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부끄러움 vs 자신감 】
전동차에 비상용 SOS긴급전화가 사용된 경우에 대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화재나 이에 준하는 큰 사고를 대비하여 설치된 것으로 비상용 긴급전화를 받은 역무원은 긴장된 상태로 그 전동차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내 접하게 된 긴급전화사용내용은 황당함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그랬을까요?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에 대한 ‘소동’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 역할을 하는 안내견을 보고서는 "누가 교양 없이 이렇게 큰 개를 데리고 지하철에 타? 미친거 아니냐" 그리고 "당신 개가 상당히 더럽게 보인다. 사과하고 그 개 데리고 당장 내려라" 라는 화를 내고 비상용 수화기를 들어 지하철 운행을 중지시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이 이러하니 승무원은 ‘황당’해 하였고, 이 내용을 인터넷에 올린 누리꾼의 글을 접한 대다수의 네티즌도 이를 ‘소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내용은 애완견과 역할이 분명이 다르고, 애완견에 대한 제제가 해당되지 않는 ‘안내견’에 대한 것으로 항의를 한 여성의 행동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모두 느낀 ‘소동’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가 되었던 걸까요?
우리는 자신의 불편함을 참으려 하지 말고 상대에게 전달해야 함을 성폭력예방교육에서 강조합니다. 의사표현을 하지 못한 억울함과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싫어요” “안돼요”를 가르치는 것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에티켓이 된 세상입니다. 물론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엄중한 평가 잣대가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위의 사례를 보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였습니다. 큰 소리를 치고 주변사람들 및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무개념 녀(女)’라는 호칭을 달게 하였을까요? 원문을 살펴보면 그녀에 대해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규칙부터 무시한 사람이 한 행동이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못 된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결여된 수많은 것 중에 ‘부끄러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노약자석에는 누가 앉아야 하는지 문자와 함께 그림까지 그려 넣어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을 때 아예 ‘부끄러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다른 젊은 청년들이 그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가, 모범적인 것이 아니라면 동년배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혼자 하였을 때 돌아올 비난과 원망에 대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혼자 하였을 때 부끄러움이 든다는 것이지요. 도둑질을 하지 않는 이유 중에도 그런 행동을 한 자신을 누가 볼까의 두려움도 있지만, 교육을 받길 자신에게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행여 들켜 혼나게 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으로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우리는 윤리적인 잣대 못지않게 ‘창피하고 부끄럽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였습니다. 전동차의 그녀는 노약자석에 아무렇지 않게 앉을 만큼 용감하였다라고 하기 보다는 ‘부끄러운줄 모르는’ 어리석은 성인여성이었던 것입니다.
처음 안내견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개! 개! 이런 개를 들고 지하철에 타면 어찌해요!’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커다란 애완견을 데리고 탔다면 누구나 똑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대로 말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녀도 이내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말 처음 봤기에 놀랬을 수 있었고 ‘아차! 실수했다’ 라고 생각한 다음에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은 사과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커다란 애완견인 줄 알았다. 미안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사과를 하기 보다는 더 부끄러운 행동을 하였습니다. 전동차를 연결해주는 통로의 문을 열어 다른 칸의 사람들에게 “여기 커다란 개가 있다”라고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 줄 사람을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소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놀라서 달려온 승무원도 다른 칸 사람들도 ‘안내견’이라는 단어를 듣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던 것 같습니다. 사방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라는 시선을 보냈겠지만, 한 술 더 떠 비상용 수화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끄러움이 드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엉뚱한 자신감으로 실수를 덮으려 하는 것은 ‘소동’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후세에 전할 수 있는 행동을 그녀가 한 것일까요? 후손도 제일먼저 ‘부끄럽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실수를 한 다음에 어떤 잣대를 가지고 실수를 수습할 것이냐가 자신의 삶의 에피소드 하나가 제대로 남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자신있게!” 는 사과를 할 때 필요한 것이지, 실수를 덮기 위해 ‘소동’을 피우는데 써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처벌하는 형벌이 무섭고 무거워지는 것보다 우리가 가진 “부끄러움”을 제대로 알게 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책감, 이 감정의 무게는 생각보다 엄청날 것입니다. 손, 발을 묶는 형벌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마음을 옥죄이는 바로 이 죄책감일 것입니다. 모두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세상. 건강한 자신감으로 가득찬 사람이 많은 세상일 것입니다.<행가래로 1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