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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8월에 블러그에 올려져 있는걸 보면
98년 한 여름의 더위는 이 책을 보면서 잘 보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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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이 자신의 화려한 삶 뒤에 감추어졌었던
너무도 처절한 고통의 나날들을 고백하는 에세이
뇌졸증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
81세에 시어머니가 쓰러져 앉은뱅이로 산 9년을 수발
딸이 고생하는 것만 보다가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에 대한 회한,
그리고 본인의 암 투병 까지.
신달자 시인이 딸 같은 제자인 ‘희수’에게
온통 눈물 범벅이었을
지난날을 술회하는 형식으로 써내려 간 글.
읽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데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옮기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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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겠지만
백치일기 등 섬세한 글이 생생한 신달자씨에게
이런 커다란 아픔이 있으리라고는
내 상처는 그녀에 비하면 상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타인도 나처럼 거의 모두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도 들고.
나이 든 여인의 가슴 속 상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아픔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던 책.
그녀에게서 나의 아픔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열 번, 백 번, 수천 번이라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아프다는 다른 사람에게 몇 번이나 읽기를 권했던 책.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은
한번 이 책을 읽어보자.
내 아픔이 얼마나 사소했음을 알게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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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있었다.
그것이 우리부부 24년간의 우리 부부생활이었다.
나는 그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내 결혼생활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말하고 싶어서
간절히 목이 타 올랐는지 모른다.
한번 입을 열면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자신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참아왔는지 모른다.
물론 나 때문에 참았고 지금 나 때문에 말의 벽을 허문다.
희수야!
너는 이제 조금은 허리가 펴지는 결혼생활을 하며
부부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야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문득 나는 이제야말로 네게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는,
아니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너의 나이에 바로 나는 인생의 복병을 만났고
그 복병은 내 인생을 전체를 흔들어 놓았으며.
그 엄청난 내 생의 줄거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늘 생각부터 숨이 막혀 말문을 열수가 없었던 거야.
1977.5.11일 그가 쓰러졌다.
전날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우리는 별 웃음 없이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내 생일날 그가 쓰러졌다.
그가 옆으로 기우는 순간
그의 머리를 받아 안은 것은 본능적 행동이었고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운명을 안아 버린 것이다.
서른다섯 그것은 나의 한창의 나이였고
결혼생활 9년, 나는 사회라는 것을 아득히 먼 강 건너 배경으로 두었을 뿐
콩나물 값을 깎는 진부한 아줌마로써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아니 바보 멍청이로 어떤 의식이나 비판도 없이 자기 학대를 하며
가능한 빨리 생명이 닳아 없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23일의 혼수상태라는 이름으로 그는 돌덩이처럼 중환자실에.
그러나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고 내 남편이며
총명한 사람이었고 사회에 효용가치가 있는
논리적이고 정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떴지만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거의 식물인간이었다.
그가 눈을 뜨고 정확하게 3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저걸 살려냈다니.
너무 무지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런데 희망의 해를 품는다는 것은
내 가슴이 먼저 훨훨 타고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내 인생이 넝마처럼 펄럭인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
희수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말을 해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불바다의 결혼생활을 지나온 사람이지만
결혼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어.
희수야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있는 삶.
그것은 결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야.
결혼이란 그냥 옆에 있는거야
우리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
그 정도로만 생각하면 어떨까?
고향.
집안의 모든 내력이 숨어있고 웃고 흐느끼는 주소
내 어린 유아기와 사춘기의 냄새가 물씬 코를 찌르는 곳
한 여자의 출발인 초경을 시작했고
사랑이라는 낱말을 처음 발음한 곳
아버지의 고독을
어머니의 외로움을
아버지의 파경을
어머니의 좌절을 보았던 곳
제2의 고향, 청파동.
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옥죄어 오는 이름 청파동
내가 다닌 숙명여자대학교가 있고
청파동하면 아직 머리에 신열이 나고
몸에 소름이 돋으며 아찔하게 춥다.
마른기침이 난다.
대학 4년 조교3년 강사 10년.
내 남편도 그곳에 30년 가까이 있었고
나는 그 남자를 청파동에서 만났다.
때문에 청파동은 내게 생의 꽃밭이면서 생의 난장판이다.
희수야.
너는 잘 알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수 만권의 책의 내용을 최대로 줄여 간단히 요약한 것임을.
나는 지금도 청파동엘 가면 눈이 붉어진다.
벌겋게 해가 떠오르고 해가진다.
눈물이 난다.
피가 끓는다.
청파동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싶다가도
나는 불현듯 청파동을 향해 총을 쏘고 싶어진다.
청파동은 내게 모든 것이었다.
꿈이며 희망이며 실패며 좌절이었고
욕망이며 욕정이며 질투며 죽음이었다.
자살미수의 현주소였고 모든 인생이 빈털터리가 된 거렁뱅이였다.
나는 그런 뜨거운 오기로 청파동을 바라볼 때도 있다.
그러나 청파동은 내게 늙지 않았다.
열아홉 그대로 내 각혈의 피가 솟고 있다.
청파동의 좁은 골목길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목이 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비어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되는 것이라곤 없었던 스물다섯.
나에게 아무 쓸모가 없이 가슴만 타는 그 나이를 탐내던 선생님들.
지금 그때 그 선생님들의 나이를 넘어섰지만
스물다섯의 나이가 부럽지 않다.
나는 늘 빨리빨리 늙고 늙어서 죽는 일이 차라리 구원이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말은
“이 또한 쉽게 지나가리니”
행복이 필요 할 때는 오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이 말이 필요하고
불행할 때는 견디기 위해서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가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시간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만 그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만 다른 뿐이다.
결혼의 가장 꽃은 결혼식이 아니라 신혼여행이라는
그 황홀한 그 며칠간이 아닐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이란 쉽게 부식되는 빵이니
적절하게 소금이 필요하고 부식하지 않은 방법을 서로가 찾는 것이
결혼이라고 했던가?
소금은 결국 인내와 양보라고.
어쨌건 결혼식보다는 신혼여행이 결혼의 가장 절정이라는 것이야
나도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갔다.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제법 큰 가방을 나보고 들고 오라는 거야.
물론 내가 산 가방이었지.
가방 속에 남자의 속옷까지 사 넣는 짜릿한 일을 혼자 했으므로
가방을 드는 일은 남자의 몫이었다.
‘왜요’
‘붉은 가방을 어떻게 남자가 들어’
결혼식이 끝나고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서울역에서부터 나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 남자와 사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을
희수야
나는 할 말이 많아
내가 결혼을 하고 인천으로 간 것은 결혼하고 처음 하는 말이야.
인천이 나빠서가 아니야
그때는 우리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가난한 창고면 어떻겠니?
부산은 너무 비싸고 인천은 싸다는 말을 하는 그때부터
그 남자는 내 인생이 중요하지 않았다.
좀 깨끗한 곳으로 가지
이정도면 돼. 이제부터 허영은 버려.
나는 사랑에 발목이 잡혔지만 사실 허영이 많은 여자다.
하지만 적어도 감정적 호사를 누릴 때는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혼여행에 거는 이정도의 기대치를 여자의 허영이라고 말하겠는가?
두 밤을 자면서 우린 거의 침묵했고 우울했으며 얼굴이 모두 굳어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던 날 나는 그냥 인천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가방은 내가 들고 왔다.
그리고 희수야.
그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의 몸조차 내가 들고 다녔다.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결혼하고 33년을 살면서
나는 늘 그의 짐을 드는 노예이거나 보호자였다.
남편은 나무를 좋아했다.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선한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무를 좋아하면 예술 감각도 문화의식도 조금은 있으리라는 기대.
영화를 보자고하면 그 돈으로 묘목을 사 심으면
10년 후에 큰 나무가 된다고 영화 값도 허영으로 내 몰았다.
그는 개도 좋아했다.
나무와 개를 좋아하는 사람
얼른 들으면 멋있고 예술이 느껴질 것 같은 그런 남자에게
나는 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나무와 개보다 사람을 잘 모르는 인간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늘 생각했다.
우리는 늘 마음이 무겁고
서로의 감정을 감시하는 긴장상태에 있었다.
가슴에 바위를 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서로 어긋나고 있었고 서로를 방치하면서
서로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희수야
지금 생각하면우리 두 사람 다 같은 존재였다.
무서운 것은 이미 우리는 사랑해서 만나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무와 개를 좋아하면서도 아내를 모르고
모차르트와 그림과 영화를 좋아하면서 남편을 모른다는 것.
결혼이란 정말 거지같아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들지
희수야
결혼은 참으로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서로 가슴에 사랑보다 적의롤 품었는데도
그 집에서 딸 셋을 낳았다.
부부생활이란 참 웃기는 것이지
적의?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정이라고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지만
아기를 낳아 본 여자.
여자에서 어머니가 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이길 자 없을 거야.
낯선 남자 앞에 가랑이를 있는 대로 벌리고 생명을 내어놓고
생명을 얻는 여자가 무엇이 두렵겠니?
나는 아이가 잘 자라 내 말을 알아듣는 나이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내 생의 모든 이야기를 그 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연습을 했고 가슴을 졸였고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희수야
그 아이가 지금 두 아들의 어머니이고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는 그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지금도 내 인생에 대해 말하려면 가슴이 떨려서 죽을 것 같아.
23일간의 혼수. 그 막막한 사막.
나무 한 토막 같은 그런 존재
그런데도 이 고비만 지나면 이 터널만 지나면 하는 기대감을 갖는.
이 병에 대한 무지가 다행이었다.
이 병에 대한 후유증과 그 남자에게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조금만 의심했더라도
나는 아마 그때 모든 걸 포기했으련만.
장기 입원 환자나 중환자의 보호실에는 종교적 유혹이 많다
굿이, 어느 교회 안수기도가, 성당 등 특별한 권유가 남발되는 곳.
가장 마음이 약해져 그 어디든 실오라기 하나를 잡고도 매달려 보고 싶은
가장 처절한 곳이 중환자실인 것이다.
이런 쓰라린 마음을 안고 우연히 성당에 가게 되는데 (내용은 생략).
희수야 기적의 아침이 왔다. 혼수 23일째 되는 날.
지금도 그 간호사들의 박수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두 다리가 흔들리는 어려운 시간에 봉착하면
그 박수 소리를 떠 올린다.
그런데 희수야
난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난 것이 아니었어.
그는 식물인간이었어.
온몸 마비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바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거야.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철부지 아이가 되고.
나에겐 그때부터 잔인한 시간이 시작
병원에서 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의사 간호사 밥해주는 사람 청소해주는 사람 등 돈만주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병원생활이
얼마나 나를 위한 시간이었는지를 깨달은 거지.
그는 주면 먹기만 하면 되고 옷을 입혀주고 시간에 맞춰
걸음마를 시켜줘야 하고 몸이 아프면 밤낮으로 두들기고
주무르고 마사지를 하고 날이 흐리기라도 하면 온몸이 져려 틈나는 시간은
거의 그의 몸에 붙어 앉아 두들겨야.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도 종일이 부족했지만.
약을 달여야하고 짜지 않은 음식을 별도로 만들어야하고
운동을 시키고 목욕을 시키고 두 곳의 병원을 다녀야 했다.
목욕만 해도 그렇다
몸을 못 쓰는 사람은 세배나 무겁다.
넌 모를거다.
난 혼자 도저히 그를 들 수가 없어서 그 사람 밑에 타월을 깔고
그 큰 타월을 질질 끌어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하루에 목욕을 두 번 시키고 등을 두발로 지근지근 밟아야 했던
나는 구역질을 견뎌야 하는 내적 신병을 앓으며
그 운명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모든 것이 내가 하지 않으면 방치되고 그 만큼
내 일이 중첩되는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한약은 다섯가지를 달여야 했으며
양약을 먹이는 것도 시간이 달랐고 먹을거리며 빨래며.
그러면서 병원을 다니고 침을 맞히고 다시 돌아와 약을 먹이고
몸을 두들여야 하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의사가 많은지
반드시 해야 할 일처럼 그것을 하면 좋아진다는 말을 해서
환자가 그것을 해주지 않으면
내게 성의가 없다는 식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다.
피곤이 겹쳐 마루에서 부엌에서 자기가 일쑤였다.
그 시절 나는 몇 년을 이부자리를 깔고 잠을 자 본적이 없다.
분명한 것은
약해지면 안된다
울어서도 안된다
남을 보며 비교해서도 안된다
더 분명한 것은 자기 학대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희수야
<시상하부과오종>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니
웃는 발작, 웃는 병이야. 한번 웃기 시작하면 30분도 계속해서 웃는거야.
통곡도 시원찮은데 웃는 그 남자를 보는 일은 머리가 도는 일.
이상한 행동
그는 말이 많았고 말의 순서가 정돈되지 않았으며
손님이 와 과일과 차를 내 놓으면
과일을 손님에게 권하지도 않고 혼자 다 먹어버리는 거야.
그것도 너무 빠른 속도로.
현실을 볼 수 없는 그는 정신적 장님이 되었고
몸은 살아났지만 정신은 아직도 비빔밥이 되어있었다.
그 시절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세살짜리 아이였다.
물방을 같은 입술을 내밀면서 뽀뽀하며 안기는 그 아이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으니.
그래, 그것이 나의 힘이었다.
기적의 비타민이었을 거야.
드디어 나는 결심했다.
영원히 목에 걸고 있어야하는 목걸이를 걸기로.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으며
하느님과 의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을 욕해가면서 하느님을 믿기로 한 것이다.
죽고 싶으면 하느님의 가슴팍이라도 쾅쾅 쳐야 할 것 같아서
나의 하느님을 택한 것이다.
나는 대학 때 종교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있었다.
시인의 길에서 종교는 필요한 것인가.
종교로 인한 감정 변화의 갈등이 나 스스로를 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겨울방학이 되면서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삶의 계절이 시작
그는 서서히 자신이 옛날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말이 줄어들고 행동이 사라지면서 약도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 표정 없이 누워있는 그 남자는 불쌍했다.
그는 가난하게 자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단 한 번도 자존심을 굽힌 일없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능력으로 자신을 알리려고
노력했으며 모든 일에 충실했고 당당했으며
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리어카라도 끌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그에게 평소대로 얘기했다.
옆에 빗자루 좀 달라고,
빗자루 달라는 소리에 그는 갑자기 빗자루가 다 부서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무너지고 자기 의지라고는 없는 천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나중에 후회했다.
그쯤에서 그를 포기했어도 좋았을것을.
그의 우울 증세는 자꾸만 깊어져
어느 날 쥐약을 마셨고
급하게 위세척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
나는 그때부터 정신병원으로 면회다니는 신세가 되었단다.
별걸 다하게 만들었다. 그 남자는.
한 달 동안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몸이 붓고 감각도 둔해지고 마치 로봇처럼 걷는
그를 보고 한없이 탄식했다.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비극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가에 놀랐다.
육체는 달콤하고 서로 말없이 통하고
서로에게 생명의 기름을 부어주는
기적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지 않았던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죽겠다고 협박하고 시간만 되면 죽음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
뭐든 죽음의 도구로 상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밤 2시에 앞산으로 달려가 죽겠다고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그 남자는
그 후에도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을 했다.
정말 징그러운 일이었다.
지상에 지옥을 복사한 것이 있었다면
바로 내가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정신과 약을 끊는 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분량이 조금만 줄이기만 해도 잠을 못자고 신경질적이 되어
죽음을 시도하고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으며
나는 타작마당의 벼처럼 껍질이 벗겨지면서 그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심하면 매질을 했거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눈알이 터지기도 하고
허리를 밟히기도 하였다.
나는 죽도록 참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서도 도저히 거기서 중단 할 수 없었다.
조울증이란 말 들어보았니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 힘으로 된다고 믿고
극도의 환상에 빠지는가 하면
그러다가 한순간 목을 접고 누우면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죽을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감정을 오가면서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살았다가 죽곤 하였다.
나는 다만 늙고 싶었다
하루에도 팍팍 늙어서 자연스럽게 죽고 싶었다.
죽어서 아무 땅에나 묻혔으면.
아니 한줌 재도 남기지 않고 내 몸을 태웠으면.
그것이 강렬한 나의 소원이었다.
그 시절 역촌 성당은 내 울음 창고였으리라.
하느님은 고요히 내 투정을 받아주셨다.
장기간 환자를 둔 집에서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는 돈이다
그러나 난 한마디로 돈을 모르는 멍청이인 대가로
세상의 손에 따귀를 맞았다.
나는 더 이상 빌릴 곳이 없어졌다.
청탁하나 없는 시인의 이름
내 글 한 줄이 10원짜리 동전하나도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나의문학은 그렇다고 누구하나 내 글을 딱히 필요로 하거나
보고 싶은 사람조차 없는 성 싶었다.
중학교 1학년에서 마흔에 가까운 시간까지 시를 위해
사랑과 노력을 바쳤는데 내 인생이 쓰러지고 있는데
시는 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억울했다.
희수야, 나는 그때 옷을 벗는 일 외에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일이 보따리 장사였다.
큰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타고 무거운 것을 질질 끌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어느 지인들의 집을 들어서는 기분을 넌 알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피를 토할 것 같아.
나는 지금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다.
양복천 하나를 두어 시간 잔소리 끝에 사 주면서
도무지 봐줄 수 없는 동정 섞인
오만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날 그 보따리를 던져버렸다.
나는 어느 날, 오장육부를 뒤집는 어느 친지의 집을 뛰쳐나와서
집으로 돌아와 그 보따리를 욕조에 넣고 물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단식기도라도 해서 빈손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 물어야 했다.
하루 세끼를 굶으며 내 가족의 미래를 배불릴 기도를 나는 선택했다.
겸손 같은 것은 내게 사치였다.
일주일 후 나는 동대문 시장으로 갔다.
기초영어교범 5권을 샀다. 새 책 한권 값으로 헌책 5권을.
그때부터 나는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도전보다는 포기가 앞서는 그런 나이다.
말하자면 죽을 생각으로 나는 그때 대학원엘 들어갔다.
영어시험에도 탈락했다.
나는 남들에게는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쩌다가 자신의 생을 이토록 가난하고
쓸모없이 만들었는가에 대한 강한 환멸감이 다가섰다.
나는 내가 미워서라도 이를 악물고 뭐든 되어야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를 용서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첫 등록금을 나는 내 지인에게 빌렸다.
희수야 나는 하느님 말씀대로 오늘만 생각했다.
만약 내일까지 생각했더라면 난ㄴ 이미 죽고 없었을 것이다.
나는 믿었다.
걱정하지마라.
나의 무기는 이 믿음 하나뿐이었다.
나는 궁핍하고 남루한 생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운 나의 새 생의 출발이었다.
희수야, 나는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는 여자인가
이런 것을 박복하다고 하는 것인가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방바닥에 쓰러지면서 다친 결과는 엄청났다.
그때가 여든한 살이었다.
그런데 그 고령으로 척추뼈가 거의 가루가 될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거의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내 억척같은 운명의 얼굴이 확대되어 보였다.
여든하나, 돌아가셔도 아깝지는 않은 연세지만
어머니는 불행했다.
나는 한두 달이면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나는 그때 다행히 대학원을 졸업하고 새롭게 대학 강의 하나를 얻어
숭실대 강사로 나가던 중이었다.
겨자씨만한 희망을 가지고 밤마다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을 무렵
나에게는 다시 불행의 둑이 터진 것이다.
이제 겨우 남이 보기에 남편이 정상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
다시 어머니가 누워버린 것이다.
나는 다시 하느님에게 대 들었다.
어머니와 나의 기도는 달랐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다.
어머니는 여든한 살에 쓰러지셔서 무려 9년을 누워계시다가
아흔 살에 눈을 감으셨다.
9년을 단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한 채
앉은뱅이처럼 돌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던
나의 작심은 어긋났다.
나는 두 여자의 운명에 무너질듯 통곡했으며
20년 넘게 같은 집에서 내가 어머니라고
불렀던 한 여자의 슬픈 죽음에 통곡했다.
나는 내 어머니의 지루한 생애가 어쩌면 나를 욕 먹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죽음의 유보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저것이 나라도 미워하면서 제 슬픔을 견디기라도 했으면’ 하는
방탄 역할을 도맡아 죽음을 유보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수가 적긴 해도 어머니는 여자였는데 내가 먼저 어머니 하고
가슴을 파고들며 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미야’
어머니는 늘 그렇게 부르다가 입을 다물곤 했다.
‘왜요’
‘아니다’
무슨 말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한집에서
서로 각자의 불행을 지켜보며 살았지만
어머니가 눈을 감는 그 순간에 나는 외쳤던 것이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렸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 내 친구 하나가 부의금이라고 슬며시
내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 주었다.
‘너 혼자만 봐’
나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슬쩍 봉투를 꺼내보았다.
봉투에는 ‘축 사망’ 이라고 적혀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위로의 하나로 축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 말 하나로 너 욕봤다.
그렇게 내 어깨를 두들겨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되지 않은 것은 서운하지 않았다.
내게도 이젠 더 맞을 벼락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날 행복하게 했다.
뭐든 처음은 흥분이 있다.
첫사랑, 첫 입학, 첫 시집, 첫 소설, 처음 가본 성당, 첫 여행,
그렇게 처음이란 이슬냄새가 나는 법이지.
남편의 병은 서서히 호전되었다.
그는 혼자 걸었고 혼자 버스를 타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학교를 갈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속일수가 없는 법이다.
내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그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일이다.
오래 잠복된 병이 어떤 표정으로 나타나는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그의 눈빛 아주 작은 변화에도 그의 기분을 알아내고
그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그의 정신적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약자였고 보호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달래고 달래어 학교를 보내고 나는 파죽음이 되어갔다.
“씨팔....”
학교 가는 그의 뒷모습에 욕설을 퍼 부었다.
그래도 내 울분은 온 집 안을 넘실거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가끔 오래 병을 앓는 사람들의 아내들을 본다.
그들은 모두 거의 죽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안이 너무나 잘 보인다.
그 가슴 썩는 냄새를 나는 안다.
그 피투성이의 고름 솟는 가슴살을 안다.
몇 번이고 죽고 다시 죽는 그들의 절망을 안다.
누구에게도 쏟아 낼 수없어 소나기 평펑 내리붓는 길에서
홀로 소리치는 그 호곡소리를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쾅하고 쏘아버리고 싶은
내면의 용광로 같은 광기를 안다.
그러다가 모든 걸 꿀꺽 삼키며 입 닫는
그들의 눈물겨운 침묵을 안다.
나는 그 처절하고 아프고 외로운 침묵을 안다, 다 알아.
병자보다 간호가 더 힘들다는 말
쉽게 하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몸의 질병은 반드시 정신을 해친다는 진리를 나는 배웠다.
대화가 어긋나 진실이 통하지 않아 오해라는 긴 강이
그곳에는 범람하는 것이다.
희수야, 그러나 하느님은 살아계셨다.
나에게도 조금씩 감격의 날들이 오고 있었다.
88올림픽이 끝난 10월 산문집 백치애인을 펴냈다.
그것이 화제가 되었다.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후속으로 내 놓은 물위를 걷는 여자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내가 나의 운명을 버리지 않고 학대하지 않고 받아드린
그 못난 사랑 때문에
난 하느님께 보상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경제적 부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동차와 운전기사까지 선물했다.
생각해보면 그런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지만
세상살이는 늘 그렇다. 주는 사람만 주는 것이다.
1992년 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평택교수가 되었다. 지방대학이었고 야간이었다.
나는 그 시절 마치 유배지로 떠나는 심정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의 한 대학에 이력서를 넣고서 발탁되지 못한
허탈감과 인간적 갈등이 서울의 정을 떼게 했다.
서울이 싫었고 머리서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상처가 깊었다.
일주일에 한번 기숙사에서 잤다.
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미묘한 감정의 바람을 일으킨다.
나 자신에게로 감정이 몰입된다.
늘 언제나 남편과 아이들에게 못처럼 박혀 있던 내 시선이
나 자신에게로 모아지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불안하게 살아왔는지
내가 얼마나 비여성적으로 살아왔는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쓴 사람처럼
나의 감정적 세포까지 이상 현상으로 세밀하게 보여 당황스러웠다.
서울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울의 집 앞에서 오래 서 있곤 했다.
가슴이 막막했다.
차라리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편과의 감정은 그 시절 불안하고 서로 등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짓눌리는 상태에서
몸은 집으로 달리고 집에 도착해야 마음이 편했다.
극심한 모순이 나를 괴롭혔다.
평안한 남자가 어느 따뜻한 방에서
나를 기다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나의 모든 감정을 묻지 않고 먹이고 잠재우고
등을 토닥거리는 남자기 있는 방으로 문을 열고 싶었다.
그런 남자의 가슴속으로 무너지고 싶었다.
걸레가 다 된 내 감정과 몸을 눕힐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일까
평택대학 교수가 된 것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자유라는 낱말을 나는 그때 배웠다.
진저리나게 환자 옆에 있다가 대학교수라는 미명아래
하루 이틀쯤은 자고 들어갈 수 있었거든.
첫날 외박을 하는데 잠자는 시간도 아까왔다.
나는 혼자 잠든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마치 신혼여행 온 신부처럼 활홀하고 흥분.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나를 생각하는 푸른 시간의 명상이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했다.
숨통이 확 트이는 자유를 나는 그때 만끽했다.
한번은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이른 새벽인데 농부들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
팔을 걷어 부치고 허벅지를 다 내놓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농부를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한테는 없다고 믿었던
까마득하게 지나간 그 욕망이 물컹하게 가슴에서 만져지는 거야.
그때 나는 쉰이었다.
어린 날에는 쉰은 성욕과 전혀 무관한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에게 놀랐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비릿한 생각이
한동안 나른 괴롭혔다.
까마득하게 죽어 누웠던 여성성이 살아나는 놀라운 변화에
나는 두 손을 떨면서 서 있었다.
몸이 말하는 여자.
몸이 외치는 절규를 나는 거기서 경험했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한 토막인 내 가당찮은 감정이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놀라워
그 시절 참 잘 보냈지.
어떤 생각이든 키우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도 알았어
곧 그런 감정은 내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속으로 묻혀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중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살아있는 증거이며 내가 다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불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느님도 이 생각만은 용서하셨을 것이다.
여자는 때때로 한순가의 열락에 생을 던지는 수도 있다
어리석은 것이지만 인간적인 그런 감정.
이제 다 흘러갔다.
희수야
나는 지금 너의 젊음이 부럽지 않다.
사람들이 젊음에 집착하는 것을 보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늙어 있는 것이 좋아
늙어 포기 할 줄도 알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데리고 살줄도 알고
누군가를 너그럽게 용서할 수도 있고
늙은 것이 편안할 때가 많아.
그래 나는 늙는 내 모습이 좋고
늙어가는 내가 편안하다.
격렬함과 분노와 절규가 다 녹아내리는 고요한 그런 시간,
지금이 나는 좋아.
1999년 12월15일 그는 다시 입원을 했다.
앞으로 5개월 정도가 그의 생명의 한계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는 물론 비밀이었다.
5개월이 한도였는데
그는 5개월을 더 살고 2000년 10월21일 토요일 6시 50분에 눈을 감았다.
집으로 돌아와 몇 달을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도 사랑했다.
뭐 좋을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숨넘어가는 일이 숨이 딱 멎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그때 보았다.
‘우리 다음에 다 만나요. 우리 다 함께 만날 거예요’
그 말이 떨러지자 그는 순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난다는 그 말에 그가 죽음을 받아드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만나지 않을면 결코 죽지 않겠다는 듯이 죽음을 저항하다가
다시 만난다는 약속을 받고 내 가슴에 안겨서
그 전쟁 같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몸뚱이는 도대체 뭔지 숨 하나 넘어가니까
그렇게 편안해지는 거야.
잠시 한순간이었지만 그이 얼굴은 마치 분홍빛이라도 돌듯 밝고 깨끗했다.
처음 사랑했던 그 애잔하고 맑았던 한 남자를 나는 그의 죽음에서 보았다.
드디어 내 생은 이모작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첫 번째 농사는 괴롭고 아팠다.
지금은 그의 삶이 베인 밭에 모조리 풀을 제거하고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지만 늘 새 농사의 거름은
지금껏 살아온 그 남자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희수야 너는 언젠가 물었다.
그 남자를 사랑했느냐고,
제발 그와의 사랑에 대해선 묻지 마라
그러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내 생애에 그나마 나를 사랑했던 남자는 내 아이들의 아빠.
그 남자일 것 이다.
너는 다시 물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해보기는 했어요.
희수야 제발 그것도 묻지 마라. 나에겐 너무 아픈 질문이다.
내 생의 모든 시간,
내 몸의 모든 시간엔 늘 아픈 애련의 노을이 휘감고 있었다.
남편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옛날에 등 긁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정말 기막히게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가끔 아내가 되고 싶다. 아주 가..끔
신명나게 도마질하면서 도마질만큼 수다를 떨면서
여보!
여보! 그렇게 남편을 부르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그에게 맛보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평범한 행복을 나도 좀 가지고 싶다.
그 많았던 가족들 사이에서 곤두박질 치면서
나는 아! 아! 혼자 있고 싶어 간절히 외치곤 했다.
그런데 혼자라는 것은 하루에 몇 시간이면 족한 것이야.
사람들이 밤에 가족과 같이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고
세상사 이야기를 하고 저녁 산책을 하는 그 시간에
혼자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댜.
나이 들어 혼자라는 것도 늘 서럽지.
삶이 뭐 거대 담론이니?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지만 소중한 것들이지.
누가 아프면 약국에 가서 파스 하나 사 오는 거. 그게 사랑이지.
그게 사는 거야. 넘어지면 팔을 붙들어 일으켜주는 것.
그게 사랑이며 사는 것이다.
‘무슨 말이야‘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
희수야 나는 놀랐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와르르 깔깔거리며 웃다가
조용해지며 차갑게 말했다.
‘미쳤나 봐’
그리고 그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울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묵살했다.
‘잠이나 자!’
방을 나오는 등 뒤로 그가 한마디 더 던졌다.
‘정말이야’
한강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 와서 9년째 살며
그는 이 집을 사랑했는데
지금 특별한 유언을 남기고 있다.
한강은 늘 같았다.
나는 그 집에서 새벽 강을 사랑하며 살았다.
새벽 강은 늘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밤에 저 한강을 보며 철벅철벅 걸어 들어가
한강에 내 생을, 내 목숨을 던지고 싶었다.
‘결혼하지 마!’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 가슴을 지나간다.
결혼, 미쳤군.
나는 남편을 욕하며 결혼이라는 당치않은 단어를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내가 결혼하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혼하라고 유언을 남겼다면 더 좋았을 걸.
사후에 우리의 몸뚱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나는 말이야 이 죄도 많고 한도 많은 몸뚱이를 태워
이 지상에서 깨끗하게 없애는 거야.
내 궂은 생의 한 올도 남기고 싶지 않다.
하나의 먼지로도 모래로도 남고 싶지 않아.
한 올 연기로 사라지는 것.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화장하자고
그 순간 남편의 얼굴은 아주 험했다.
그는 그렇게 남고 싶었을까?
아니 그대로 서서히 썩고 싶었을까?
그런데 남편은 죽기 2년 전에 나와 상의도 없이 가묘를 만들었다고
나와 구경을 가자고 했다.
정말 미치겠더라.
죽고 나서 내가 우겨 태우기라도 할까봐 아예 무덤을 만들어 놓은거야.
어머님 묘 옆에 그는 자신의 묘를 지어 놓았더라고.
‘우리가 살 집이야’
그는 말했다. 합장이라고 하던가.
우리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몸이 좋지 않아 다리를 절 때도 그는 주말이면 고향을 갔어.
아마도 자신이 영원히 누울 땅에 피가 당겼는지 몰라.
한 다리를 끌며 걸어서 한 달에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신었다.
그래도 그는 고향길이 늘 푸근했다.
나는 그의 뜻을 어겨 태우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그까짓 죽음 이 후에 무엇을 내가 못해 주겠니.
다만 그의 영혼이 편하고 오랜 고생 끝에 죽은 그의 영혼이
하느님 곁에서 천사처럼 평화롭게 있을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못 하겠니.
그러나 나는 알았다.
환자를 간호하는 일은 또 하나의 호사라는 것을.
내가 환자로 그것도 암 환자라는 이름으로 병원 침대에 눕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니
정작 내가 환자가 되어서 병실에 눕고 말았을 때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 공포 그 외로움 그 막막함.
간호 3단 아니 5단 아니 10단을 건너 온 나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진정한 비극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 이었어.
유방암이었고 절개 수술 날짜도 잡혔다.
수술 후 나는 서른세 번 매일 치료를 받는데
암 환자가 득실거리는 의자에서.
몸보다 정신이 아팠고 세상이 싫고 그리고 지독스럽게 외로웠다.
몸이 아픈 사람이 이렇게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내 남편이 반길 일이라고 나는 반성했다.
그 긴긴 환자를 난 죽도록 지겨워했으니까.
나는 그의 외로움을 이해했다.
인간은 인내의 터를 넓히는 사람이 결국은 이기는 법이지.
나는 행복하다
어느 현자는 말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할 때 그것이 지고의 경지라고.
그래 나는 지금 물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그는 나의 십자가였어
나는 자꾸 그 십자가를 어깨에서 내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썼지
십자가는 지고 그냥 묵묵히 가는 것인데 말이야.
나는 지금이야말로 아픈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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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달자 그런 삶을 ..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들은 정말 호강하게 살아가고 있는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있는 삶.
그것은 결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이란 쉽게 부식되는 빵이니
적절하게 소금이 필요하고 부식하지 않은 방법을 서로가 찾는 것이
결혼이라고 했던가?
소금은 결국 인내와 양보라고.
팔을 걷어 부치고 허벅지를 다 내놓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농부를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한테는 없다고 믿었던 욕정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신달자 책 제목 맞는 거지
약간은 각색이 되었을지라도 정말 독하다
내 생각에는 전혀 각색이 없는 진품.
그녀 주변에 너무 많은 증인이 있어서...
책을 읽으면 정말 한참동안 멍해질 때가 많아...
숨이 컥컥 막히는 지나온 삶에서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 뭐였음을 말해주고 있었어....
그게 인생이 아닐런지...
어차피 닥친 자기 인생이라면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것.
어떤이는 태어나면서 죽고. 어떤이는 장애로 태어나지 않던가?
숨막히는 삶속에서도 끄덕끄덕 희망이라는것에 붙들려~~~
나를보는 주위의 시선, 선과악의 교활함속에 어쩔수 없었으리라,
오늘의 현실에 휩쓸려 함께 살아 갈수 밖에는 환경
그런 인생들을 보면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책 한권의 효과는 엄청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