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낙하산 아이
점멸하는 안내판과 그로테스크한 토템 폴, 그 뒤에 한물간
양복을 입고 그림자처럼 서있는 그가 한 프레임에 들어왔다. 마치 현대극과 시대극을 합성한
영화 포스터 같았다. 퇴색한 포스터 한가운데 그가 들고있는 피켓의 글씨가 형광으로 빛났다. 참 희한했다. 아무리 멀어도
한글은 한눈에 들어오고, 길 건너편에서 하는 한국말은 입모양새만으로 다 짐작을 한다. 모국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숨 쉬듯이 기침하듯이 튀어나오는 것, 머리 싸매지
않아도 절로 익혀지는 것. 그 좋은 걸 두고 영어 배우겠다고 기러기 엄마, 독수리 아빠, 낙하산 아이가
되어 수만 리 창공을 날아든다.
한글 피켓 쪽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자석에 끌리듯이. 양복쟁이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 한 편에 어둠이 내려 검버섯이 핀 듯했다. 낯이 익은데
누구지? 가물가물했다. 가까이 가자 그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허, 이게 누구야? 갤러리 미스
뱅?”
대기업 신입사원처럼 양복을 빼입고 식당에 출근했던 학경력이 한 손을 내밀었다. 피켓을 숨긴
채.
“에이, 미스 뱅이
뭐야. 아무튼 반가워요. 근데 누구 마중 나온 거예요?”
“응, 영어 캠프
오는 학생. 명절인데 직원들을 불러낼 수 있나? 그래서 몸소
출동했지. 허허. ”
너털웃음을 웃는 그의 표정이 웬지 서글퍼 보였다. 겉으로 웃지만
속으로 울고있는 찰리 채플린 같았다. 초라함을 감추려고 허세를 부리는 그가 짠했다.
“교육사업, 교육사업하더니
드디어 꿈을 이루었네요. 축하해요.”
“웬걸. 미스는 아직
거기서 일해? 그 깐깐한 사장 밑에서 오래 견디네. 우리쪽 일
해볼 생각 없어? 영어 잘하고 학벌 좋으니 딱 제격인데. 공짜로 한국
왔다갔다 할 수 있고. 십 년이 되도록 아직 한국 못 갔다고 했지? ”
“딱히 가고 싶지도 않아요. 이젠 그리운
것도, 보고픈 사람도 없는 걸요.”
정말일까, 그네의 말이. 그네도 학경력처럼
허세의 외투를 걸친 건 아닌지.
“그래도. 미스가 원하면
한국 왕복 항공권 하나 정도는 구해줄 수 있어. 전화번호 좀 줘.”
때마침
탑승객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가 든 피켓이 풍선처럼 동동 떠다니는 걸 보며 인사할 새도 없이 입국장을
나왔다.
채 스카이트레인 역에 도착하기 전인데 휴대폰이 울렸다. 학경력이었다.
“미스, 지하철 탄
거야? 아직이면 나좀 도와줘. 제발, 응?”
다급한 목소리로 재우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어 다시 입국장으로 돌아갔다. 학생이 세관에
걸려 있는데 현지인이 보증을 서줘야 한댄다. 하지만 영어가 짧아 이민관과의
통화가 불가능하다고.
“헬로우, 전 소희 연. 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찬우 정과 당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후견인의 대리인이라 말하자니 번거로워 그냥 후견인이라고 했다. 그러자 곧장
질문들이 쏟아졌다. 방문 목적이 무엇이냐, 왜 한국이
아닌 필리핀에서 오느냐, 어린 학생이 보호자도 없이 왜 혼자냐 등. 아차,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아니구나. 학경력에게 묻고 메모해가며 이민관에게 알려주다 보니 거의 동시 통역
수준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이민관의 말에 숨을 고르기는 커녕 공연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취업비자를 연장해 가며 빌붙어 사는 그네가 후견인 자격이 있느냐고 되물을
것 같고, 또 거짓말한 게 들통나 추방되는 건 아닐까 해서. 휴대폰을 쥔
손등에 퍼런 정맥이 솟았다. 후회와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차마
사색이 된 학경력과 호랑이 이민관 앞에서 벌벌 떨고있을 학생을 팽개치고 도망칠 순 없었다. 휴대전화의
침묵은 모질게도 길었다. 침묵이 고문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낄 만큼.
“오케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찬우
정의 출국 날짜와 그때까지 머물 곳은?”
“잠깐만요. 수첩을 꺼내서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출국일자와 홈스테이? 소곤거려도 손바닥에 써줘도
못 알아듣는 학경력 때문에 애를 먹은 그네가 아예 그의 손에 든 파일을 뒤적여 알려주었다. 등에 진땀이
자작했다. 통화가 끝났지만 그대로 통과되었는지 거부된 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또
기다리는 게 고역이었다. 가끔 세관에 걸리거나 거짓말해서 쫓겨가는 경우도 있다는 학경력의 귓속말이 그네를 더 긴장케
했다.
얼추 한 시간이 지났을까. 한 소년이 제 몸집의 배가
넘는 큰 가방을 카트에 싣고 나왔다. 두리번거리다가 제 이름이 쓰인 피켓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선 그네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생면부지이면서도
진짜 혈육을 만난 듯.
고맙다며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학경력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늘 하루
느닷없이 맡은 세 아이의 이모 역할이 너무 버거웠다. 학경력은 의외로 끈질겼다.
“1일 가디언이라도 그 책임은 다해야지. 큰 신세를
졌는데 보답할 기회를 주심이.. .”
얼렀다 달랬다 하는 학경력의 간청보다 잔뜩 겁을 먹고 그네의 소맷자락을 놓지 않는 찬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동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찬우는 그네 어깨를 베고 금세 잠이 들었다.
또 하나의 ‘낙하산 아이(Parachute
Kids)’가 성공이라는 이름의 로켓에 강제로 태워져 우주를 방황하고 있다. 제 꿈을 꾸어볼
겨를도 없이 제 행복 도표를 스스로 그려보지도 못한 채 편견과 아집의 잣대로 계산된 인생설계에 등 떠밀려.
엄마의 죽음으로, 또 모국을 떠나옴으로써 궤도를
벗어난 행성처럼 유랑하던 자신의 모습이 찬우에게 오버랩되었다.
공항을 빠져나간 자동차는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갓 아래 안개가 짙었다. 안개가 차창에 부딪혀 두 날개를 편 아기새 그림을 그렸다. 안개가 굵어지면서
날개 한 쪽이, 나머지 날개가 부러지고 마침내 새의 형상은 물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날개 찢기는
아픔이 전해졌을까? 찬우가 잠결에 흐드득 흐느꼈다.
자동차가 방지턱에
걸려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찬우가 눈을 떴다. 주택가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있어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찬우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첫눈처럼 맑고 순한 웃음이었다.
골목이 끝나가는 코너에 작은 십자가를 인 예배당이 나타났다. 지붕이 나즈막하고
네모져서 외양간처럼 보였다. 아무리 큰 사람도 이곳에 들려면 스스로 낮아져야 할 듯했다. 아무때나 찾아와
기댈 수 있는 소박하고 아담한 예배당, 그곳이 기독교회면 어떻고 천주교회면 어떠랴. 세상살이 때꼬장물
질질 흐를 때 텀벙 뛰어들어 칼칼하게 헹굴 수 있는 옹달샘이면 어느 종교 어느 종파여도 상관없었다.
어둠 속에
작은 예배당을 빛나게 하는 것은 한곁에 불 밝힌 아치 형의 동굴이었다. 화관처럼 두른 리스 아래
뭔가가 놓여있고 그 주변에 촛불이 나풀거렸다.
홈스테이집에 찬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온 그네의 뇌리에 그 작은 예배당의 동굴 속 촛불이 너울거렸다. 분명 처음인데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훗날 인연의 끈이 닿을 것 같은.
201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