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 2024. 5. 18.~19.(토,일) - 음력(4. 11.~12.), 일출 05:20~일몰 19:32
- 2024. 5. 23.(목) - 음력(4. 16.), 일출 05:16~일몰 19:36
●산행지: 장령지맥 2구간 졸업
●산행코스: 하신리-장령지맥 분기점-금성산(437.8m)-미륵재-344.6m봉-삽재-427.9m봉-419.4m봉-수암재- 456.2m봉-민재-471m봉-서대산갈림봉-방화봉(555.1m)-비들목재-국사봉(666.9m)-615.3m봉-신안고개-701m봉-투구봉(687.1m)-715.5m봉-645.8m봉-꼬부랑재-대성산(705.9m)-586.1m봉-매봉(599.5m)-622.4m봉-금산고개-566.4m봉-573.4m봉-장령산(654.5m)-299.3m봉-솔치굴-도덕봉(407.3m)-4번국도/ 옥천군산림조합-함박산(250.2m)-퇴미산(249m)-돌남산(258.6m)-자고치 육교-소망침례교회 앞-나분티재-마성산(409.3m)-늘티산성 표지석(318.3m)-며느리재-333.8m봉-이슬봉(453.3m)-참나무골산(419.2m)-장계교-장계관광지선착장
●먹거리: - 생수3리터, 빵4, 맛동산, 사탕6
- 생수1.5리터, 맛동산(반틈), 빵3, 사탕4
●준비물: - 담요,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충전지3,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여분의류,양말, 띠지10
- 스틱, 충전지1,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팔토시, 여분의류, 양말, 귀마개, 안대, 띠지10
●거리: 약 70.4Km(48.7+21.7)
●소요시간: 29.52h(22.14h+7.3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 고속버스14,000, 택시8,200, 음료1,700, 뒤풀이10,800, 기차15,000원
- 기차11,800원, 편의점 아침(음료, 빵)4,200원, 기차10,000원, 음료10,200원
●날씨: - 11~29(새벽엔 춥고 한낮엔 더움), - 14~29
●산행경과:
* 5. 18.(토) : 25.8km
- 08:50 : 윗삽실마을
- 09:15~26~34 : 금성산(438m)
- 09:20 : 장령지맥 분기점(405m)
- 10:12 : 삽재
- 10:47 : 344.6m봉
- 11:00~10 : 고속도로, 행동식
- 11:30 : 성재산(427.9m)
- 12:08 : 469m봉
- 12:30 : 419.4m봉
- 12:59 : 431m봉
- 13:32 : 456.2m봉
- 13:40~48 : 행동식
- 14:08 : 민재
- 14:48 : 471m봉
- 15:06 : 487.3m봉
- 15:27 : 주지봉/ 560m봉/ 서대산갈림봉
- 15:38 : 502.8m봉
- 15:45~54 : 행동식
- 16:30 : 429.5m봉
- 17:14 : 방화봉(555.1m)
- 17:40~18:00 : 비들목고개, 행동식
- 18:54 : 국사봉(667.m)
- 19:22 : 615.3m봉
- 19:45 : 655.4m봉
- 20:29~38 : 행동식
- 20:54 : 526.2m봉
- 21:16 : 신안고개(415m)
* 5. 19.(일) : 22.9km
- 03:35: 출발
- 04:49~14 : 감투봉(701m), 행동식
- 04:55 : 신음산(678m)
- 05:56~04 : 투구봉(687.1m)
- 06:33 : 715.5m봉
- 06:55 : 601.6m봉
- 07:39 : 대성산(705.9m)
- 07:55 : 641.2m봉
- 08:22~32 : 행동식
- 08:47 : 매봉(599.5m)
- 08:53 : 지내재
- 09:06~25 : 휴식
- 09:32 : 622.4m봉
- 09:46 : 금산고개
- 10:13 : 566.4m봉
- 10:51 : 돌메기산(573.4m)
- 11:08 : 헬기장(571.4m)
- 11:30 : 장령산(654.5m)
- 11:47~12:41 : 삼리봉
- 11:53 : 장령정 휴식
- 13:07 : 돌탑공원(식수보충)
- 13:24 : 가풍고개
- 13:34 : 275.6m봉
- 14:00 : 299.3m봉
- 14:37~49 : 솔치(185m)
- 15:37 : 도덕봉(407.3m)/ 도둑봉
- 16:34 : 4번국도
* 5. 23.(목) : 21.7km
- 08:55 : 가풍리 원각마을/ 4번국도
- 09:17 : 180.3m봉
- 09:32 : 함박산(250.2m)
- 09:42 : 퇴미산(259m)
- 09:50 : 귀화리고개
- 10:21 : 돌남산(258.6m)
- 10:40 : 자고치육교/ 경부고속도로
- 10:48 : 166m봉
- 11:22 : 목사리재/ 소망교회
- 11:44 : 구덕재(140m)
- 11:52 : 쇠소리재
- 12:02 : 207m봉
- 12:18 : 나분티재(135m)/ 교동식품
- 12:26~32 : 행동식
- 12:44 : 굿당
- 13:16~25 : 마성산(409.3m)
- 13:35~40 : 행동식
- 13:58 : 늘티산성(318.3m)
- 14:50 : 310.6m봉
- 15:15~20 : 이슬봉(453.3m), 행동식
- 15:39 : 참나무골산(419.2m)
- 16:10 : 장계대로
- 16:22 : 장계구교
- 16:47 : 장계관광단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령지맥(長靈枝脈)이란
장령지맥은 금남정맥의 대둔산 남동쪽 인대산(661.8m)과 백령고개 사이에 있는 610m봉에서 분기한 식장지맥이 월봉산(543m)을 지나 금성산(438.6m)에서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한줄기는 북진하여 만인산(537m), 식장산(598m), 계족산(423m)을 지나 신탄진 금강/갑천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식장지맥(食藏枝脈)이고, 또다른 줄기는 식장지맥 금성산(438.6m)에서 동북으로 분기하여 미륵재, 삽재, 닭이봉분기봉(460m), 민재, 서대산분기봉(560m), 방화봉(放火峰, 585m), 국사봉(國師峰, 667.5m), 대성산(大聖山, 704.8m), 매봉(600m), 장령산(長靈山, 655m), 도덕봉(407.3m), 함박산(250m), 퇴미산(249m), 돌남산(258.6m), 마성산(馬城山, 409.3m), 이슬봉(454.9m), 참나무골산(422m)을 지나 옥천군 군북면 장계리 장계관광지 앞의 금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52.2km인 산줄기이다. 장령지맥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추풍천, 상곡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조정천, 봉황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된다.
♤ 장령지맥 개념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령지맥을 지나는 동네
* 금산군(錦山郡)
현재의 금산군이란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1914년 3월 1일부, 폐합으로 옛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금산군(錦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내군(進乃郡)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때 진예군(進禮郡)이라 고치고 고려초에 진예현(進禮縣)으로 하였다가 1305년(고려 충렬왕때 31년)에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부리현(富利縣), 청거현(淸渠縣), 무풍현(茂豊縣), 진동현(珍同縣)의 5현을 소속시켜 지금주사(知錦州事) 금주군(錦州君) 김신(金侁)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오늘날 금산이라는 지명이 있게 하였다. (고려사제57권) 1413년(조선 태종 13년) 이에 따라 금주군(錦州郡)을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하여 조선말까지 이르렀다. 옛 진산군(珍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이였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황산군(黃山郡)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옥계부(玉溪府)로 고쳤다가 1305(고려 충열왕 31년) 금주군(錦州郡)에 소속시켰다. 그 후 1390년에 다시 고산현(高山縣)의 속현(屬縣)으로 한 것을 조선에 와서 1393년(태조2년) 에 만인산(萬刃山:胎峰)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시키고 지진주사(知珍州事) 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이에 따라 진산군(珍山郡)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則令 第36號)에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忠淸湳道 公州府)의 금산군과 진산군을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가 서두에 기술한 바와같이 1914년 3월 1일 부, 폐합으로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라 칭하고, 금산면(錦山面), 금성면(錦城面), 제원면(濟源面), 부리면(富利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남이면(南二面), 진산면(珍山面), 복수면(福壽面), 추부면(秋富面)의 10개면(面)으로 하였다가 1940년 11월 1일 부령 제221호(府令 第221號)에 금산면(錦山面)이 금산읍(錦山邑)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으로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상황을 살펴보면은 1953년 12월에 내부리(內釜里)에 있는 군북면사무소(郡北面事務所)를 현재의 위치인 두두리(杜斗里)로 신축이전 하였으며, 1962년 5월 27년 군조례(郡條例) 제28호에 따라 군북면 내부출장소 (郡北面內釜出張所)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 6542호에 따라 복수면 용지리 (福壽面 龍池里)가 추부면(秋富面)에 편입되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영동군
충북 최남단에 있으며 동쪽은 경상북도 김천시 · 상주시, 서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군, 북쪽은 옥천군과 접해 있다. 길동(吉洞), 계주(稽州), 영산(永山), 계산(稽山)으로 불리었으며, 군청 소재지인 영동읍에는 주곡천(主谷川)과 양정천(楊亭川)의 이수(二水)가 합류하여 영동천(永同川)을 이루고 있는데, 이 "二水"를 한 글자로 표기하면 "永"자가 된다. 신라시대 길동의 "吉"도 이두문에 따라 발음하면 "길=永"이 되며 본군의 명칭인 "永同"은 이 "二水"와 "吉同"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라 초에는 길동이라 불리어 오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당시에 영동으로 고쳐 불렀다. 영동군은 백두대간과 금북정맥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 군 전체가 아름다운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에는 눌의산(訥誼山 743m) · 황악산(黃岳山 1.111m)이 우뚝 솟아 있고 금강정맥에서 금강기맥이 갈라지는 지점인 서쪽에는 마니산(摩尼山 640m) · 천태산(天台山 715m) · 성주산(聖主山 624m) 등이 아름다운 능선을 자랑한다. 남쪽으로는 천혜의 자연림으로 알려진 민주지산(眠周之山 1,242m)과 석기봉(石寄峰 1,200m) · 각호산(角虎山 1,176m) · 삼도봉(三道峰 1,176m) · 천마령(天摩嶺 926m) · 막기황산(1,000m) 등 높은 산들이 모여 있으며 북쪽에는 백화산맥의 포성봉(捕城峰 933m)이 있다. 예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어 온 북동부의 추풍령(秋風嶺)과 괘방령(掛榜嶺)에 지금은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3도가 모두 접하는 위치인지라 상촌면에 '삼도봉'이라는 산이 있으며, 3도의 방언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과 등에서 방언 연구를 하러 많이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리학과, 지리교육과 역시 문화 연구 차원에서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의 방언은 기본적으로 충청도 사투리로 분류되지만 데우다-뎁히다, 피곤하다-대근하다 등의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경북과 가까운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추풍령면 등 경부선 연선에 위치한 쪽은 아예 말이 경상도 사투리와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전북과 가까운 용화면과 학산면은 전라도 사투리와 비슷하다. 생활권은 도청 소재지인 청주가 아니라 대전, 김천과 가깝다. 특히 동부 지역인 상촌면, 황간면, 추풍령면, 매곡면은 김천 생활권에 가까운데, 이들 지역은 거리상으로 영동읍보다 김천 시내가 훨씬 가깝기 때문에 김천과 매우 밀접하다. 그래서 김천시 시내버스가 도 경계를 넘어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추풍령면까지 온다. 심지어 영동군 농어촌버스가 상주시 서부지역까지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김천시 시내버스, 구미시 시내버스, 칠곡군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김천, 구미, 칠곡, 대구에서 영동군까지 시내버스만으로도 갈 수 있다. 또 서남부 지역에서는 무주로 가는 110, 111, 112번 버스가 평균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무주에서 기차 타러 영동에 오는 등 무주군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대전이 가까워 매우 살기 좋은 환경이다. 다만, 전투기 훈련이 많아 엄청나게 시끄러운 편이므로 조용한 곳을 원한다면 피해야할 고장이다. 영동은 금강 상류지역으로 곳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금강에 흘러들고 있는데 산과 물이 많아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남쪽 석기봉(石寄峰 1,200m)에서 시작되어 동부와 북부를 돌아 금강에 합류하는 초강천과 서부의 호탄천 · 원당천 등이 있다. 내륙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지만 충북에서 가장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아 '과일나라'라고 불릴 만큼 생산되는 과일이 많고 맛이 매우 좋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옥천군
충북 남부에 있는 군으로 대전광역시 남쪽에 위치하여 위성도시의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고시산군인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성군으로 개칭하고 이산현·안정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1018년(현종 9) 경산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43년(인종 21) 현으로 독립했다. 1313년(충선왕 5) 옥주로 승격되고 경산부 소속의 이산현·안읍현·양산현을 편입받았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 옥천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공주부 옥천군, 1896년 충북 옥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인 양내면·양남면을 영동군으로 이관해 면적이 줄어들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에 따라 청산군이 폐지되어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군면 폐합도 이루어져 옥천군의 이내면·안내면·안남면은 그대로, 이남일소면이 이남면으로, 군내면·군남면이 내남면으로, 이남이소면·군동면이 동이면으로, 군서일소면·군서이소면이 군서면으로, 군북일소면·군북이소면이 군북면으로 폐합되고, 청산군 남면이 청남면으로, 서면이 청서면으로, 동면·군내면·북면이 청산면으로 통합되어 옥천군에 폐합되었다. 백두대간과 호서정맥, 금남기맥의 영향으로 500m 내외의 산지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옥천분지를 이루며,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한다. 동부에는 팔음산(八音山,762m)·천금산(千金山, 465m), 서부에는 환산(環山, 581m)·용봉(龍峰, 437m)·망덕봉(望德峰, 420m), 남부에는 매봉·마니산(摩尼山, 640m)·월이산(551m), 북부에는 거멍산(494m)·덕대산(德垈山, 573m)·금적산(金積山, 652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의 옥천읍·동이면·청산면·이원면 일대에는 산간분지가 발달했다. 금강이 군의 중부와 북부를 곡류하는데, 특히 이 군 일대에서 하천의 구배가 매우 크다. 그밖에 건천·서화천·월외천 등이 금강으로 유입한다. 금강 연안에는 평야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경지는 주로 소하천 연안과 분지 내에 분포한다. 옥천읍 서산성 일대의 백제고분군을 비롯해 여러 개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다투었던 곳이어서 산성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데, 청성면의 산계리토성, 군북면의 고리산성(環山城)과 노고성, 이원면의 마니산성 등이 있다. 경부선이 군의 남서부를, 경부고속도로가 군의 중부를 각각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그밖에 충주-남원, 음성-무주, 대전-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나며, 옥천-대전 간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생활권이 대전에 형성되어 있으며, 근교 농공단지로 발전해왔다. 대전·청주 등 대도시에 인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해 최근 경제성 작물을 중심으로 채소 등 원예작물과 특용작물 생산에 주력함으로써 농가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포도·딸기·상추·배추·토마토 등이 생산되는데, 옥천읍을 중심으로 포도·사과·감의 재배가 활발하며, 군북면에서는 토마토와 배추, 군서면에서는 딸기 재배가 활발하다. 이원면 묘목특화지의 묘목이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이면 조령리에 있는 금강유원지와 1991년에 개장한 안내면 장계리의 장계국민관광지에는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장령산자연휴양림·정지용생가 등이 주요 관광지이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구간별 세부거리
윗삽실마을-1.8km-금성산-2.5km-미륵재-2.2km-삽재-3.9km-수암재-3.3km-민재-2.2km-서대산갈림봉-3.8km-방화봉-0.7km-비들목재-1.5km-국사봉-3.3km-신안고개-1.6km-천태산갈림길-4.9km-대성산-6.1km-장령산-2.3km-가재고개-2.1km-솔치재-0.9km-도덕봉-1.5km-4번국도-2.1km-함박산-0.6km-퇴미산-2.3km-돌남산-1.4km-차고치육교-4.4km-나븐티재-1.7km-마성산-4.5km-이슬봉-3.5km-장계교-1km-장계관광지 선착장
♤ 구간거리
- 지맥분기점~신안고개 21.5km (윗삽실마을 접속 1.8km 포함)
-. 윗삽실마을~미륵재 4.2km
-. 지맥분기점~민재 11km
-. 비들목재~신안고개 3km
- 신안고개~나븐티재 29.3km
-. 신안고개~솔치고개 17.4km
-. 솔치고개~나븐티재 11.9km
- 솔치고개~금강관광단지: 22.8km
-. 나븐티재~합수점 10.9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미륵재: 왕서방 손짜장
- 비들목재: 왼쪽으로 우회 산꽃나라 정자 위 빌라촌에 수도 있음.
- 신안고개: 왼쪽 아스팔트 도로 산안리 명지목골 마음선원힐링센터 수도 있음.
- 장령산 하산 돌탑공원 원두막 옆에 계곡물
- 4번국도/ 모텔 바로 옆 식당, 오른쪽 cu편의점
- 귀화리 버스정류장 : 물 구할 수 있음.
- 자고치 육교 지나 국도변 식당
- 소망교회: 뒤편 수도
- 마성산 30분 직전 굿당: 수도
- 장계구교: 까페
- 장계관광단지: 카페프린스 편의점, 주차장 화장실
* 서울에서 장령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서울 경부 ~ 금산행 버스: 06:30, 2.05h, 14,000원
- 서울 경부 ~ 금산행 버스로 마전에서 하차, 추부면(마전터미널),
- 서울역 ~ 대전역 ktx: 05:03, 05:13, 05:28, 05:38, 05:58, 06:03~, 0.59h, 23,700원
- 서울역 ~ 대전역: 05:54, 2.05h, 10,800원
- 대전역 앞에서 마전행 501번 버스, 0.45h
- 추부면(마전터미널) ~ 하신2리 윗삽실마을: 버스(810번):
- 추부면(마전터미널) ~ 하신2리 윗삽실마을: 택시(7,000원)
- 가풍리 원각마을: 옥천시내버스터미널~수묵리, 양산, 포동행 버스(06:30, 06:40, 07시, 07:50, 08:20, 08:40,..)
* 장령지맥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장계대교 버스정류장 ~ 옥천시내버스터미널/ 옥천역: 버스 많음, 0.25h
- 옥천시외버스터미널 ~ 서울: 옥천 ~ 대전복합터미널: 15:40, 19:15
- 옥천역 ~ 서울역: 10:19, 10:55, 13:13, 15, 15:58, 17, 17:48, 18:41, 20:24, 21:37, 02.16h, 10,000~17,600원
- 옥천시내버스터미널(607번 버스) ~ 대전 → 신인동주민센터(501번 버스) ~ 대전복합터미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금산군이 전북이었을 때는 장령지맥의 서대산까지도 전북 고산현의 관할하에 있었다. 장령지맥이 서대산(西臺山, 904m)에 이르면 방향을 남동으로 틀어 국사봉(668m)~감투봉(716m)으로 이어진다. 장령지맥은 감투봉에서 충북과의 도계와 만나고 능선이 T자형으로 갈라진다. 감투봉에서 남쪽으로 장령지맥과 헤어지는 능선상의 최고봉이 천태산(天台山, 714.7m)이다. 식장지맥에 보만식계가 있다면 장령지맥에는 천성장마가 있다. 모든 지맥이 다 그러하지만 장령지맥엔 어마무시한 역사가 묻혀있다. 어느 만큼이나 찾아볼 수 있을까 시작부터 걱정이 앞선다.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게 금성산이다. 그 아래에 칠백의총이 있다.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며 금강은 이에 따라 북상한 나제간의 자연스런 국경선이다. 식장지맥과 보만식계가 백제의 최전선이라면 장령지맥과 천성장마는 신라의 최전선이었다. 관산성전투는 둘의 균형을 깨뜨렸다. 옥천의 관산성을 두고 치러진 나제간의 숨막히는 공성전과 예기치 못한 성왕의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한국전쟁사에 빼놓을 수 없는 빨치산 충북도당, 옥천군당의 자취가 그렇다. 사실 빨치산의 주류는 현지인 중에 기존체제를 바꾸려는 소외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 지도부는 해방정국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먹물들이었다. 적대세력에 기반하여, 외부 침략자에 호응해 내부를 흔드는 준동세력이기에 체제유지 측면에선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식장지맥에서 분기하여 동북진으로 서대산을 우회하여 금산을 빠져나온 장령지맥은 천태산갈림길에서 천성장마와 만나 영동을 잠시 지나고 옥천으로 진입하여 장령산에서 옥천읍내를 조망한 후 도덕봉으로 내려서서 옥천시내를 우회하여 마성산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안내면 금강으로 향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윗삽실마을/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下薪里)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에 있는 윗삽실 마을은 소고개 동북쪽으로 금산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 삽실 또는 섶실, 신곡(薪谷)이라고 부르며 마을 동쪽에는 넘바위가 있다. 해서 넘바우들이라고 부르는 들이 있으며 서쪽에는 막골이라고 부르는 들이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숲이 우거진 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숲속에 집들이 들어섰다 하여 섶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삽실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또한 신곡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은 아래삽실과 그 사이에 마을이 있다 해서 중삽실, 중신리(中薪里), 중신, 중신곡이라고 부르고 들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평댕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삽실 서북쪽 중삽실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삽실 위쪽에 마을이 있다해서 웃삽실, 상신이라고 부르며 삽실 아래쪽 마을은 아래삽실, 하신곡, 하신이라고 부른다.
♤ 해너무재 갈림길/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馬首里)
왼쪽으로는 피재산성으로 내려서서 37번 국도가 넘어가는 해너무재 가는 길이고 반대편에는 마수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금산군 금성면에 있는 마수리는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마을 동남쪽에서 하천이 유입해 들어오고 있으며, 용고랑들, 쟁이논들, 홍각골들 등이 하천 주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자연마을로는 마수, 적은실 마을 등이 있다. 마수 마을은 지형이 말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말머리 마을이라 불리다 후에 마수(馬首) 마을이라 개칭되었으며 상마수는 말의 머리에 해당되는 지형이다. 적은실 마을은 윗말머리 동쪽 골짜기에 있는 지명이다.
♤ 장령지맥분기점(405m)/ 삼면봉(진산면, 금성면, 추부면)/ 채석산
식장지맥은 좌틀하며 금성면과 면계를 벗어나 추부면 내안으로 들어서 북진하는 지점으로 오른쪽으로 금성면과 추부면 면계를 따라 장령지맥이 분기하여 나간다. 분기점산패는 금성산에서 250m 떨어진 식장지맥에 있다. 금성산 정상에서 칠백의총 가는 길로 내려서다 두번째 나무계단과 두번째 돌탑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묘지가 보이고 그곳에서 오솔길로 좀 더 진행하면 참나무에 장령지맥분기점 산패가 매어 있다.
장령지맥 분기점을 다녀와서 데크목 전망대 북쪽 급경사길로 내려서서 선락장군 하동정씨 묘지 큰 비석 앞으로 내려서면 등산로가 나옵니다.
♤ 금성산(錦城山, 437.8m)/ 전망대/ 3등삼각점(금산 308/ 1980 복구)
정상에 나무데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충남 금산군의 금성면과 진산면 추부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가야할 서대산, 천태산은 물론이고 만인산, 대둔산, 진악산, 덕유주능과 호남알프스능선도 조망이 가능하다. 1914년 등장하는 금성면의 명칭이 유래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진산(鎭山)으로 인식되는 의미 있는 산이다. 『여지도서』에 "금성산은 금산으로부터 왔는데 군 북쪽 10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조선 전체 사람이 사흘을 먹을 금이 들어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들어온 금남정맥이 읍치 서쪽 장군봉에서부터 금성산을 지나 추부면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예로부터 여러 성들이 축조되었는데, 진산면 만악리와 금성면 둑실 사이 고개에 있는 지춘산성(芝春山城, 작은성재)과 진산면 초미동과 금성면 성밑 사이에 있는 학성산성(學聖山城, 큰성재) 등이 그것이다. 금성이라는 이름도 과거 이 산에 성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곳이다. 또한 추부천 금성산의 복수면 쪽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서 추부면 중심부를 뚫고 충북으로 들어서서 충북 옥천군 군서면에 이르러 서화천(西華川)으로 흘러가며, 냇물 주변에 곡식이 잘된다하여 부천(富川)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추부면에 흐르는 긴 냇물이라 하여 추부천이라 부르고, 또한 관천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에 백하지맥 기웃재로 금산에 진입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여 왜군이 일시(두달 여) 점거했던 산성이기도 합니다.
♤ 금성산성(錦城山城)
금성산성은 어원상으로 '금'은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신성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순수한 우리말로써 한자로 '錦'으로 표기하였다. '금'은 '크다'는 뜻 말고도 '위대하다, 으뜸이다'라는 뜻도 있음을 볼 때 지금 금성은 아름다운 성이라기보다 '크고 위대하다'는 뜻으로 크고 위대한 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금성산은 마한의 성 금현성에 비정되는 말로 산은 높지 않지만 금산의 20여 개 성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임진왜란 때 제봉(霽峰) 고경명선생의 눈벌전투, 중봉(重峯) 조헌,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의 연곤평전투, 변응전 선생의 횡당촌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칠백의총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곳이 금성산이다. 금성산성은 조망권이 넓고 성내에 성이 있었으며 주변의 여러산성을 거느렸던 산성이다.
♤ 칠백의총(七百義塚)/ 금산 전투
사적 제105호로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다. 1592년(선조 25) 8월 18일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승장 기허당(騎虛堂) 영규가 거느리고 있던 승병이 합군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뒤에 조헌의 문인인 박정량(朴廷亮)과 김승절(金承節, 또는 全承業)이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사총이라 했다.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에는 순의단이 설치되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 '종용사'라는 사액과 4결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했다. 그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사우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파괴한 것을 8·15해방 후 군민이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고, 국가에서 기념관·칠백의사순의탑 등을 새로 짓고 묘역을 조경하여 사적으로 지정했다.
♤ 382m봉
왼쪽으로 조금전에 출발한 분기점이 보이고 그 너머로 대둔산(大芚山, 879m)이 흐릿하게 보인다.
♤ 363m봉
363m봉으로 다가서며 벌써 서대산(西臺山, 905.3m)이 눈앞에 다가선다.
예전엔 고개마다 성황당, 미륵당, 당목이 있었는데 이 고개엔 미륵당이 있었나봅니다.
♤ 미륵재(弥勒峙, 234.3m)/ 37번국도/ 왕서방 손짜장, 수도시설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와 금성면 하신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대전에서 금산을 잇는 37번 국도가 지나가고 추부 아스콘공장과 골재 하치장이 보이고 금산쪽 오른쪽에는 오늘 산행을 시작한 윗삽실 마을이고 왼쪽은 금성농공공단이 있다. 지형도에는 미륵재라고 나오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불교교리에 따르면, 용화수 아래에서 고타마 붓다가 제도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할 부처로 수기를 받았다. 미륵보살 신앙 또는 미륵 신앙은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미륵불(彌勒佛)로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이다. 도로를 따라 금산쪽으로 가다가 (주)추부 아스콘공장 마당으로 올라서고 마당에서 돌담 윗쪽으로 올라 아스콘공장 뒷쪽으로 가면 마루금에 복귀한다.
♤ 303.1m봉/ 삼리봉(추부면 추정리, 금성면 하신리 → 대암리)
능선에 올라서며 바라보이는 추부면을 지나는 식장지맥 마루금이 늠름하다. 지맥은 왼쪽으로 이어지나 오른쪽 첫번째 봉우리인 303.1m봉을 찍고 돌아서 돌무더기가 있는 성황당고개 안부를 지난다.
♤ 344.6m봉/ 삼리봉(금성면 대암리, 추부면 추정리 → 장대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큰나무에 매어 있다. 대암리에서 추정리를 넘나들던 잊혀진 고개인 옛 감동재가 근처에 있다. 산패와 띠지들이 다량 매달려 있다.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식장지맥 만인산과 정기봉이 바라보인다.
삽재는 고속도로가 지나 우회를 해야 합니다. 암거까지 내려가기 멀어서리 수로가 지나는 개구멍으로 고속도롤 통과했더니 배낭 지붕이 천정에 닿아 바짝 쪼그리고 걸어야 했습니다. ㅋ
♤ 삽재(245m)/ 대전통영고속도로 굴다리(암거)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와 금성면 대암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는 민초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이곳으로 뚫리는 바람에 잊혀진 길이 되어 버렸다. 고속도로 수로를 따라 왼쪽으로 우회를 한다. 능선 아래로 내려서서 민가가 있는 오른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인삼랜드 휴게소 안내표지판을 지나 고속도로 암거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꺽어 고속도로 옆의 옛날 도로를 따라서 맥길을 잇는다. 5분이면 도착할 곳을 고속도로를 우회하느라 25분이 소요된다. 한참을 돌아 마루금을 복귀한 다음 철계단으로 올라선다. 계단에 잡목이 올라오면 오르기가 영 불편하다. 지명은 고개 남쪽에 있는 대암리 삽재마을에서 따온듯 한데 삽재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고개 이름을 따라 삽재 또는 신리라고도 부른다. 반남박씨(潘南朴氏)가 많이 산다. 백룡지맥을 하며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을 가까이 지난다.
※ 백제(남부여)가 멸망하기 5년 전인 655년, 남부여와 고구려는 신라를 일시에 공격한다. 일종의 군사공조였다. 이때 신라는 33성이 함락되어 위기를 맞는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한다. 당나라는 화답하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선에서 평화를 찾고, 곧바로 남부여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한다. 그것이 바로 655년 조천성 전투이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조천성 전투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에 그 단편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의 <김흠운 열전>과 <취도열전>을 보면, 남부여와 고구려에게 33성을 빼앗기고 난 후 무열왕이 우선적으로 조천성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대 남부여 전선 중에서 조천성 지역이 최대의 화약고임을 유추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와 남부여 간의 최대 화약고인 조천성은 어디인가? 조천성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양산면 일대로 비정된다. 양산면의 진산인 비봉산성이 조천성으로 추정된다. 양산면 북방으로 금강이 흐르는데 양산면 일대에서는 금강이 양강으로 불린다. 양강은 협곡이다. '양산덜개기'라는 협곡을 틀어막으면 개미 새끼 한마리 지나기 어렵다. 이곳을 조천성전투로 신라가 확보한 것이다. 양산덜개기를 지나면 금산벌이 나온다. 금산벌에는 남부여의 최후 방어선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신라는 금산벌에 포진한 남부여(백제) 방어선을 정탐할 목적으로 닭이봉에 용문산성을 축조하였다. 용문산성은 대전통영간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 상행선 인삼랜드휴게소 뒷산인 닭이봉 근처 남방에 위치한다.
성이 있는 곳의 이름이 모두 성재산이네요. 기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성재산(城在山, 429.1m)/ 대암산성 터/ 4등삼각점(금산 425/ 1980 재설)
금산군 금성면 대암리와 추부면 장대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대암리 북쪽이 되므로 북산이라고도 하고, 옛 성터(대암산성)가 있어 '성티' 또는 '오대산'이라고도 한다. 대암에서 금산군 추부면 일대를 바라보면 왼쪽 낮은 봉우리에 마전리산성이 있다. 추부를 다스리던 현의 치소로 당연히 백제(남부여) 계통의 산성이다. 성재산 뒤로 대둔산이고 그 왼쪽은 안산, 오른쪽은 만인산(537.1m)이다. 그 뒤로 대전시 경계이다. 대암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이 아니라 고려시대 산성이라고 한다. 아직 삼국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암산성은 닭이봉 용문산성과 더불어 신라계 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백제(남부여) 최후 방어선을 정탐할 목적으로 대암 위에 보루 정도는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원봉(鷄元峯, 352m) 보루 뒤편으로 금산읍의 진산인 진악산(進樂山, 732.3m)이 보입니다.
♤ 대암(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금산군 금성면 대암리(大岩里)
금성면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37번 옛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북쪽으로는 성재를 경계로 추부면 장대리, 추정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달기봉을 사이에 두고 군북면 동편리와 외부리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하신리, 그리고 남쪽으로는 외부리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 대암리는 자리한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비교적 높은 산악지대가 접하고 있으나 서남쪽으로는 냇물을 낀 들이 많은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대암에서 추부면 추정리로 넘어가는 감동재라는 고개가 있으며 또한 대암에서 추부면 장대리로 넘어가는 삽재고개가 있어서 산으로 가려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쪽으로도 대암에서 하신리 평댕이로 넘어가는 분산골고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높은 지역에 자리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전후로 보며 백제 때는 진내군에 속했었으며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도 그리 속했다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한 금주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차츰 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들에 경작지가 조성되고 금산의 외곽지대로 농촌으로서의 전망이 좋은 곳으로 치부했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서이면의 지역으로서 대미 또는 대암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와여리(瓦餘里), 하신리(下薪里) 일부를 병합하여 대암리라 하고 금성면에 편입되었다. 옛날부터 반남박씨(潘南朴氏)가 많이 세거하는 지역이다.
♤ 서낭당고개/ 성황당고개
안부로 내려서는 고개에는 서낭당터의 흔적인 돌무더기가 보인다.
♤ 395m봉
맥길은 봉우리 아래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가나 직진 능선으로 올라선 봉우리이다. 상배운영자님 띠지가 있다.
♤ 닭이봉갈림길(460m)/ 삼면봉(추부면, 금성면 → 군북면)
오른쪽은 닭이봉(鷄峰, 507.5m)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능선이고 지맥길은 왼쪽 아래로 꺽어진다. 추부면 장대리와 금성면 대암리 경계를 따르던 지맥의 오른쪽이 군북면 동편리로 접어들어 이제부터 추부면과 군북면의 면계를 따른다.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새터가마실은 한국전쟁 지리산 빨치산 부대(일명 남부군)의 총사령관인 화산 이현상의 고향이다.
♤ 닭이봉(鷄峰, 507.5m: 맨 좌측 봉우리)/ 달기봉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두두리와 금성면 대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닭 또는 닭벼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바로 옆 봉우리는 용문산성이고, 그 맞은편 보루가 있는 앞산을 계원봉(鷄元峯, 352m)이라 부르는데, 마을에서는 계원봉이 암탉 그리고 달기봉이 수탉이라고 말한다. 달기봉과 계원봉은 서로 암수간의 음양 상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 금산군 군북면(郡北面)
조선시대에 금산군이 전북의 북쪽에 있다 하여 군북면으로 불렀던 곳이었는데 1963년 충남으로 이관되어 금산군 군북면이 되었다. 현재 10개의 법정리를 관할한다. 동쪽 대성산과 남쪽 천태산에 둘러싸여 있어 험준한 산지를 이루는 곳이다. 지형이 삼분되어 있어 행정상 불편한 점이 많다. 생활권은 동쪽의 상곡분지는 충북권, 서쪽의 내부분지는 금산읍권, 중간의 두두분지는 제원권으로 나뉜다. 군북면은 북쪽으로 장령산의 줄기가 병풍처럼 서 있고, 서쪽으로는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904m)이 우뚝서서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면서 달기봉, 계원봉으로 이어주는 산악지대를 조성하며, 동쪽으로는 매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줄기가 남쪽의 국사봉(667m)으로 이어지고, 다시 남쪽의 발군산까지 그 산맥이 쌓여 안쪽으로 방화봉을 비롯한 여러 산이 첩첩이 놓이고 그 사이로 북쪽에서 흘러오는 조정천이 남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기사천(외부천)이 남쪽으로 흘러보내고 있는 그 완충지대에 산과 들과 냇물이 함께 자리한 지역이 군북면이다. 군북면의 주거지 정착은 백제시대에 취락 형성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되며, 전답이 본격적으로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부터라고 전하며 마을이 조성되기는 조선시대로 들어서서 말기까지 이루어진 분포상황이다. 때로는 국난과 정란, 사화에 밀려 전원을 택하는 씨족들이 오지인 이 지역을 택하였고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왔다가 산과 들을 개간하면서 정착하였으며, 산울타리에 둘러쌓여 산이 좋고 들이 좋아서 정착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왔다. 주로 산지농업이 이루어지는데 인삼과 깻잎을 특산물로 많이 재배한다. 면의 남쪽에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지나가며 문화재로는 조선시대 사당인 숭의재, 현덕사, 형수당이 있다.
♤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東片里)
군북면 동편리(東片里)는 대부분의 지대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산간 마을로 마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고, 자연마을로는 동편, 방아재, 퉁적골 마을 등이 있다. 동편 마을은 개울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방아재 마을은 방아고개 밑에 자리한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퉁적골 마을은 동(구리)점이 있었다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 447m봉/ 면리계(추부면 장대리 - 군북면 동편리)
벌목능선에서 숭암저수지 뒤로 철마산이 보이고 마전 뒤로 식장지맥이 펼쳐지고, 가야할 방향으로 왼쪽부터 방화산, 국사봉, 서대산이 차례로 바라보인다.
♤ 419.4m봉
오래된 여영대선배님과 인삼대장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능선 너머로 서대산이 버티고 있다. 오른쪽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내려선다. 등로에서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 숭암(崇岩) 마을에 있는 숭암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숭암마을은 장대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 어귀에 문바위(문처럼 생긴 바위로 옛날 효자 감사 김천석이 독서 하던 곳)가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저수지 오른쪽은 철마산(469.8m)이다.
♤ 수암재(355m)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 하숭암 마을에서 군북면 동편리 통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준희선생님 수암재 산패가 있는데 수암재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원래는 ‘숭암재’였는데 ‘수암재’로 바뀐것은 아닐런지 추측해 본다.
♤ 철마산(469.8m)
차가 다닐 정도의 임도를 올라가니 넓은 경작지가 나오고 맞은편으로 철마산이 보인다. 충남 금산군 군북면 천을리에 있는 닭이봉과 연계가 가능한 산으로 봉수와 보루가 있다. 철마산 뒷쪽으로는 만인산과 정기봉 등 식장지맥 능선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 비포장 도로/ 임도
잠깐 같이 걸어온 넓은 임도는 상숭암마을로 내려가고 오른쪽으로는 군북면 동편리 통점마을 가는 길이다. 숭암마을은 동면장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숭암이라고 부르며 마을 어귀에 문바위, 문암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숭암(崇岩)이라고 부르므로 이에 연유하여 숭암이라고 부른다. 벼슬로는 감사까지 올랐으며 효자로 알려진 김천석(金天錫)이 살면서 글을 읽던 바위가 문바위이므로 더욱 유명했던 마을로 지금은 조선시대에 일찍부터 정착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숭암 위쪽을 웃숭암, 상숭암이라고 부르고 아래쪽을 아래숭암, 하숭암이라고 부른다. 상숭암에서 군북면 조정리로 넘아가는 고개는 조정개라고 부르고 아래숭암에서 조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질고개, 그리고 아래숭암에서 군북면 통작골로 넘어가는 고개는 통적골재라고 부른다.
♤ 434m봉/ 삼리봉(추부면 장대리, 군북면 동편리 → 조정리)
지맥은 능선으로 올라서면 지맥의 오른쪽은 군북면 동편리에서 조정리로 바뀌어 민재를 지나 방화봉까지 한참동안 같이 한다.
♤ 금산군 군북면 조정리(鳥亭里)
북쪽으로는 서대산에서 주주봉으로 밀어붙이는 산의 줄기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쪾으로도 방화봉을 주축으로 조성된 산악지대로 산 높이가 430m에 이르는 고원지대를 조성하는데 그 안쪽으로 북쪽에서 서대산 주주봉 황골에서 발원하는 조정천을 안고 들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 정착한 지역이 조정리다. 동쪽으로는 산안리와 봉광리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동편리와 두두리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추부면 서대리와 장대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자리한다. 군북면 조정리는 산악지대와 들이 아기자기해서 옛날부터 선비들이 자주 찾던 지역이며, 또한 조정리 북쪽으로 1km지점에 있는 매바위는 바위가 높아서 매가 많이 앉았다 하는데 조선시대에 무인들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떼지어 찾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정리는 풍수상 마을이 새가 날아가는 형국에 자리 잡고 있어 유래했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인 주지봉이 새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뒷산인 주지봉으로 인해 왕이 태어나고 그 아래 마을은 조정이 되어 그 이름도 조정(朝廷)이라 했다가 관아에서 새가 깃드는 마을이라 해서 조정(鳥亭)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 431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는 별다른 특징은 없는 봉우리이다.
♤ 455m봉
♤ 456.2m봉/ 삼리봉(군북면 조정리, 추부면 장대리 → 서대리)
맨발대선배님과 인삼대장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추부면 장대리에서 서대리로 바뀐다.
♤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書垈里)
왼쪽 아래에는 충남에서 제일 높다는 서대산의 품안에 있는 추부면 서대리가 보인다. 금산군 추부면에 속해있는 서대리는 마을 앞으로 서화천이 흐르고 근처에 구일저수지가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서당골(서당곡), 송대, 신대 등이 있다. 서당골은 송대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송대는 서당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노송이 많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신대는 송대 북쪽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민진강 효자문이 있다. 백제 때는 진동현에 속했었으며, 신라 때는 황산군에 딸린 영현에 속했다가 뒤에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도 진례군의 영현 고을을 지속해 오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2년(1390)에는 잠시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해서 다스리는 고을에 속했었다. 서대산이 있어서 그 표적이 되겠으나 조선시대 초기부터 초야를 찾아 선비들이 낙향을 할 때에 금주의 서대산 아래는 한양사람들이 꼽는 낙향지였는데 첫째로 기름진 들과 산에 가려서 권력을 생각할 수 없는 선비들의 금수지지라 하였는데 그때부터 선비들이 많이 정착한 곳으로 지목들을 한다.
♤ 411.4m봉/ 4등삼각점(이원 402/ 건설부 74. 9)
금산, 충남북 일대의 산에는 금산문화원 인삼대장님 산패가 자주 보인다. 가야할 방향으로 금풍(주) 뒤에 471m봉과 서대산이 바라보인다. 서대산 산 아래 마을이 서대리이다. 지맥은 급우틀하며 민재로 가파르게 내려서는데 벌목지에서 자란 잡목숲이다.
♤ 민재(245m)/ 601번 지방도로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와 군북면 조정리 북쪽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601번 지방도로가 통과하며 대전광역시 주변에 있어서 그런지 주위에는 공장들이 많이 보인다. 세진(世塵)을 씻는 고개로 유명하며 조선시대 포악한 포리들도 이 부근에서는 발길을 돌렸다는 신성지가 바로 서대리 부근이다. 원 지맥길은 종이 포장재와 쌀포대를 제조하는 ‘금풍’이라는 회사 마당으로 이어지나 공장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민재 정상에서 서대리쪽으로 좀 내려서다가 보령석재 표시석이 보이는 곳에서 도로 오른쪽으로 금풍 담벼락 옆을 따라 가파르게 오른다.
♤ 471.0m봉
NO.222 송전탑을 지나 계속해서 오르막이다. 가파른 급경사를 올라서서 능선에 달라붙는 지점입니다. 소나무에 여영대선배님 산패가 매어 있다.
♤ 487.3m봉
왼쪽으로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 수통골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에 있는 수통골은 서대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 있으며 동석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서 서대산쪽을 바라보면 닭의 벼슬 모양을 닮았다는 닭벼슬바위가 있으며 탑제를 지내는 탑 앞 개울 위로 둥글게 자리잡은 마을로 뒷산의 모양이 수통과 같다 해서 수통골(水通谷) 또는 수통곡이라고 부른다. 수통골 남쪽에 수통제라 부르는 못이 있다. 지맥은 우틀이다.
♤ 주지봉(566m)/ 서대산갈림봉/ 면계/ 삼리봉(군북면 조정리, 추부면 서대리 → 군북면 보광리)
평평한 능선이 나오고 왼쪽(북쪽)은 서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맥길은 오른쪽(남쪽)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서대산 정상까지는 왕복 약 3km 거리라 다녀오기가 만만치 않다. 여기부터 행정구역이 금산군 추부면과 면계를 벗어나 좌우가 온전히 금산군 군북면 내안으로 접어들며 방향을 남쪽으로 전환한다.
♤ 서대산(西臺山, 905.3m)/ 1등삼각점(이원 11/ 1983 재설)/ 강우레이다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은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와 충북 옥천군 군북면 보광리에 걸쳐 있는 충남의 최고봉이다. 주위에 방화봉·장령산 등이 있으며, 능선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다. 『동국여지지』 충청도편에는 ‘서대산은 (옥천)군 남쪽 20리, 금산군 경계에 있다. 산 모양이 불뚝 튀어나온 것이 대와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편에 ‘서대사(西臺寺)는 서대산에 있다. 옛날에는 상·중·하 세 개의 서대가 있었는데 중서대사는 지금 없어졌다’는 기록으로, 서대사가 있었다 해서 서대산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서대’라는 명칭은 산의 서쪽 기슭에 신라 문성왕 때 무양국사가 서대사를 창건했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쪽 기슭은 낭떠러지에 가끔 평평한 지형이 나타나는 곳이다. 따라서 서쪽 평평한 지형에 사찰을 창건해서 서대사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로는 서쪽으로 커다란 누대처럼 산이 우뚝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서대산은 금산의 깊은 산중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에 "서대산은 군 북쪽 35리에 있다."고 하고, 동일 문헌에 "서대산은 북방을 진수하고 진악산(進樂山)은 남방을 가리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서대산이 금산군의 북쪽 경계이자 방어벽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초기 이전에 서대산에 3개의 서대사가 있어 꽤 알려졌던 모양이며 서대사의 서편 기슭에 있는 현재의 원흥사 터에 서대사가 있었으며 고려말의 고승 취운당(翠雲堂)의 부도 등 큼직한 청석부도가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국내의 여러 절에 옛날 서대사에서 출판한「화엄경」이 많이 있음을 보아서도 서대사가 절도 크고 불사도 활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의 형태는 땅속에서 그대로 솟아 오른것처럼 보이고 비래산(산맥으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 떨어져 독립된 산)에 가깝다. 북쪽으로는 잿말재, 남쪽으로는 비들목재, 남서쪽으로 민재를 지나 산줄기가 이어지지만 그 재들이 낮은데다가 서대산 자체가 워낙 우람하고 높이 솟아있어 주위의 모든 산들을 압도한다. 산세는 원추형 암산으로 곳곳에 기암괴봉과 깍아지른 낭떠러지 암반들이 많고 경관이 좋다. 용바위, 마당바위, 선바위, 남근바위, 구름다리, 사자굴, 살바위, 개덕사, 개덕폭포 등이 있고 주릉에는 석문, 견우장연대, 북두칠성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으며, 서대산 강우레이더 관측소에는 등산객을 위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서대산 정상에 서면 민주지산,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및 대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대산의 산길은 모두 가파르지만 암릉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넘고 돌아오르는 등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 산행 중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경관이 좋고 아름다워 산 타는 멋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험준한 산세인 서대산은 삼국시대 때는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역이었다. 때문에 산자락 곳곳에 옛날 성터와 봉화대 흔적들이 남아 있고 게다가 동학란 때에는 관군을 피해 동학군들이 숨어들었고, 한국전쟁 전후해서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하게되어 금산, 옥천, 무주 일원에서 활동하던 공산군들이 경찰서와 군청 등을 습격하는 활동 무대의 아지트로 삼기도 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북으로의 퇴로가 막혀 퇴주하지 못한 공산군들이 서대산으로 집결했다. 이때 서대산으로 숨어 든 공산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충남과 충북 의용경찰과 전투경찰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서대산에서는 무덤(대부분 묵묘)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무덤들은 대부분 바위 꼭대기나 절벽 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역 토박이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이 무덤들은 6·25 이후 전투 중 희생된 경찰들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어떤 토박이 주민은 당시 전투경찰들을 돕기 위해 특수부대인 ‘켈로부대’가 투입된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정상과 가까운 거리인 견우장연대 바위 꼭대기에 음각된 태극기는 6·25 때 어느 전투경찰이 새겼고, 태극기 남쪽 바위 꼭대기 무덤은 이곳에서 희생된 전투경찰이 묻힌 곳으로 보고 있다. 정규군끼리의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빨치산들과의 비정규전으로 옥천읍 내 행정관서의 주요 기관이 불에 타는 등 폐허를 경험하였다.
아! 그렇군요. 옥천역 앞에서 빙 돌아보다 산꼭대기에 탁구공(강우레이다?)을 보았는데 그게 서대산이었습니다.
♤ 전국 강우레이다
2004년에 발표한 ‘전국 강우레이더 기본계획(대형 7기, 소형 2기)’에 따라 대형 강우레이더 7기는 임진강(강화, 2001년 3월), 비슬산(청도, 2009년 8월), 소백산(단양, 2012년 5월), 서대산(금산, 2014년 10월), 모후산(화순, 2015년 12월), 가리산(홍천, 2016년 4월), 예봉산(남양주. 2019년 10월)에 설치됐다. 이중 임진강 강우레이더는 2021년 하반기 중에 감악산으로 이전하며, 이전 계획에 맞춰 임진강 시설의 효율적인 활용방안을 마련 중에 있다. 소형 강우레이더 2기는 삼척과 울진에 2018년 12월에 설치됐다. 강우레이더는 태풍과 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는 달리 반경 100㎞ 이내에서 지표에 근접하게 내리는 비의 양을 집중적으로 관측한다고 한다.
보곡산골은 서대산 아래 군북면 보광리, 상곡리, 산안리 무공해 청정지역 세 마을을 합해 부른 이름으로 국내 최대 산벚꽃 군락지로 금산군에서 개최하는 비단고을 산벚꽃축제로 유명합니다.
♤ 금산군 군북면 보광리(普光里)
금산군 군북면에 있는 보광리는 서대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로 비교적 낮고 평평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이다. 마을 동쪽으로 하천이 흘러가고 있으며, 그 주위에서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자연마을로는 보광마을 등이 있으며 보광리는 보광사라는 사찰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하고, 사방이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칠목지간으로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어떤 난리에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호티리는 범고개(虎峙)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옛날 고개에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 범재라 불렸다고도 하고 모양이 범의 형상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502.8m봉
일대구정에서 수고해 주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살짝 좌틀로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선다. 창원황공 가족묘 왼쪽으로 안부로 내려서고 안부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능선에 올라서면 벌목지와 채석장이 나오며 시야가 확 트인다. 전방으로 국사봉과 방화봉이 보인다.
♤ 429.5m봉/ 4등삼각점(이원 405/ )
삼각점은 실제로는 깨져있어 판독이 불가하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노간주나무에 매달려 있다. 429.5m봉 지나자마자 좌틀하여 약 30분 진행하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지맥의 왼쪽이 군북면 보광리에서 산안리로 바뀐다.
♤ 방화봉(放火峰, 555.1m)/ 삼리봉(군북면 산안리, 조정리 → 두두리)/ 봉화재/ 산불감시초소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금산군 군북면 조정리, 두두리, 산안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봉화를 올렸던 산이라 해서 '봉화재'로도 불리는데 봉화봉이 방화봉으로 변음된건 아닌지. 내림길에 군 교통호와 참호가 보이면서 갈림길을 만나 좌틀로 가파르게 내려선다. 멀리 금산의 진악산이 바라보이고 비들목재 개구멍을 잘 찾지 않으면 직전 휀스를 우회해서 내려서는데 잡목이 꽤 심하다.
♤ 금산군 군북면 헌대리(軒垈里) 두두리마을
본래 금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 조선시대 동헌터가 있었으므로 헌대(軒垈) 혹은 헌터라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서 두둑말(두두리), 뫼덕이(산덕이), 헌대리를 병합하여 두두리라 하고 군북면에 편입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둔 홍장군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헌대리의 주산인 성통산에는 역시 임란 때 홍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 홍씨에 뒤이어 나주(羅州) 라씨(羅氏)가 역시 임란 때에 입촌하였다고 한다. 입향조는 나구룡이란 사람인데, 당시에 전라도 김제에서 피난을 나와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나씨들이 번성하며 오래도록 세거(世居)하여서 현재도 나씨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 편제상 1구에는 헌대리, 샘골, 가나울, 2구에는 학교담, 음짓말, 양짓담, 3구에는 뫼덕이가 편성되어 있다. 두두리는 군북면의 소재지로, 면사무소, 학교, 우체국, 파출소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주민들은 모두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벼농사가 주작이며, 일부 가정만이 인삼을 재배한다. 인삼은 연작이 불가능하므로 도라지, 당귀, 생지황 등의 약재를 재배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떠나가는 배인 행주형(行舟形) 지세이다. 때문에 예전부터 마을에 함부로 우물을 파는 것을 금지한다. 공동우물 한 개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풍수상의 특성 탓에 마을 중앙에 배의 돛에 해당하는 진대를 세웠다.
비들목재는 가급적 왼쪽으로 내려서야 합니다. 오른쪽 빈 농가에 수도는 물이 나오지 않고 왼쪽으로 내려서야 들입구가 가깝고 빌라촌에서 물을 구할 수 있습니다.
♤ 비들목재(365m)/ 2번군도/ 구목령/ 구항령/ 정자(산꽃나라)
낙석방지 철망 개구멍을 통해 비들목재에 내려선다. 준희선생님 여기가 비들목재입니다 산패가 철망에 매달려 있다. 충남 금산군 군북면에 있는 고개로 군북면소재지가 있는 두두리에서 산안리 사기점마을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데 2차선의 2번 군도가 지나가며 북쪽으로는 서대산이 시원스레 보인다. 비둘기의 목을 닮았다고 해서 비둘목재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도로에서 북쪽으로 올라선 다음에 보광로 교통표지판에서 오른쪽 산판임도로 꺽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산안리 사기점마을에는 태양광 시설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서대산이 시원스레 보인다. 사기점 마을은 웃사기점과 아랫사기점 두 마을로 나누는데 아랫사기점은 조선시대에 사기를 구었으므로 사기점골이라고 부른다.
서대산갈림봉에서 군북면 내안을 지나온 지맥이 군북면을 지나 제원면 면계에 닿는 곳으로, 보곡산골 천성장마를 지나며 서대산을 계속 바라보게 됩니다.
♤ 국사봉(國師峰, 666.9m)/ 국수봉(國手峰)/ 면계/ 삼리봉(군북면 산안리, 두두리 → 제원면 동곡리)/ 4등삼각점(이원 407/ 1980 재설)
비들목재에서 잠깐 임도를 따른 이후 국사봉까지는 힘든 빨래판 구간이다. 왼쪽으론 서대산, 오른쪽으론 장령산이 보인다. 금산군 군북면 두두리와 제원면 동곡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4등삼각점이 있으며 전국에 산재한 같은 이름의 국사봉 중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높다. 국수봉이라고도 한다. 국수봉의 국수는 의국수(醫國手)의 준말로 '나라의 병을 고친다'는 의미로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국수당을 차려놓고 하늘에서 내리는 국수신을 모셨다고 한다. 국사봉 정상의 네모큰바위 밑에서는 그릇조각, 쇠로 만든 말, 배 모형, 금가락지 등이 출토되었으며 국수신당이 설치되어 민속신앙의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국사봉 사면에서 서화천(西華川)이 발원하며 북쪽으로 흘러 옥천군 군서면과 군북면을 관류하여 군북면 이평리에서 금강 본류(대청호)로 흘러간다. 지명은 『대동여지도』에 서화천이 표기되어 현재까지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후 한국지명총람에는 서화천과 함께 서화천의 이명칭으로 큰내가 기록되어 있다. 몸집이 우람하고 높은 서대산이 부러운 듯 서대사의 턱밑에서 서대산을 우러러보고 있으며, 갈곡리 새방이골에 한줄기, 산안리 사기점골에 두줄기의 좋은 개울을 거느리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좌틀로 내려서는데 낙엽이 쌓인 가파른 능선이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과 경계인지라 백하지맥을 하며 이미 제원면과 인연이 있습니다.
♤ 금산군 제원면(濟原面)
백제 때에는 두시아현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옹성하여 저항하였다는 토성도 있다. 신라 때는 이성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 창건하였다는 신안사가 이 지역에 있으며 신라말기 경순왕의 발길이 잦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때에는 처음에 부리현에 속했었다. 고려전기 성종 때에 관물의 수송, 도로의 정비전령기관으로 역관이 있었던 제원역이 들어서면서 제원면은 활발하게 개간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엣날부터 무주의 소천역과 용담의 달계역, 진안의 단령역 그리고 고산의 옥포역을 관할하는 제원도역승이 있었던 지역으로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도와 남단지역과 왕래가 심했던 지역이므로해서 역말 또는 역촌이라고 불러오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중기 임진왜란 때는 금강을 건너서 침범해 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권종 군수와 오금산의 군사들이 피를 흘렸던 닥실의 저곡산성이 있으며 또한 칠백의사의 의병대장이 건넌 닥실나루도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정희량의 민란 때는 의병대장 나후명이 의병을 모아 난을 진압할 때 그 의병을 모았던 발군산도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 건양 원녕(1896)까지 금산군의 교통 중심지였음은 물론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제원리라 하고 전북 금산군 제원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에 편입, 충남 금산군 제원리가 되었다. 장수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와 서쪽으로 방향을 돌린 금강의 강줄기가 제원면에 이르러서 다시 북쪽으로 그 물줄기를 바꾸다가 마치 뱀처럼 꾸불꾸불 선을 그으며 동쪽으로 물줄기가 바뀌는 그 아기자기한 금강변이 제원면의 남쪽이 된다. 그러므로 산과 들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지가 많은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학산면과 접하고, 남쪽은 부리면과 접하며, 서쪽과 북쪽은 군북면과 경계를 나눈다. 금산군의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오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은 봉황천이 금강으로 합류하기 전에 북쪽에서부터 흘러오는 조정천과 합류하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는 봉황천 강변 아래 위로 넓은 들과 야산지대를 조성하는 지역에 제원리가 자리한다. 사통팔달의 편리한 교통망과 기름진 옥토 등이 자랑인 제원면은 천내강, 국사봉, 산봉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보는 중앙의 천앙봉 등 절경지가 많은 지역이며 특산물로는 인삼, 약초, 바리실사과, 배, 쌀. 인삼어죽 등이 있다.
♤ 615.3m봉/ 시온산/ 이면삼리봉(군북면 산안리, 제원면 동곡리 → 길곡리)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간벌된 나무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정상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좌틀로 내려서면서 지맥의 오른쪽이 동곡리에서 길곡리로 바뀐다. 비들목재에서 신안고개까지 오르내림이 반복되어 계속 힘들다.
♤ 금산군 군북면 산안2리 자진뱅이
군북면에서 가장 오지마을에 속하는 자진뱅이는 예로부터 ‘오목지간의 피란지지’로 이름이 높다. 여기에서 오목이란 산안리와 두두리를 잇는 비둘목, 자진뱅이 남쪽에 위치한 명지목, 자진뱅이에서 상곡리 죽말로 넘어가는 느지목, 상곡리 도랜말에서 안말로 넘어가는 노루목, 보광리에서 상곡리로 넘어가는 황새목이 그것이다. 그만큼 이 마을은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에워싸여 최고의 피란처로 주목을 받아왔던 것이다.
♤ 조망바위/ 금산군 제원면 길곡리(吉谷里)
제원면 길곡리의 마을은 희미하게 보이고 그 너머로는 금산읍이다. 제원면 북쪽 중앙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신안리, 서쪽으로는 동곡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대산리, 그리고 북쪽으로는 군북면 산안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위치한다. 길곡 또는 질곡, 질골, 길골리라 부르며 마을 뒤에는 돌배나무밭, 길나무밭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으며, 북쪽에는 또한 횟목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는 마을 뒷쪽에는 국사봉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길곡리의 유일한 도로가 신안사까지 이어져 있으며 북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마을 부근을 적시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 655.4m봉/ 면계/ 삼리봉(군북면 산안리, 제원면 길곡리 → 신안리)
무명봉을 넘고 안부에서 올라서면 정상이다. 준희선생님 산패와 인삼대장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길곡리에서 신안리로 바뀌는 이면삼리봉지점이다. 지맥길은 우틀로 내려선다.
♤ 635m봉
문패없는 묵묘가 있다. 묵묘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대성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 460m봉/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山安里)
460m봉에서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 마을이 보인다. 산안리는 대부분의 지형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산간 마을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비교적 낮은 지대에 자리한다. 자연 마을로는 산내, 사기점, 웃사기점 마을 등이 있다. 산내 마을은 묵방산, 국사봉, 방화봉의 세 산 안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사기점 마을은 조선시대 때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으며, 웃사기점 마을은 사기점 위에 자리한다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 526.2m봉
안부에서 정상에 올라서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달려있다.
오른쪽 신안사는 조금 멀고 왼쪽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군북 산안리 명지목골로 내려서면 임산물체험관과 헬링센터 인가가 가깝습니다.
♤ 신안고개(新安峴, 415m)/ 제원면 신안리(新安里)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와 제원면 신안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고개 오른쪽으로 약 20분 거리 아래에는 꽤나 큰 규모의 신안사라는 절집이 있고 지명의 유래는 신안리 마을에서 따온듯 하다. 신안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마을 동쪽에 천태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하천이 흐르는데 자연마을로는 신안 마을 등이 있다. 신안 마을은 옛날에 임금님이 편안히 쉬어간 신안사라는 절이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신라말기 홍국사에 들렸던 경순왕이 찾아와서는 마음이 편안한 곳이라 말하였으며 고려 때에도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에 들린 공민왕이 몸을 편히 쉬었다 하여 신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 지역은 깊은 산골이나 두 임금이 쉬어간 명소라 하겠다. 문화재로 시도유형문화재 3호인 신안사대광전(身安寺大光殿), 시도유형문화재 117호인 신안사극락전(身安寺極樂殿)이 있다. 신안고개에서 돌계단으로 올라 감투봉을 향해 약 40분간 장령지맥에서 젤 빡신 오름이 시작된다.
♤ 신안사(身安寺)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신음산(神陰山) 국사봉(國師峰) 아래에 있는 절집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651년(진덕여왕 5)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으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충북 영동군 있는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학할 때 이 절에도 가끔 들러 머물렀는데 주변 경관과 어울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여 신안사라고 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 481m봉
왼쪽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사면길이 보이나 직진 능선으로 올라가면 만나는 봉우리이다. 다시 우회한 사면길로 내려선다.
충남 금산군을 지나온 지맥이 충북 도계와 만나는 곳입니다. 감투봉에서 투구봉까지 장령지맥이 지나는 영동군 구간은 고만고만한 산길로 약 40분 거리입니다.
♤ 감투봉(敢鬪峰, 701m)/ 도군계/ 삼면봉(충남 금산군 군북면, 제원면 → 충북 영동군 양산면)
충남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와 제원면 신안리,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가 만나는 이도이군삼면봉이다. 정상에는 이정표, 준희선생님 산패와 인삼대장 산패 두개가 붙어있고, 누군가가 이정표 기둥에 메직으로 감투봉이라 써놓았다. 지도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되어있지 않으나 트랭글 앱에서는 감투봉이라고 뻿지가 울린다. 이곳에서 지맥길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성산쪽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신음산(711m)이 왕복 8분 거리, 영국사를 품고있는 천태산은 약 2.9km 거리이다.
♤ 충북 영동군 양산면(陽山面)
충북 영동군 서부에 있는 면으로 남쪽은 학산면, 동쪽은 양강면, 북쪽은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 서쪽은 충남 금산군 제원면과 접한다. 고려시대 양산현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조선시대에는 양내면으로 불렀고 구한말인 1906년 영동군으로 편입되어 9개의 법정리를 관할한다. 서부는 해발 715m의 천태산을 중심으로 산지를 이룬다. 북부의 마니산(摩尼山, 640m)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해발고도 200∼400m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곡류하는 금강(錦江)이 남부에 와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남동부의 금강 주변에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면의 중심부를 이루며 금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쌀·보리의 산지를 이룬다. 양산면에서는 당도가 높은 수박과 포도, 사과 등을 특산물로 재배하며 논농사도 많이 이루어진다. 잎담배와 양잠이 성하며, 특히 인삼의 주산지인 금산(錦山)과 가까워 인삼 재배가 활발하다. 무주·금산·옥천 방면 지방도가 면내를 통과한다. 문화재로는 영국사(寧國寺), 영국사 부도(보물 532), 영국사 3층석탑(보물 533), 영국사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보물 534), 영국사 망탑봉(望塔峰) 3층석탑(보물 535),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 영동 영국사 대웅전(충북유형문화재 61), 영동 영국사 석종형부도(충북유형문화재 184), 영동 영국사 원구형부도(충북유형문화재 185)가 있다.
♤ 도가실 갈림길/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樓橋里) 도가실마을
오른쪽 아래로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도가실 마을로 내려가는 등로이다. 누교리는 천태산 끝자락에 걸쳐 있으며, 마을 앞으로 천이 흐르는 산촌마을로 자연마을로는 누다리(누교), 명덕, 산직촌, 아래도가실(하도가실, 하도덕), 안내골(안내곡), 영국동(영국사), 지력골(지력동) 등이 있는데 누교는 마을에 누다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명덕은 처음에 명씨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하며, 산직촌은 옛날에 산지기들이 살았다고 한다. 영국동은 영국사(만월사)가 있는 마을이다. 지력골은 천태산 어귀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천태산을 지륵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영국사(寧國寺)에는 공민왕(恭懲王)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문화유적으로 영국사 망탑봉 3층석탑, 영국사 대웅전 등 영국사 내에 문화재들이 많다.
전망바위에서 천태산이 바라다 보입니다.
♤ 천태산(天台山, 714.7m)/ 지륵산(智勒山)
천태산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와 충남 금산군 제원면 화원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는 지륵산으로 불렸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옥천)에 "지륵산(智勒山)은 고을 남쪽 53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관련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옥천)에도 "지륵산(智勒山)은 군 남쪽 양내면 53리에 있다. 주맥(主脈)은 전라도 금산군 서대산으로부터 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옥천)와 『대동여지도』에도 그대로 지륵산(智勒山)이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지지자료』(영동)에는 지륵산 대신 천태산(天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지륵산이란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천태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지명총람에는 천태산의 다른 이름인 천대산·천주산·대성산·지륵산·국사봉·국수봉(國壽峯)이 소개되어 있다.
♤ 영국사(寧國寺)
천태산 아래에 있는 영국사(寧國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고려 문종 때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로 당시에는 국청사(國淸寺)라고 했다. 그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 마니산성에 머물 때 이 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온하게 되었다’ 해서 영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영국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서기 1361년(공민왕 10년) 11월 원(元)나라의 한산동(漢山童)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기 위해 공민왕은 노국(魯國)의 공주와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던 중 남으로 길을 재촉하던 공민왕은 영동 양산면 지금의 누교리에 머물게 되었다. 영국사의 그 당시 이름은 국청사이기 때문에 왕이 부처님 앞에 나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빌려고 했는데, 며칠 전부터 내린 폭우로 도무지 내를 건너 갈 수가 없었다. 개경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가슴 아픈 일들 뿐이였다. 성안의 부녀자와 노인과 어린이들은 다투어 성을 빠져나갔다지만 그나마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홍건적의 무리에 짓밟혀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소식이었다 공민왕이 이곳 양산이 아니라 이천(利川)을 지날 때 이미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 했고 그 뒤 수개월 동안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왕궁을 불사르는 등 잔악한 행동이 그칠 사이가 없이 일어 났다고 한다. 때마침 개울 건너 천태산(天台山)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서 공민왕은 깜짝놀라 좌우를 돌아 보았다. 이 부근에 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종소리가 아름다운 절인 줄은 몰랐구나. 왕비와 왕자 그리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공민왕의 눈치만을 살폈다. 대신 한 사람이 설명하기를 「저 절은 일찍이 신라 때 원각국사(圓覺國師)께서 세운 절로써 처음에는 만월사(滿月寺)라 하였다가 문종대왕(文宗大王)당시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주지로 온 뒤로 국청사(國淸寺)라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공민왕은 눈이 번쩍 띄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아들로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분이 아닌가 의천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나라와 백성이 평안함)을 빌어보고 싶었다. 공민왕의 뜻을 알아채린 대신들은 산에 올라 칡넝쿨을 걷어오라 일렀다. 그들은 수행원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걷어 온 칡넝쿨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이를테면 구름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완성된 다리를 밟고 국청사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왕비 왕자 그리고 대신을 데리고 공민왕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 그래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나라안 백성들의 편안함을 빌었다하여 편안할 영(寧)자 나라 국(國)자를 써서 국녕사(寧國寺)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공민왕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천성장마(天聖長馬)란?
천성장마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충남 금산군 제원면과 경계를 이루는 천태산(天台山, 714.7m)에서 시작하여 서북방향으로 대성산(大聖山, 704.8m), 매봉, 장령산(長靈山, 654.5m), 마성산(馬城山, 497m), 용봉을 거쳐 옥천읍 삼성산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작은 산맥으로서 그 중 주요 산인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의 이름을 조합하여 산악인들 사이에 불려지고 있다. 영동에서 활동하는 서용희(徐龍喜) 법무사가 개척한 종주산행길이다. 도상거리 26km, 실거리 30km로 순수 산행에만 13~15시간이 소요된다.
♤ 천성장마 개념도
지맥의 오른쪽이 영동군에서 옥천군으로 바뀌며 충남 금산군과 충북 옥천군의 경계를 따릅니다.
♤ 투구봉(鬪具峰, 687.1m)/ 도계/ 삼군봉(충남 금산군 군북면, 충북 영동군 양산면 → 옥천군 이원면)
지맥의 오른쪽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서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로 바뀌는 도계이자 삼군봉이다. 정상에는 여영대선배님의 산패와 조그만 돌멩이에 누군가가 투구봉이라 적어놓았는데 지도에는 지명이 없다. 봉우리 모양이 투구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조금 전에 지나온 천태산 갈림봉(701m봉) 이름도 지도상 지명이 없었는데 감투봉이라 했고 이곳 역시 지명이 없는 무명봉인데 투구봉이라고 했다.
팔음지맥 끄트머리에서도 이원면을 바라보며 내려섭니다. 이원면은 팔음지맥과 장령지맥을 같이 품고 있군요.
♤ 옥천군 이원면(伊院面)
이원면은 신라때는 소리산현·이산현·관성군에 속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성산부·옥주에 속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이남면·이내면으로 분할되었다가, 1739년(영조 15)에 8개리를 관할하였다. 1929년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북쪽은 옥천읍, 동쪽과 남쪽은 영동군 심천면· 양산면, 서쪽은 충남 금산군 군북면과 접한다. 대체로 면의 경계지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옥천군에서 서대산(西臺山, 905m)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대성산(大聖山, 705m)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서쪽으로 장령산(壯靈山)과 매봉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 마니산(摩尼山, 639m)·월이산(月伊山, 551m)이 V자형을 이루며 솟아 있으며, 북쪽에는 도덕봉(道德峰, 407m)·철봉산(鐵峰山, 450m)이 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옥천읍과 대전광역시에 인접해 있어 근교농업인 포도·배·복숭아 등의 과일 재배가 활발한데, 특히 포도는 맛이 뛰어나 전국에서 '이원포도'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묘목 산지로, 1939년 복숭아나무 묘목을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배, 감, 사과나무, ·매화나무·밤나무·포도나무·호두.배롱나무등 우리나라 각종 묘목의 70%가 이곳에서 유통된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120), 옥천 경현당(景賢堂:충북유형문화재 158),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忠毅公金文起遺墟碑:충북기념물 44), 옥천 송우암 유허비(宋尤庵遺墟碑:충북기념물 45), 창주서원 묘정비(滄州書院廟庭碑:충북기념물 105), 옥천 이원리 봉수지(伊院里烽燧址), 이원리 성지(城址), 관사지(關寺址), 용문영당(龍門影堂) 등이 있고, 그밖에 금강(錦江) 상류에 서식하는 금강의 어름치(천연기념물 238)가 있다.
♤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開心里)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는 마을 뒤로 천태산이 있으며, 앞으로는 이원천이 흘러나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개심골(개심곡), 노루목(장항), 북개리, 살구정이(행정), 새말(신촌), 새터(신기), 장왜(남개리, 장화) 등이 있는데 개심골은 마을에 개심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노루목은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살구정이는 마을에 살구나무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왜는 새김리의 중심 마을로, 새말은 장왜 서북쪽에, 새터는 서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명소로는 개심저수지가 있다.
등로 오른쪽으로 개심저수지 너머 어류산이 보입니다.
♤ 어류산(御留山, 482.4m)
충북 영동군의 심천면 기호리, 금정리, 마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 지리지와 고지도에 어리산, 어니산, 어유산, 어류산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변천해 왔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어류산(御留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명 유래에 대해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원래는 어리산이었다가, 어유산 혹은 어류산 등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는 고려시대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적 전설이 강하게 작용하여 어류산(御留山)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리산(於里山)은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여지도서』에는 "어리산(於里山)은 현 서쪽 14리에 있다. 전라도 덕유산으로부터 와서 어리산 주맥이 된다."라는 기사가 있다.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어리산(於里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872년지방지도』에는 '어니산(於尼山)'으로, 조선지지자료에는 어유산(御遊山) 또는 어류산(御留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 투구봉/ 마니분맥 분기점/ 월이산능선
능선으로 오르며 투구봉 오른쪽으로 마니분맥 등로가 빠져 나간다. 마니분맥이란 충남북 도계에서 충북의 영동군과 옥천군계를 따라 마니산(摩尼山, 639,8m)과 월이산(551.4m)을 거쳐 군계를 버리고 옥천군 이원면으로 들어간 산줄기를 따라 작은동산(126.0m)과 뒷묘산(126.0m)을 거쳐 평촌 두물머리(금강&이원천)에서 끝맺음을 하는 약 25km의 짧은 산줄기로 산세가 수려하지만 주변의 명산(장령산 654,5m, 천태산 714,7m, 서대산 903,7m)들에 가려 꼭꼭 숨어있는 산들이다.
♤ 마니분맥 개념도
장령지맥의 최고봉이지만 이름없이 낙엽에 덮힌 무명봉입니다.
♤ 715.5m봉/ 삼리봉(충북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충남 금산군 군북면 산안리 → 상곡리)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와 인삼대장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의 왼쪽이 군북면 산안리에서 상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서대산갈림봉에서 남진하여 방화봉으로 향하며 군북면 산안리를 만나 복주머니처럼 생긴 산안리의 서남동쪽 외곽 경계를 감싸고 돌며 715.5m봉에 이르는 동안 순서대로 충남 군북면 조정리, 두두리, 제원면 동곡리, 길곡리, 신안리,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로 바뀌었다. 여기부터 옥천군으로 진입하는 574m봉/ 돌메기산까지는 군북면 상곡리의 경계이자 충남북 도계를 따른다.
♤ 충남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上谷里)
상곡리는 군북면 최북단에 위치한 오지마을로 긴 골짜기의 위쪽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상곡리 또는 안골내미라 부른다. 동서남북이 완전히 산악지대로 조성되어 그 안쪽으로 분지처럼 아늑한 곳에 부락이 형성된 상곡리는 보광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군도와 남쪽에서 산안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군도가 큰 길이다. 동쪽으로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옥천군 군서면 금산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보광리와, 그리고 남쪽으로는 산안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매봉을 비롯하여 산 높이 500m가 넘는 산의 준령으로 높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서대산의 맥에서 이어지는 산악지애로 첩첩산중을 이룬 그 사이로 여러 산의 맥에서 흐르는 냇물이 합하여 하나의 큰 냇물 상곡천이 흐르는데 그 주변에 이룩된 부락이 상곡리다. 산악지대에 자리한 지역으로서는 교통이 편리한 편에 속하며, 옛날에는 동쪽으로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으로 넘어다니는 고개가 유일한 길이다. 이 고개는 지네가 많아서 지네재로 불린다. 남쪽으로는 죽말에서 산안리 자진배미로 넘어다니는 느지목재와 북쪽으로는 옥천군 옥천읍으로 넘어다니는 사목이재가 큰 고을로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였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긴 골짜기 위가 되므로 웃골 또는 상곡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곡리를 병합하여 상곡리라 하였다. 이에 속한 자연마을로는 구석말, 돌안말, 배나뭇들(李木洞), 복거리9보거리), 안골내미, 양지말, 죽말(竹村), 지네말(眞義), 하곡남 등이 있다.
♤ 601.6m봉
안부에서 올라서니 대성산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사면길이 보이고 많은 선답자들이 사면길로 갔는지 시그널이 많이 걸려 있으나 직진으로 올라가면 족보가 있는 601.6m봉이 있다. 무심코 편안한 길을 택하면 돌탑이 있는 601.6m봉을 놓치게 된다.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좌틀로 내려서면 조금 전에 헤어진 사면길과 다시 만난다.
♤ 송전탑
송전탑에서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개심저수지 너머로 월이산으로 이어지는 마니분맥 능선이 보인다.
♤ 645.8m봉/ 도계/ 군면계/ 삼리봉(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 의평리)
대성산기도원 갈림길을 지나 빡시게 오른 봉우리이다. 여영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잠시 후에 가야할 대성산이 보인다.
♤ 옥천군 이원면 의평리(義坪里)
옥천군 이원면 의평리는 대성산이 마을을 병풍같이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 이원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건넛들(의평), 구억담, 아래말 등이 있으며, 건넛들은 장항리 앞 들 건너편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의평이라고도 하며 마을 이름은 건넛들(의평)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이 마을에 김일려 부자의 효자문이 있으므로 효자와 의로운 사람이 많아지라는 뜻에서 의 자와 평 자를 넣어 의평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 꼬부랑재(625m)
충남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와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큰장화골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원로터리클럽에서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실재 꼬부랑재는 지맥의 오른쪽에 있는 개심리 큰장화골과 의평리 덕전골을 넘나드는 고개로 여기서부터 3km거리에 있다. 즉, 여기는 꼬부랑재를 통해 의평리로 가는 하산로 갈림길 지점이다. 고개길이 꼬불꼬불해서 붙은 지명인듯 하다.
♤ 대성산갈림길
이원로타리클럽에서 세운 ‘대성산 정상 705m’라는 이정표와 대성산 등산로, 메모장 박스가 있다. 지맥은 우틀이나 실제 대성산 정상은 이곳에서 직진으로 눈에 보이는 거리인 20여m 더 가야 있고 맥길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장령산보다 높지만 지맥의 이름이 되지 못했습니다. 최고봉이지만 이름없는 무명봉도 있고 최고봉이 꼭 지맥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지명도와 대표성, 중첩 회피 등 여러가지를 고려하지 않았을까요.
♤ 대성산(大聖山, 705.9m)/ 도계(금산군 군북면 - 옥천군 이원면)/ 3등삼각점(이원 301/ 1980 재설)
충남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의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정상석과 3등삼각점이 있다. 대성산에는 옛날부터 큰 성현이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대성산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학자와 효자가 많이 나와 마을 이름을 의평리라 하고 대성산 최고봉을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른다고 하며 충남북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옥천군에서는 서대산 다음으로 두번째 높은 산이다. 대성산은 이원면 분지의 젖줄을 대는 모산으로 북으로는 장령산, 남으로 천태산과 이어지고 주능선 북쪽과 동쪽은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서쪽은 충남 금산군 군북면과 접하고 있으며 대성산 동쪽으로 패여 내려간 계곡으로는 큰폭포와 작은폭포가 기암괴봉과 어우러져 여름이면 시원스런 경치를 자랑한다. 작은폭포 앞에는 주변의 풍광을 시로 지어 새겨놓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정상의 오른쪽으로 오롯이 솟아있는 것이 국사봉인데 옛날에는 이 봉우리에 쇠말(철마)이 있었고 윤정리 마을 사람들이 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성산 정상은 사방이 숲에 가려 있어 조망이 어렵다. 북서쪽으로는 서대산과 장령산, 고리산(환산)이 옥천읍과 함께 펼쳐지고 북동쪽으로는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이원면 소재지가 멀리 속리산, 구병산 등과 함께 조망된다. 대성산 기슭에는 경관이 아주 뛰어난 계곡이 네개가 있는데 그 중에 세번째 폭포에는 50cm의 높이로 오언절구의 漢詩가 새겨져 있는데 폭포를 예찬하기 위해 어느 선비가 비를 세웠다고 하며 비석에 새겨진 글귀의 영향으로 산이름을 데구름, 데구리 또는 덕운봉(596.3m)이라고도 부른다.
♤ 641.5m봉/ 도군면계/ 삼리봉(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옥천군 이원면 의평리 → 강청리)
641.5m봉 정상에는 커다란 참호가 있다. 내려서면 키작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폐헬기장이 나온다.
♤ 586.1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좌틀로 내려선다. 가야할 방향의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 581m봉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할 매봉이 보인다. 왼쪽으로 서대산도 전면으로 보이는데 카메라로 찍어 담기는 어렵다.
♤ 매봉(鷹峰, 599.5m)/ 도군면리계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충남 금산면 군북면 상곡리와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매봉이란 지명은 어느 방향에서 보았을 때 봉우리가 매의 부리처럼 뾰족하다거나 암봉의 경우에 많이 붙여진다.
준희선생님 지나실 때는 여기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물을 가져오셨다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현역 때 누구보다 더 물냄새를 잘 맡는 귀신이었다며 자랑스레 말씀하시는데 그 이면을 조금만 헤아려보면 항상 솔선하여 힘들고 어려운 일에 앞장서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셨다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자 삶의 징표였습니다.
♤ 지내재(535m)
준희선생님 "여기가 지내재입니다" 산패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충남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진의골과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동림골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진니말, 진의(眞義)말, 지네말이라 부르는데 유래는 마을 동쪽에는 지난날 상곡리 사람들이 충북 이원으로 장을 보러다니던 예전에 지네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 밑에 동네가 입지하므로 지니말, 변하여 지네말, 진의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풍수에서 마을 뒷산의 형국이 지네혈에 비정되기 때문에 지네말, 변하여 지니말, 진의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창의단 소속 독립운동가 전좌한·김응선 의사 등이 1926년 1월31일에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만들어 시험했던 곳이라고 한다.
♤ 622.4m봉/ 도군면계/ 삼리봉(군북면 상곡리, 이원면 강청리 → 장찬리)
암릉구간을 지나 622.4m봉에 올라선다. 능선을 따라가며 장찬저수지 뒤로 옥천읍내와 도덕봉이 좌우로 보이고, 고속철로가 지나는 이원리도 보인다.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長贊里)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는 장령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아 산수가 뛰어나며 마을 앞으로는 군내 최대의 장찬저수지가 있다. 장찬 저수지 건설로 인해 기존의 마을이 수몰되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적다. 자연마을로는 장찬골(장찬곡) 등이 있는데 마을 골짜기가 장차게 길므로 장찬골 또는 장찬곡이라 이름 붙었는데 장찬리 지명의 유래가 되었고 문화유적으로는 800여년 대를 이어 백자를 구워냈다고 전해지는 옹기터가 있다.
♤ 금산고개(495m)
충남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인내골이 마을에서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 장찬저수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양쪽으로 뚜렷한 길이 있다. 맨발대선배님의 금산고개 안내 표지판이 있다.
♤ 566.4m봉
노간주나무에 여영대선배님의 산패와 표지기들이 다량 매달려 있다. 앙증맞은 돌탑 2개가 있는 566.4m봉에서 좌틀로 맥길을 이어간다. 잠시 후에 가야할 돌메기산과 장령산이 보이고, 전망 좋은 암봉에 서면 지맥 왼쪽으로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마을이 보인다. 암봉에서 군북면 상곡리 너머로는 지나온 신안고개가 희미하게 보이고 지난 구간의 국사봉-비들목재-방화봉-서대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대산을 빙 둘러서 한참을 돌아온 셈이다. 등로 오른쪽으로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 마을이 바라다 보인다.
장찬저수지 뒷쪽으로 도덕봉 능선이 보이고, 지맥이 완전하게 옥천군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573.4m봉/ 돌메기산/ 도군계/ 삼면봉(옥천 이원면, 금산군 군북면 → 옥천 군서면)/ 4등삼각점(이원 409/ 1980 재설)
준희선생님 산패와 깨진 삼각점이 있고, 서레와님은 돌메기산이라 했다. 이곳부터는 멀리 분기점부터 같이해 온 금산군과 작별하고, 가까이는 충남북 도계와 헤어진다. 지맥의 왼쪽이 옥천군 군서면 금산리로 바뀌며 좌우가 온전히 충북 옥천군 내안으로 들어서서 군서면과 이원면의 경계를 따른다. 우틀로 꺽어져 장령산 방향으로 내려서며 안부의 휴양림갈림길 이정표를 지난다.
옥천군 군서면은 식장지맥에 명지봉(404.2m)에서 대전광역시와 만나 식장산까지 도계를 함께하기도 합니다.
♤ 옥천군 군서면(郡西面)
군서면은 옥천군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은 옥천읍에, 서는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동에, 남은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북은 군북면에 접하여 있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서일소면이라 하여 상동, 중동, 하동, 월곡, 군전, 오동, 서정, 옥곤, 각신리 등 9개 리를 관할하다, 군서이소면에 증산, 금천, 곡촌, 동산, 평촌, 행정, 사기, 상보, 지경, 상은, 하은, 사음, 백양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일소면과 이소면이 병합되면서 군북면 백석리와, 전북 진산군 동이면 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군서면이라 하여 상중, 하동, 월전, 오동, 서정, 옥각, 금산, 동평, 사정, 상지, 은행, 사양리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9년 8월13일 옥천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군서면의 서정, 옥각리를 옥천읍으로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쪽에는 장령산(654.5m)의 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산맥을 형성하고 서쪽은 식장산(598m)의 줄기가 대전시와 경계를 이루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쌓여 있다. 대전시와 접하고 있어 근교농업이 발달되었고 서화천이 면의 중심부를 흐르면서 주변에 넓은 밭농사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깻잎과 포도, 복숭아, 딸기가 특산물이다. 37번 국도가 면을 관통하며 사적지로는 신라와 전투에서 전사한 백제성왕사절지가 있다. 면 내 장령산은 찾는 등산객이 많고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 [관산성 전투]성왕의 원혼이 구천을 떠 돌게 한, 비극의 현장 구천 (궂은 벼루 : 굽은 벼랑)
☞ https://cafe.daum.net/grandeurlove/qyo6/36?svc=cafeapi
휴양소에서 모녀가 올라오셨네요. 장령을 하며 처음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정상에서 내려갈 예정이시라고...
♤ 휴양림 관리사무소 갈림길
돌메기산에서 5분 정도 내려선 지점이다. 장령산 휴양림을 말하는데 장령산 자연휴양림은 옥천군청에서 관리하며 1994년 6월에 개장하여 수용인원은 최대 2,500명이며, 금천계곡이 휴양림을 가로지르고 금천천에는 어름치(천연기념물 238호)가 서식한다.
♤ 571.4m봉
헬기장을 지나 장령산 직전에 오른 봉우리이다. 사면길이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왼쪽으로 장령산 휴양림으로 내려서는 뚜렷한 등로가 있다.
♤ 장령산(長靈山, 654.5m)
장령산은 충북 옥천군 옥천읍과 군서면, 이원면 접경에 있다. 본래는 장용산(壯龍山)으로 불렀다. 1995년 5월 군의 요청으로 중앙지명위원회가 장용산(壯龍山)을 장령산으로 고치는 지명 개정안을 심의·의결해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제출했고 이 개정안이 1999년 5월 1일 받아들여져 중앙지명위원회가 장령산(長靈山)으로 지명을 개정 고시했다. 장령산(長靈山)은 불가(佛家)에서는 ‘신령스러운 산’이란 뜻이다. 정상에는 정상석이 두개나 서있고 구조이정목과 이정표, 장령산 등산안내도, 넓은 공터에 쉼터 시설이 있다. 남서쪽으로 충남이 최고봉 서대산(903.7m)과 이웃하며 사목재를 경계로 북쪽의 마성산과 마주하고, 산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능선이 완만하게 마성산과 용봉, 삼성산으로 이어져 동쪽이 옥천분지를 감싸고 있으며 서쪽 금산리 방면은 1991년부터 각종 편의시설과 주차장 등이 개발되어 휴양림으로 조성되었다. 북쪽 기슭에는 일출과 운해로 유명한 법주사의 말사인 천년고찰 용암사가 있는데 북쪽 옥천 방향은 골짜기와 비탈이 많아 서쪽 금산리 방면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지만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장령산에서 북쪽 마성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맥은 옥천읍의 서벽을 이루는데, 이 지맥의 거의 모든 봉우리가 보루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령지맥은 동쪽 도덕봉을 거쳐 옥천읍의 동벽을 이루지만 그 마루금은 들판에 구릉으로 존재하고 있어 뚜렷하지 않고 희미하게 그리다가 옥천읍 교동리 마성산에서 다시 뚜렷해진다. 산 정상에는 육각정자로 만든 2층 전망대(장령정)가 있어 이곳에 서면 옥천읍 전경과 금천리를 돌아 흐르는 금천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천천에는 천연기념물 238호인 어름치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울창하고 숲 사이로 왕관바위와 포옹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장령산 용암사에는 마의태자(麻衣太子. 생몰년 미상)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암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바위를 파괴하는 바람에 그 흔적은 찾기 어렵다. 마의태자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태자이다.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후대에 마의를 입고 살았다해 마의태자라 부른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용바위에서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했던 곳이다. 용암사의 마애불은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했다고하여 마의태자 상이라고도 한다.
♤ 633.7m봉/ 삼읍면봉(이원면 장찬리, 군서면 금산리 → 옥천읍 가풍리)
지맥의 왼쪽이 군서면 금산리에서 옥천읍 가풍리로 바뀌는 장령산의 실질적인 삼읍면봉이다. 직진으로는 장령산 북쪽 기슭에 있는 용암사로 가는 천성장마 종주길이고 장령지맥길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찬리 고래마을쪽 우틀로 꺽어져 도덕봉까지 이원면과 옥천읍의 경계를 따른다. 장찬저수지 모양이 위에서 보면 고래 모양이라고 고래마을이다.
장령정에서 직진하여 용암사를 다녀오기에는 넘 먼 거리네요. 왕복 약 5km로 2시간 잡아야 합니다. 용암사에서 이곳 장령정 구간이 일출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관바위는 천태산에 있는데 여기에도 왕관바위가 있다하고..
♤ 용암사(龍岩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되었다는 고찰이다. 창건주는 천축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이다. 절 이름은 경내에 있는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용바위에서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으며 사찰은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는 설이 있어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한 채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파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건 이후 중수·중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절의 역사를 논하는 것도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과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는 법통이 이어져왔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 옥천군 옥천읍(沃川邑)
삼국시기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양국의 싸움이 치열할 때는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던 옥천은 주위에 수많은 산성이 분포해 삼국시기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내물왕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해를 도모했다. 양국의 관계가 긴밀해졌다고는 하나 완전한 동맹 관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항했고, 특히 371년 평양성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신라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동맹을 맺은 때는 433년으로 신라 눌지왕 17년이며, 백제 비유왕 7년이다. 이들의 동맹은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 장수왕의 남방 경략에 대항하려는 포석이었다. 장수왕은 79년이라는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부왕인 광개토태왕의 위업을 계승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장수왕은 먼저 백제를 침략해 한성을 점령하고 아차산성에서 개로왕을 죽였다. 이에 큰 타격을 받은 백제는 개로왕의 뒤를 이어 문주왕이 즉위한 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에 위협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라에도 위협이 되었으므로 두 나라는 한반도 안에서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는 견제세력권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433년 백제가 먼저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가 이에 응했다. 백제는 좋은 말과 흰 매를 보냈고, 신라는 이에 답해 황금과 구슬을 보내면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 갔다. 백제의 동성왕은 493년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 서로 국혼을 맺는 것을 계기로 고구려에 맞선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고구려에 빼앗긴 땅의 회복에 힘썼다. 그 결과 백제는 가야까지 끌어들여 성왕 29년(551) 마침내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했다. 그러나 중국과 직접적 교통로와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 확보를 바라던 신라 진흥왕이 2년 후인 553년 7월 군사를 돌이켜 백제의 수복지역인 한강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동맹 관계는 깨져버렸다. 성왕 부자는 비전파(非戰派) 귀족들의 반대에도 554년 신라정벌군을 일으켰다. “과인은 매양 너의 나라 배신이 골수에 사무쳤다”는 말처럼 신라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의 공격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우세한 듯했지만, 결국 성왕은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양국 사이의 동맹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그 뒤 백제와 신라는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100여 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삼국의 각축이 처절했던 산성의 고장 옥천(沃川)지역은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고시산군으로 불렸으나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상주의 관성군으로 재편되어 이산현(利山縣: 지금의 이원)과 현진현(縣眞縣: 지금의 안내)을 영현으로 두었다. 고려 현종 때는 경산부(京山府=星州)에 속했다. 이후 충선왕 때 지옥주사로 승격시켜 경산부에 속했던 이산·안읍·양산의 3현을 관리토록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옥주를 거쳐 조선시대에 옥천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옥천이라는 이름은 강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주가 옥천으로 변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인데, 계수관 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만 주(州)를 사용하도록 하고 기타 주(州)자가 들어가는 다른 도시는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변경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 속하던 옥주는 태종의 명으로 보은, 황간, 영동, 청산과 함께 충청도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충청도에는 주요 거점도시로 충주, 청주, 홍주, 공주가 있어 그 이름을 유지했고, 옥주는 옥천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옥천향교, 청산향교와 같은 관아건물과 백촌 김문기의 유허(遺墟), 우암 송시열 유허(遺墟)를 비롯하여 창주서원묘정비(創洲書院廟庭碑), 이지당(二止堂), 양신정(養神亭), 사마소(司馬所) 등과 같은 유학 관련 건조물들이 지금도 옥천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장령산과 도덕봉 아래로 ktx터널이 지나는데, 장령정에 누워있을 때부터 도덕봉에서 벌목지로 내려서기까지 굉음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소울음소리도 들리던데 어찌 소를 키우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 옥천읍 가풍리(加豊里)
가풍리라 부르게 된 것은 가척동리의 가(加) 자와 지풍리(地豊里)의 풍(豊) 자를 한 자씩 취하여 그리한 것이다. 가척동리는 가자골의 옛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발음대로 더할 가, 자 척, 마을 동 즉, 가척동리가 되었다. 옛 말의 가작골이 가자골로 음운변화가 된 것이다. 다만 마을 뒤 송씨 문중 묘비에 가재동(佳才洞)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름다운 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출발했다는 설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주민들 대다수는 마을 골짜기에서 가재가 많이 잡혀 가재골이라고 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명 유래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아직도 가재가 잡힐 정도로 맑고 수려한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양지동은 가척 밑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풍(음지촌)은 논이 기름지고 물이 좋아 풍년이 드는 땅이라 하여 지풍이라 하였다. 가풍리 서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로 풍년이 지는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 원각은 신원리의 원 자와 각리동리의 각 자를 한 자씩 합하여 원각이라 하였다. 가풍리 마을의 행정마을 중 하나인 원각리와 서대리 사이인 신원리에는 옛 관리들이 여행할 때 숙소로 쓰였던 금천원이 있어 이 곳이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 가재고개
통나무집 카페가 있는 돌탑공원 초입의 옴팍한 곳이 지형도상의 가재고개이다. 돌탑공원으로 올라오는 도로 아랫쪽이 옥천읍 가풍리 가재마을인데 아마도 가재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라 가재고개라 불렀던 모양이다.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에 있는 가재마을은 가척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척마을은 근처의 산형이 가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찬리 저수지로 넘나드는 안부로 내려서면 가풍리 웃가풍 솔밭마을입니다.
♤ 가풍리 지풍마을 안부
가풍리 지풍마을 윗쪽에 옴팍한 안부이다. 지풍(地豊) 마을은 논이 기름지고 물이 좋아 풍년이 드는 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가풍리(加豊里)는 장령산, 도덕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골짜기가 많다. 근처에 삼청저수지, 장찬저수지가 있는 농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가척(가재골,가재동), 뒹이(두왕리), 양지동, 원각 등이 있으며, 가풍리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드는 금구천(金龜川) 발원지가 있고 수령 200년이 넘어 옥천군 보호수로 지정된 가풍리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 275.6m봉
선답자들의 띠지와 산패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으로 밀양박씨 묘지군을 지나 내려서는 고개입니다.
♤ 가풍고개(加豊峴)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 마을에서 이원면 장찬리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오른쪽 장찬리 쪽에는 묘지가 보이고 장찬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며, 왼쪽 가풍리 지풍마을 쪽은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키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는 원래 가재골에서 시작되었다 전하며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마을을 형성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진주하씨가 가장 먼저 가풍리에 정착했고 그 후에 들어온 청주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뿌리를 내렸으며 지금도 가풍리에는 전 가구의 30% 가량이 한씨이다. 처음 정착했던 하씨는 지금 거의 떠나고 단 3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던 가재골은 장령산 줄기 아래에 형성된 골짜기로 차차로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확산되었다 하며 가재골에서는 지금도 가재가 잡힐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임을 자랑한다. 본래 가재골이란 지명은 옛부터 신령스런 산이라고 믿어왔던 장령산에서 뻗어나온 작은 솔티의 산줄기 형상이 가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며 가재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후에 가척으로 변천되었다.
♤ 299.3m봉
장찬저수지와 지나왔던 마루금이 한눈에 보인다. 맥길은 좌틀로 이어져 이름없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간다.
♤ 325m봉
예전에 묘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장한 묘터의 흔적이 보인다. 숲사이로 장찬저수지와 지나온 지맥이 보인다.
♤ 330m봉
블록으로 쌓은 벙커가 있는 330m봉에서 직진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전망 좋은 마지막 봉우리에서 장찬저수지와 그 뒤로 지나온 대성산 매봉 장령산으로 이어지는 지맥능선을 다시한번 살피고 솔치로 내려선다.
금산과 무주를 잇는 성치지맥의 솔치재를 여기로 착각하고 빨치산의 이력을 찾았으니 나올리 없었지요.^^ 개가 짖는 건물이 있긴한데 물을 구할 수 있을지는 직접 확인하니 불가로 나옵니다. 서울 창1동에 거주하시는 산주님이 격주로 내려오신다는데 비어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 솔치굴재/ 솔치고개(松峙, 185.3m)/ 우치(牛峙)
솔치굴재 아래로 경부고속철 선로가 지난다.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와 이원면 장찬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큰 길이었다. 이원면 우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해서 우치라고도 했다. 특히 솔티에는 예부터 도적들이 많아 ‘사지고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나그네들이 두려워했던 고개이며 대낮에도 솔숲이 우거져 어둠침침 했고 도적들이 은신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마을 노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이 고개 부근에서는 사람이 은신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나오고, 먹고 있기도 한데 도둑샘이라 불리는 이곳은 그 옛날 도둑들이 은바가지로 물을 떠먹다가 빠뜨려 지금도 쇳소리가 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고개 아래로는 경부선 철로가 통과하는 터널이 상하행으로 두개가 있고 폐터널이 하나 있는데 그 기찻굴을 이용해 마을의 어른들은 장을 보러 이원을 다녀오기도 한 곳으로 최근에는 버섯을 재배하다 그만두어 그냥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고개를 가로질러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른다.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약 30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 삼각점봉
솔치재에서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선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대부분이 삼각점이라 기록을 했는데 자세히 보니 측량을 하고 박아둔 지적도근점(보조삼각점)인듯 하다.
산성지에 걸맞게 조망이 좋습니다. 환산(고리봉, 578.8m)과 탑산(561m) 그리고 장령 마지막에 제일 고되다는 마성산을 조망해 봅니다. 여기부터는 나븐티재 직전 202m봉까지 대체로 옥천읍과 동이면의 경계를 따르지만 중간에 퇴미산에서 잠시 옥천읍내로 들어가 돌남산과 자고치를 지나 다시 읍면계로 나옵니다.
♤ 도덕봉(道德峰, 407.3m)/ 삼읍면봉(옥천읍 가풍리, 이원면 장찬리 → 동이면 세산리)/ 방송송신탑/ 무인산불감시카메라/ 3등삼각점(보은 323/ )
4번국도가 직선으로 향하는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의 경계가 되는 산이 도덕봉이다. 도덕봉 남서 아래 고개가 솔치인데, 고대에는 이 길로 해서 영동으로 갔다. 그런데 솔치 주변에 도적떼가 극성을 부려 지금의 4번국도가 나있는 구집티로 우회해서 이원면과 영동으로 갔다고 한다. 도덕산이란 지명은 전국적으로 다수 분포하는 산 지명으로 조선시대 다수 생성된 유교적인 지명이다. 이곳 도덕봉은 조선시대 고문헌이나 고지도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지지자료』에 "도덕봉 ·도덕곡(道德谷)은 이남이 소면 남상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도덕봉과 함께 산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도덕곡도 함께 실려 있다. 최근 자료인 한국지명총람에도 도덕봉이 소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덕봉은 도적들이 은거하고 있다 해서 도적봉이라고 했으나 이미지가 좋지 않아 도덕봉이라고 고쳤고, 정상은 성터가 있다. 전국에는 도덕봉이 많은데 대부분 산적들이 출몰하던 도둑봉에서 유래한 경우가 꽤 있다.
도덕봉 정상석과 삼각점, 도덕봉산성 표지석이 한쪽에 있습니다.
♤ 도덕봉산성
도덕봉산성지는 옥천읍과 이원면을 가르는 산줄기 중 경부선철로가 터널을 지나는 지점의 동북쪽 방향에 있는 산봉우리에 있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부는 석축을 하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석축산성이나 지금은 모두 허물어져 산성인지의 구분도 어려우나 잡목으로 둘러쌓인 성의 서쪽 경사면 2-3m 아래쪽에 일부나마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또한 성에서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도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그 옛날 성터임을 알게 한다. 성의 북쪽 사면은 전혀 성을 쌓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남동쪽 사면도 윤곽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옥천읍 전체와 관산성과 용봉산성지가 잘 보이며 저 멀리는 환산이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현리산성지가 가깝게 보이며 조금 멀리 월이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마니산성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금강 너머 멀리 지탄리산성지가 보인다. 도덕봉산성지는 옥천읍과 이원면을 연결하는 솔티고개(경부선철로가 지나는 지점)를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된 망루형태의 보루이며 축성국가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성의 주요 출입로는 북쪽 능선과 가까이 있는 세산리 용암말 부락으로 짐작된다. 도덕봉산성지는 옥천군지 등 이전의 산성자료에는 물론 없으며 인근의 주민도 전혀 알지 못하는 성터이며 최근 조사 기간 중 성터(망루)로서는 이상적인 위치라 조사하였으며 지탄리산성지와 함께 이원면 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산성지이다. 무인산불감시카메라 휀스를 우회하면서 걷는데 오른쪽으로 큰물산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산줄기가 보이고 등로가 잘 나있어 딱 알바하기 좋은 곳이니 독도에 주의해야 할 구간으로 지맥길은 정상석 뒷쪽으로 내려선다.
동이면은 금적지맥의 합수점인 합금리와도 경계를 나누며, 팔음지맥의 마지막인 합수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옥천군 동이면(東二面)
동이면은 옥천군 동남쪽 약 6㎞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청성면, 서쪽은 옥천읍, 남은 이원면, 북은 안남면에 접하고 있다. 면의 동쪽으로 금강이 심하게 곡류하는 협곡을 이루면서 독특한 풍광을 연출하는 지역이다. 면의 서쪽으로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밭농사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옥천군 중앙부에 위치하는 면으로 삼국시대 때는 고시산군에 속했고 고려시대는 옥주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태종 13) 옥천군에 속하였다. 동이면은 1739년 영조 15년에 발간한 여지도서의 기록에 보면 군동면과 이남면의 일부가 현재 동이면이 된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군동면을 동면이라 하고 이남면이 이남일소면과 이남이소면으로 나누어질 때 이소면의 일부에 속해 있었다. 1914년 4월 1일 동면과 이남이소면의 평산, 세산, 적하리만을 합병하여 동면의 “동(東)” 자와 이소면의 “이(二)” 자를 따서 동이면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원면 우산리를 동이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4번국도, 501번 지방도가 관통하는 곳으로 국내유일의 고속도로 상.하행선과 금강이 함께 어우러진 금강휴게소가 위치하고 있다. 대전.청주권의 식수원인 대청댐 상류에 자리잡은 청정지역으로서 반딧불이의 복원을 위한 습지(안터마을 반딧불이 생태체험장)와 생태학습장을 비롯한, 『정지용생가~육영수생가~장계관광지~청마리 금강변~금강휴게소』를 잇는 총연장 50km의 자전거 향수 100리 길이 유명세를 타며 가족단위 여행과 자전거 여행의 대표지로 각광받고 있다.
♤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細山里)
세산리는 이남면(伊南面) 상리(上里)라 불렀으며 1910년 이남이소면(伊南二所面)에 속했다가 1914년 4월 1일 동이면(東二面)에 속하게 되었다. 세산리 동이농공단지에는 주식회사 한빛을 비롯한 27개의 기업체가 입주해 있다. 세산리의 유래는 원래 마을 근방이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가너메, 가느뫼라 부르고 있었는데 한자화 할 때 세산(細山)이라 쓰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돌꽂이, 천수골, 용암말, 탁운, 오가골이 있다. 돌꽂이는 마을옆에 곶감꽂이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경부선철도 개설당시 모두 파괴하여 침목받침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자화 할 때 “돌꽃”이라는 뜻으로 석화(石花)라 하였는데 돌이 있는 곳 석처(石處)나 돌곶이 석곶(石串)이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석화는 풍천임씨(豊川任氏) 집성촌으로 풍천임씨 11세조이신 한성판윤을 지낸 임경윤공이 낙향한 이후 20여대를 이어 살고 있다. 주변에는 두골배기, 앞산, 구둠티, 농공단지가 형성된 미내, 작은방가, 큰방가, 지르리들, 장구먹이, 너덜이, 앞들, 구리골, 흔두골, 사근다리, 못골 등이 있다. 용암마을은 큰 느티나무가 있어 괴촌(槐村)이라 부르다가 용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암(龍岩)말 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아랫마을이 탁운(卓雲)이기 때문에 두 마을 합하여 용운(龍雲)이라 부른다. 용운마을은 포도의 최초 재배지이며 시설포도 재배법을 처음으로 도입, 기술보급에 이바지 한 공이 큰 마을이다. 큰길가에 마을 자랑비가 있다. 주변에는 황골, 넉골, 행상바위, 중간말, 웃말, 건너말, 이원 건진리로 넘어 다니던 가운데재, 응골, 오가골이 있고, 탁운에는 서당말, 언덕말, 아랫말이 있고, 마을 뒤로 도덕봉, 밀버봉, 명타골, 배남재, 깐치날, 돌림병에 죽어간 어린 시신들의 덕다리가 있던 송장날, 공동지, 오솔이골, 참성골이 있다. 천수골은 약 450여 년 전에 여흥민씨 18세조인 민성근(閔聖近)공이 입향한 후 누대를 거쳐 민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 여흥민씨 세거비(麗興閔氏 世居碑)가 있다. 주변에 가지동, 길막, 가릅재, 뒷산, 뒷산너머 못골, 수방골, 구리골, 절골, 황새나들, 복골이, 주막거리, 장판, 논소골, 매봉재, 진등날, 검등메지 등이 있다. 성골(서원골)에는 1571년 서희여가 세운 쌍봉서원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 도덕봉 내림 갈림길
도덕봉 정상에서 3분정도 내려서다 직진으로 뚜렷한 마루금의 등로를 버리고 왼쪽 비탈로 맥길을 이어가는 독도주의 지점이다. 길이 없는 비탈면을 직진으로 미끄러져 내려서면 가파른 내림길 뒤에 능선이 살아나고 옥천읍 쪽으로 조망이 트인다. 마루금을 따르면 계곡을 건너야 하는지, 지맥이 길도 없는 곳으로 등고선만 보고 길을 잡은 곳이다. 벌목지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중간에 반바지님 띠지가 있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알바이다. 오른쪽 숲으로 들어서서 능선을 잡아 목장 울타리를 지나야 한다. 길은 없지만 앱상 등고선만 보고 내려서는 지점으로 기존엔 마루금을 따랐으므로 선답자 띠지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다.
♤ 오가골 갈림길
옥천군 동이면 세신리 오가골 삼거리인데 수로가 보이는 왼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 152.6m봉
잠깐 올라선 봉우리이다. 양회임도로 내려서서 진행하며 눈팅으로만 보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광주 일대구정 동밖에님이 준희선생님 하청으로 산패를 매달아 두었다.
전원모텔 바로 옆에 식당, 오른쪽으로 주유소 옆에 편의점이 있습니다.
♤ 4번국도/ 읍면계(옥천읍 가풍리 - 동이면 세산리)/ 옥천로/ 옥천군산림조합
전원모텔 옆으로 내려서면 옥천읍에서 충북 영동으로 이어지는 4번국도가 지나가는데 차량이 많이 달린다. 도로를 무단횡단 하기보다는 왼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산림조합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맥길은 가풍리 원각마을 교통표지판에서 수로를 따라 능선으로 올라가야 하며 근처 식당/ 편의점에서 매식이 가능하다.
가풍리, 원각마을 교통표지판에서 배수로를 따라 산으로 오릅니다.
♤ 원각마을 갈림길/ 옥천군 옥천읍 가풍리 원각(院覺)마을
'원각'이란 마을 지명은 오래된 지리서 등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원각(院覺)은 본래 현재의 가풍리를 포함해 일컫던 신원리(新院里)와 각리동리(覺里洞里)의 지명 중 '원'자와 '각'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이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각리동리는 현재의 오로변 큰말을 일컫던 마을로 1910년 가척동리, 신원리와 함께 가풍리로 통합되었다. 기록에는 원각이란 지명이 일제강점기에 와서야 나타나지만 주민들이 말하는 마을의 역사는 훨씬 깊다. 마을은 본래 '두영(斗靈)'이라 불렸고 이것이 '뒝이'로 변해 지금도 어른들은 원각보다는 뒝이라고 불러야 잘 알아듣는다. 주민들이 전하는 말로는 두영이란 지명은 현재의 작은 말이 곡식을 한 말, 두 말 되는 말(斗)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며 특히 원각리가 옥천육씨 문중이 오래전부터 살아왔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알 뿐 일반 주민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다. 옥천육씨 문중에는 지난 92년 작은말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에 합동제단을 세워놓고 옥천육씨의 유래를 밝혀놓았다. 유래비에 의하면 원각리에 거주한 옥천육씨는 17대 선조인 육금언 공이 원각리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니 정작 그 뒤에 집성촌을 이룬 성주이씨는 한참 후에야 이룬 문중이었다. 성주이씨 문중에서는 11대조 할머니가 성주이씨인 이인희 공과 결혼해 이곳에서 살게된 것이 최초인데 이인희 공은 처가가 있는 마을에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셈이 되었다. 성주이씨가 번창하면서 본래 원각리의 세거 문중이었던 옥천육씨는 차차로 떠나 단 한 가구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세상 일이란 묘한 일이 있기 마련인 듯 싶다. 마을 지형 및 유래와 관련된 얘기는 또 있다. 현재 국도변 마을인 큰말 앞 4호 국도 건너편에 있는 큰 느티나무와 관련된 얘기로 전하는 바로는 이 느티나무는 본래 마을 한가운데 있었던 나무였는데 용암사가 생기고 나서부터 동네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는 마을 지형이 '갈가마귀'혈인지라 용암사가 창건된 후 징소리에 놀라서 마을이 옮겨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징을 치니 갈가마귀는 날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이다.
♤ 180.3m봉/ 읍면삼리봉(동이면 세산리, 옥천읍 가풍리 → 옥천읍 구일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토사가 흘러내린 밋밋한 봉우리였는데 잡목이 가득 차있다. 지맥의 왼쪽이 옥천읍 가풍리에서 구일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나온 구간 장령산, 도덕산 등의 봉우리들을 감상하고 좌틀로 내려선다.
♤ 질매기재(165m)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천수골에서 옥천읍 구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찾을 길이 없으나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질매재와 같은 뜻인 고개의 형상이 소의 잔등에 짐을 싣는 질매와 비슷하다고 해서 질매기고개로 불렀으리라 짐작된다. 고개 왼쪽에 공장이 들어서 있다.
♤ 함박산(含朴山, 250.2m)/ 읍면삼리봉(옥천읍 구일리, 동이면 세산리 → 평산리)
정상은 넓은 공터인데 잡풀로 꽉 채워져 있다. 여영대선배님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가야할 돌남산 뒤쪽으로 환산이 버티고 있다. 함박산 왼쪽 아래쪽은 옥천읍 서대리와 서대저수지가 보인다.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와 동이면 세산리, 평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옥천군의 옛 문헌을 찾아보면 이곳 함박산을 퇴미산이라 기록한 자료가 보여 조금은 헷갈린다. 안부에 잠시 내려섰다 다시 오른다.
옥천읍과 동이면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퇴미산에서 잠시 옥천읍 내안으로 들어가 돌남산과 자고치를 지나고 다시 동이면과 경계에 닿습니다.
♤ 퇴미산(249m)/ 테미산/ 읍면계(옥천읍 - 동이면)
정상에 조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묘지가 한기 있다.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와 동이면 평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오룩스 맵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퇴미산 혹은 테미산이라고도 부른다. 퇴미산은 문헌상의 기록은 나와 있지 않으나 옥천읍 분지의 한복판에 산성이 있었다는 자료가 보이며 옥천읍 쪽에서는 예부터 함박산이라고 불렸던 테미산(해발 250m) 정상이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퇴미산이란 지명은 특히 정상에 테두리를 두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대전시 테미고개나 여수시의 테미산성 등 ‘테미’란 지명이 쓰인 곳은 대부분 성이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테미산은 옥천읍 쪽에서는 함박산이라고 불렸으나 동이면 평산리 쪽에서는 함박산 대신 테미산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테미산이 통행이 많았던 옛길을 지키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점도 길목을 지킬 필요가 있는 산성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곧 이원-동이면을 거쳐 옥천읍을 가기 위한 중요한 길이 테미산 기슭으로 나 있는 동이-옥천읍 가는 옛길 옆으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테미산 바로 아래인 동이면 평산리 서원골에 쌍봉서원이 있어 조헌선생을 비롯한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로 의병 활동 논의를 했고, 조헌선생이 순절한 후 이충범선생과 유생,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로 제2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모임을 가졌던 장소라는 기록이 정립선생이 쓴 ‘고암일기’에 전한다. 의병활동과 테미산이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상 주위에 보이는 강자갈은 임진왜란 당시 전투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든다. “테미산이라고 하는 지명에는 대부분 토루(작은산, 흙무덤)의 형태로 성이 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 귀죽고개
지맥은 퇴미산에서 동이면과의 경계와 잠시 헤어지고 옥천군 옥천읍 내안으로 들어서서 구일리 귀죽마을로 내려서고 귀죽고개를 가로질러 귀화리고개를 지나 돌남산으로 향한다.
구일리 귀죽마을을 지납니다.
♤ 귀화리고개/ 2차선도로/ 서대구일로/ 옥천읍 구일리(九逸里)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 귀화마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도로명 주소는 서대구일로이다. 고개 좌측 아랫쪽에는 귀화리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장령산이 보인다. 구일리는 원래 군남면(郡南面) 귀일리(貴日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沃川邑) 구일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면서, 귀일리를 구일리로 바꾸었다. 1917년 옥천면이 되었고, 1946년 옥천읍으로 승격한 후 현재까지 이에 속해 있다. 구일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마을 이름을 새로 지을 때 자연마을이 9개로 나누어져 있다 하여 ‘아홉 구’, ‘놓일 일’ 자를 써서 구일리라 하였으나, 현재는 방고개가 없어지고 진말랑, 새보루, 증골, 터골, 고사리골은 귀현리, 회총골은 귀죽리, 자구티와 화정골은 귀화리로 8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구일리는 우선 옥천군내에서도 포도재배를 일찍부터 시작한 마을로, 옥천읍내 포도 주산지로 손꼽힌다. 귀화리는 황씨 시조의 10대손인 황계우 선생이 거주한 이래 500여년에 달하는 관성황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귀현리와 귀죽리에서는 먹고살기 어려웠던 1950년대에 이미 포도를 재배해 오늘날 옥천포도의 원류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귀현리, 귀죽리 뒤로 높이는 낮지만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는 함박산 정상에는 성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고, 예부터 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함박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귀화리 뒤에는 옥천읍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돌남산(石南山)이 있어 주민들에게 산책로 및 좋은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마을에는 구일저수지가 있고, 이원-동이를 거쳐 옥천읍으로 향하는 옛 길목에 위치해 있다.
♤ 돌남산(石南山, 258.6m)/ 삼리봉(옥천읍 구일리, 매화리, 장야리)/ 3등삼각점(보은 322/ 2003 복구)/ 철탑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와 장야리, 매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우측 아래에는 옥천기지국 통신시설 2곳이 있고, 정상 아랫쪽에는 옥천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운동기구가 보인다. 정상에는 국립지리원에서 세운 삼각점 안내판과 3등삼각점이 있다. 지명 유래는 옛날에 어느 원님이 옥천고을을 다스리던 시절 관아가 구읍에 있을 때 ‘관아 남쪽에 있는 돌이 박힌 산’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독도주의 지점이다. 왼쪽의 장야리쪽 내리막길은 등로가 아주 좋으나 맥길은 정상의 벤취 뒷쪽으로 매화리와 경계를 따라 급우틀한다.
♤ 182m봉/ 리계(옥천읍 구일리 - 매화리)
돌남산에서 옥천읍 구일리 자고치로 내려서는 봉우리이다.
♤ 자고치(自古峙, 135m) 육교/ 경부고속도로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에 있는 자고치는 옥천과 영동을 잇는 501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구일농공공단이 있고 자고치 육교 아래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왼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옥천휴게소가 보인다. 옥천읍과 동이면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6.25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가던 피난민들이 잠시 쉬어가던 고개로 각시바위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자고치를 지나 501번 지방도를 만난다. 병천순대, 카페마루와 불고기집인 한성회관도 보이고 맞은편에는 시골막국수집도 있다. 한성회관을 끼고 오른쪽의 영동쪽으로 향하여 풍림공장 담벼락을 따른다.
♤ 각시바위의 전설
이곳 자고티는 동이지역 사람들이 옥천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길목이었다. 때문에 동이지역에서 소를 키우던 주민들은 소를 팔기 위해 자고티를 넘어 옥천장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옥천에서 소를 팔고 집으로 향하던 소장사들이 지금은 구일농공단지가 들어서 있던 자고티 마을 뒷산을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길가에 놓여있던 두 개의 바위에서 색시가 뛰어나와 소장사들을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이었다. 소장사들은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갔고 다음날 다시 찾아와 그 자리를 살펴보니 전날 소장사들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빗자루 였다는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은 길가에 놓여있던 두 개의 바위에서 색시가 나왔다 하여 각시바위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설을 지니고 있는 각시바위는 구일농공단지가 준공되면서 전설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귀화리버스정류장이 한두 군데가 아니네요.
♤ 귀화리 버스정류장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에 있는 귀화리(貴花里)의 지명은 돌남산에서 유래됐다. 나무보다도 돌이 많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돌남산이다. 지금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돌남산에는 진달래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을 뒷산에 진달래꽃이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귀할 귀(貴), 꽃 화(花)를 사용하게 되었다는데 귀화리란 마을의 이름도 이 돌남산 진달래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167m봉/ 읍면계/ 옥천읍 - 동이면
정상에 울타리가 쳐진 묘지가 있다. 퇴미산에서 동이면의 경계와 헤어지고 옥천읍 내안으로 들어선 지맥이 돌남산에서 우틀하여 경부고속도로로 내려서서 자고치를 넘어 다시 동이면과 경계를 만나는 곳이다.
♤ 164.4m봉/ 읍면삼리봉(옥천읍 매화리, 구일리 → 동이면 남곡리)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야 하나 공장이 맥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조금 더 진행한다. 맥길에 공장이 들어서 있어 우회해야 하지만 왼쪽 비탈로 내려서서 풍림공장 마당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퇴비로 비료를 만드는 공장이라 냄새가 고약하다. 오른쪽으로는 축사와 태양광시설이 있어 진행하기 복잡하다.
♤ 154m봉
154m봉을 지난 다음에 맥길은 좌틀로 꺽어진다.
♤ 목사리재(牧仕峙)/ 남곡길/ 소망침례교회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에서 동이면 남곡리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에 소망침례교회가 있으며 고개 오른쪽 아래에 있는 남곡리 목사리 마을에서 지명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소망교회 맞은편으로 올라야하나 잡목이 성할 때는 조금 더 진행하다 묘지로 올라서면 한결 편하다.
♤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南谷里)
동이면 남곡리는 수남리의 남(南)자와 행곡리의 곡(谷)자를 따서 남곡리가 되었다. 수남리는 수북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두 마을 사이를 흐르는 물을 경계로 하여 수남, 수북리라 불렀던 것 같다. 행곡리는 살골을 한자화한 것으로 살을 살구행(杏)자 골곡(谷)자를 써서 행곡이 되었다. 목사리를 한자화 해 목금리라는 마을이름을 한때 사용하기도 했으며 목사리의 어원을 목쇠리로 보고 나무 목(木)자와 쇠금(金)자를 쓴 것이다. 현재 마을 이름은 한자로 칠 목(牧)자와 벼슬 사(仕)자를 쓰고 있지만 마을주변의 오래된 비석을 보면 나무 목(木)자와 모래 사(沙)자를 썼던 흔적이 있다. 목사리 주변에는 막골, 함박골, 약물내기, 진밭골, 큰터골, 작은터골, 가자골, 뒷골, 푼더골, 목사리골이 있고 산정말 주변에는 수몰 이주민이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새말이라 부르고, 개미재는 야산 속에 깊숙이 잠겨있는 마을이라 해서 감이골 즉 장동으로 감이재, 갬이재, 개미재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마을 생김새가 개미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개 아래로 기다랗게 형성된 개미재는 머리, 가슴, 배의 구별이 확실한 개미의 형상인데 이 고개를 서너고개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는 거멩이들이 있고 향곡저수지 옆으로 도장골, 화악골, 가래티, 사냥골이 있고 산정말 옆으로 산막골, 살골, 안골, 절골, 기티가 있다. 새마을 옆에 고령신씨(高靈申氏) 재실이 있다.
♤ 태솔이재
왼쪽으로는 매화저수지와 구덕마을이 보인다. 등로는 상당히 까칠하고 걷기가 불편하여 사면길로 내려선다.
♤ 개미재 갈림길/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
직진으로 뚜렷하게 나있는 개미재 가는 등로를 버리고 등로가 보이지 않는 왼쪽으로 꺽어진다. 옥천군 동이면 남곡리에 있는 개미재는 야산 속에 깊숙이 잠겨있는 마을이라 해서 감이골 즉 장동으로 감이재, 갬이재, 개미재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마을 생김새가 개미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개 아래로 기다랗게 형성된 개미재는 머리, 가슴, 배의 구별이 확실한 개미의 형상인데 이 고개를 서너고개라고도 한다.
도로 왼쪽 옹벽 끝부분으로 들어섭니다.
♤ 구덕재(140m)/ 옥천군 옥천읍 매화리(梅花里)
매화리는 원래부터 읍내면(邑內面) 매화리(梅花里)라 불렀으며, 후에 옥천읍에 소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10년 읍내면과 군남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면서도 이에 속해 있었다. 1917년 옥천면이 되고 1949년 옥천읍이 된 후 현재까지 매화리는 이에 속해 있다. 매화리는 풍수설에서 매화당이라 하여 아주 좋은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매화가 땅에 떨어진 형국이라고 전한다. 이곳의 형세가 좋아서 지은 이름이다. 자연마을로는 매화, 구덕재, 산정말 등이 있다. 매화리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세거지로, 신요 공이 이웃인 동안리(東岸里) 못골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 500여년의 터전으로 지켜온 곳이다. 매산(梅山)이라고 쓴 고령신씨 세거비는 매화리 앞 지방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옛길 옆에 서있다. 매년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다운 구덕재소류지는 1957년 구덕재 마을과 매화 사이에 위치해 축조됐다. 1995년 이후 매화리에는 각종 기관과 시설이 들어섰다. 서울-부산간 고속국도 상하행선 휴게소인 옥천휴게소와 80kw급의 옥천변전소가 입주해 있으며, 옥천군 농업기술센터도 9,680평 규모로 들어서 있다. 매화리 앞은 옥천읍-이원간 지방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매화-동안간 도시계획도로가 개설돼 구읍간 거리도 가까워지고, 차량 통행량도 크게 늘어났다.
♤ 180m봉
지나온 돌남산과 그 뒤로 장령산, 서대산이 첩첩이 보인다.
♤ 쇠소리재(165m)
매화리 구덕마을 뒷쪽에 있는 옥천군 옥천읍 동안리와 동이면 남곡리를 잇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건물을 지을려는지 산을 깍아 놓아 절개면을 만들어 놓았다.
♤ 190m봉/ 읍면삼리봉(동이면 남곡리, 옥천읍 매화리 → 동안리)
쇠소리재에서 오른쪽으로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옥천읍 매화리에서 동안리로 바뀌고 곧바로 산바래기산 갈림길에서 지맥의 왼쪽이 옥천읍 동안리에서 교동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산바래기산(195.8m) 갈림길/ 읍면삼리봉(동이면 남곡리, 옥천읍 동안리 → 교동리)
등로 정상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나분티재로 내려가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산바래기산이 있는데 오룩스맵상에는 195.8m봉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잠시 왕복해야 한다. 산바래기산 아래에는 옥천 태생의 시인으로 박인수와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서 유명했던 가곡 ‘향수’와 ‘고향’이란 시를 썼던 정지용(하계리)과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셨던 육영수 여사의 생가(교동리)가 있는 곳이다.
♤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校洞里)
교동리는 원래 읍내면 향교리와 고수동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1910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 때 읍내면과 군남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었고, 1917년 옥천면이 되고 1949년 옥천읍이 되었으며 향교리와 고수동리를 합하여 옥천읍 교동리가 되었다. 교동리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지방의 영재를 기르기 위한 향교(鄕校)를 세웠기 때문이며, 처음에는 향교리라 부르다가 교동리라 하게 되었다. 향교 앞에는 조선시대 충신의 묘역이나 향교 앞에 세워 경건한 마음자세를 가지도록 했던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자연마을로 교동, 섶바탱이(이곳이 원래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으므로 나무지게(섶)를 지고 가다 한 번 쉬어간다(바탱이)는 설이 있다), 고수골(구읍지역에서 저수지 쪽으로 올려다보면 높게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고수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이 있었으나 교동저수지가 축조되면서 고수골은 없어졌다. 또 수북리를 넘는 고개는 나부티재와 나부티샘이 예부터 유명했다. 교동리에는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육영수여사가 태어난 생가가 있으며 무너졌던 것을 2008년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육영수여사 생가 복원사업은 본래 생가가 조선시대 3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양반가옥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으며, 이에 따라 충북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사업이 추진되게 되었다. 교동리 뒤로는 옥천의 진산이라 불리는 마성산이 자리하고 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옥천고을 전체의 안녕을 비는 마조제가 마성산을 바라보며 올려지는 것은 마성산이 옥천의 진산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교동저수지가 있어 문정뜰에 농업용수를 대고 있으며, 저수지 입구 옥천어린이집 앞에는 조선시대 옥천군수를 비롯해 옥천을 거쳐 간 많은 관리들의 공적을 알리는 공적비와 송덕비 등이 세워져 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지맥은 여기부터 늘티산성이 있는 318.3m봉까지 옥천읍 내안을 지납니다.
♤ 202m봉/ 읍면삼리봉(옥천읍 교동리, 동이면 남곡리 → 옥천읍 수북리)
에이원방장님 띠지가 있다. 202m봉에서 나분티재로 내려서며 지맥의 오른쪽이 동이면 남곡리에서 옥천읍 수북리로 바뀌며 동이면과 면계를 떠나 좌우가 완전하게 옥천읍 내안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화계리는 정지용시인의 아버지가 옥천 읍내로 나가기 전까지 거주했던 동네입니다.
♤ 옥천군 옥천읍 수북리(水北里)
원래 군동면 수북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북리라 부르게 된 것은 금강 갯가의 북쪽에 있다 하여 수북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꾀꼬리(화계리)와 동경재(동정자리, 동정리)가 있으며, 화계(花溪)는 마을 위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복숭아꽃이 떨어져 하천 가득히 떠내려간다 하여 “꽃내”라 하다가 화계라 부르게 되었다. 꾀꼬리는 음운변화에 따라 갯곶리>깨꽃리>꾀꼬리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옥천에는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라 하여 동정자(東亭子), 관아의 서쪽에 있는 정자라 하여 서정자(西亭子)가 있었는데, 동정자가 있어 동경재, 또는 동정리, 서정자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서정리라고 이름 짓게 되었다. 현재의 동정리는 대청호 수몰로 인해 수몰선 위에 다시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긴 곳이다.
♤ 나븐티재(135m)/ 교동식품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와 수북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 오른쪽에 애플 모텔과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왼쪽에는 교동식품이라는 꽤나 큰 규모의 공장이 있고 교통량도 많은 편이며 지명의 유래는 옛날 교동사람들이 나무를 많이 해다 땠다 하여 나무가 많은 재, 즉 나무티재라 불리우다 전해오는 과정에서 나분티로 변음이 되었다고 하며, 부근에 나분티물이라는 찬샘이 있다. 이 샘은 물이 하도 차가워 예전에 옥천 사람들이 여름철에 이곳에 와서 등멱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애플 무인호텔 앞에 있는 이동통신탑 사이로 올라서 간다. NO7 송전탑을 지나고 묘지지대를 지나며, 등로 왼쪽 아래로 육영수여사 생가 근처에 있는 교동저수지가 바라다 보인다. 임도 같은 사목재를 진행하다 왼쪽에 있는 굿당을 지나자마자 도로를 버리고 전봇대가 있는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굿당에서 약 30분 정도 급사면을 올라서야 한다.
마성산 오름길은 가파르고 길도 없어 힘들기로 정평이 나있지만 가시만 없다면야~ 그나마 준희선생님 '힘힘힘' 산패가 힘을 주네요. 선생님 힘힘힘 산패 아래에서 전화를 드렸더니 엄청 기뻐하십니다.^^ 마성산 오름 동남쪽으로는 금강 너머로 각호지맥 능선이 보입니다.
♤ 마성산(馬城山, 409.3m)/ 일자봉(一字峯)/ 3등삼각점(보은 324/ 2003재설)/ 산불감시초소/ 헬기장
충북 옥천군의 옥천읍 교동리와 수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옥천군내에는 3개의 마성산(馬城山)이 있는데 옥천읍 소정리와 군서면 금산리 경계에 용암사를 품고 있는 천성장마의 그 서마성산, 지형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죽향리에 위치한 동마성산, 그리고 옥천읍의 진산이라는 이곳 교동리에 위치한 마성산이다. 산 남쪽 아래의 교동저수지 근처에는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육영수 여사의 생가, 그리고 아름다운 3개 봉우리가 연이어진 등산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지만 그 명성이 남아있는 장계국민관광지를 차례대로 연결해서 돌아볼 수 있고, 이곳에서 서면 서대산과 장령산, 식장산, 환산, 속리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앙증맞은 돌탑, 이정표, 3등삼각점, 이 지역 출신인 시인 정지용의 詩 “홍춘”이 기록된 정상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마성산(馬城山)은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진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 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마성산이 옥천군의 진산이며, 그 지명 유래가 말(馬)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 "마성산은 군 북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 (중략) 본래 지륵산으로부터 맥이 온다."라는 기록이 있어 마성산의 맥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 『해동지도』와 『1872년지방지도』에도 당시 옥천군의 읍내면에 마성산이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마성산의 다른 명칭으로 '일자봉'이 기록되어 있는데, 산 모양(一)을 표현한 지명으로 보인다. 실제 옥천 구읍(舊邑) 뒤의 산 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의 '일(一)'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옥천읍 내안을 지나온 지맥이 군북면의 경계와 만납니다. 대청호오백리길이라 등산로가 정비되어 걷기 편안합니다.
♤ 318.3m봉/ 늘티산성/ 읍면삼리봉(옥천읍 수북리, 교동리 → 군북면 국원리)
지맥의 왼쪽이 옥천읍 교동리에서 군북면 국원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정상에는 옥천군 향토사 연구회에서 세운 늘티산성 표시석이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이곳을 할애비산(289m)이라고 기록한 자료들이 보이나 실재 할애비산은 좀더 왼쪽으로 옥천군 군북면 국원리 섶밭댕이 윗쪽에 있는 봉우리를 말하며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다. 늘티산성 표시석 뒷쪽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옥천군 군북면 국원리 며느리재 남쪽 해발 300m 봉우리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이다. 늘티산성은 퇴뫼형(삼태기형)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150m이다. 옥천군 동북부 지역인 안남 및 안내면 방향에서 금강으로 건너오는 적군을 경계하고 며느리재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지오리 산성과 축성법이 흡사하며 이웃한 국원리산성(할미성)과 함께 축성시기 및 사용국가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늘티산성 산줄기인 마성산에서 이슬봉 사이 또 다른 성터가 없어 늘티산성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마성산에서 늘티산성으로 진행하며 왼쪽으로 환산(고리산)이 아주 가까이 보입니다. 식장산도 옆으로 보이구요. 성왕의 아들 여창이 주둔했던 그 곳...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청호 보다는 그쪽으로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 옥천군 군북면(郡北面)
옥천군 군북면은 옥천군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동으로는 대청호를 경계로 안내면에, 서로는 대전시 동구 세천동에, 남쪽은 옥천읍에, 북쪽은 보은군 회남면에 접해 있다. 원래 신라 고시산군(古尸山郡)의 일부였으며, 경덕왕 때에는 관성군(管城郡)에 속하였다가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에 옥천군에 소속되었다. 1739년 『여지도서』에는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방하곡리, 이탄리, 환평리, 증걸리, 소태동리, 장사리 등 7개 리가 있었으며,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는 위의 7개 리 외에 자모리, 비하동리 등 9개 리를 관장하였다. 1908년 군북면이 군북일소면과 군북이소면으로 나뉘어져 군북일소면은 괴목리, 백석리, 이지리, 증약리, 자모리, 와정리, 대촌리, 비야리, 항곡리 등을 관할했고, 군북이소면은 지파리, 보오리, 도호리, 환평리, 추동리, 부소리, 석결리, 소정리, 국원리 등 11개 리와 동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서일소면의 각신리 일부를 병합하고 군북일소면과 군북이소면이 합하여 군북면이 되면서 이백리, 대정리, 증약리 자모리, 장계리, 환평리, 소정리, 국원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 군북면 장계리를 안내면에 소속케 하고, 안내면 용호리와 막지리를 군북면에 소속케 하여 오늘에 이른다. 군북면은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생활권이 사실상 둘로 갈라지면서 소정리, 국원리, 이평리 일부, 막지리 등은 옥천읍을 거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마을이 되었다. 행정구역이 나뉘어진 것은 물론 대청호 수몰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고장이 군북면이다. 현재는 대전시와 인접한 면으로, 2002년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선형개량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백리-감로리간 고속도로 폐도를 활용해 대전시 동구 쪽으로 직통도로가 개설돼 차량 통행량이 크게 증가했으며, 증약리 쪽으로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는 등 인구가 유입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 대청호오백리길
대청호오백리길은 대청호를 끼고 총 249.5km로 21개의 주 코스와 다섯갈래 코스 등 26개 구간으로 1980년 대청호에 물이 담기기 이전에 물줄기 따라, 산줄기 따라 들판을 가로지르며 농사를 지어러 다녔고, 성황당 고개를 넘어 민초들이 장보러 다녔던 이 지역에 살았던 우리 부모님들, 자녀들이 걸었던 애환이 서린 길로 이처럼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길을 찾아서 다시 연결하고, 한번쯤 들려 이곳에 살고있는 주민들의 흔적들을 보고 가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어진 길이다.
어느 게 진짜 며느리재인지 내려서는 안부마다 다 며느리재라고 쓰여 있습니다.
♤ 며느리재Ⅱ(250m)
오른쪽으로는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지맥은 왼쪽 사면길로 내려선다. 석탄리(石灘里)는 원래 군동면 지석리와 직탄리가 합하여진 마을로 후에 동이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동면의 직탄동, 지속리, 지장리, 양이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지석리의 석(石)자와 직탄리의 탄(灘)자를 취하여 석탄리라 하고 동이면에 속하였다. 지석리라 부르게 된 것은 안터마을에 고인돌 즉 지석묘가 있었기 때문에 지석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직탄리는 "피실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피직+여울탄=직탄이 되었다. 이 석탄리는 한때 동이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었으나 1978년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거의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아주 작은 마을로 변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안터, 산얼기, 피실, 덩기미가 있었으나, 피실과 덩기미는 수몰되어 마을이 완전히 없어졌고 안터 일부와 산얼기만 있다.
♤ 며느리재Ⅰ(225m)
옥천군 군북면 국원리 늘치(티) 윗쪽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이곳이 며느리재이다. 며느리재에는 옛부터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 시아버지와 흰 소복을 입은 며느리가 이 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자 하얀 소복은 며느리 몸에 착 달라 붙었고, 이를 본 시아버지가 딴 마음을 먹자 며느리가 이를 피해 계곡으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며느리재에는 흰색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한다.
지맥이 여기부터는 옥천읍과 헤어지고 군북면과 안내면의 경계를 따릅니다. 멀리 금적지맥의 금적산을 찾으며 진행하는 구간입니다.
♤ 300m봉/ 삼읍면봉(군북면 국원리, 옥천읍 수북리 → 안내면 장계리)
대청호 오백리길은 오른쪽 사면길로 이어지고 직진 능선으로 올라서는 밋밋한 봉우리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옥천읍 수북리에서 장령지맥과도 길게 함께하는 안내면과 만나고 장계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조금 전 헤어진 대청호오백리길과 만나 지맥길을 이어간다.
금적지맥이 노성리고개에서 만나 금적산, 정방재를 지나 삼승지맥분기봉까지 제일 많이 접하는 그 안내면이 장령지맥의 합수점까지 포괄하는군요.
♤ 옥천군 안내면(安內面)
옥천군 안내면은 동쪽은 보은군 삼승면에, 서는 군북면과 보은군 회남면에, 남은 안남면과 군북면에, 북은 보은군 수한면에 접한다. 본래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아동혜현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안정현(安貞縣)이라 고치고, 관성군에 부속시켰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안읍현(安邑縣)이라 하여 경산부에 부속시킨 후 조선 태종 13년(1413년) 안읍의 읍내에 있다 하여 안내면이라 고치고 옥천군에 속하게 하였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호리, 막지리를 군북면에, 군북면 장계리를 안내면에, 안남면 오덕리와 인포리를 안내면에 편입시킨 이후 13개 리(里)를 관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지와 골짜기가 면소재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 금적산(652m)이 최고봉이다. 면의 중심부로 안내천이 흐르며 하천유역의 넓은 평지에는 밭농사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과수재배와 밭농사를 주로 하는데 지역특산물로는 옥천 포도가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옥수수와 감자, 복숭아를 많이 재배한다. 37번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여 보은과 옥천읍으로 이어지며 유적지로는 의병장 조헌을 추모하는 사당인 후율당이 있고 대청호 인근의 장계관광지가 유명하다.
♤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長溪里)
장계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하면서 장사리의 장자와 욱계의 계자를 한자씩 합하여 장계리라 하였다. 장사리는 “진모래”를 한자화한 것인데 “진”을 긴장(長) “모래”를 모래사(沙)로 써서 장사리(長沙里)로 하였으나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되었다. 옛말로 “진”은 긴 것이 되고 “모래”는 모랭이란 말로서 “모랭이가 길다”는 뜻이 되며 이곳의 지역으로 보아 강의 모롱이가 길기 때문에 “긴모롱이→진모랭이→진모래”로 음운변화가 된 것이다. 욱계는 아주 옛날에 생긴 마을이 아니고 한자가 생활화한 후에 생긴 마을로서 마을이 산중턱에 있고(웃계), 마을 가운데 작은 하천이 있으나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그 외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바닥이 마른 내(川)이었기 때문에 햇빛에 돌이 반짝이며 빛이 난다하여 욱계라 이름지었다 한다. 장계리의 자연마을로는 진모래, 욱계, 주막말, 개경주, 논골 등이 있었으나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진모래, 주막말, 개경주 등이 물에 잠겨 없어지고 인근 마을에 조금씩 옮겨와 살고 있다. 장계리에는 옥천향토전시관과 대청비치랜드가 자리하고 있다.
♤ 290m봉
공터봉을 지나 직진으로 오르는 봉우리이다.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서서 대청호오백리길과 만나 지맥길을 이어간다.
♤ 333.8m봉/ 읍면 삼리봉(안내면 장계리, 군북면 국원리 → 소정리)
조망바위를 지나 직진으로 오르막을 오르면 나온다. 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이다. 지맥의 왼쪽이 군북면 국원리에서 소정리로 바뀐다.
♤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疎亭里)
군북면 소정리는 마을 뒤로 산이 둘러 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대청댐이 있어 경치가 빼어난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소정(송정), 문바우골(문암곡, 문암동, 문밖골, 문회곡), 바깥마을(외동), 소태골(소태곡), 안마을(내동) 등이 있는데 소정은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송정이라고도 부른다. 문바우골은 문바우가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이름 붙여졌다. 바깥마을은 소정 바깥쪽에, 안마을은 소정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소태골은 옛날에 소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소정리 안마을 고인돌이 있다.
♤ 310.6m봉
지형도상에는 족보가 있는 봉우리인데 아무런 흔적도 없고 예전 헬기장이었는지 보도블럭 같은 것이 보인다.
♤ 둔주봉(屯駐峰, 382.7m)/ 등주봉(登舟峰)
오른쪽 금강 너머로 보이는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있는 둔주봉은 등주봉이라고도 부르지만 인터넷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산 주위로 금강 본류가 휘돌아 감싸며 흐르고 산 아래로 초계 주씨(周氏)의 정자인 독락정(獨樂亭)이 있고 둔주봉의 지명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한국지명총람』에 둔주봉이 소개되어 있으며, 옛날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곳 안남면 연주리 일대는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의 풍수형국이 나타나고 둔주봉을 이와 관련시켜 이해하기도 한다.
※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을 보면 신라 고시산군의 영현으로 소리산현과 아동혜현이 있다고 한다. 고시산군은 지금의 옥천군 옥천읍 일대, 소리산현은 지금의 옥천군 이원면 일대, 아동혜현은 지금의 옥천군 안내면, 안남면 일대로 비정된다. 한마디로 이 지역은 고대 관산성 전쟁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5C 중엽 백두대간 화령을 넘은 신라군은 삼년산성, 모로성, 굴산성을 축조한 이후 백제군을 금강 동안에서 몰아내고 급기야 금강 도하를 꿈꾸게 된다. 그 꿈을 실현할 교두보가 있으니 그 산성이 바로 아동혜현의 치소인 화학리산성이다. 지금의 화학리산성은 고대에는 아동혜현의 이름을 따서 아동혜성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아동혜성을 장악한 신라군은 금강 동안에 여러 개의 보루성을 구축한다. 그러면서 금강을 도하하여 백제(남부여) 관산성을 기습의 꿈을 꾸었다. 그 보루 중의 하나가 둔주봉 보루이다. 둔주봉산성은 보루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북동 아래까지 토석혼축으로 산성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군이 둔주봉 보루에 서면 눈에 거슬리는 산성이 하나 있다. 바로 금강 건너편에서 신라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지양리 산성이 그것이다. 금강은 이곳에서 개 이빨처럼 U자와 역U자를 무수히 반복하며 고대 자연국경선을 형성하고 있다. 상호간에 수비와 공격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둔주봉 북방으로 신 산경표 상의 금적지맥이 덕대산과 금적산을 향해 힘차게 동남류하고 있다. 금적지맥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의 서벽을 이루며 청성면 합금리에서 그 맥을 다한다.
♤ 420m봉
능선을 올라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선다. 조망이 좋다.
♤ 이슬봉(453.3m)/ 면리계(군북면 소정리 - 안내면 장계리)/ 3등삼각점(보은 316/ 1980 재설)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와 안내면 장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석과 이정표, 3등 삼각점이 있다. 먼 옛날 홍수로 인해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이슬만큼 봉우리가 남아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 참나무골산(419.2m)/ 면리계(군북면 소정리 - 안내면 장계리)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와 안내면 장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그저 밋밋한 등로에 있어서 소나무에 매인 준희선생님의 산패가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알 길이 없으나 실재로는 앞쪽이 더 높아 보인다. 주위에 참나무들이 많다.
♤ 400m봉
쉼터에는 벤취 4개가 있고, 트랭글 앱에서는 이곳을 참나무골산이라고 한다. 맥길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계리쪽으로 내려선다. 장계리로 내려가는 이정표와 쉼터 의자가 있고 왼쪽으로 사면길이 있으나 직진으로 향해 쉼터에 올라서니 철탑이 있는 해주오공 묘지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참으로 좋다. 코앞에는 잠시후에 가야할 장계교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하마산, 장계교 지나 37번 국도 너머로는 금적지맥 능선에 있는 금적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묘지 왼쪽으로 내려선 후 조금전에 헤어진 등로에 들어선다.
♤ 하마산(下馬山, 350m)
하마산은 충북 옥천군 안남면에 있는 산으로 북쪽으로 금적산, 남쪽으로 둔주봉과 이어진다. 산의 서쪽으로 대청호가 있으며, 여기에 조성된 장계관광지가 멀지 않다. 산의 남쪽에는 안남면 소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안남천이 발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회인)에 "고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마비가 있다 하여 하마산(下馬山)이라 불린다. 조선 시대에는 '하마산(何磨山)'이라 표기하였다.
지맥이 군북면 면계와 헤어지고 장령지맥의 마지막 행정구역인 안내면 장계리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직진하여 장계대교 바로 앞에까지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도로가 새로 나서 오른쪽 계단으로 우회하여 내려서야 합니다.
♤ 신37번국도/ 장계대교/ 카페 꼬레(샌드위치, 핫도그)
신 37번 국도가 지맥을 잘라먹어 우회길을 따라 37번 신국도가 지나가는 장계대교 아래에서 왼쪽으로 간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구37번 국도방향으로 간다. 굴다리를 지나 갓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 마루금에 복귀한다.
장령지맥을 마무리하고 다시 여기로 나와 옥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됩니다.
♤ 구37번국도/ 장계리 버스 정류장/ 수준점(100m)
옥천군 안내면에 있는 장계리는 참나무골산 아래에 있으며, 앞으로는 금강이 휘돌아 나가는 농촌마을이다. 인포가든을 지나서 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곡각지점에서 뒷쪽 능선으로 벙커봉으로 올라선다. 개사육장인지 고사리농장인지 인가 뒤로 내려서서 장령지맥의 마지막 무명 봉우리에 오른다. 영일정공 묘에서 장계관광지로 내려서고 관광지 마당에 카페 프란스가 보인다. '카페 프란스'란 정지용이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유학시절에 1926년 유학생 회지 『학조』 창간호에 실린 詩의 제목이다. 장계유원지 선착장에서 장령지맥을 마무리 하고 다시 장계교로 나오는데 약 30분이 소요된다.
♤ 장계유원지/ 대청호 금강 선착장
장계관광지 선착장장으로 내려가서 장령지맥을 마무리한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 아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충북 영동의 양산팔경을 지나 옥천을 관통하며 굽이돌아 대청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2/3인 이원·동이·청성·안남·안내·군북의 6개면을 적시고 흐르는 금강은 옥천 자연의 상징으로 이곳에서 대청호를 만나 금강에 입수하는 합수점이다. 장계관광지는 아름다운 대청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천의 유일한 관광단지다. 대청댐이 설치된 후 물이 차면서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옥천의 역사문화와 인물, 유물. 민속자료 등이 보존된 향토전시관이 존재한다.
♤ 에필로그
첫날 날이 밝을 때 신안고개까지 가고, 장령산 장령정에서 시간을 봐서 비박할려고 했는데, 신안고개 정자에서 잤습니다. 진행했더라도 장룡산 정자까지 약 9시간이 소요되고 중간에 비나 이슬을 피할 만한 휴식지가 없어요. 둘쨋날 자고치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만나는 501번 국도에서 마무리를 하면 후반 약 14km 남겨두지만 도덕봉 내림에서 알바를 해서 더 갈 마음이 사그라들어 다음에 와서 편하게 보충 하기로 했습니다. 물은 비들목재나 신안고개에서 틀림없이 보충해야 하는데 두군데 다 보충이 가능합니다. 야간근무를 조퇴하고 시작하는 지맥인지라 이틀밤을 무리하게 새며 한번에 끝내기 보다는 두구간으로 나눠 후반부 여유있게 마무리 하기로 현지에서 결정키로 했습니다. 금적지맥을 하며 저도 모르게 이미 여러 번 장령지맥과 인연이 있었더군요. 옥천시외버스공용정류장 위쪽의 고개가 천성장마의 출구였습니다.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차에서 눈을 감고 가는게 안타까웠는데 이미 그때 장계교 대청호를 지났구요. 1구간 정방치에서 옥천 구읍을 지나 육영수여사생가에 내려주신 아저씨는 장계대교를 넘었고, 정방치에 가며 시내버스를 타고 장계구교를 또 한번 넘으며 장령을 지났습니다. 금적을 마무리하고 옥천으로 나오면서도 매화리를 지났으니 이미 여러 번 장령과 인연이 이어진 셈입니다. 2구간은 경등산화에 소형배낭이라 무릎도 아프지 않고 예상보다 1시간 일찍 끝났습니다. 장령을 진행하며 대둔산, 만인산, 서대산, 천태산, 식장산, 계룡산, 속리산, 환산, 갈기산, 금적산, 둔주봉, 하마산 등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사진은 200장 가까이 찍었는데 100장만 올릴려니 빠듯해요. 댓글에 하나씩이라도 더 첨부하겠습니다.
첫댓글 장령지맥 마무리 하심을 축하 드립니다
예전에 힘들게 진행했던 기억이 나고 더운데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정말 지맥 하시는 모든 분들 존경스렵습니다
홀산시 늘 안산 즐산 하시고 하나 하나 줄여가면 언제 끝이 나겠지요
늘 응원드리고 홧~팅 입니다^)^
와룡산선배님!
홀대모 봄모임에 잠깐이나마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넉넉하게 시간 쟁여 오셔서 한담도 나누고 쉬어가십시요.^^
장령과 금적 난도가 비슷비슷 한것 같습니다.
식장은 장령보다 조금 낫다니 다행이구요.
곧 날잡아 식장 진행할 계획입니다.
아직 팔음, 팔공, 각호, 병풍, 백덕, 성지, 독조, 황병, 칠봉, 사자 등등등 갈길이 멉니다.
첨부 사진은 자고치 식당가입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
두번에 걸친 장령지맥 마무리를 축하드립니다.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우리산하 어느곳이든 만만치 않네요.
첫날은 도덕봉 내려서며 일대구정팀도 만나고 얼마전 가입하신 류민영님 모습도 보이네요.
두번째날은 날씨도 좋아 금강변 조망으로 시원함을 즐기셨겠어요.
멋진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요즘 저는 식장지맥 공부에 여념이 없습니다.
가만 생각하니 식장지맥은 2+1이 아니라 1+2입니다.
첫 구간이 잡목지이고 보만식계에 올라타면 어렵지 않게 진행할것 같습니다.
물을 구하는 위치도 1+2로 하면 어렵지 않을것 같습니다.
수레너미재와 세천고개 사이에 물 보충은 태봉산 푸른학습원인데 거기도 내려갔다 올라와야 하니깐요.
다녀온 금적과 장령보다는 식장이 다소 쉽다고 말씀하시니 그나마 안심입니다.
첫 구간을 전지가위를 대동할 모양이구요.
장령지맥은 장령산 장령정과 마성산에서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진행하며 계속 앞뒤로 지나온 구간과 가야할 구간이 펼쳐져 보여 예습과 복습하기가 좋았어요.
일대구정팀도 아마 이번주에 끝내지 않을까 싶네요.
첨부하는 사진은 마성산에서 내려다본 옥천 구읍 육영수여사 생가쪽인데요.
왼쪽은 서대산, 오른쪽은 식장산 뒤로 계룡산 정상부도 아련하게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