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종택 修巖宗宅 수암종택은 지방문화재 제 70호이며, 西厓先生의 제3자인 修巖 柳袗(1582~1636)선생의 종택으로 선생이 37세에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데서 비롯되며 풍산류씨 우천파 종택으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 석학과 명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겸암(謙菴)과 서애(西厓) 형제를 배출한 河回는 명당으로 이름나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S자형으로 휘돌아 흐른다하여 太極形이고 중앙에서 볼 때는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蓮花浮水形이다. 연화부수형은 꽃과 열매를 한꺼번에 갖추어 유종의 미를 이루고 그 위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므로 자손이 번성하고, 靑史에 빛나고 향기로운 偉人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河回에 못지않게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 우천(愚川)이다. 우천은 태백산, 일월산, 그리고 팔공산의 끝자락이며 또 洛東江, 渭江의 합류하는 곳이라 예부터 三山二水가 만나는 지점, 梅花落地의 명당이라 했다. 매화는 땅에 떨어지면 향기를 내 뿜기 때문에 발복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수암종택 사당에 알묘하는 영남유학회 회원
수암종택 안내와 해설을 하는 류현우 회원
상주의 유력한 재지양반 가문으로 풍양 조씨, 진양 정씨, 풍산 류씨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조씨 문중에서 지은 양진당과 오작당은 물의 범람이 잦은 지역에서 자연을 드러내는 독특한 방식을 어떻게 고안했나를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양진당(養進堂) 낙동면 승곡리에 있는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상주땅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의 가옥이다.
1981년 해체 보수 중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26년(仁祖 4)에 착공하여 3년의 공사로 1628년(仁祖 6)에 준공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66년 대 홍수로 대문채 등이 유실되었던 것을 2005년 발굴하여 복원 하였다.
상습적 침수지역에 정면 9칸, 측면 7칸의 `ㅁ'자형 평면을 한 고상高床 (누각 樓閣)식으로 지은 외관과 다소 복잡하면서 치밀한 내부 공간구성, 그리고 정성어린 조형사상을 읽게 하는 목조 수법들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상류 주택이다.
1975년 12월 30일자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85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던 중 조선시대 주거 건축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 2008년 7월 10일자로 국가 보물로 승격 되었다.
상주 지역 유교문화 안내와 해설을 맡은 강경모 선생
오작당(悟昨堂) 은 답사는 못했지만 자료가 있어 사진과 함께 간단히 올려 보았습니다~~
오작당(悟昨堂) 오작이란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근본이다" 라는 의미로 양진당의 큰길 맞은편에 있으며, 이 오작당 역시 조정(趙靖)선생이 지은 집이다. 본래 양진당이 있던 근방에 1601년에 지었던 종가(宗家)로 ,1661년에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1781년에 중수했으며 그 후 120년이 지나 다시 다시 중수한 것이 지금 모습의 기본형이 되었다.
원래 안채와 바깥채 합해서 48칸 이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간단한 사랑채, 가묘만 남아있다. 집 밖에 있는 또 하나의 사당은 구당 조목수의 불천위 사당이다.
사랑채 연못을 지나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를 마주한다.
일곱 칸짜리 일자 모습의 사랑채는 동쪽이 마루와 사랑방이고, 문간을 사이에 두고 서쪽 행랑채가 잇대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옆면 2칸으로 거의 일자에 가깝다. 서쪽이 부엌이고 길게 3칸 마루가 펼쳐진 뒤쪽으로 두 칸짜리 안방이 남향하여 있으며, 동쪽으로 한 칸짜리 방 둘이 앞뒤로 앉아 있다. 뒤쪽 방는 고방처럼 쓰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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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고택과 운곡마을 안내와 해설을 하는 조일희 회원
의암고택(依巖古宅) 의암고택은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41-1번지에 있는 검간종파(黔澗宗派)의 극암(克巖) 조식의 종택이다. 안채는 현 소유주인 조준희(趙浚熙)의 7대 조모인 延安李氏(慕任堂 1749~1826)께서 1800년경 건축 하였으며 나머지 건물들은 조준희의 조부인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 1877~1934)께서 1910년경 개축하였다. 만당 조태연선생의 조부인 의암(依巖) 조범구(趙範九 1834~1896)선생께서 거처한 곳이라 하여 이 건물의 당호를 依巖古宅이라 정하였다. 사랑채 만을 별도로 일우당(逸憂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도장채, 뒤주채,대문간채 및 사당 등 조선시대 사대부 주택의 구성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의 주택 및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대문간채와 평행으로 사랑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배치되었고 전면 좌측에 설치된 한칸의 문으로 들어서면 ㄱ자 도장채와 ㅡ자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 싸고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방형으로 토담을 두르고 가묘(家廟)를 설치하였다.
청간정(聽澗亭) 청간정은 가곡(柯谷) 조예(1608~1661)가 1650년경 건축한 건물이다. 조예의 아들인 죽파(竹坡) 조원윤(趙元胤 1633~1688)과 용술헌(容鉥軒) 조진윤(趙振胤 1635~1709) 형제는 미수 허목(許穆)의 제자로서 미수로 부터 청간정의 현판을 받아 들보에 걸었다. "청간정"의 당호는 자연의 소리인 계곡의 물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마음 깊숙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는 뜻으로서 자연을 벗하며 자신을 수양하려는 조선 선비의 자세를 알수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단에서 제자를 가르친 뜻을 본받아 정자 옆에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를 심고 이를 자손들을 위한 강학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1870년경 쇠락한 건물을 5개파 자손들이 중수한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성을 갖추고 있고 건립 당시의 규모와 형식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어 조선시대 정자건축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