어 시골 5일 장터에서 개를 한 마리 샀다. 그때는 애완견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그런 종자들이 아니다. 무조건 개답게 잘 짖고 깨물려고 하는 강아지를 여러 마리 가운데 하나를 샀다. 그리고 이름을 태구라고 지었다. 저의 이름인 권순태의 “태”와 동생이름인 순구의 “구”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 독일에서 개를 키우는 것을 보니 우리는 정말 자격이 안 되었던 사람인 것 같다. 이곳에서 개를 키우려면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고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애를 하나 낳아 키우는 것이 낳을 것이다. 씻겨주어야지 개밥도 마켓에 가서 사야지 어디 여행하면 같이 가야지 산책도 시켜주어야지 예방주사도 맞추어 주어야지... 개가 상전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개를 밖에 키웠고 주는 것도 남는 밥을 주고 예방주사는 무슨 주사, 산책은 무슨 산책인가! 그리고 석류나무 아래에 개집을 두고 내내 묶어 두고 있었다. 이것이 성장해 가면서 새벽마다 낑낑거리고 운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짜증이 나든지... 그런데 그것을 숫컷이라 암컷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의 본능도 죽이면서... 시끄럽다고 어느 날 “개 파시오”하는 소리를 듣고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값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구두가 되었다. 개도 자격이 되어야 키울 수 있다. 설주 혜주가 개를 갖고 싶어 한다. 이름도 벌써 견주라고 예상이름을 지어 놓았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개를 사줄 수 있는가? 사 주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돌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개털은 어찌할 것이고 개똥과 오줌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고 누가 산보를 시켜주고 예방주사를 맞으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중요한 것은 내가 축복을 얻을 자격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즉, 그릇을 내가 준비해 놓았는가하는 문제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게 만드셨는가? 그들로 하여금 축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어 주고 계셨고 그들을 축복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래도 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있는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봐라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손실이다. 무자격한 자에게 줄때 그것은 낭비이다. 나아가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다.
자격이 안 된 자에게 나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돌팔이 의사가 된다. 할레사모님이 한방에 전문가이다. 국제 자격증과 경험도 수년이나 되고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그런데 힘이 약하기에 제가 여러 가지고 시다바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 치료를 받고 온 사람에게 내가 목에 힘주는 것을 스스로 보았다. 기구를 전달해주고 화장지를 건네주고 하다가 이제는 지가 먼데 어디가 아프냐고 묻기까지 한다. 그리고 들은 풍월이 있어서 체한 것은 위가 운동성이 떨어졌으니 뚫어야 한다는 둥, 이제는 진맥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자격증이 없다. 이런 사람을 돌팔이라고 한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나의 몸을 맡기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자격이 안 된 자에게 물질을 주어봐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겠는가? 그러한 자는 과소비를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없는 자에게 좌절만 심겨줄 뿐이다. 그 물질이 쾌락에만 사용될 것 아닌가! 이러한 자를 졸부라고 부른다. 졸지에 부자가 되어서 부자가 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자격이 안 되는 자에게 권력을 주어봐라. 국민들이 파탄에 처하게 된다. 대부분의 못사는 어려운 나라들에게는 자격 안 된 정치인이 있어서 그렇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자신들의 권력으로 기득권을 누린다. 우리나라도 과거사에 있어서 무자격해 보이는 자들이 권력을 가질 때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 속에 있게 되었는가?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자녀를 키울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신랑을 주세요. 신부를 주세요. 자녀를 주세요라고 구하기 전에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가꿀 자격이 있어야 한다. 참으로 내가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가?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라.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굳이 걸어야 했는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과정은 자격을 주는 과정이었다.
마치 언어를 공부하는 수고와 땀의 과정이 있을 때 언어를 할 수 있고 언어과정수료증을 받을 수 있고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어려운 과정이 있을 때 졸업을 할 수 있고 운동선수가 연습을 하고 음악하는 이들이 연습을 한 후에 결실을 얻을 수 있듯이 그저 그들 손에 쉽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졸업을 하고 한국에 가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하고 말을 할 때 “아, 라이프찌히요, 학교 들어가기도 쉽고 공부는 그저 시간만 가면 됩니다. 그리고 졸업은 웬만큼 하면 주는데 교수 콘탁만 잘하면 그저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다들 어렵게 했다. 논문을 써야 한다. 졸업연주 때는 피를 말린다. 이렇게 어렵게 해야지 가치가 있지 않느냐!
주님께서 아무리 가나안 땅을 지금 주고자하셔도 자격이 되지 않고 준비가 되지 않으면 주시는 축복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졸부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폭군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그들을 돌팔이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위해 사는 백성으로 만들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가게 만드시고 땀을 흘리게 하실 때 나를 골탕 먹인다고 생각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내게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 나의 그릇을 넓히고 계시는 것이다.
III. 축복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우리를 준비시키고 그릇을 만들 때 어려움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광야의 과정은 고난의 여정길이었다. 본문을 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의 연단의 세월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고 광야 길을 걷는 것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걷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고 그만을 바라보도록 하려 한 것이었다.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백성을 낮추시고 시험하신 것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지를 보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주리게 하시고 다시 만나를 주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축복이 자신들이 쟁취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여정에 따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들을 재수 없이 당한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이 축복에로 이끄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께서 예비한 축복에 상응한 자격을 주시는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시기 위한 그릇 만들기 작업임을 깨달으라. 이스라엘에게 있어 애굽 땅에서 바로 가나안땅으로의 여정이 없이는 사실상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립한 것은 바로 출애굽과 광야의 삶과 가나안입성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삶과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그것은 전쟁이었다. 민족의 대이동은 전쟁을 의미했다. 이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고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잘 나타내셨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또한 그 광야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는 한치 앞도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찌 광야를 그들의 준비로 헤쳐나갈 수 있었으랴! 그 막대한 식량은 어쩔 것이며 그 물은 어쩔 것이며 장막은 어쩔 것인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전쟁을 하면서 헤쳐나와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가? 다음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과정임을 알라. 지금 일이 어렵다고 안 된다고 실망하지 말라. 너무 빠른 결론을 맺지 말라. 아직 진행 중인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라.
예)쓰레기통을 샀다. 그것이 깨어졌다. 피곤하고 번거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꾸러 갔을 때 그들이 돈으로 갖겠냐 상품을 교환하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바꾸자고 하니 아내가 돈으로 달란다고 한다. 그래서 돈으로 가졌고 다시 그 파트에 가서 보니 어제 산 그것이 이미 반으로 되었다. 만일 전날 샀던 쓰레기통이 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른통으로 바꾸어달랬으면... 하지만 우리의 모든 일은 조그마한 일이지만 신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웃고 야단났다. 다들 쳐다보는데도 우리는 깨진 하나로 성한 두개를 얻게 되었다. 오늘 나의 삶이 조금 깨어졌을찌라도 너무 손해라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이 일이 너무 작다고 보잘 것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를 보신다. 훈련을 시키신다. 지금 너무 힘들다고 주저앉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에게 체력을 주시고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훈련하시는 것이다. 혹, 지금 내게 고통이 없다 할찌라도 내게 고통이 올 때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겠사오니 그것을 변하여 축복으로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라. 그것을 통해 주여 배우게 하소서라고 하라. 그것을 통해 크게 하소서라고 하라. 하나님이 이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가게 하시고 결국 우리를 세우실 그 날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준비시켜서 큰 그릇으로 사용하실지를 기대하라.
예)요셉을 보라. 그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까지 그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 아니었는가? 그는 형들에게 팔리운다. 노예가 된다. 감옥에 까지 가게 된다. 그의 나이 때에는 무엇을 할 시기인가? 17세 때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때는 아비투어하고 계속 우니에서 공부하고 박사공부를 할 때이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공부의 황금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예하고 있지 않는가? 소망도 없다. 그저 봉급도 없이 미래도 없이 암담하게 일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바로 아우토반 탄 것처럼 총리가 되게 된다. 혹자는 그가 꿈 하나 가지고 준비 없이 바로 총리가 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사회에서 했다. 노예를 통해서 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다.
쉽게 얻어지면 거기에 대한 감사도 없다. 얻어지는 축복에 대해 너무나 당연스럽게 생각한다.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준 은인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어렵게 얻어지면 그것에 대해 감사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축복은 더욱 그리하다. 축복은 사실, 거저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복이다. 축복에 대해 우리가 할 유일한 것은 감사이다. 누가 축복에 대해 값을 치르겠는가? 우리는 단지 축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고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이다. 축복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축복을 얻는 그릇, 즉, 자격을 만들어 놓는 것이 광야의 연단 과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광야의 길을 이스라엘백성에게 허락하시면서 겸손과 감사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그릇을 키우고 계셨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도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를 주셨던 것이다.
예)언어 해 본 사람이 겸손한다. 번역 잠깐만 해 주세요. 독일어 번역을 해보셨는가? 한 페이지를 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 한국어 실력까지 좋아야 한다. 번역은 제 2의 창작활동인 것이다. 그런데 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가치를 알지만 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생각한다.
광야의 길을 걸을찌라도 즉, 고난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지라도 그것이 방향만 바로 되어 있다면 통과해야 할 터널로 알라.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요, 그곳이 안정된 곳임을 알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아무리 편안해 보이는 곳이라도 그곳은 따분하며 유혹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해가 없는 곳이다. 오늘의 고통을 주님과 함께 담당해 나가라.
우리는 가나안땅을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그것은 광야 생활이다. 성경에서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광야생활로서 인간의 인생을 상징한다. 그 광야 생활은 어떠한가? 고난이 있고 시험이 있고 괴로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러한 광야 길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축복의 전조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광야 길을 걸으라.
우리는 어려운 광야 생활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어려우니 하나님이 나를 골탕 먹이고 있는가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없는가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 하나님은 지금 졸고 계시는가 보다. 이렇게 광야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의 광야 생활을 해석해야 하고 판단해야 한다. 주님이 내게 어떠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한 축복을 주시려고 하시지?
예)의사가 칼 대는 것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복면을 하고 칼을 드니... No! 나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 병원가기 싫어도 가야하는 것은 엄마 아빠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다.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기준을 삼아서 광야생활을 판단해야 한다. 의미가 무어냐고 물어라.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라.
IV. 이 광야의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믿음을 쫓아 살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자격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라. 미국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영국의 퓨리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곳으로 가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닌가? 그들은 금을 찾아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쫓아서 갔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곳이 신대륙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쫓아왔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부강한 미국이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퓨리탄들이 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의 형편이 어렵다 할찌라도 주님을 중심으로 살라. 가나안땅은 하나님의 인도하에 가는 땅이다.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샘과 분천이 흐르고 동과 철이 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그 모든 고난의 길도 이기게 한다. 결국 축복에로 이끄는 삶이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이스라엘은 알았다.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이 보장된 삶임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해서 가나안땅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음을 알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그날을 위해 우리를 낮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고자 했던 것은 겸손의 훈련이었다. 이제 축복을 하게 되면 그들은 배가 부를 것이다. 12-14절을 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축복 받을 자들이 이후에 받은 복으로 인하여 오히려 화가 될까봐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로 이끄신 것은 결국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배부를 때 과거를 잊는다. 축복을 참으로 가치있는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 광야 40년의 훈련을 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가나안을 위해 준비시키듯이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음을 깨달으라. 우리가 가나안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할 때 오히려 축복이 아니고 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축복이 우리에게 화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축복이 아니다.
어려운 광야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일하고 있음을 알라. 우리는 기대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면 되는 것이다. 광야의 길을 걸었던 것, 주린 것, 기타 광야에서 경험한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주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 바로 자녀에게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각자를 향하신 계획이 있다.
지난 한 주간 그리고 앞으로 계속 시험이 있다. 이 기간에 언제나 긴장하며 기도한다. 주님 학생들의 플라츠는 제한이 되어 있는데 어쩌지요? 합격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그렇다면 떨어진 사람은 저주입니까? 그렇지 않다. 모든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독특한 계획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부어줄 축복을 위하여 그릇을 넓혀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좀 기다림에 지치기도 한다. 짧은 길을 걸어도 될 것인데 길게 걷게 하신다. 돌아가게 하신다. 하지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라.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훈련에 참가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때를 기다리라. 주님께서 주실 축복을 위해 계속하여 축복을 담을 그릇을 넓히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