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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하만물,영상.음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만물
♣진도북춤-박병천님[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 |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문화♥정원기의 국악 아카데미♣ |
박병천(중무문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은 9대에 걸친 세습단골 집안의 가장이다. 남도삼현으로 시작하여 쳐올리기, 제석굿, 영돈말이, 고풀이 순으로 이어져 망자의 원혼을 달래고 길닦음으로 마무리되는 진도씻김굿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진도에는 무형문화재가 많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만도 4종이나 있으며 지방비장 무형문화재도 <진도북놀이>와 <진도만가> 등 두 가지가 있다. 무형문화재 72호 진도씻김굿(80년 지정)의 전수조교 박병원(朴秉元)씨는 특정한 스승없이 집안 내림 재주와 굿판에서 직접 익힌 재주로 오늘의 씻김굿 음악전반을 이어받고 있다. 진도씻김굿의 예능 보유자들이나 전수·이수자들은 모두가 집안내림이 많다. 이른바 세습무가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다. 타고난 재주에다가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란 바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가 7명이며 지방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도 4명에 이른다. 그래서 진도(珍島)를 일컬어 가무의 고장이라고들 한다. 진도 사람들이 일상처럼 춤과 노래를 밥 먹듯 지켜 왔다고는 하지만 1개 군에서 6개에 달하는 무형문화재와 11명에 달하는 예능보유자를 배출한 데는 한 사람의 숨은 공로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도씻김굿> 무악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박병천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진도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각종 민속예술을 복원하고 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하여 국문학과, 민속학, 무용학 교수 등을 찾아 다니며 때로는 고증을 받고 때로는 난상토론을 벌이며 다듬고 정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하여 ‘대통령상’과 ‘총리상’ 등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박병천씨는 세습무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이 진도에 온 것은 9대조라니까 250년이 넘은 것은 확실하나 언제부터 무업에 종사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고 증조부 달영(達永)씨가 아들 형제에게 전수하고, 다시 병천씨에게 총아(叢牙)씨에게 대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병천씨의 부인 정숙자(鄭淑子)씨의 전수과정을 살펴보면 시증조모로부터 시조모, 시어머니를 거쳐 이어받고 있다.
진도에는 박씨가(朴氏家) 이외에도 몇몇 세습무당이 있었으나 박씨가가 뚜렷한 단일 계보로 이어오고 있는데다 굿을 제일 잘한다 해서 신청(神廳)의 당장(堂長)을 맡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박병천씨의 증조부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이고 당숙인 만준(萬俊)씨는 피리의 명인이 있다.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국악사에 기록되어 있는 증조부는 어찌나 대금을 잘 불었던지 그가 대금을 불면 그의 어깨에 산새가 날아와 앉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완도의 잔치 판에서 대금을 불게 되었는데, 불던 대금에서 피가 떨어지며 대금을 잡은 채 운명하였다. 시신을 진도로 운구하자 진도군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진도군장(珍島郡葬)으로 모셨다. 그래서 박병천씨는 세습무가 출신으로 자신이 무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 일이 천하다고 여겨본 적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씻김굿>은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하고 맺혀있는 원한을 풀어주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굿입니다. 의식과 형태는 다르지만 기원하는 본뜻은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우리 가문에서 빌어준 덕에 숱한 사람들이 좋은 세상에 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 입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박씨는 쓸데없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조상을 속이려는 재인 후손들을 경멸한다고 했다.
박씨는 진도신청의 당장이던 박범준씨와 진도에서 굿을 제일 잘 하는 단골무당이던 김소심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농악 칠 때 무동을 서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국민학교 때는 학예회에서 스스로 연출한 연극을 공연하여 타고난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목포상업중학과 목포상선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기도 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때는 미곡상도 해보고 포구에서 객주 노릇도 해보았으나 무슨 일을 해도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업을 잇기로 하고 부모로부터 무속에 따른 가, 무, 악과 의식 일체를 전수받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어정판(굿판)을 쫓아다니며 눈으로 익힌 탓인지 아니면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의 타고난 소질이었던지 그의 솜씨는 얼마 안 배워서 이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즈음 어머니가 몸져 눕게 되었다. “오늘이 음력 며칠이지? 내 건너 마을 안서방네 씻김굿을 해주어야 할텐데……”
“어머니, 제가 한 번 해 볼까요?”
이 말에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할 테면 똑바로 해야 한다. 어정판에 돈을 조금 내놓는 것은 가난해서 그러는 거야. 돈 적다고 슬슬하면 신장이 노하는 법이야 ......”
이때 박씨는 큰 감명을 받았다. 평생을 천대 받으면서 하는 이 무업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만은 아니며 진정 죽은 사람이 좋은 세상으로 가라고 빌어주는 값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의 가락이 갑자기 멈추고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맺힌 망자의 넋을 위로하면 박병천씨의 징이 마무리를 짓게 된다. 어느 진도사람은 박씨가 징을 잡으면 누웠던 환자가 일어나고 소도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만큼 그의 징은 발군이다. 그는 비단 징만이 아니라 꽹과리, 장구, 북 등 모든 타악기에 능하다. 또한 박씨는 <북춤>에도 달인이다. 그의 <북춤>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인 <진도북놀이>의 원형으로 판소리고법의 명인이었던 김득수씨의 부친이 창안하였으며 <진도북놀이>의 예능보유자인 양태옥씨가 전수받은 것을 박씨가 이어받은 것이다. 그가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쌍가락으로 치는 ‘북춤’은 흥이 넘치고 너름새도 일품이다.
박병천씨의 예능은 <진도씻김굿>과 <북춤>에 그치지 않는다. 진도의 각종 민속예술에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다. 1960년대까지 진도는 물론 인근 지역의 모든 가무악을 섭렵한 그는 1970넌대 들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하여 이들을 발표하게 된다. 1972년에는 <남도들노래> ‘총리상’, 1973년 <나주들노래>’총리상’, 1974년 <강강술래>’대통령상’, 1975년 <거문도뱃노래> ‘총리상’, 1976년 <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년 <진도다시래기> 등의 발표를 통해 남도의 민속예술 복원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들 가무악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자신이 각 종목의 소리와 가락과 춤을 전수하고 사설을 정리하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많은 사람들을 인간문화재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인간문화재가 못되자 한때는 실의에 빠지기도 했었으나 1980년 <진도씻김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자신을 인간문화재로 당국에서 인정하자 다시 재기하여 우리 민속악의 연원인 무악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남도의 가무악을 보급하는데 온 정성을 쏟아 부었다.
국립극장을 비롯하여 각종 공연행사에서 <진도씻김굿>의 발표공연을 하는가 하면 중앙대 무용과와 선화예고에 출강하기도 하고 자신이 서울 방이동에 ‘박병천 문화재 전수실’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박씨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공연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85년 ‘베를린음악제’에 참가, 유럽 6개국, 32개 지역을 순회한 것을 비롯, 미국과 일본 등지를 몇 차례씩 순회 공연하였으며 88서울 올림픽 때는 개회식의 화합작품을 협동안무하기도 하였다.
- 가무의 가사를 정리해서 책자로 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구전으로 내려오는 무가의 사설은 나름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이 많아 고민입니다. 백과사전을 뒤져도 없는 말들이 태반이지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상태에서 부정확한 발음이 몇 단계씩 구전 되다보니 변질된 것도 있고, 불경과 풍수사상에서 따온 전문용어도 많아 아직도 정리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제자는 많이 길러내셨으며 대물림할 후계자는 발견하셨는지요?
“제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징, 북, 장구, 꽹과리, 북춤, 무악 등을 단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은 많아도 <씻김굿> 한바탕을 제대로 전수 받으려는 후학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문의 세습무가 내 대에 와서 끊어진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다만 서울대를 나오고 한양대 국악과로 편입한 임수정 양(27세)이 가무악과 의식일체를 폭넓게 전수 받고 있어 기대를 해봅니다. 그의 아들은 서울시립국악원 대금주자로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진도에는 국가지정과 지방지정 중요 무형문화재의 인간문화재와 보유자후보, 조교, 이수자가 50명이 넘습니다. 이분들을 한군데에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전통예술인마을을 조성하고 전수회관을 건립하여 연중 공연케 함으로써 관광단지로 꾸미는 것이 소망입니다.”
한국의 집 민속공연 총감독으로 있는 박병천씨는 매일 밤 한국의 집 민속극장에서 그의 장기인 북춤을 독무로 선보이고 있다.
굿판서 날 밝혀도 피곤 몰라... 진도씻김굿 전수조교 박병원
그의 집안은 가까운 곳만 둘러봐도 모두가 국악·무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버지 박남준씨는 무악에서 시작해 여성국극단에서 음악으로 넓은 직업활동을 했던 분으로 특히 가야금, 피리에 능했다. 어머니 역시 무업에 종사했던 분이다. 그의 큰아버지 동준씨도 창극을 했고 여성국극단 전성기에 국극무대의 스타였던 박보배, 박옥진씨가 그의 사촌누이이고 오늘의 씻김굿 인간문화재 박병천씨가 그의 6촌 형이다.
김매는 아낙네도 소리 한 자락이 낯설지 않다는 소리고장 진도에서 태어났고 대대로 무업과 국악으로 일해온 집안의 후손인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그 재능을 쏟는 첫 번째 대상은 씻김굿이 아니었다.
“신악(新樂)을 했습니다. 진도 고등학교 다닐 때 밴드부에 들어간 거죠. 졸업 후에 광주에 가서 학원에 들어가 드럼을 배웠고 오르간이나 테너 색소폰을 가지고 부산, 제주, 광주, 목포 등지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가 이제는 그의 숙명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씻김굿 음악으로 돌아온 것은 28세 때였다.
“그 즈음에 진도에 밤업소가 처음 생겨 선배 한 분이 도와달라고 절 불렀습니다. 마침 몸도 아프고 해서 집에서 좀 쉴 겸 귀향했다가 그냥 굿판으로 뛰어들었죠. 굿판의 음악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천대받은 업이고 천대받던 소리였는데 다시 돌아와보니 이것이 참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집안이나 동네 어른들이 이끄는 굿판 연주무대에 끼어 앉을 수가 있었다.
원래 소질이 있고 대강은 아는 것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장구장단은 육촌형인 박병천씨에게 지도를 받았지만 대개의 음악은 듣는 것이 곧 공부고 연습이 돼서 재주가 그대로 익어 나왔다.
그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만난 씻김굿은 ‘기막히게 좋은 음악’이었다. “신악은 처음엔 흥이 나고 삼박한 맛이 있어도 곧 싫증이 납니다만 우리 음악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하면 할수록 율(律)속이 몸에 스며들고 깊은 맛이 우러나옵니다.” 이제 그는 객지로 떠돌며 서양장단 서양음률로 지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돌아온 탕아인 셈이다.
고향으로, 우리 음악으로 돌아온 그는 할 일이 많다. 장단은 대강 알지만 무가는 더 배워야 하고, 아는 것만이 아닌 깊이와 크기를 찾아내야 되고, 다시래기·강강술래·들노래·씻김굿 등 진도지역 문화재들의 행정사무처리를 해야 하고 씻김굿의 전수장학생을 가르치며 아주 바쁘게 산다. 지금 그가 다루는 악기는 장구는 물론 아쟁, 피리, 징으로 넓어져가고 있다. 진도씻김굿의 동살풀이장단을 우리 음악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그는 굿판에서 날을 밝혀도 피곤하지 않다.
인간문화재 후계자, 일간스포츠 199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