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남은 휴가에 전주행을 빼놓을 수 없지. 가자. 고향으로...
한여름 뙤약볕 속의 휴가보다는 맹물다운 가을휴가가 좋다.
내가 태어난 달이니만큼 뭔가 다른 계기를 마련해야겠지.
그냥 나이만 먹지 않고 더디나마 꾸준히 성장해 가야겠다.
발안에서는 서해안 고속도로에 오르기 쉬워 좋다.
시간약속 없으니 바쁠 것도 없다. 쉬엄 쉬엄 가면 되는거지.
휴게소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가치를 꺼내어 문다.
전주에 가면 어디를 둘러보고 누구를 만나볼까?
음료수로 목을 추기면서 가을 빛 띄워가는 산하를 본다.
휴게소를 가득 메운 차량과 사람들이 평화스러워 보인다.
추석에 앞서 미리 성묘를 갈 수 있음도 행복이다.
소리갯재 너머 금상동의 들녘이 어릴 쩍 성묘길에서 느꼈던 것처
럼 그득하여 풍성해보인다. 그 땐 수수모가지 깨나 잘랐댔는데..
증조부님 묘역의 비석도 예와 다름이 없다.
미리 사초를 해 두어서 다른 묘역과 달리 오르기도 쉽다.
도처에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보면서 송구스러워진다.
나는 증조부님의 삶을 익히 들어 알기에 자랑스레 여기며 살지
만 내 아이들은 어르신 함자도 기억하지를 못함이 아쉽다.
언젠가 태어나고 자랄 나의 후손들은 어떨까? 먼 가계보다는
다른 인물에 대한 관심이 재밌고 실용적인 현실이지만..
어머님께 전해들은 할아버지 생시의 이야기와 중풍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 모습이 되살아 나며 나를 돌이켜 보게하누나.
지금도 나의 탯자리인 왜망실에 이르면 전쟁의 포성이 들리는
느낌이다. 그 때에야 뭘 듣고 볼 수 있었을까만은 6.25가 생생하
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전란 속에서 내가 태어났음이 하나의 기
적으로 기억하는 까닭이리라. 나는 어떻게, 무엇을 하며 야 하는
가? 불확실한 미래에 매달리지 않고 정해진 일, 필연적인 일을
준비함이 실속있고 현명할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 주어지리라고
어찌 감히 자신하여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미룰것인가?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능력 당연히 유한함을 잊은 채 머나
먼 미래에 할 일을 계획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진 않은가!
왜망실의 산과 들은 내 젊은 시절의 기억과 변함이 없어 보인다.
아마 작고하신 어머니 아버지가 다시 살아 둘러보신다 해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으시리라. 하지만 부모님은 딴 세상에 계시고 나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새 전주가 바뀌고 없던 길이
뚫리며 들이 넓어졌듯이 세월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새 생명을 잉
태하고 낳으며 낡은 것을 거두어 간다. 장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
나는 어느 지점을 떠가고 있는건가? 혹, 잠시 멈춰 있는 걸까?
흘러흘러 이제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나의 젊은시절처럼, 내 살
던 집과 터도 흔적조차 없어진 아중리의 산하를 다시 돌아보면서
수원에서 내려와 임실에 산다는 병곤이를 불러본다. 이 길을 남
쪽으로 휘돌아 가다보면 대성동이 나타날테니까.
불가피한 회사 일정이 있다는 통지를 전해듣고 왼편으로 보이는
회사 건물을 보며 "저 곳이 이 친구 일하는 곳이로구나! 동네가
꽤 깊어졌군.." 하면서 어려운 일 있을 때 수원에서 만나 도움을
받았던 기억속에 창 밖으로 아쉬움 한 개를 휙~ 던져둔다.
왼편으로 대성동, 오른편으로 추억의 서방바우를 지나치면서
마눌과 전주천에 담긴 우리들의 얘기를 나눔도 맛깔스럽다.
(맹물 살던 데는 동완산동, 마눌이 자란 곳은 교동이다.)
평화동으로 달려가 병주를 만난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늙은
모습에서, 30년 넘게 적조했던 친구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동창회 일을 오래 한 친구답게 입담이 하도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요론조론 에피소드를 엑기스로 웃어가며 듣다보니 이
친구는 꽁트작가가 되어도 능히 성공하겠다 싶은 느낌이 든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는 그동안 사회생활에서 얽힌 일이 없기에
선입견도 없고 조심할 일도 없어서 맘이 가볍다. 12년을 한 울타
리 안에서 더불어 자랐다는 사실만으로 먹고 싶던 전주백반이
더욱 맛깔스럽고, 차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불러 앉혀 오순도순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꾀복장이 시절로 돌아
가 밤을 새우고 싶어지기도 한다. 술 잘 마시는 친구를 보면 항상
부럽다. 술은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여는 마력을 가졌다.
석구를 보고 싶지만 여섯시면 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댔다.
일 마치고 나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다. 그냥 뜨긴 아쉬운데..
서울에도 더러 온다 하니 얼굴보긴 요담으로 미루고 목소리나
들어보자. - 석구의 목소리에서 듬뿍 반가움이 묻어 나온다.
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환영해준다는 말인가? 모임에 나가는
것조차 가뭄에 콩 나듯 잼병인 터에...고맙다. 고마워! ㅜ.ㅠ
보자 하면 올 눈친데 곁에 마눌 두고 날을 새자 할 수도 없음이라.
아쉬움을 한개 더 남기고 익숙하지 않은 도로를 달리며 꿈꾼다.
이 카페에 스스럼 없이 던지는 마음들이 저 대추나무 열매처럼
풍성하게 열리고, 세월따라 새콤달콤 익어 갈 수 있기를....!
(060921전주 / 보관 06여름)
첫댓글 꿈에서 만난 것 같소이다. ♬ "만나면 좋은 친구, ㅁㅁㅁ ㅁㅁㅁㅁ" ♬, 모 방송국 CM송이지만 우리들에게 딱 맞는 간결한 멜로디다. 마눌 '레지나' 자매님께서도 잘 귀가 하셨는지... 모처럼의 邂逅(해후)~~~= 최성수?
주말엔 배티와 미리내에 하루씩 머물며 감사의 날을 보냈다. 문짜 그대로 맹물 같은 내가 이처럼 여유롭고 평화로이 살 수 있음은 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바쁜 시간 쪼개어 음식점 안내해 주고 많은 얘기 들려주었음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무쪼록 행운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