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자의 설교내용을 필자의 묵상과 결부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 내용과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을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나는 양(羊)’이라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을 맴도는 양의 이미지는 온순하고 하얀 털로 덮인 채 초장에서 풀을 뜯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을 덮는 털에 온갖 오물이 묻어있는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무기가 될 만한 것도 없으며, 겁이 아주 많고, 미련하며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양’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다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낭떠러지와 같은 위험천만한 곳인지도 모른 채 서성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양은 목자를 만나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양은 목자를 만났을 때부터 그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양은 목자를 만나면서부터 푸른 풀밭을 거닐며 쉴 만한 물가에서 부족함이 없는 만족을 누립니다. 양의 털은 물을 잘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물에 빠지면 자신의 무게에 못 이겨 익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목자는 양들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시편 23편이 널리 애송되고 있는 이유는, 시편 23편이 모든 성도의 삶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이고 현재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 부요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끔찍하고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기에 23편의 시적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과 같은 우리는 목자를 만나도 영혼의 소생이 필요함을 노래합니다(2v).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를 만족하지 못하고 꾀를 부리고 요령을 피워 봅니다. 마냥 좋아하기 보다는 싫증을 내고 불평하며 자기의 길을 가 버리곤 합니다. 양은 비스듬한 언덕빼기 그늘에 숨어서 기대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몸이 뒤집어질 때가 있습니다. 양은 자기 몸이 뒤집어진 상태에서 도로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발버둥을 치다가 기력이 쇠하면, 독수리와 매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목자는 양의 수를 세다가 맞지 않는다 싶으면 하늘을 봅니다. 새가 날아다니고 있는 곳에 황급히 달려가 보면, 뒤집어진 양이 어떻게든 몸을 재우쳐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혹은 거의 지쳐가고 있는 모습 위에 맹수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목자의 도움으로 양이 소생될 수 있었습니다.
양은 목자를 만나고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간증을 들을 때마다 영혼의 눌림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소위 ‘잘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저의 20대의 암흑과도 같았던 시간들과의 괴리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의 20대의 삶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설은, 복음 자체는 좋은 소식, 복된 소식임에도 우리의 생각처럼 인생의 밝음의 연속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심에도 불구하고 지나가게 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이하 사음골).
사음골은 평소에 사소하게 겪는 실패, 아픔, 눈물과 같은 일상적인 어려움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만 같은 실패와 좌절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동반합니다. 사람들의 위로가 위로로 다가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채 홀로 서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 온갖 여론의 공격과 리더십의 타격 이단침입으로 인한 분열공세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랑의교회의 현재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사음골을 중간으로 23편의 앞뒤의 내용의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앞의 내용은 양이 목자를 만났기에 풍성함을 누리고 부족함이 없다는 소극적인 고백이라고 한다면, 사음골을 지나고 나서의 시편 기자의 고백은 차원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깊이 있는 진심어린 고백으로, 목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적극적으로 고백합니다.
신앙, 성도의 삶의 경험은, 시련을 당해도 남들이 겪는 더 큰 시련과 절박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쉽게 지나간다고 치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음골의 역할은 무엇이고, 시편 기자는 어떻게 차원이 다른 고백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목자는 양이 사음골을 지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목마르고 굶주려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원수의 목전 앞에서 잔치상을 차려 주십니다.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사음골은 위험만 도사리는 곳이 아니라 조롱과 비웃음과 송사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움 중에,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입히는 실수를 범하고 상처받은 모습들을 바라볼 때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매우 핍절한 상황의 끝에서 잔치상을 차려 주시는 반전 때문에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아직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성경 속 인물 중 욥은 사음골과 같은 순간을 지날 때,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러나 욥은 이와 같은 고백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1, 4, 20),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5-16)
사음골을 지나면서 우리는 욥처럼 때로는 신실하게 주님(의 뜻)을 기다릴 때도 있지만,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한계와 부끄러움 등을 가릴 수 없도록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욥은 자신을 가리키며 이와 같이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사음골은 우리 인생이 티끌 내지 먼지와도 같다는 본질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본질상 전능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답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돌아보게 되는 장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함을 인정받았던 욥조차도 탄식하고 무너진 곳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나를 잊으셨나요?’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만이 계속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음골은 ‘지나가는 길(passby)’일 뿐입니다(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 - NIV psalms 23,4).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고독한 곳,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질고가 있는 곳, 모든 쌓은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은 곳, 수없는 역경 속에서 나라도 바로 서서 몸부림치면 어떻게든 살 길이 보일 것 같은데도 아무리 힘을 내서 일어나려 해도 같은 혹은 더한 상처를 반복하게 될 때의 좌절감과 무력감에 내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통과(pass; through)하는 것입니다. 사음골을 지나면서 나의 신앙의 내면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원망과 불평 가운데서도 목자되신 주님께서는 언제 그러했냐는 듯 원수 앞에서 잔치상을 차려 주십니다.
사음골을 지나기 전에는 부족함이 없는 부요함을 받을 만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다면, 사음골을 지난 후에는 지난날 주께서 선대하셨음에도 내 모습이 이 모양 이 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지도 않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처 위에 기름을 부으시고 잔치상을 차려 주심을 목도하면서, 나의 연약함과 죄성과 악함과 믿음없음이 너무도 수치스럽고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처절한 연약함과 부족함에 비하면 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요한 잔치상 앞에서 시편 기자는 이전에는 고백할 수 없었던 진실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고백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 동안 좋은 명성과 평판을 들어오며 순탄하게 걸어왔던 사랑의교회는 지금 사음골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깊이 받아내어서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신앙고백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사음골을 지나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과 상처가, 더 아프고 상하고 약하고 질고를 겪는 영혼들을 매만지는 도구로 사용될 것을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상처입은 영혼들을 깊이 이해할 줄 아는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넘치는 잔의 부요함’이 무엇인지 아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이 다른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훌륭한 리더십이나 신실한 성도들 때문이 아닙니다. 리더십도 우리도 다 같이 티끌 내지 먼지와 같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모순과 질고와 아픔과 부패함과 죄성과 패악함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구주가 있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습니다. 모순된 세상의 법칙을 소멸시키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새 시대를 준비하는, 부활하신 구주 때문에 회복되는 십자가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은혜의 통로로 변화되는 사랑의교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축원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내 잔에 가득했던 분노와 원망과 아픔과 원통함과 질고와 연약함과 죄악을 모두 비워 내게 하시고, 갈급함과 목마름으로 신음하는 빈 질그릇에 보배되신 구주의 십자가 은혜를 넘치도록 채워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전의 우리는 ‘죽어봤자 천국’이라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소극적인 신앙고백만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안주하며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나의 모습에 취해 있던 연약하고 교만한 것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도 더 처절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것이 나의 모습임을 깨닫게 하셔서, 구주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절박하게 고백하게 하시니 기쁨의 눈물 아니 흘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의 십자가를 새김으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소서.
첫댓글 특새 후 이 글이 항상 기다려졌습니다. 너무도 고맙습니다~^^
와ㅡㅡㅡ놀라워요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기 말고도 다른 경로로 글을 받았습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소원하시는 바 주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저도 소원합니다. ^^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