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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살자가 되고 싶다. 나를 괴롭힌 친구들을 죽이고 싶다."
인터넷 게임중독에 빠진 고1 윤기준(가명·17)군이 2년 전 글짓기 노트에 남긴 글이다. 윤군의 손목을 붙잡고 전남청소년종합지원센터를 찾은 당시 담임교사는 이 글짓기 노트를 들고 왔다.
"매일 글짓기 주제가 다른데 기준이는 늘 총·군인·싸움·아바타·아이템 같은 인터넷 게임과 관련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씁니다. 일상적인 의사소통도 안 되고, 하루에 10시간 정도는 인터넷 게임에 매달리는 것 같아요." 윤군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새총을 만들어 친구들을 쏘는 등의 폭력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넷 중독은 IT강국 대한민국의 어두운 이면(裏面)이다. 여성가족부와 교육과학기술부가 전국 초등학교 4학년 및 중학교 1학년생 123만여명을 대상으로 전수(全數) 조사를 했더니, 6만8000여명(5.5%)이 인터넷 중독이거나 중독 우려 직전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각적으로 전문상담·치료가 필요한 '고위험군'이 2만명(1.6%), 인터넷 중독에 빠질 것이 우려되는 '잠재적 위험군'은 4만8000명(3.9%)이었다.
◆저소득층 자녀가 더 심각
앞서 소개된 윤군의 인터넷 중독 배경에는 '부모의 방임'이 있었다. 윤군은 어려서 어머니와 사별했고, 아버지는 2008년 가출했다. 부모 대신 윤군을 돌봐주던 조부모와 큰아버지 역시 생업이 바빠 인터넷 중독에 빠진 윤군의 심각성을 제대로 몰랐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중독이 맞벌이 가정이나 조손(祖孫) 가정 등 저소득·소외계층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성윤숙 연구위원은 "실제로 실태조사를 해보면, 부모님이 곁에 붙어서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강남 학생들보다 강북 변두리 학생들의 게임 중독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며 "정보격차가 아니라 가정 형편에 따른 '관리격차'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성 연구위원은 "정부가 정보격차를 줄인다며 조손가정 등 저소득계층 10만명 이상에게 공짜로 컴퓨터를 놔주고 통신비를 지원했는데, 이게 오히려 인터넷 중독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컴퓨터만 놓아줬을 뿐, 컴퓨터를 어떻게 교육적·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과도한 몰입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는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중독자는 더 많아"
인터넷 중독 청소년은 '10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09년 인터넷 중독 실태조사에선 9~19세 청소년 93만8000명이 인터넷 중독인 것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정부가 정작 실태 조사에 나선 것이 2004년, 전수조사에 나선 것은 작년이었다. 그나마 내세운 대책은 중독 학생이 자발적으로 치료 등을 원할 때 돕는다는 정도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인터넷 중독 위험군 중 상담·치료를 희망하는 청소년에게는 전국 166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156개 정신보건센터, 179개 치료협력병원을 통해 상담·치료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가정형편에 따라 최대 30만~50만원까지 치료비 지원도 해준다.
그러나 치료까지 연결된 학생은 지난해 약 200명에 불과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부모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거나 소아청소년정신과 치료기록이 남는 것을 우려해 치료 대신 상담만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증 인터넷 중독을 예방하자는 이른바 '신데렐라법'(자정 이후 강제로 인터넷 게임 접속을 금하는 법)도 관련 부처 간의 줄다리기로 아직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정부의 전수조사는 특정 연령에만 국한돼 중독자가 실제보다 적게 파악된다는 한계도 갖고 있다. 이형초 인터넷중독연구소장은 ▲부모 조사가 빠졌다는 점 ▲인터넷 중독이 심할 것으로 추정되는 학교이탈 학생이 포함되지 않는 점 ▲기명 조사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 인터넷 중독 청소년은 더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윤숙 연구위원도 "인터넷 중독 조사 척도를 보다 정교하게 하면 실제 중독자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중독 위험군
▲고위험군=인터넷을 이용하지 않을 때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등 당장 전문가의 상담·치료가 필요한 경우. 중고생의 경우 하루 4시간 이상(초등생 3시간 이상) 인터넷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잠재위험군=약한 수준의 금단증상이 나타나고 스스로 문제가 없다고 느끼지만 인터넷 중독 우려가 있어 상담·치료가 권장되는 경우. 중고생의 경우 보통 3시간(초등생 2시간) 정도 인터넷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