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전 거리 (시편 73:21-28)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몇 주일째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각자의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두세 사람이 모인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질병이며, 그래서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통 마비되고, 안 되고, 못 되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스크가 필수품보다 귀해지고,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배급 받듯이 사야 하는 실정입니다.
학교나 어린이집은 계속 개학을 미루고 있고, 직장인들도 재택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국과의 항공편은 모두 끊어지고, 대신 방콕, 집콕, 방굴러데시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움츠러들어 있는 사이에 그래도 봄이 오고 꽃들이 피었지만, 꽃구경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기업과 경제가 무너지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모임도 가지지 못하니,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을 많이 봅니다.
세계인들이 유튜브를 많이 보다 보니, 유튜브의 화질도 고화질에서 기본 화질로 낮추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 선진국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혼이 나고, 영국은 총리가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거나 여행을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안하고, 쫓겨서 급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후원하는 아비가일 선생도 도시가 봉쇄되고, 대사관에서 귀국하도록 전세기 예약을 하라고 계속
연락한답니다.
그러나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남겠다고 합니다.
그곳에 보내신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우리가 더 힘써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속에 많이 듣는 말이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감염병의 전파를 감소시키는 통제 전략입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접촉 가능성을 감소시켜 바이러스의 전파를 늦추기 위한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기침이나 재채기 등의 비말 감염의 경우에 가장 효과적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1-2미터 이상 유지하는 것입니다.
학교는 휴교를 하고, 직장도 재택 근무를 하고, 교회까지 모이지 말고 가정에서 예배드리자고 합니다.
모여도 멀리 떨어져 띄엄띄엄 앉아야 합니다.
인사할 때도 몸이 접촉하는 악수 등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컵이나 식기 등도 개인별로 따로 쓰라고 하고, 식사도 마주보지 않고 떨어져 앉아서 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영국에서는 3명 이상 모이는 집회를 금지시켰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마스크를 쓰고, 탈의실 같은 밀집된 공간을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벚꽃과 유채꽃이 만발하였지만 꽃구경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건강을 지키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자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관련하여 안전 거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시편 73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의문과 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성도의 의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인들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이 더 잘 되고 형통한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문제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악인들은 온갖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교만하지만,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잘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악인들은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도 고통 없이 편하게 죽습니다.
악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없이, 평안하게 잘 사는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교만을 목걸이처럼 달고 살며, 폭력을 옷처럼 입고 삽니다.
잘 먹고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날 정도이고, 그들의 소득은 기대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악인들은 사람들을 비웃고, 악하게 말하고, 거만하게 말하였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방하는 말을 하고, 사람들을 향해서도 악한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도 부정합니다.
악인들은 이렇게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났습니다.
반면에 시편 기자는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의롭게 사는 것이 헛된 것처럼 보여서 탄식하였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애쓰는 시편 기자는 형통한 악인들과 너무도 대조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깨끗한 마음과 의롭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헛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악인들의 형통함에 질투가 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통스러운 의문의 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모든 것을 아시고,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마침내 파멸에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완전히 망할 뿐 아니라 그 파멸이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악인들은 갑자기 황폐하게 되고, 놀랄 정도로 완전히 전멸할 것입니다.
악인들의 번영과 형통함은 덧없이 사라지는데, 사람이 잠에서 깨면 잊어버리는 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모순되게 보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이 많으나, 불신자들은 평안히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병들고 일찍 죽기도 하나, 불신자들은 건강하고 오래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난하고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으나, 불신자들은 부자가 되고 형통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은 작고 힘든 경우가 많은데, 이단들은 크고 왕성합니다.
교회들은 전도가 힘들고 청년들이 줄어드는데, 이단들은 청년들이 바글바글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어떻게 이런 모순된 상황이 많은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이 때가 되면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십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우리의 의문과 고통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풀려집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을 때는 성전에 나아가야 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히스기야왕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위협과 조롱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성도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눈물로 간구한 자리들이 있습니다.
그 기도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여러분을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하였고, 그 기도의 결과가 오늘 여러분에게 응답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악인들의 종말을 깨닫고, 자신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22절).
자신의 어리석은 질투와 믿음이 흔들렸던 것에 대하여 아파하며 후회하였습니다.
한때 어리석은 의문에 빠졌던 시편 기자였으나,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하시고, 그 오른손을 붙잡아 실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4-25절)
이 말씀은 목사인 제가 애송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의 교훈으로, 주의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을 자가 없습니다.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악인들은 망하고 꿈처럼 사라지지만, 의인들은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심을 받고, 영광으로 영접하심을 받습니다.
시편 기자는 한때 어리석은 의문에 빠졌으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본래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영에 의문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교훈을 따라 살아갑니다.
악인들의 형통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영광의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5절)
그러면서 영적인 안전 거리에 대해 고백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7-28절)
주를 멀리하는 자, 음녀가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처럼 주를 떠난 자는 멸망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 됩니다.
사람들 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가족 사이의 거리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의 거리가 있습니다.
직장 동료 사이의 거리가 있습니다.
이웃 사이의 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가까워야 하고, 어떤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가까워야 할 거리가 멀어지거나, 멀어야 할 거리가 가까울 때 문제가 생기고 고통이 따릅니다.
이것을 사람 사이의 안전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산문시 ‘예언자’에서 결혼에 대한 구절입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 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 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따로이듯이.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
서양 격언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두고도 그렇게 걱정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아예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이고 예배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5)
차를 운전할 때도 안전 거리가 필요합니다.
안전 거리는 안전 운전을 위해서 제동 거리만큼 유지해야 하는 앞차와의 거리를 말합니다.
안전 거리는 안전 운전의 기본입니다.
안전 거리를 무시하고 운전하는 습관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 두기도 생명의 안전 거리입니다.
사람들 간의 거리나 자동차의 안전 거리는 필요하지만, 영적인 안전 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기 위해 사람 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복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 나쁜 친구를 가까이 하면 해를 당하게 됩니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를 가까이 하면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복을 받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27-2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야고보서 4:8)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갈망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종이 되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항상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멀찍이 따라가다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마가복음 14:54)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적당히 믿고, 신앙생활도 적당히 해야지.”
“주일마다 교회를 꼭 가야 하나.”
“교회 일도 너무 많이 하면 안 돼.”
모두 다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교회에 모이지 못하는 때이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기도도 더 하고, 성경 말씀도 더 읽고, 가족끼리 더 사랑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최근 트롯 경연 프로그램인 미스터트롯에서 1등 진(眞)을 차지한 임*웅 씨의 영상입니다.
임*웅 씨는 4년 전에 가수로 데뷔하였으나 인기를 얻지 못하고, 무명 가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로 지방의 축제나 노래교실 등에 다니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미스터트롯에서 진(眞)이 되면서 인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임*웅 씨는 무명 시절 어디에 가서나 성실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 어느 노래교실에서 노래하였던 영상입니다.
노래교실에 온 회원들이 환호하며, 임영웅 씨의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합니다.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모두 잡아 주고, 안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임*웅 씨의 손을 잡고 안아 본 사람들은 1년 반 후에 미스터트롯에서 우승한 임영웅 씨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것입니다.
임*웅 씨가 이렇게 뜰 줄 알았다면 사인이라도 받아 둘 것을….
* 임*웅 노래 천년지기
https://www.youtube.com/watch?v=8zM3LhKnsqE
임*웅 씨의 손 한 번 잡아 보는 것이 뭐가 대단하겠습니까.
그래도 이제는 미스터트롯 진이 된 임*웅 씨의 이야기를 할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갈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노래하는 임*웅 씨를 보면서 그때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은 임*웅 씨의 손 한 번 잡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부어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권능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은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복입니다.
어렵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하셨습니다(이사야 41:8).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임*웅 씨는 “올라가야지.” 하고 관객석으로 올라갔으나, 예수님은 “내려가야지.” 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사람 사이에, 자동차 사이에는 안전 거리가 필요합니다.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도 안전 거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안전 거리는 가까울수록 안전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종말을 깨달은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27-28절)
하나님과 가까운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안전 거리는 가까워야 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4)
예수님의 이름 중에 임마누엘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우리 아버지 하나님,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리와 먼 거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손 내밀어 보세요.
하나님이 그 손 잡아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보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 잡아 보세요.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세요.
권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