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0. 6. 16.~6. 17.(화,수)
- 음력(4. 25.~26.), 일몰 19:57, 일출 05:10
●산행지: 한북정맥 3구간(말머리고개-오두산통일전망대)
●산행코스: 말머리고개-수리봉갈림길-기산보루성-고령산-앵무봉-보광사-됫박고개-새문안교회묘지-박달산갈림길-달구니고개-채석장-장지산-용암사/용미리마애이불입상-양지가든(78번도로)-6.25전사자유해발굴지역-돌봉산-매봉-파주인쇄단지-오산리고개/상촌고개(56번도로)-영산수련원(순복음교회)-103m봉-해방교회공원묘지-은혜교회묘지-100m벙커봉-도내리고개-영태리고개/월롱과선교(1번국도)-다락고개-용상사갈림길-돌탑-월롱산성갈림길-월롱산-5번군도-기간봉-임도-310번지방도로 방호벽-(주)코아스건물 도로-바구니고개-(재)기독상조회공동묘지-한려산(131m)-동화경모공원묘지-각시고개-보현산-헤이리마을-99m봉-성동사거리-열무니고개-깃대봉(117m)-100m봉-자유로육교-통일전망대주차장-오두산통일전망대
●먹거리: 생수1,5L, 콜라1.5L, 크림빵2, 소보루1, 샤브레, 사탕30, 자유시간2, 토마토케찹1, 게비스콘2,
●준비물: 외투1, 스틱, 썬글, 충전지2, 충전짹, 헤드랜턴1, 구급약, 경광점멸등, 손수건, 머리띠, 휴지, 물티슈, 예비양말, 부직반창고, 햇, 팔토시, 무릎보호대, 마스크, 이너텐트, 무릎담요, 매트리스
●거리: 약 52.43km
●소요시간: 30.10h
●누구랑: 나홀로
●경비: 됫박고개쉼터6,000, 오산리편의점6,000, 월롱역식사17,000, 월롱역편의점8,150, 5번군도편의점3,850, 헤이리편의점4,100,
●날씨: 17~30, 맑음
●산행경과:
- 08:15 : 말머리고개
- 08:59 : 기산보루성(530m)
- 09:55 : 고령산 군부대갈림길
- 10:04 : 앵무봉(621.8m)
- 10:34 : 보광사
- 11:00 : 됫박고개, 쉼터
- 12:33 : 박달산(360m)
- 12:10~12:46 : 박달산갈림길
- 13:27 : 달구니고개/분수3리고개, 토마토부페, 우측 250m편의점
- 14:20 : 장지산(163m)
- 14:27 : 용암사/마애이불석불입상, 감로수
- 14:46 : 용미리 양지고개/한민고/78번도로
- 15:27 : 돌봉산(163m), 정자
- 16:24~17:13 : 조리읍 오산리고개/56번도로, 식당, 편의점
- 17:17 : 영산수련원(순복음선교원)
- 17:?? : 해방교회공원묘지
- 18:28 : 도내리고개(동물이동통로)
- 19:21 : 월롱과선교/1번국도(통일로)
- 19:36~05:31 : 월롱역 비박, 편의점, 식당, 식사
- 05:44 : 다락고개
- 06:15~06:34 : 용상골 용상사
- 06:15 : 월롱산(229m)
- 07:35~07:48 : 금탄고개/5번군도(방호벽)/ 363번지방도, 편의점
- 08:10 : 기간봉(245.5m)
- 10:09 : 방촌로/358도로 바구니고개 (방호벽)
- 10:43 : 한려산(131m), 산불초소
- 11:17 : 동화경모공원묘지/전망대, 쉼터, 수도
- 11:22 : 각시고개, 헤이리영어마을
- 11:32 : 보현산(135m)
- 11:58 : 헤이리마을, 편의점
- 13:11 : 성동사거리/열무니고개, 식당
- 14:09 : 자유로육교
- ??:?? : 오두산(119m)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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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북정맥: 236km (추가령~장명산)
* 한북정맥: 160km (수피령~장명산)
* 신한북정맥: 224km (추가령~오두산)
* 신한북정맥: 148km (수피령~오두산)
* 한북오두지맥: 41.3km
* 도봉지맥: 53km
- 말머리고개~월롱역 30km
-. 말머리고개~양지고개(한민고)/ 78번도로 17.5km
-. 말머리고개~오산리고개 22.5km
-. 용미리 양지고개~월롱면 다락고개 14km
-. 됫박고개~오산리고개 13.9km
-. 오산리고개~월롱역 7.5km
- 조리읍 오산리고개~오두산통일전망대 22.6km
-. 조리읍 오산리고개~5번군도 10.6km
-. 월롱면 다락고개~오두산통일전망대 14km
-. 5번군도~오두산 12km
* 사전정보(식수보충지)
- 수리봉: 0.5km
- 도솔암: 약수
- 보광사입구: 사하촌 식당가
- 뒷박고개: 쉼터, 정수기
- 박달산: 600m
- 달구니고개: 토마토부페식당, 편의점
- 마애이불입상: 좌측 30m
- 용미리고개: 양지가든, 양지상회, 한민고
- 오산리기도원: 편의점, 식당
- 월롱산오름길: 약수터 0.08km
- 용상사: 500m
- 월롱산: 300m
- 월롱산 하산지점 53번군도: 편의점
- 동화경모공원: 추모관옆 수도
- 헤이리마을: 식당, 편의점
- 성동사거리: 식당
- 오두산통일전망대: 화장실
* 서울에서 말머리고개 가는길
- 지축역, 15-1, 07:03, 0.25h
* 오두산에서 서울 오는길
- 경의중앙선 금촌역
- 헤이리~홍대입구: 좌석(2200번)
- 통일동산버스정류장(좌석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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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 11일 지리산을 출발해 그해 9. 30일 J3클럽에서 백두대간을 10구간으로 완주하고, 2018. 11월 낙남정맥에 들어가 19개월 만에 한북정맥을 끝으로 일구를 완성했습니다. 야근 마치고 3시간 조퇴하고 출발하는 비슷한 패턴입니다. 이번엔 일구졸업 자축 기념으로 동료들에게 통닭 다섯마리 야식으로 쐈습니다. 뒤풀이는 동네에서 저녁겸 클라이밍 자파 송회장님과 둘이 돼지고기 4인분 지져 쏘맥 여섯잔 정도 말았나봅니다.
금강정맥을 하며 금남기맥을 마무리 하였고, 호서정맥을 하며 금북기맥을 마무리하였기에 남은 기맥은 한강, 진양, 영산, 땅끝 4개입니다. 우선 한강기맥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산경표에서의 한북정맥은 도봉산과 북한산에 치우치느라 한강의 지류인 공릉천의 수계를 나누지 못할 뿐아니라 그 자신 또한 강이 아닌 지천에 흘러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산경표의 신한북정맥을 따라 오두산에서 한북정맥을 마쳤습니다.
오두산에서 보구곶리까지 12km를 한강으로 보는 시각에서 본다면 임진강도 한강의 지류이기에 한북정맥도 바다에 닿지 않아 기맥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이 점령한 관미성을 삼국사기에서 바닷물에 둘러쌓인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산경표가 나오기 1,400년전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인 교하까지 바다가 둘러싼 지점으로 이해 단정하였던 것입니다.
신한북정맥의 마지막 교하지점 오두산이 관미성으로 판명 되면서 정맥의 끝임을 역사적으로 공인받게 되어 소심한 분들에 의해 한북정맥의 끝이 어디인가로 분분했던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박성태 선생은 산경표는 선이 아닌 면으로 산줄기를 이름하여 왔다고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5G 시대에 현대적 감각으로만 해석하여 면을 선보다 더 가늘게 쪼개려는 세심함으로 인해 산사람들의 마음에 대립과 분열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구를 마치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대명사 신 산경표에 더욱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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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경기도 북서부에 있는 시로 1996년 파주시로 승격되었다. 서울과 개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끼고 있다. 관서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었으나 현재는 북부에 군사분계 선이 지나며 임진각·판문점 등이 있다. 파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보문헌비고라는 책에 나타나는데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차지한 것은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음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고구려를 몰아내고 신라가 차지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파주는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싸우는 각축장이 되었다. 지금의 파주시는 옛 파주목과 교하군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파주목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또는 고구려라고도 함)의 술이홀현이었으나, 고구려의 남하로 475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봉성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초 1393년(태조 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398년(태조 7)에 파평현을 병합하면서 원평군으로 개칭했다. 1459년(세조 5)에 정희왕후 윤씨의 관향이라 하여 파주목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세기 중엽 영조대에는 장단에 있던 방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임진강 나루 임진보와 장산보에 성을 쌓고 관문과 돈대를 설치하며, 별장을 파견하는 등 지리적 중요성을 강화했다. 파주의 별호는 곡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교하군이 폐지되어 파주에 병합됨으로써 임진강 하구인 서쪽으로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파주군의 광탄면·조리면·파평면은 그대로, 주내면·천현면·월롱면·임진면·와석면·청석면·탄현면·아동면 등으로 통합되어 파주군의 일부가 되었다.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해져 교하면으로 개칭되었다. 1972년에는 장단군에 4개면이 파주군에 편입되었으나 이곳은 임진강 북쪽에 위치하고 휴전선이 지나는 이북지역으로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1973년에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1951년 군의 행정중심지가 된 아동면이 같은 해에 금촌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주내면이 주내읍으로 승격된 후 1983년에 파주읍으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에는 천현면이 법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파주시로 승격되면서 금촌읍이 폐지되고 행정동인 금촌1동·금촌2동으로 분할되었다. 2002년 교하면이 교하읍으로, 조리면이 조리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에는 운정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2011년 5월 군내출장소의 명칭을 장단출장소로 변경하였다. 7월에는 교하읍이 교하동, 운정1·2·3동으로 분동되었고 금촌3동이 신설되었다.
* 교하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교하읍·탄현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었던 옛 고을로 삼국시대에 백제의 천정구군(泉井口郡:또는 於乙買郡)이었다가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 영역에 속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757년(경덕왕 16)에 교하군으로 고쳐 한주의 관하에 있었으며, 영현으로 봉성현(峰城縣)·고봉현(高峰縣)을 관할했다. 고려에 들어 1018년(현종 9)에 양주의 속군이 되었다. 조선초인 1394년(태조 3)에 양주의 속현인 심악현(深岳縣)·원평현(原平縣)과 속향(屬鄕)인 석천(石淺)을 편입하고,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심악현은 본래 보신향(寶薪鄕)으로, 고려초에 심악현으로 개칭, 1018년에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교하가 파주에 병합되었다가 1418년(태종 18)에 다시 교하현이 복설되었다. 1731년(영조 7)에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인 장릉(長陵)을 파주로부터 교하현의 중심지로 이전함에 따라 읍의 치소(治所)를 장명산 아래로 옮기고 군으로 승격되었다. 별호는 선성·원정(原井)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한성부 소속, 1896년에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에 의하여 지석면·와동면이 와석면으로, 석관면·청암면이 청석면으로, 현내면·탄포면·신오리면이 탄현면으로, 아동면·현내면이 아동면으로 통합되어 파주군에 병합되고, 교하군은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613년(광해군 5) 에 지기가 쇠한 한양을 떠나 교하로 수도를 옮기자는 천도 논의가 제기되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교하는 매우 좋은 지세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고양시
본래 백제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475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가 차지했다가 뒤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함에 따라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후 757년에 고봉현(高峯縣)으로 이름을 고쳐 교하군 영현이 되었다. 고려조에 들어 1018년 양주에 속했다가 조선 건국 후 1394년 감무를 두어 독립했으며, 행주현을 병합했다. 1413년 고양 현감을 두고 읍의 치소를 원당리로 옮겼다. 1471년에 이르러 경릉(덕종과 비의 능)과 창릉(昌陵:예종 능)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벽제관 전투, 행주대첩 등이 벌어졌다. 1895년 한성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에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양주의 두입지인 선혈면이 편입되었다. 이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의 서강면·용강면은 용강면으로, 숭신면·인창면이 숭신면으로, 두모면과 양주군의 고양주면이 뚝도면으로 통합되어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성부의 연희면·은평면·한지면 등의 8개면과 양주군의 1개면이 편입되어 관할구역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발달로 1936년에는 용강·연희·한지면이 경성부로, 1949년에는 은평·숭신·뚝도면이 서울시에 이관됨으로써 면적이 축소되었다. 동시에 서울의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도시 팽창에 따른 인접 고양군에로의 거주지 확산과 교통로의 확충 등으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1973년 신도면과, 1979년 원당면이 읍으로, 1980년에는 중면이 일산읍으로, 벽제면이 읍으로, 1985년 지도면이 읍으로,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승격하는 등 서울 생활권으로의 편입이 가속화되었으며, 1992년 2월에는 군 전체지역이 행정동 26개의 시로 승격되었다. 2005년 일산구가 일산동구·일산서구로 분구되었다. 고양시는 전체면적의 50%쯤이 그린벨트이며, 시 전체가 군사보호시설, 공장이전 촉진지역이어서 공업의 발달은 미약하다. 주엽1동 등에 상설시장이 7개소가 있으며 신도시 건설로 대규모 유통업체가 들어서고 있다. 서울의 교외지역으로서 교통이 편리하다. 경의중앙선이 시의 남서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서울교외선이 시의 동서를 횡단하고 있다. 도로교통은 행주에서 원당을 거쳐 벽제에서 통일로와 연결된 뒤 의정부와 연결되는 노폭 15m의 산업포장 도로와 기타 간선도로가 확장되었다. 또한 서울 시내버스가 연장 운행되고 있어 서울의 생활권에 들고 있으며, 서울 구파발에서 원당을 경유하여 일산신도시에 이르는 지하철 3호선의 연장노선이 1996년 1월에 완공되었다. 예로부터 행주는 한강을 건너는 나루터로 번성했으나 한강의 수운이 쇠퇴하면서 관광적인 기능만을 지니게 되었는데, 최근 인천과 연결되는 운하건설계획의 발표와 일산지역의 신도시건설로 장래에 주택지와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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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고개(39번국도) → 1.5km → 수리봉 → 2.8km → 고령산622m(앵무봉) → 2.6km → 됫박고개 → 3.0km → 박달산 갈림길 → 1.6km → 달구니고개 → 2.3km → 용미1리, 양지1리(78번도로) → 3.8km → 오산리고개 (56번지방도)
오산리고개 (56번지방도) → 3.7km → 78번지방도 → 2.3km → 월롱면(1번국도) → 1.6km → 118.8m봉 → 1.6km → 월롱산(229m) → 1km → 5번 군도 → 0.5km → 기간산(245m) → 5km → 131m봉 → 1.5km → 보현산(110m) → 1.6km → 99m봉 → 2.5km → 오두산(鰲頭山11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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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고개에 다시 올라, 백석쪽으로 라이브카페가 있는데 영업 여부는확인이 안됩니다.
누가 원정맥길은 크라운해태연수원 안으로 들어가라길래 정맥길과 합류하는데 고생만 조금 했습니다. 안에 지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왼쪽으로 접근해 통신주에서 곧바로 올라치는게 낫겠네요.
장군봉 방향으로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다는데....
▶ 말머리고개(말굴이고개) 유래
말굴이고개라는 이름은 중국사신이 타고오던 말이 굴렀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굴이에서 말구리로 이후 말두리로 그리고 말머리로 변하면서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변음되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말부리고개라고도 불리였다 한다. 말부리의 어원은 말(馬)과 '짐을 부리다'가 합성된 말로 옛날 마차수레로 짐을 나를 때 '고개가 가팔라 마차에 실은 짐이 부려졌다(마차가 뒤로 넘어져 짐이 부려졌다)'는 데서 말부리 고개라 불려 졌다고 합니다.
김신조루트를 하며 노아산에서 팔일봉 사이에 탱크훈련장이 있었던 기억입니다. 오늘 날잡았는지 계속 포가 날아가 터지는 소리가 울립니다.
성위에 선답자들 표지가 나부끼고....
♤ 기산보루성(530m, 基山堡壘城)
양주 일대는 삼국시대 전쟁이 잦았던 요충지였다. 기산리 보루(基山里堡壘)는 양주시 전지역에 분포된 28개 보루성 중 하나이다. 기산리 보루가 있는 곳은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34번지에 해당하며, 꾀꼬리봉 고갯마루 턱에서 서쪽 능선 2.5㎞에 위치하는 높이 530m의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보루, 혹은 보루성은 적의 이동 상황 등을 관찰하기에 용이하도록 주변보다 높은 구릉,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기산리보루 역시 사방이 잘 조망되며, 남쪽으로 내려오는 적의 길목을 차단하기 유리한 지형에 전략적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축성 연대는 자세히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역사학자들은 이곳에서 출토된 약간의 토기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서는 조선시대 개축한 모습을 띠고 있어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산리 보루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며, 전체 둘레는 약 63.5m로 적은 규모이다. 성벽은 산의 정상부 둘레를 돌로 쌓았는데, 폭 3~4m 정도이고, 성벽의 안쪽은 그보다 2~3m 정도 높게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은 암반 위에 그대로 쌓았으며, 윗단과 아래 단은 성벽 표면석과 뒤채움돌을 맞물려 쌓았다. 이 때문에 기산리 보루는 신라계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쪽의 성벽은 길이 13m, 높이 4m이다. 성 서쪽에도 길이 4m, 높이 1m의 석축이 있다. 성 내부의 북쪽 한 켠에는 400×460×100cm 정도의 구덩이가 있는데 집수시설인지 군사시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봉화를 피웠던 봉수대의 흔적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특히 양주 전지역에 분포된 보루성 어느 하나도 정확한 축조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현재 규모가 가장 큰 대모산성과 불곡산 제2보루성만이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이곳 기산보루성은 다른 보루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성곽 형태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여기 수리봉(530m)이 있고, 또 됫박고개와 달구니고개 사이에 박달산(360m)이 있어 맥꾼들을 잠시 헛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장흥 석현리 박달산 아래 돌고개유원지라는데 계곡에 음심점들이 즐비한 모양인데 가보지를 않은 곳이다.
♤ 수리봉(鷲理峰/봉수대/530m)/ 박달산
파주시 광탄면에 자리한 박달산은 530m로 낮은 산이지만 동서로 길게 늘어선 주능선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좋은 산행코스를 제공한다.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고 부르게 됐으나, 이웃 다른 마을에서는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鷲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장리와 분수리로 갈라지는 고갯길마다 작은 표지판이 길을 잘 안내한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고령산 앵무봉(621.8m)이, 동북쪽으로 양주 신불산(470m)이, 북쪽으로는 감악산(673m)이, 동남쪽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야트막한 산 너머로 보인다.
앵무봉 앵무정이다.
정상석도 두개이다.
1등삼각점이 있는 이곳이 정상 아닐까 한다. 여기서 직진해 능선을 따라 보광사로 내릴 수도 있고, 앵무정 아래로 계곡으로 내릴 수도 있다.
김신조로트에 해당하는 고령산이다. 김신조일당들은 고량포에서 파평산-북노고산-노아산-팔일봉-안고령(기산저수지)-고령산을 통해 일영 남노고산으로 향하였으며 자하문을 넘어 청와대 칠궁 옆 검문소까지 걸어내려와 검문에 불응하고 교전을 벌이며 북쪽으로 다시 도주하기 시작하여 개명산 아래 안고령마을에서 매복중인 국군에 의해 사살되기도 하였다.
♤ 고령산(高靈山, 622m/ 앵무봉(鸚鵡峰)/ 개명산(開明山)
고령산(高靈山, 高嶺山)은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와 영장리,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장흥계곡에 걸쳐 있으며, 양주시 일원에서 감악산(674.9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령산(高嶺山)은 양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양주읍지』에는 "고령산은 양주의 서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은봉산(隱峯山)으로부터 맥이 이어진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해동지도』에는 파주와 적성의 경계를 형성하는 고령산(高靈山)으로 표기되었다. 이렇게 볼 때, 고령산(高靈山)에서 고령산(高嶺山)으로 지명이 변경된 듯하다.『파주읍지』에는 광탄(廣灘)의 발원지를 고령산이라 하였다. 고령산 영모암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봉우리가 꾀꼬리처럼 생겼다고하여 앵무봉, 또는 앵봉이라 불렸다고 하고 산의 모양이 꾀꼬리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대개의 경우 앵무봉이나 앵봉은 꾀꼬리봉 또는 꾀꼴봉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이 경우 꾀꼴봉은 고깔을 닮았다고 하여 불리었던 고깔봉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고깔봉이라 하다가 꾀깔봉을 거쳐 꾀꼴봉으로 변하고, 최종적으로 한자화 하면서 앵무봉이나, 앵봉으로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정에서 북서편으로 능촌교를 지나면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昭岺園)이 있다. 북쪽으로 팔일봉 줄기를 마주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마장저수지가 있다. 마장저수지가 있는 곳은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와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가 만나는 경계 지대이다. 서쪽에 파주시 광탄면의 박달산[369m]이 있고 팔일봉의 한 줄기가 서북으로 올라가며 도마산~금병산~법원읍의 자웅산·명학산 등으로 이어진다. 파주시 문산읍으로 가면서 산줄기가 현저하게 잦아든다. 동쪽에 꾀꼬리봉, 한강봉, 호명산 등이 의정부시 방향으로 이어지며 천보산맥에 다다른다. 꾀꼬리봉 남쪽으로 장군봉을 거쳐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서울의 서북 지역에서 가장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동네이다. 산이 높아 서쪽으로 파주시 교하동, 광탄면, 법원읍, 문산읍에 이르기까지 멀리 조망할 수 있다.
도솔암에 들려본다.
보광사 경내 보이는 석불은 큰손 장영자가 보시했다고 한다. 감로수가 있는데 먹질 못하게 금줄을 쳐놓았다. 바가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안 먹고 지나기도 서운하고...
천년사찰이라선지 앰프로 내보내지 않고 당우마다 라이브 독경소리가 우렁차다.
일주문을 나와 됫박고개로 오르는 도로 삼거리까지 걸어내려오는데 길옆으로 음식점이 도열해 있다.
♤ 고령산 보광사
앵무봉 서사면으로는 보광사가 있으며, 1634년에 주조한 범종이 있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창건 당시 한강 이북 6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고려 고종 2년(1215년) 원진국사가 중창하고 우왕 14년(1388년) 무학대사가 삼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4년(1622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보광사의 내력을 담은 범종(1631년, 인조9년 주조)은 조선시대 범종양식을 잘 보여 주는 종으로 크기는 작지만 화려한 느낌을 준다. 1634년 주조한 보광사 범종과 조선 후기 편찬된 ‘양주목읍지’에는 각각 ‘고령산(高嶺山)’과 ‘고령산(高靈山)’이라 표기돼 있으나 ‘한국사찰전서’에는 두 가지 표기가 모두 실려 있고 고령산은 계명산이나 개명산(開明山) 등 지도마다 다른 이름으로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아 산림청은 ‘고령산’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줄 것을 제안한 바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