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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설 13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13권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서문
세상에는 광명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순전히 광명의 덕입니다. 우리가 보물이 가득한 창고에 들어가더라도 광명이 없으면 무엇이 흙이고 무엇이 돌이며, 무엇이 쇠고 무엇이 구리며, 무엇이 은이고 무엇이 금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광명과 같은 지혜가 없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뒤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며,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삿된 것인지 모른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로 두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광명이란 곧 깨달음이며, 깨달음은 곧 지혜며, 그 지혜는 곧 진리의 가르침인 화엄경입니다.
세상 모든 분야에서의 발전은 의문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불법에서의 모든 공부와 수행도 역시 의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보살문명(菩薩問明)이란 공부와 수행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의문을 갖는 태도를 드러내 보입니다.
불법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수행하고 바르게 깨달으려면 먼저 의문을 가져야 하며 그 의문을 밝게 해결하는 일입니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여러 보살들과 질문과 그 답을 주고받으며 불법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분석해갑니다.
연기는 무엇이며 교화는 무엇이며, 업과는 무엇이며 설법은 무엇이며, 복전은 무엇이며 교법은 무엇이며, 바른 행은 무엇이며 수행은 무엇이며, 일도(一道)는 무엇이며 부처님 경계는 무엇인지 실로 불법에 가장 중요하며 기본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실로 인생에 있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의문을 가져야 하며 그 의문을 밝게 해결해야합니다.
화엄경은 모든 의문의 그 바른 답입니다.
쉼 없이 정진하여 인생의 가장 유익하고 정확한 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2014년 8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차례
1, 세존의 정각수승(正覺殊勝)
1) 족륜방광(足輪放光)
2) 세존의 팔상성도(八相成道)
3) 그 외의 제천(諸天)
2, 정각(正覺)의 인과
1) 광명변조(光明徧照)
3, 정각(正覺)의 팔상(八相)
화엄경 강설 제13권 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강설 ; 광명각(光明覺)이란 광명을 놓아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먼저 부처님께서 두 발바닥으로 백억의 광명을 놓아서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가지가지의 차별한 현상들을 비춘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때 본질과 현상으로 나누는데 현상에 해당한다. 다음에는 문수보살이 지혜의 광명으로 평등한 이치를 비춘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을 뜻하는 광명이다. 부처님의 몸의 광명과 문수보살의 지혜의 광명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 본질과 현상이 융합한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즉 본질이 현상이고 현상이 곧 본질인 이치,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이렇게 본질과 현상이 원융하게 엮여서 천백억화신으로 작용하는 사람 부처의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제2회에서 이상의 여래명호품과 사성제품과 광명각품 3품은 믿음의 의지가 될 불과(佛果)의 덕(德)을 밝히었다. 다음의 보살문명품과 정행품과 현수품 3품은 능히 믿는 행을 보이는데 믿음에는 지혜와 수행과 그 공덕이 있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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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1, 세존의 정각수승(正覺殊勝)
1) 족륜방광(足輪放光)
爾時에 世尊이從兩足輪下로放百億光明하사照此三千大千世界의百億閻浮提와百億弗婆提와百億瞿耶尼와百億鬱單越과百億大海와百億輪圍山하니라
그때에 세존이 두 발바닥으로부터 백억 광명을 놓아서 이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염부제(閻浮提)와 백억 불바제(弗婆提)와 백억 구야니(瞿耶尼)와 백억 울단월(鬱單越)과 백억 대해(大海)와 백억 윤위산(輪圍山)을 비추셨습니다.
강설 ; 세존의 정각은 참으로 위대하고 수승하다. 위대하고 수승함을 광명으로 표현한 것이 광명각품이다. 세존이 두 발바닥으로부터 백억 광명을 놓았다는 것은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 관한 법문을 설하시었다. 즉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법문 중에 믿음이 최초이다. 발바닥은 행의 근본이 되며, 몸은 발바닥을 말미암아 머물 수 있듯이 믿음을 통해서 이해와 실천과 성취가 성립됨을 밝혔다.
백억 광명을 놓으니 삼천대천세계의 남쪽 염부제와 동쪽 불바제와 서쪽 구야니와 북쪽 울단월이 모두 각각 백억 세계나 되는 것을 남김없이 다 비추게 된 것이다. 정각의 위대함이 어느 세계에선들 위대하지 않겠는가. 깨달으신 진리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서도 보편타당하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화엄경의 가르침이 옛날에는 맞았으나 지금은 맞지 않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리라. 동양에만 맞고 서양에는 맞지 않다면 그도 진리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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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의 팔상성도(八相成道)
百億菩薩受生과百億菩薩出家와百億如來成正覺과百億如來轉法輪과百億如來入涅槃하니라
또한 백억 보살의 생(生)을 받아 태어남과 백억 보살의 출가(出家)와 백억 여래의 정각(正覺)을 이룸과 백억 여래의 법륜(法輪)을 굴림과 백억 여래의 열반(涅槃)에 드심을 비추셨습니다.
강설 ; 깨달음의 광명, 진리의 광명, 지혜의 광명을 통해서 비로소 세존의 팔상성도를 이해하게 된다. 만약 불교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믿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하고 만다면 어찌 세존의 일생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정각과 법륜을 어찌 알겠는가. 금은보화가 가득한 방 앞에 이르러 문을 열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화엄경의 광명을 빌어 방문을 열고 불법의 보고(寶庫)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세존의 팔상성도에서 다섯 가지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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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그 외의 제천(諸天)
百億須彌山王과百億四天王衆天과百億三十三天과百億夜摩天과百億兜率天과百億化樂天과百億他化自在天과百億梵衆天과百億光音天과百億徧淨天과百億廣果天과百億色究竟天하사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라
또한 백억 수미산왕과 백억 사천왕중천(四天王衆天)과 백억 33천(天)과 백억 야마천(夜摩天)과 백억 도솔천(도率天)과 백억 화락천(化樂天)과 백억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백억 범중천(梵衆天)과 백억 광음천(光音天)과 백억 변정천(徧淨天)과 백억 광과천(廣果天)과 백억 색구경천(色究竟天)을 비추시니,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모두 다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세존이 두 발바닥으로부터 백억 광명을 놓으니 인간세상만 비출 뿐 아니라 온갖 천상세계도 다 비친다. 인간의 삶과 천신들의 삶까지 깨달음의 광명으로 그 실상을 꿰뚫어 본다. 깨달음의 안목이라야 모두 다 환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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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세존의 법회
如此處에 見佛世尊이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하야其百億閻浮提中에百億如來도亦如是坐하시니라
이곳에서 부처님 세존이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십불찰 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백억 염부제(閻浮提) 가운데의 백억 여래께서도 또한 이와 같이 앉으시었습니다.
강설 ; 세존은 처음 정각을 이루신 보리도량에서 자리를 옮겨 보광명전 사자좌에 앉아계시고, 십불찰 미진수의 보살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다시 또 백억이나 되는 염부제에 또 백억이나 되는 세존이 똑 같이 그렇게 계신다. 주위환경과 둘러싸고 있는 보살들의 숫자도 또한 똑 같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산천초목과 두두 물물이 모두 세존이고 모두 보살들이다. 너도 나도 다 같이 천백억화신이 되어 불성생명으로 이렇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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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5) 법회에 온 대중
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名曰文殊師利菩薩과覺首菩薩과財首菩薩과寶首菩薩과功德首菩薩과目首菩薩과精進首菩薩과法首菩薩과智首菩薩과賢首菩薩이요
모두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낱낱의 보살이 각각 십불찰 미진수의 보살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갔느니라. 그들의 이름은 문수사리보살과 각수(覺首)보살과 재수(財首)보살과 보수(寶首)보살과 공덕수(功德首)보살과 목수(目首)보살과 정진수(精進首)보살과 법수(法首)보살과 지수(智首)보살과 현수(賢首)보살이었습니다.
강설 ; 시방으로 각각 십불찰 미진수의 보살들이 있고 그 보살들 중에 각각 한분의 큰 보살이 있다. 그들의 이름을 밝혔다. 이름에 모두가 머리, 우두머리, 으뜸, 상수라는 수(首)자가 놓여 있다. 불법을 수행하고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을 교화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믿음의 중요성을 설법하려는 뜻에서 법회대중들의 상수보살들을 소개하면서 상징하여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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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6) 보살들이 온 세계
是諸菩薩이 所從來國은 所謂金色世界와 妙色世界와 蓮華色世界와 薝蔔華色世界와 優鉢羅華色世界와 金色世界와 寶色世界와 金剛色世界와 玻瓈色世界와 平等色世界라
그리고 이 모든 보살들이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른바 금색(金色)세계와 묘색(妙色)세계와 연화색(蓮華色)세계와 담복화색(薝蔔華色)세계와 우바라화색(優鉢羅華色)세계와 금색(金色)세계와 보색(寶色)세계와 금강색(金剛色)세계와 파려색(玻瓈色)세계와 평등색(平等色)세계이었습니다.
강설 ; 보살들이 온 세계를 밝혔다. 그 세계도 또한 차별현상을 표현하는 색(色)을 들어 표현하였다. 차별의 현상은 곧 본질인 평등과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다. 모두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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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7) 모신 부처님
此諸菩薩이各於佛所에淨修梵行하시니所謂不動智佛과無礙智佛과解脫智佛과威儀智佛과明相智佛과究竟智佛과最勝智佛과自在智佛과梵智佛과觀察智佛이시니라
이 모든 보살이 각기 부처님 계신 곳에서 범행(梵行)을 깨끗이 닦았으니, 이른바 부동지불(不動智佛)과 무애지불(無碍智佛)과 해탈지불(解脫智佛)과 위의지불(威儀智佛)과 명상지불(明相智佛)과 구경지불(究竟智佛)과 최승지불(最勝智佛)과 자재지불(自在智佛)과 범지불(梵智佛)과 관찰지불(觀察智佛)이셨습니다.
강설 ; 그 많고 많은 보살대중들은 훌륭한 보살이 될 수 있었던 근본이 있음을 밝혔다. 모두 부처님의 처소에서 청정한 범행을 잘 닦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셨던 보처님의 이름은 모두 지혜라는 지(智)자가 있는 부처님들이다. 하나하나 부처님의 명호가 얼마나 뛰어난 이름들인가. 부동지불(不動智佛) 무애지불(無碍智佛) 해탈지불(解脫智佛)들이다. 불법에는 무엇보다 지혜가 근본이다. 자비도 지혜가 있어야 바른 자비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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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8)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各於佛所에同時發聲하사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강설 ;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보살이란 무슨 뜻인가. 명명백초두(明明百草頭)에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라더니 낱낱이 문수사리보살이요, 낱낱이 지혜광명이다. 옛날 해인사에서 산감을 살 때, 길에서 자주 만나는 거지가 있었다. 행여 문수보살이 아닐까하고 의심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기특하게도 바로 의심하였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천지만물이 모두 문수보살이 되어 동시에 소리를 내어 게송을 읊어 노래 부른다. 처처가 불상이요, 사사가 불공이라는 말도 있다. 지혜의 광명으로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아 처처가 문수사리보살임을 알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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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1> 바른 이치가 아님
若有見正覺이解脫離諸漏하고
不着一切世하면彼非正道眼이니라
만약 어떤 이가 정각(正覺)을 보되
해탈하여 모든 번뇌[漏]를 떠나고
온갖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줄로 보면
그는 도안(道眼)을 증득한 것이 아니니라.
강설 ; 도안을 갖춘 부처님은 번뇌도 떠나지 아니하고 아니고 망상도 떠나지 아니한다. 또한 세간에 집착도 아니 하고 해탈도 아니한다. 도안을 갖춘 부처님은 번뇌 망상과 집착과 해탈을 다 부정하고 다 긍정하여 수용한다. 무엇에 걸리겠는가. 굳이 표현하면 중도적 삶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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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바른 이치
若有知如來가體相無所有하야
修習得明了하면此人疾作佛이로다
만약 어떤 이가 여래는
체상(體相)이 없는 줄 알아서
닦고 익혀 명료(明了)함을 얻으면
이 사람은 빨리 부처를 지으리라.
강설 ; 여래는 실로 고정된 체상이 없으나 없는 가운데서 천백억화신을 나타낸다. 완전한 공이면서 온갖 물질과 소리로 천변만화한다. 그래서 여래의 물질은 공한 것이므로 마음대로 물질로 나타나도 걸림이 없다. 이와 같이 알아야 부처를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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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세계와 불(佛)의 평등
能見此世界호대其心不搖動하고
於佛身亦然하면當成勝智者로다
능히 이 세계를 보되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부처님 몸에 대해서도 또한 그렇게 보면
마땅히 훌륭한 지혜 있는 이가 되리라.
강설 ; 훌륭한 지혜 있는 이란 곧 여래다. 사람의 불성생명에는 본래로 부동성이 있다. 그것을 또한 부동지(不動智)여래라고 하였다. 육조혜능스님은 그것을 “어찌 내 자성이 본래로 동요가 없음을 예측이나 했겠는가[何期自性本無動搖].”라고 하였다. 그 부동성을 가져서 세계도 보고 부처님의 몸도 본다. 이와 같이 보면 수승한 지혜를 이루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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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불(佛)과 법(法)의 평등
若於佛及法에其心了平等하야
二念不現前하면當踐難思位로다
만약 부처님과 법에
그 마음이 평등함을 요달하여
두 가지 생각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땅히 생각하기 어려운 지위에 오르리라.
강설 ; 생각하기 어려운 지위란 곧 부처님의 지위다. 부처님의 지위에 오르려면 부처님과 법을 두 가지로 보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도 불성생명이고, 법도 그 불성생명이 여러 가지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가 금이라면 법은 금으로 비녀, 반지, 시계, 불상 등을 만들어 놓은 현상들이다. 이것들을 어찌 다른 것으로 보겠는가. 어찌 두 가지로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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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5> 불(佛)과 중생의 평등
若見佛及身이平等而安住하야
無住無所入하면當成難遇者로다
만약 부처님과 자신(自身)이
평등하게 안주하여
머무름도 없고 들어감도 없음을 보면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이를 이루리라.
강설 ; 만나기 어려운 이란 곧 부처님이다. 화엄경의 근본 종지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알면 곧 부처님이 되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6> 오온(五蘊)의 평등
色受無有數며想行識亦然하니
若能如是知하면當作大牟尼로다
색(色)과 수(受)가 수(數)가 없으며
상(想)과 행(行)과 식(識)도 또한 그러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마땅히 대모니(大牟尼)가 되리라.
강설 ; 대모니란 곧 부처님이다. 오온(五蘊)은 오온이 아니다. 무슨 실체가 있어서 그것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랴. 오온이 개공(皆空)인 것을.
화엄경 강설 제13권 1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7> 세간과 출세간의 초월
世及出世間에一切皆超越하야
而能善知法이면當成大光耀로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일체를 다 초월하여
능히 법을 잘 알면
마땅히 큰 빛을 이루리라.
강설 ; 큰 빛이란 곧 부처님이다. 부처님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표현하였다.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는 것도 일찍이 모순이 많다. 무엇이 세간이고 무엇이 출세간인가. 세간도 출세간도 실체가 없음을 보면 그것이 초월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8> 마음에 남이 없다.
若於一切智에發生廻向心호대
見心無所生하면當獲大名稱이로다
만약 일체 지혜에
회향하는 마음을 내되
마음이 나는 바가 없음을 보면
마땅히 큰 명칭을 얻으리라.
강설 ; 큰 명칭이란 곧 부처님이다. 불법은 그 아름다움이 회향에 있다. 회향하는 마음은 위대한 지혜에서 나온다. 회향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면 그는 불자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는가. 마음은 내되 내는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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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9> 중생의 무생멸(無生滅)
衆生無有生이며亦復無有壞니
若得如是智하면當成無上道로다
중생은 생김도 없으며
또한 다시 무너짐도 없으니
만약 이와 같은 지혜를 얻으면
마땅히 최상의 도를 이루리라.
강설 ; 최상의 도란 부처님이 얻으신 도다. 일체의 법은 불생(不生)이며 일체의 법은 불멸(不滅)이다. 불생불멸이 일체 존재의 실상을 보는 불교의 관점이다. 그래서 세간의 형상이 항상 머무른다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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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광명각품(光明覺品)
<10> 하나와 무량
一中解無量하고無量中解一하야
了彼互生起하면當成無所畏로다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는 가운데서 하나를 알아
그것이 서로 함께 일어남을 알면
마땅히 두려울 바 없음을 이루리라.
강설 ; 두려울 바 없음이란 곧 부처님을 일컫는다. 존재의 본질은 언제나 텅 비어 공하다. 그 공한 본질에서 천백억화신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상이다. 그래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고 하며,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육조혜능스님은 “본래 저절로 구족하였으며[本自具足], 능히 만법을 만들어 낸다[能生萬法].”고 하였다. 청량 스님은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는 것은 마치 텅 빈 방에 1천개의 등불을 밝혔으나 서로 서로 방해하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정각(正覺)의 인과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此世界하야徧照東方十佛國土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라
그때에 광명이 이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열 불국토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에 모두 백억의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세존이 두 발바닥으로부터 백억 광명을 놓아서 시방세계와 이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염부제(閻浮提)와 백억 불바제(弗婆提)와 백억 구야니(瞿耶尼)와 백억 울단월(鬱單越)과 백억 대해(大海)와 백억 윤위산(輪圍山) 등등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의 모든 것들을 낱낱이 다 환하게 나타내었음을 다시 밝혔다. 깨달음의 광명이 얼마나 밝고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강조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如此處에 見佛世尊이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하야彼一一世界中에 各有百億閻浮提의百億如來도亦如是坐하시니라
이곳에서 부처님 세존이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계신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저 낱낱의 세계 가운데에도 각각 백억 염부제의 백억 여래도 또한 이와 같이 앉으셨습니다.
강설 ; 앞에서 세존의 정각이 수승함을 밝힌 내용 중에 있는 것과 그 형식은 같다. 다시 한 번 거듭 밝힌 것이다. 역시 화엄법계연기의 이치를 보인다. 하나를 들면 전체가 들리는 이치를 보인 것이다. 이곳에서 세존이 사자좌에 앉으시니 백억 염부제에 계시는 백억 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마치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커다란 태풍이 된다.”는 카오스의 이론과도 닮아 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보살대중
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낱낱의 보살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강설 ; 앞에서 밝힌 바를 거듭 밝혔다. 재차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내용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일체처(一切處) 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정각의 인(因)
衆生無智慧하야愛刺所傷毒일새
爲彼求菩提하시니諸佛法如是로다
중생이 지혜가 없어서
애착의 가시에 상한 바가 됨이라.
그들을 위해 보리를 구하시니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이 출가하시고, 6년 고행 끝에 정각을 이루신 그 위대한 사건에 대한 목적을 밝혔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중생들이 애착의 가시에 찔리어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 그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처님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구하고 정각을 구했다. 이것은 곧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무엇으로 그들을 구제할 것인가. 모든 사람은 본래로 해탈성과 대자유성과 무한 안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서 스스로 그것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정각의 과용(果用)
普見於諸法하고二邊皆捨離일새
道成永不退하사轉此無等輪이로다
모든 법을 널리 보고
이변(二邊)을 다 버리며
도를 이루어 길이 물러서지 않고
짝이 없는 법륜을 굴리신다.
강설 ; 모든 법을 널리 본다는 것은 내 자성 안에 본래부터 저절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음과 본래부터 저절로 청정함과 본래부터 불생불멸함과 본래부터 저절로 무한창조 할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또한 본래부터 보는 신통, 듣는 신통, 냄새 맡는 신통, 맛보는 신통, 감수하는 신통, 아는 신통. 손발을 움직이는 신통, 걸어 다니는 신통, 물건을 잡는 신통, 글씨를 쓰는 신통 등을 갖추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에도 치우치지 않고 현상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있음과 없음과 공함과 색의 양변을 다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어 활발발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곧 짝이 없는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不可思議劫에 精進修諸行은
爲度諸衆生이시니 此是大仙力이로다
불가사의한 겁 동안
정진하여 온갖 행을 닦음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함이시니
이것은 대선(大仙)의 힘이로다.
강설 ; 대선(大仙)이란 곧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큰 신선이다. 신선은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신선 같다. 라고도 한다. 오래고 오랜 세월동안 고행하시고 정진하신 일은 모두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導師降衆魔가勇健無能勝이라
光中演妙義하시니慈悲故如是로다
도사(導師)께서 마군들을 항복받음이여
그 용맹이 능히 이길 자가 없어
광명 가운데서 미묘한 뜻 설하시니
자비하신 연고로 이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 마군들을 항복받는 일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경계(逆境界)고 또 하나는 순경계(順境界)였다. 역경계는 자신을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경우며, 순경계는 자신의 마음이 유혹에 흔들리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과 편안한 환경들이었다. 부처님은 이 모두를 용맹으로 항복받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以彼智慧心으로 破諸煩惱障일새
一念見一切하시니 此是佛神力이로다
저 지혜의 마음으로
모든 번뇌의 장애를 깨뜨릴 새
한 생각에 일체를 다 보시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 이로다.
강설 ; 번뇌와 무명을 제거하는 길은 지혜뿐이다. 지혜가 밝은 빛이라면 번뇌와 무명은 캄캄한 어둠이다. 어둠을 소멸하는 것은 밝은 빛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본래로 갖춰진 지혜성이 있으며 광명성이 있다. 이 지혜광명성을 드러내기만 하면 번뇌무명성은 저절로 소멸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擊于正法鼓하사 覺悟十方刹하야
咸令向菩提케하시니 自在力能爾로다
정법(正法)의 북을 두드리어
시방세계를 깨닫게 하여
다 보리에 나아가게 하시니
자재하신 힘이 능히 이러하도다.
강설 ; 사람의 진여불성에는 저절로 자재력이 갖춰져 있다. 정법의 북을 두드려서 시방세계 중생들에게 자신의 진여불성을 깨닫게 해야 한다. 부처님의 설법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며, 경전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며, 전법포교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중생을 제도함
不壞無邊境하고而遊諸億刹호대
於有無所着이면彼自在如佛이로다
끝없는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모든 억만 세계에 노닐되
유(有)에 집착이 없으면
그의 자재함이 부처님과 같도다.
강설 ;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점점 늙어 가면서 일생을 사는 동안 천백억화신으로 천변만화한다. 그야말로 끝없는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모든 억만 세계에 노닌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처를 받으며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유(有)에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여불성에는 본래로 대자유와 대 해탈이 갖춰져 있다. 유(有)에서 공(空)으로 전환하여 자유감과 해탈감으로 살아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諸佛如虛空하사 究竟常淸淨하시니
億念生歡喜하면 彼諸願具足이로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과 같으사
끝까지 항상 청정하시니
그것을 생각하여 기뻐하면
저 모든 원(願)을 구족 하도다.
강설 ; 우리들의 진여불성과 생명성은 텅 비어 허공과 같고 철저하게 청정하다. 허공성과 청정성을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것이 사람이므로 그것을 깊이 관조(觀照)하면 일체 원이 구족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3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一一地獄中에 經於無量劫하시니
爲度衆生故로 而能忍是苦로다
낱낱 지옥 가운데서
한량없는 겁을 지내시니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연고로
능히 이 고통을 견디도다.
강설 ; 부처님의 서원을 인격화하여 나타난 보살이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 나서 비로소 보리를 증득하겠다.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맹서코 성불하지 않겠다.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는 세 가지로서 그 중생제도의 정신을 나타내었다. 그야말로 자신을 제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부터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정신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不惜於身命하고 常護諸佛法하시니
無我心調柔하야 能得如來道로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상 모든 불법을 옹호하시니
아(我)가 없어 마음 편안하여
능히 여래의 도를 얻었도다.
강설 ; 사람 사람의 진여불성에는 본래로 무아성(無我性)이 있다. 그러므로 불법을 보호하기 위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순교까지도 할 수 있다. 만약 고정 불변하는 내가 있다면 설사 불법을 위해서라하더라도 버려서도 안 되며 버릴 수도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정각의 팔상(八相)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過十世界하야徧照東方百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諸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저때에 광명이 열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백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 모든 세계 가운데에 모두 백억의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가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느니라.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 가니라.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강설 ; 광명각품에서 세 번째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여덟 가지 현상을 밝히는데 먼저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환하게 비치는 내용과 다시 세존이 자리에 앉으시는 내용을 거듭 밝혔다. 역시 문수보살은 금색세계에서 왔으며, 섬기면서 수행하셨던 부처님은 부동지여래이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부처님 덕의 충만
佛了法如幻하사通達無障礙하고
心淨離衆着하사調伏諸群生이로다
부처님은 법이 환술과 같음을 아시고
통달하여 장애가 없으며
마음은 청정하여 온갖 집착 떠나사
모든 중생을 조복하시네.
강설 ; 일체처(一切處)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설하신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설하시는 이 게송은 비단 한 곳, 한 회상의 대중들만 듣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의 모든 대중들이 다 듣는다. 일체존재의 광대성(廣大性)과 진여불성의 광대성과 생명의 광대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법이 환술과 같음을 알면 모든 장애를 떠난다. 마음은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성을 작용하여 온갖 집착에서 떠나버린다. 이것이 자심(自心) 중생을 조복하는 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팔상(八相)
或有見初生에妙色如金山하사
住是最後身하야永作人中月이로다
혹은 보니 처음 태어날 때
미묘한 빛이 금산(金山)과 같으사
최후신(最後身)에 머물러서
길이 사람 가운데 달을 지으셨도다.
강설 ; 세존께서 처음 태어나실 때에 그 아름다운 모습이 마치 금산과 같았다. 평범한 사람의 몸은 마지막이었다[最後身]. 그래서 영원히 사람들 가운데 원만한 달과 같이 중생들을 비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經行時에 具無量功德하시며
念慧皆善巧하사 丈夫獅子步로다
혹은 보니 경행(經行)할 때에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시며
생각과 지혜가 매우 공교하사
대장부의 사자걸음 걷도다.
강설 ; 여기에서 경행이란 처음 태어나시어 사방으로 7보를 걸으시면서 원만한 덕을 본래로 갖추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무량공덕성(無量功德性)을 본래로 갖추고 있음을 본보기로 보인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3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紺靑目으로 觀察於十方하고
有時現戲笑하사 爲順衆生欲이로다
혹은 보니 검푸른 눈으로
시방을 관찰하고
어떤 때는 웃음을 나타내어
중생들의 욕망을 수순 하도다.
강설 ; 태어나시어 7보를 걸으시고 검푸른 눈으로 시방을 관찰하시면서 웃음을 보인 것이다. 이 웃음으로 부모와 친척들과 모든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화엄경 강설 제13권 4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獅子吼와 殊勝無比身으로
示現最後生하사 所說無非實이로다
혹은 보니 사자후와
수승하여 비할 데 없는 몸으로
최후생(最後生)을 나타내 보이사
하시는 말씀 모두 다 진실 하도다.
강설 ; 수승하여 비할 데 없는 몸으로 최후생(最後生)을 나타내 보이면서 사자후를 하신 것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가장 높으니 삼계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 빠져있구나. 내가 마땅히 그들을 제도하여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가리킨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有見出家하사 解脫一切縛하고
修治諸佛行하사 常樂觀寂滅이로다
혹은 보니 출가하사
일체 속박에서 해탈하고
모든 부처님의 행(行)을 닦으사
항상 즐거이 적멸(寂滅)을 관(觀)하도다.
강설 ; 출가란 무엇인가. 일체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적멸 속에 머무는 일이 진정한 출가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4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坐道場하사 覺知一切法하고
到功德彼岸하사 癡暗煩惱盡이로다
혹은 보니 도량에 앉으사
일체 법을 깨달아 알고
공덕의 저 언덕에 이르러
어리석고 어두운 번뇌를 다하였네.
강설 ; 도량에 앉았다는 것은 마군을 항복 받았다는 일이며,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일이다. 일체 장애가 다하고 덕이 원만해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勝丈夫가 具足大悲心하사
轉於妙法輪하야 度無量衆生이로다
혹은 보니 훌륭한 장부가
큰 자비의 마음을 구족하사
미묘한 법륜을 굴려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 하도다.
강설 ; 부처님이 출가하시어 고행하시고 마군을 항복받고 정각을 이루신 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설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대 자비심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자비심도 모든 사람이 본래로 자성 생명 속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獅子吼가 威光最殊特하사
超一切世間하야 神通力無等이로다
혹은 보니 사자후(獅子吼)하심이
위엄과 광명이 가장 수승하사
일체 세간에서 뛰어나서
신통력이 같을 이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이 사자후를 하실 때 위엄과 광명이 뛰어나서 조복받기 어려운 사람까지 조복 받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或見心寂靜이 如世燈永滅호대
種種現神通하시니 十力能如是로다
혹은 보니 마음이 고요한 것이
마치 세간의 등불이 아주 소멸한 것과 같되
가지가지로 신통을 나타내시니
열 가지 힘이 능히 이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이 열반에 들되 신통묘용에 방해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열 가지 힘으로 표현되는 부처님의 능력은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정각의 체성(體性)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百世界하야徧照東方千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그때에 광명이 백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 색구경천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이품의 이름이 광명각품이므로 광명으로 깨달음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처음에는 세존이 발바닥으로 백억 광명을 놓아 이곳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 다음에는 이 세계를 지나서 10불국토를 비추었다. 다음에는 10세계를 지나서 1백 세계를 비추었다. 또 이번에는 1백 세계를 지나서 1천세계를 비추었다. 이와 같이 열 번에 이르면서 점점 광명의 범위가 10배로 증광(增廣)하였다. 깨달음의 지혜는 무한으로 확장한다는 뜻이다.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진여불성의 생명체도 이와 같이 무한광대하다. 수천억 광년 저 끝에서 다시 또 수천억 광년 저 멀리까지, 거기에서 또 수천억 광년 저 멀리까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자성생명의 원리며 법성생명의 원리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가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 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이때에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자비와 지혜
佛於甚深法에通達無與等이라
衆生不能了일새次第爲開示로다
부처님이 심히 깊은 법에
통달하여 같을 이 없는데
중생들이 알 수 없어서
차례대로 열어 보이도다.
강설 ;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은 참으로 무상심심미묘법이다. 그 누구도 이와 같은 법을 깨달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중생들이 그 깊고 높은 법을 알 수 없어서 부처님은 방편을 써서 차례대로 근기에 맞춰서 설법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4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삼덕원만(三德圓滿)
我性未曾有며我所亦空寂이어니
云何諸如來가而得有其身이리오
아(我)의 본성(本性) 있지 않으며
아의 소유도 또한 공적한데
어찌하여 모든 여래께서는
그 몸이 있으리오.
강설 ; 삼덕원만(三德圓滿) 중에서 첫째 여래는 깨달음이 아(我)와 아소(我所)가 영원히 끊어진 덕을 찬탄하였다. 불교의 기본은 무아(無我)다. 만약 무아라면 내가 없는데 나의 것[我所]이 어디에 있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3권 5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解脫明行者가 無數無等倫하시니
世間諸因量으로 求過不可得이로다
해탈과 밝은 행(行)이
수도 없고 짝도 없으시니
세간의 모든 인과량(因果量)으로
허물을 구하여도 구할 수 없네.
강설 ; 다음은 해탈덕과 반야의 덕을 찬탄하였다. 밝은 행(行)이란 반야덕을 가리킨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佛非世間蘊과 界處生死法이라
數法不能成일새 故號人師子로다
부처님은 세간의 온(蘊)과
계(界)와 처(處)와 생사의 법이 아니라.
숫자의 법으로 이룰 수 없을 새
그러므로 사람 가운데 사자라 하네.
강설 ; 다음은 부처님이 5온(蘊) 12처(處) 18계(界)인 3과(科)를 초월한 덕을 찬탄하였다. 일반불교에서는 이 3과 법문을 매우 중요시하지만 화엄경의 부처님은 3과 법문을 초월한 경지를 설하신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其性本空寂하고 內外俱解脫하사
離一切妄念하시니 無等法如是로다
그 체성(體性)은 본래 공적(空寂)하고
안과 밖이 함께 해탈하사
모든 망념(妄念)을 다 떠나시니
짝 없는 법이 이와 같도다.
강설 ; 본질의 세계인 체성도 본래 공적하고 현상도 역시 공적하다. 공적한 것이 곧 성색(聲色)으로 꽉 찬 것이고, 꽉 찬 것이 곧 공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성색의 본질은 공적한 것이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모두 공적하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해탈이다. 따라서 모든 망념을 다 떠나게 된다. 이러한 이치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수승한 최고의 법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본체에 의한 자비의 작용
體性常不動하야無我無來去하사대
而能悟世間하야無邊悉調伏이로다
체성은 항상 움직이지 아니하여
아(我)도 없고 거래(去來)도 없어
능히 세간을 깨우쳐서
끝없는 중생을 다 조복하도다.
강설 ; 움직이지 않으면서 널리 응하는 덕을 밝혔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본질의 공적성과 부동성에 입각하여 무아성과 무거래성을 경계와 대상에 잘 활용한다. 그것으로 세간을 깨우치고 끝없는 중생들을 다 조복한다. 그 방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 즉 무위법(無爲法)으로 무위법을 깨우친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常樂觀寂滅이 一相無有二하사
其心不增減하사대 現無量神力이로다
항상 적멸을 즐겁게 관찰하되
한 가지 모양이요, 둘이 없으사
그 마음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한량없는 위신력을 나타내도다.
강설 ; 움직임과 공적함이 둘이 아닌 덕을 밝혔다. 일체 삼라만상은 본래가 적멸하고 공적하다. 즉 열반경의 말씀대로 “제법은 본래부터 항상 저절로 적멸한 모습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치를 실천한다면 다음 순간부터는 곧 부처로 살리라.” 그곳에 무슨 두 가지 모양이 있을 것인가. 그곳에 무슨 마음이 증하고 감하는 것이 있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3권 5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不作諸衆生의 業報因緣行하고
而能了無礙하시니 善逝法如是로다
모든 중생들의
업보(業報)와 인연행(因緣行)을 짓지 않고
능히 걸림이 없음을 아시니
선서(善逝)의 법이 이와 같도다.
강설 ; 본체가 공적함을 아는 부처님은 중생들과 노닐면서 중생들을 제도하되 중생들의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그래서 걸림이 없다. 본체가 공적함을 모른 중생들은 처처에 집착하고 대상마다 물든다. 세상에 살더라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스치고 지나가면 다 잊어버리는 관광객이 되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種種諸衆生이 流轉於十方이어든
如來不分別하사 度脫無邊類로다
가지가지 모든 중생들이
시방세계에 흘러 다니는데
여래가 분별하지 않으시고
그지없는 무리들을 제도 하도다.
강설 ; 중생들을 제도하는 마음이 평등함을 밝혔다. 외형상의 그 어떤 중생들이 차별하더라도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아니하고 온갖 무리들을 다 제도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諸佛眞金色이 非有徧諸有하사
隨衆生心樂하야 爲說寂滅法이로다
모든 부처님의 진금(眞金)빛이
있는 것 아니나 모든 세간에 두루하사
중생들의 마음에 즐겨함을 따라서
적멸한 법을 설법하신다.
강설 ; 부처님을 비유하자면 진금과 같다. 진금을 가지고 온갖 형상을 다 만들어도 그 진금에는 변함이 없다. 생멸이 없으면서 생멸을 마음껏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천백억화신이며 천변만화다. 본체가 공적하기 때문이다. 어디 부처님뿐이랴. 사람사람이 모두다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5, 정각의 인행(因行)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千世界하야徧照東方十千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그때에 광명이 1천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십천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 색구경천(色究견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광명이 다시 또 증광(增廣)하였다. 1천세계를 지나고 십천 세계를 두루 비춘다. 깨달음의 광명이 어디까지라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필요에 따라 무한히 더하고 무한히 넓어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5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가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어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갔습니다.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강설 ; 다시 한 번 상기하건대 문수보살이 게송을 설하신 내용 밖에의 것은 어떤 내용도 규칙상 모두 경가(經家)의 서술이다. 모든 경전은 아난존자가 서술하여 결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아난존자가 모든 정황들을 빠짐없이 살펴서 보고 들은 대로 송출(誦出)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경전편찬[결집]의 약속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이때에 일체처(一切處)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깨달음의 원인
發起大悲心하사救護諸衆生하야
永出人天衆하시니如是業應作이어다
큰 자비심을 일으키사
모든 중생들을 구호하여
영원히 인간과 천상의 무리에서 벗어나게 할지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깨달음을 이루려면 먼저 큰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중생들을 구호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무리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는 이와 같은 보살업(菩薩業)을 열심히 지어야 한다. 이것이 정각을 이루는 원인이 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지혜의 업을 닦다
意常信樂佛하사其心不退轉하야
親近諸如來하시니如是業應作이어다
마음에 항상 부처님을 믿어
그 마음 물러나지 아니하고
모든 여래를 친근하여야하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志樂佛功德하사 其心永不退하야
住於淸凉慧하시니 如是業應作이어다
마음에 부처님의 공덕을 좋아하고
그 마음 길이 물러나지 아니하여
청량한 지혜에 머무를지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一切威儀中에 常念佛功德하사
晝夜無暫斷하시니 如是業應作이어다
일체 위의(威儀) 가운데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사
주야(晝夜)에 잠깐도 끊어짐이 없게 할지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觀無邊三世하고 學彼佛功德하사대
常無厭倦心하시니 如是業應作이어다
끝없는 삼세(三世)를 관하고
저 부처님의 공덕을 배워
항상 싫거나 게으른 마음이 없게 할지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을 믿는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늘 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참다운 공덕을 잘 알아서 마음이 물러서지 않아야 된다는 맑은 지혜를 갖는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 위의 중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여 잠간도 잊지 않는다. 어느 한 부처님의 공덕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까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업을 반드시 짓는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몸의 실상(實相)
觀身如實相하사一切皆寂滅하야
離我無我着하시니如是業應作이어다
몸의 진실한 모습은
일체가 다 적멸함을 관찰하여
나를 떠나 나에 대한 집착이 없을지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사람은 누구나 몸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간다. 그러므로 몸의 실상을 잘 관찰해야한다. 몸의 실상이란 적멸한 것이다. 공인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무상인 것이다. 몸의 재료가 공이기 때문이다. 즉 공으로 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의 재료가 공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허수아비에 온갖 치장을 다 한다. 금은보화로 꾸미고 장엄한다. 들녘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아무리 공을 들이고 금은보화로 장엄을 했더라도 사람들은 허수아비는 보지 않고 허수아비에 걸려있는 금은보화만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다. 보통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란 이와 같다.
중론(中論) 법품(法品)에 “제법의 실상은 생각이나 언어가 끊어졌다.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 적멸한 것이 열반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또 “모든 부처님이 혹은 아(我)를 설하고 혹은 무아(無我)를 설하지만, 제법의 실상 중에는 아도 없고 아가 아님도 없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중생 평등
等觀衆生心하고不起諸分別하사
入於眞實境하시니如是業應作이어다
중생의 마음을 평등하게 관찰하고
모든 분별을 일으키지 않아
진실한 경계에 들어가나니
이와 같은 업(業)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어떻게 하면 중생들의 마음을 분별하지 아니하고, 차별하지 아니하며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겠는가. 본심으로 대하는 진실한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중생들의 가장 큰 약점이 차별심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5> 큰 작용
悉擧無邊界하고普飮一切海가
此神通智力이시니如是業應作이어다
끝없는 세계를 다 들고
모든 바다를 다 마시는 것은
신통과 큰 지혜의 힘이시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자신도 공하고 세계도 공한 일체존재의 본질에 깊이 들어가면 시방세계를 다 들 수 있으며, 일체 바닷물을 다 마실 수 있다. 이것이 신통과 지혜의 힘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思惟諸國土의 色與非色相하사
一切悉能知하시니 如是業應作이어다
모든 국토의
색(色)과 색(色)이 아닌 모습을 사유(思惟)하사
일체를 다 능히 아시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몸과 몸 밖의 것을 모두 색이라 한다. 그래서 국토와 세계도 그 속에 다 포함된다. 색이 아닌 모습이란 색의 공성(空性)을 말한다. 즉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이치를 사유해서 그 일체를 능히 다 알아야 한다. 그러면 존재의 본질과 현상관계를 꿰뚫어 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6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十方國土塵을 一塵爲一佛하야
悉能知其數하시니 如是業應作이어다
시방(十方) 국토의 먼지를
한 먼지를 한 부처님으로 삼아
그 수(數)를 다 능히 아시니
이와 같은 업을 응당 지을지어다.
강설 ; 부처님의 법지통(法智通)을 밝혔다. 시방국토를 작은 먼지로 만들어 그 먼지 수대로 부처님으로 삼아 그 숫자를 다 아는 지혜신통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6, 세존의 위덕(威德)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十千世界하야徧照東方百千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그때에 광명이 십 천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백 천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 처(一切處)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법신(法身)
若以威德色種族으로而見人中調御師인댄
是爲病眼顚倒見이라彼不能知最勝法이로다
만약 위덕과 색상과 종족(種族)으로
사람 가운데 조어사(調御師)를 보려 한다면
이것은 병든 눈이요, 전도된 소견이라.
그는 가장 수승한 법을 알지 못하리라.
강설 ; 진정한 세존의 본 모습인 법신은 무엇인가? 위덕과 색상과 종족(種族)은 아니다. 만약 그것으로 부처님을 안다면 병든 눈이라고 하였다. 전도된 견해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如來色形諸相等을 一切世間莫能測이라
億那由劫共思量하야도 色相威德轉無邊이로다
여래의 몸의 모습과 모든 상호들을
모든 세간은 측량할 수 없음이라.
억만 나유타 겁을 함께 생각해도
몸과 상호(相好)와 위덕(威德)은 더욱 끝이 없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如來非以相爲體라 但是無相寂滅法이로다
身相威儀悉具足하시니 世間隨樂皆得見이로다
여래는 색상으로 본체를 삼지 않으니
다만 상(相)없는 적멸한 법이로다.
신상(身相)과 위의(威儀)를 다 구족하시니
세간이 좋아함을 따라 다 보도다.
강설 ; 여래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백억화신을 나타내어 보이지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본체를 삼지는 않는다. 다만 형상이 없는 적멸한 법에서 무수한 상을 나타내어 방편으로 교화할 뿐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佛法微妙難可量이라 一切言說莫能及이니
非是和合非不合일새 體性寂滅無諸相이로다
부처님의 법은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워
온갖 말로써는 미칠 수 없어라.
화합도 아니요 화합 아님도 아니니
체성(體性)이 적멸하여 모든 형상 없도다.
강설 ; 여래를 만약 있다고 하려니 체상이 적멸하고, 없다고 하려니 색상이 끝이 없다. 또 화합과 비화합은 인연을 만나면 화합하고, 본체에 머물면 화합이 아니다. 그래서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본질이 곧 현상이고 현상이 곧 본질이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이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佛身無生超戲論하사 非是蘊聚差別法이라
得自在力決定見하시니 所行無畏離言道로다
부처님의 몸은 생멸이 없어 희론(戱論)을 뛰어넘어
오온(五蘊)의 차별한 법이 아님이라.
자재한 힘을 얻어야 결정코 보리니
행하는 바가 두려움 없어 언어를 떠났도다.
강설 ; 부처님 몸의 진실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체성이 공하여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생멸이 있는 현상은 설명이 가능하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므로.
화엄경 강설 제13권 7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지혜신(智慧身)
身心悉平等하고內外皆解脫일새
永劫住正念하사無着無所繫로다
몸과 마음 다 평등하고
안과 밖이 다 해탈이라.
영겁(永劫)동안 바른 생각에 안주하여
집착도 없고 매임도 없네.
강설 ; 부처님은 지혜로 몸을 삼는다. 그것이 지혜신이다. 어떤 사람은 탐욕으로 몸을 삼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으로 몸을 사마기도하고, 명예로 몸을 삼기도 한다. 지혜로 몸을 삼는 이는 몸과 마음이 하나다. 안도 밖도 모두 해탈하여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바른 생각에 안주할 수 있다.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바른 생각만 하고 산다면 무엇에 매이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3권 7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意淨光明者의 所行無染着이라
智眼靡不周하사 廣大利衆生이로다
뜻이 깨끗하여 빛나고 밝은이는
행하는 것이 염착(染着)이 없으며
지혜의 눈이 두루 하사
넓고 크게 중생을 이롭게 하네.
강설 ; 지혜로 몸을 삼는 사람은 그 뜻이 광명으로 눈부시다. 무슨 행동을 하건 물들고 집착함이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이 빛나는 지혜로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7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一身爲無量이요 無量復爲一이라
了知諸世間하사 現形徧一切로다
한 몸이 한량없는 몸이 되고
한량없는 몸이 다시 한 몸이 되며
모든 세간을 밝게 알아
형상을 모든 것에 두루 나타내도다.
강설 ; 절대평등인 공한 본체는 하나다. 본래 없는 그 하나가 천백억화신으로 나타내 보이며, 천백억화신이 나타나도 그 근본인 본체는 평등하고 공한 하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하루 종일 온갖 행위를 하면서 천변만화로 삶을 영위하지만 결국은 한 사람이 상황과 입장을 따라 달리 나타내는 것과 같다. 하나인 것과 한량이 없는 것은 텅 빈 방에 일 천 개의 등불을 밝혔으나 서로 방해되지 않은 것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此身無所從이며 亦無所積聚어늘
衆生分別故로 見佛種種身이로다
이 몸은 온 곳도 없으며
또한 쌓이고 모인 바도 아니다.
중생들이 분별하는 까닭에
부처님의 갖가지 몸을 보도다.
강설 ; 부처님의 몸이나 보통 사람들의 몸이나 본래 온 곳이 없다. 또한 쌓이고 모여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쌓이고 모인 것도 아니다. 미혹한 중생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하고 텅 빈 실체를 알지 못하여 가지가지로 분별하여 본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心分別世間호대 是心無所有라
如來知此法이시니 如是見佛身이니라
마음으로 세간을 분별하나
이 마음은 있는 바가 아니라
여래가 이 법을 아시니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몸을 볼지니라.
강설 ; 참으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이치다. 하루 종일 세상을 분별하며 천변만화로 나타내지만 그 주인공은 있는 바가 아니다.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제외하면 또한 아무 것도 분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잘 알고 활용하면 그는 곧 여래이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8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7, 안팎을 포섭하는 덕(德)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百千世界하야徧照東方百萬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저때에 광명이 백 천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백만 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갔습니다.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불법(佛法)의 불가사의
如來最自在하사超世無所依하시며
具一切功德하사度脫於諸有로다
여래께서 가장 자재(自在)하사
세상을 뛰어넘어 의지함이 없으시며
일체 공덕을 다 갖추어
모든 세간을 제도하시네.
강설 ; 부처님의 안팎을 다 포섭하는 덕을 밝혔다. 부처님은 또한 공덕으로서 법성(法性)을 삼는다는 뜻을 밝혔다. 안팎을 다 포섭한다는 것은 공덕으로 법성을 삼기 때문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가 아닐까한다. 여래는 대 자유를 얻어서 자유자재라고 표현한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일체 공덕을 다 갖추어 세간을 제도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을 자유자재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無染無所着하시며 無想無依止하사
體性不可量이나 見者咸稱歎이로다
때도 없고 집착도 없으시며
생각도 없고 의지함도 없으사
체성이 한량없으나
보는 이가 다 찬탄하도다.
강설 ; 부처님은 청정무구하다. 사람도 본래로 청정무구하다. 또한 본래로 무념무상하다. 의지함도 없어 대 자유를 누린다. 체성에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지녔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다 찬탄해 마지않는다. 이것이 진여자성이 본래로 갖춘 청정무구성이며, 자유자재성이며, 만행만덕성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光明徧淸淨하시며 塵累悉蠲滌하사
不動離二邊하시니 此是如來智로다
광명이 두루 청정하시며
번뇌를 다 씻어 제거하사
움직이지 않은 채 이변(二邊)을 떠나시니
이것이 여래의 지혜로다.
강설 ; 여래의 지혜란 지혜광명이 청정하여 번뇌의 어둠이 다 소멸되어 저절로 있음과 없음, 너와 나, 남과 여, 동과 서, 남과 북 등등의 상대적 두 치우친 견해를 멀리 떠나야 한다. 진여가 갖춘 불이성(不二性)의 자연적인 현현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若有見如來가 身心離分別이면
則於一切法에 永出諸疑滯로다
만약 어떤 이가 여래께서
몸과 마음에 분별 떠난 것을 보면
곧 일체 법에서
모든 의심을 영원히 벗어나리라.
강설 ; 여래는 몸과 마음에 분별이 없다. 공에도 색에도 분별이 없다. 너와 나에도 분별이 없다. 여래의 이와 같은 경계를 안다면 저절로 의혹을 영원히 떠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一切世間中에 處處轉法輪하사대
無性無所轉이시니 導師方便說이로다
일체 세간 가운데
곳곳에서 법륜(法輪)을 굴리시나
성품도 없고 굴리는 바도 없으시니
도사(導師)의 방편의 말씀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일체 세간을 위해 무수한 법륜을 굴리시지만 모두가 방편인지라 자성도 없고 굴린 바도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8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방편에 들어가다
於法無疑惑하고永絶諸戲論하야
不生分別心이면是念佛菩提니라
법에 의혹이 없고
모든 희론(戱論)을 길이 끊어서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부처님의 보리를 생각함이라.
강설 ;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래서 불교인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깨달음을 말하고, 깨달음을 생각하고, 깨달음을 행동한다. 무엇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생각하는 것인가. 일체 존재의 원리에 대해서 의혹이 없어야 한다. 모든 희론(戱論)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了知差別法하고 不着於言說하야
無有一與多하면 是名隨佛敎니라
차별한 법을 잘 알고
말에 집착하지 아니해서
하나와 많음이 없으면
이것이 이른바 불교를 따름이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9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多中無一性이요 一亦無有多니
如是二俱捨하면 普入佛功德이니라
많은 가운데 한 성품이 없고
하나에도 또한 많음이 없으니
이와 같이 둘을 함께 버리면
부처님의 공덕에 널리 들어가리라.
강설 ; 불교를 따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존재의 공성(空性)인 평등과 현상인 차별이 둘이 아님을 잘 알아 온갖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차별은 많음이고 공성은 하나다. 이 많음과 하나가 둘이 아닐 때 많음도 없고 하나임도 없다. 굳이 “공이다. 현상이다.”라고 할 것마저 끊어진다. 일(一)과 다(多)가 걸림이 없는 무애이다. 이것이 곧 부처님의 공덕에 들어가서 그 공덕을 누리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及國土가 一切皆寂滅이니
無依無分別하면 能入佛菩提니라
중생과 국토가
일체가 다 적멸하니
의지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면
능히 부처님의 보리에 들어가리라.
강설 ;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이다. 무엇이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가는가.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중생과 국토가 모두 적멸한 줄 보아야 한다. 아무런 분별도 없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及國土가 一異不可得이니
如是善觀察하면 名知佛法義니라
중생과 국토가
하나다 다르다 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하면
불법(佛法)의 뜻을 안다고 이름 하리라.
강설 ; 불법의 뜻을 안다는 일은 중생과 국토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평등한 공성에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중생과 국토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8, 방편의 덕(德)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百萬世界하야徧照東方一億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저때에 광명이 백만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일억 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各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종체기용(從體起用)의 방편
智慧無等法無邊하시며超諸有海到彼岸하시며
壽量光明悉無比하시니此功德者方便力이로다
지혜는 짝이 없고 법은 끝이 없으며
세상바다 뛰어넘어 저 언덕에 이르고
수명과 광명도 비할 데 없으시니
이것은 공덕 있는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진여, 불성, 자성, 법성, 생명의 본 능력은 텅 빈 본체에서 온갖 지혜의 활동을 연출해 낸다. 이것을 즉체기용(即體起用)의 방편, 종체기용(從體起用)의 방편이라 한다. 청량스님은 이 게송에는 또 여섯 가지 뜻을 덧붙였다. 공덕 있는 이[功德者]란 부처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참으로 훌륭한 존칭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적조(寂照)의 방편
所有佛法皆明了하시며常觀三世無厭倦하시며
雖緣境界不分別하시니此難思者方便力이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을 다 밝게 알고
항상 삼세를 다 관찰하되 싫어함이 없으며
비록 경계를 반연하나 분별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생각하기 어려운 이[難思者]란 부처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적조(寂照)는 고요한 가운데 밝게 비추는 작용이다. 일상적인 우리들의 마음도 고요해야만 제대로 비출 수 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는 늘 함께한다. 선정이 완성되면 지혜는 저절로 밝아진다. “부처님의 법을 다 밝게 알고, 항상 삼세를 다 관찰하되 싫어함이 없는” 고요하고도 밝은 관찰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방편
樂觀衆生無生想하시며普見諸趣無趣想하시며
恒住禪寂不繫心하시니此無礙慧方便力이로다
중생을 즐겨 보되 중생이란 생각이 없고
여러 갈래[諸趣]를 널리 보되 갈래란 생각 없으며
항상 선정에 머물되 매이는 마음 없으시니
이것은 걸림 없는 지혜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걸림 없는 지혜[無礙慧]도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다. 무애(無礙)를 이해하려면 존재의 공성을 이해해야 한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이치다. 방 안에 1천개의 등불을 밝혀도 서로 걸리지 아니하면서 모두가 하나같이 밝게 비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9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4> 닦되 닦음이 없는 방편
善巧通達一切法하시며正念勤修涅槃道하사
樂於解脫離不平하시니此寂滅人方便力이로다
교묘한 방편으로 일체 법을 통달하며
바른 생각으로 열반의 도를 부지런히 닦으사
해탈을 즐기고 차별을 떠나시니
이것은 적멸한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적멸한 이[寂滅人]도 역시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다. 적멸한 경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수행하는 것은 아무리 닦아도 닦음이 없다. 또한 닦음이 없으면서 열심히 닦는 이치다. 게송의 내용들이 모두 무수이수(無修而修)의 설명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5> 회향의 방편
有能勸向佛菩提하며趣入法界一切智하며
善化衆生入於諦하시니此住佛心方便力이로다
능히 부처님의 보리에 향하기를 권하며
법계의 일체 지혜에 나아가며
중생을 잘 교화해서 진리에 들게 하시니
이것은 불심(佛心)에 머문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어디에 회향하는가. 진리인 실제(實際)에 회향하고 깨달음에 회향하고 중생에게 회향한다. 불교는 회향이다. 회향하려고 수행하고 회향하려고 공부하고 회향하려고 돈을 번다. 이것이 불교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6> 증득(證得)하여 아는 방편
佛所說法皆隨入하야廣大智慧無所礙하시며
一切處行悉已臻하시니此自在修方便力이로다
부처님의 설법에 다 따라 들어가서
넓고 큰 지혜에 걸림이 없으며
온갖 곳에 다니는 일 모두 이르시니
이것은 자재하게 닦은 방편의 힘이시다.
강설 ; 강의를 듣고, 경전을 읽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광대한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법을 듣고 지혜를 얻었다면 어디에 간들 걸림이 있겠는가. 이것이 자유자재한 수행방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7> 고요한 작용의 방편
恒住涅槃如虛空하시며隨心化現靡不周하시니
此依無相而爲相이라到難到者方便力이로다
항상 열반에 있어도 허공과 같으며
마음대로 화현(化現)하여 두루하시니
이것은 무상(無相)으로 상(相)을 삼음이라
이르기 어려운 데 이른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이르기 어려운 데 이[到難到者]도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열반에 있어도 허공과 같다는 것”은 적정을 표한 것이며, “마음대로 화현(化現)하여 두루 함”은 작용이다. “이것은 무상(無相)으로 상(相)을 삼는 것”은 고요한 작용의 걸림 없음이다. 열반을 증득했으나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은 범부와 소승들은 어리기 어렵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8> 시겁(時劫)의 방편
晝夜日月及年劫과世界始終成壞相을
如是憶念悉了知하시니此時數智方便力이로다
낮과 밤과 달과 해와 겁과
세계의 시작과 마침과 이뤄지고 무너지는 모양을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다 아시니
이것은 시간과 숫자의 지혜인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낮과 밤과 달과 해와 겁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은 생로병사하고 계절은 춘하추동하고 지구와 모든 별들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이 또한 시간과 숫자를 꿰뚫어 아는 지혜의 방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9> 생각하기 어려운 방편
一切衆生有生滅과色與非色想非想의
所有名字悉了知하시니此住難思方便力이로다
일체 중생들의 생멸과
색(色)과 비색(非色)과 상(想)과 비상(非想)의
모든 이름을 다 아시니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데 머문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금강경에 9류 중생이라는 말이 있다. 일체중생의 종류를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 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아홉 가지로 분류함을 말한다. 이 여러 가지 중생들의 생명까지를 다 아는 불가사의한 지혜방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10> 화향(廻向) 방편
過去現在未來世의所有言說皆能了하사대
而知三世悉平等하시니此無比解方便力이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상의
모든 말을 다 능히 알되
삼세가 다 평등함을 아시니
이것은 비할 데 없이 아는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강설 ; 비교할 데 없이 아는 이[無比解]라는 말도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삼세의 모든 언설이 다 평등함을 아는 방편의 힘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9,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하는 덕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一億世界하야徧照東方十億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
그때에 광명이 일억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십억 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
그때에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수행의 원만(圓滿)
廣大苦行皆修習하사대日夜精勤無厭怠하사
已度難度獅子吼로普化衆生是其行이로다
광대한 고행(苦行)을 다 닦으시며
밤낮으로 정근(精勤)하여 게으름이 없으사
제도하기 어려움을 이미 제도한 사자후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이 그 행이로다.
강설 ; 대자비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게송들이다. 부처님은 6년간 고행을 닦으시고 게으른 적이 없었다. 강강 중생들이라 참으로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들까지 제도하시니 참으로 사자후라고 할만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0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삼독(三毒)을 교화하다
衆生流轉愛欲海하야無明網覆大憂迫일새
至仁勇猛悉斷除하시니誓亦當然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애욕의 바다에 흘러 다니며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거늘
지극히 어지신 이가 용맹하게 다 끊으시니
서원도 또한 당연히 그 행(行)이로다.
강설 ; 중생들의 중생이 된 병이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독한 병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사람이 살상한 것도 모두가 탐진치(貪嗔痴)라는 삼독 때문이다. 하루에도 사람들이 삼독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지르는가. 애욕의 바다에 흘러 다니며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는 것도 모두가 삼독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世間放逸着五欲하야 不實分別受衆苦일새
奉行佛敎常攝心하사 誓度於斯是其行이로다
세간 사람들 방일하고 오욕(五欲)에 집착하여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 받는 도다.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라
제도하기를 서원함이 바로 그 행이로다.
강설 ; 오욕에 집착한 중생을 제도하는 가르침이다. 사람이 방일하는 것은 오욕에 집착할 인연이 된다. 불교에서의 오욕이란 눈, 귀, 코, 혀, 몸 등이 하고자하는 일만 하는 것이 오욕이다. 세속에서는 재물과 이성과 음식과 명예와 수명이다.
세 번째 구절에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명언 중에 명언이다. 자신을 지키는 입장에서의 불교란 이 말씀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리라. 불교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탐진치 삼독과 방일과 오욕락(五欲樂)에 마음이 흘러가지 않도록 잘 살펴서 단속하기 위함이다. 이 일만 제대로 한다면 과오가 없는 삶을 산다. 사람들은 흔히 나를 거스르는 경계와 나를 순종하는 경계를 만나면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마음이 좀 더 발전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가고 만다. 그래서 8만 4천 과오를 불러온다. 마음을 단속하는 방법으로는 참선, 염불, 간경, 진언, 예배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순간에 마음을 깨닫는 것이 제일 훌륭한 방법이다.
원효스님은 “막지 않은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과 번뇌로 자신의 집 재산을 삼았기 때문이며, 유혹하지 않는 악도에 많이 가는 것은 육신과 오욕으로 거짓 마음의 보배로 삼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着我入生死하야 求其邊際不可得일새
普事如來獲妙法하사 爲彼宣說是其行이로다
중생이 아(我)에 집착하여 생사에 들어가서
그 끝을 찾을 레야 찾을 수 없거늘
널리 여래를 섬겨 미묘한 법을 얻어
그들 위해 설명함이 그의 행이라네.
강설 ; 아(我)에 집착한 중생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생사도 무아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있다고 본다. 아(我)에 집착하는 것은 원인이 되어 생사의 과보를 받게 된다. 무아를 깨닫지 못하면 생사가 넓고 넓어 끝이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無怙病所纏으로 常淪惡趣起三毒하야
大火猛焰恒燒熱일새 淨心度彼是其行이로다
중생이 의지가 없고 병에 얽히어
항상 악취(惡趣)에 빠져 삼독을 일으켜서
크고 맹렬한 불에 항상 타오르거늘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강설 ; 악취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악취란 지옥, 아귀, 축생을 뜻하는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는 모습은 언제나 지옥과 같이 살고 아귀와 같이 살고 축생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迷惑失正道하야 常行邪徑入闇宅일새
爲彼大燃正法燈하사 永作照明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미혹하여 정도(正道)를 잃고
늘 삿된 길 걷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니
그를 위해 정법(正法)의 등불을 크게 밝혀
길이 밝게 비춤이 그 행이로다.
강설 ; 삿된 견해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미혹하기 때문에 정도를 잃고 삿된 길을 걷는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한마디로 인생의 삿된 길을 버리고 바른 길을 가게 하는 가르침이다. 정법(正法)의 등불을 크게 밝혀서 일체 중생들이 하루빨리 인생의 정도에 들어서게 해야 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漂溺諸有海하야 憂難無涯不可處일새
爲彼興造大法船하사 皆令得度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온갖 존재의 바다에 빠져서
근심과 어려움이 끝이 없어 머물 곳이 아니니
그를 위해 큰 법의 배를 만들어
모두 제도하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강설 ; 온갖 존재의 바다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존재의 공성(空性)을 모르는 것을 존재의 바다[諸有海]에 빠졌다고 한다. 근심과 어려움이 끝이 없는 것도 색이 곧 공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無知不見本하야 迷惑癡狂險難中일새
佛哀愍彼建法橋하사 正念令昇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무지하여 근본을 못보고
미혹하고 어리석어 험한 길로 달아날 새
부처님이 불쌍히 여겨 법의 다리를 세워
바른 마음으로 그 다리에 오르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강설 ; 무지한 중생들을 제도함을 밝혔다. 법선(法船)이나 법교(法橋)라는 용어는 인생의 고해(苦海)를 건너는데 반드시 필요한 방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법(法), 진리의 가르침이라야만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배가 되고 다리가 된다는 뜻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見諸衆生在險道하야 老病死苦常逼迫하고
修諸方便無限量하사 誓當悉度是其行이로다
모든 중생들이 험한 길에서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에 항상 쫓김을 보고
온갖 방편을 한량없이 닦아서
맹세코 다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강설 ; 험한 길에 떨어진 중생들을 제도함을 밝혔다. 험한 길이란 늙고 병들고 끝내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온갖 방편을 한량없이 닦아서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사와 열반이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몸과 텅 빈 공이 하나임[色卽是空]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의 삶이 본래 공에서 출발하여 공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자비와 지혜
聞法信解無疑惑하며了性空寂不驚怖하고
隨形六道徧十方하사普敎群迷是其行이로다
법을 듣고 믿어 알아 의혹 없으며
성품이 공적함을 알아 놀라지 않고
형상을 육도에 따르며 시방에 두루 하사
많은 중생 널리 교화함이 그의 행이로다.
강설 ; 자비와 지혜가 두루 함을 밝혔다. 법문을 통해서나 강의를 통해서나 책을 통해서나 법을 들으면 믿고 이해해서 의혹이 없어야 한다. 불교공부에는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라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잘 듣고, 깊이 사유하고,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다. 몸도 공적하고 성품도 공적함을 깨달으면 그 어떤 일이 앞에 닥친다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서 형상은 육도를 따르지만 시방에 두루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10, 인과가 원만한 덕
1) 광명변조(光明徧照)
爾時에 光明이 過十億世界하야徧照東方百億世界와千億世界와百千億世界와那由他億世界와百那由他億世界와千那由他億世界와百千那由他億世界와如是無數無量無邊無等과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인盡法界虛空界의所有世界하고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시니彼一一世界中에皆有百億閻浮提와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其中所有가悉皆明現하니라
그때에 광명이 십억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백억 세계와 천억 세계와 백 천억 세계와 나유타 억 세계와 백 천 나유타 억 세계와 이러한 수 없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 법계와 허공계에 있는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다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여기까지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아 깨닫게 하는 것이 점점 확대되고 불어나서 열 번째나 거듭하였다. 광명이 시방을 비치는 것이 마지막에는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에 까지 이르렀는데 화엄경의 수준에서는 간략하게 백억세계와 천억 세계와 백 천억 세계에서 온 법계와 허공계에 있는 세계까지 17단계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받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 광명 안에 비친 세계는 모두가 그 실상이 환하게 다 밝게 나타났다. 이것이 광명으로 깨닫게 하는 가르침, 즉 광명각품(光明覺品)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오로지 지혜광명으로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밝혀내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1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彼一一閻浮提中에悉見如來가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十佛刹微塵數菩薩의所共圍遶라悉以佛神力故로十方各有一大菩薩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來詣佛所하시니其大菩薩은謂文殊師利等이며所從來國은謂金色世界等이며本所事佛은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0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3) 일체처(一切處)문수보살의 게송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一切處)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1> 부처님 인과가 두루 함
一念普觀無量劫호니無去無來亦無住라
如是了知三世事하사超諸方便成十力이로다
한 생각에 한량없는 겁(劫)을 널리 보니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머무름도 없네.
이와 같이 삼세(三世)의 일을 분명히 아사
모든 방편 뛰어나서 열 가지 힘 이루었도다.
강설 ; 인과가 원만한 덕을 밝혔다. 화엄경의 게송 중에 빼어난 구절이라 법당의 주련으로 많이 활용한다. 한 순간에 한량없이 멀고 먼 겁을 관찰하지만 그 한량없는 겁에 가거나 오거나 머물거나 하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과거현재미래와 혼연히 일체가 되는 이치이다. 시간성을 초월하여 모든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열 가지 힘, 즉 부처님이 된 것이다.
또 아래와 같은 해석이 있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감이 없다.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미래도 없다.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므로 머무름도 없다.”라고 하였다. 졍명경에는 “만약 과거라고 하면 과거의 마음은 이미 소멸하였고, 만약 미래라고 하면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았고, 만약 현재라고 하면 현재의 마음은 머무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1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十方無比善名稱이 永離諸難常歡喜하사
普詣一切國土中하야 廣爲宣揚如是法이로다
시방에 비할 데 없는 좋은 이름이
모든 어려움을 영원히 떠나 항상 기쁘며
일체 국토에 널리 나아가
이러한 법을 널리 선양하도다.
강설 ; 큰 작용이 밖으로 드러남을 밝혔다. 큰 작용이란 설법이 두루 함이다. 부처님을 찬탄한 노래가 있다. “부처님은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과 같을 이 없으며, 시방세계에 비할 데 없다. 세간에 있는 것을 다 보았지만 그 무엇도 부처님과 같을 이 없더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22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爲利衆生供養佛일새 如其意獲相似果하시고
於一切法悉順知하사 徧十方中現神力이로다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부처님께 공양하여
그 뜻과 같이 상사(相似)한 결과를 얻으시고
모든 법에 다 수순하여 아시고
시방에 두루 위신력을 나투시네.
강설 ;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결코 부처님을 위해서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보살이라 하더라도 어찌 부처님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공양할 수 있으랴. 바꿔서 말하면 중생공양이 곧 제불공양이라는 말이다. 공양하는 뜻이 이와 같아야 상사(相似)한 결과, 즉 기대하는 불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3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從初供養意柔忍하며 入深禪定觀法性하고
普勸衆生發道心이실새 以此速成無上果로다
처음 부처님께 공양하고 마음이 부드러우며
선정에 깊이 들어 법성(法性)을 깊이 관찰하고
중생에게 널리 권해 도심(道心)을 내게 할 새
이것으로 최상의 결과를 빨리 이루었네.
강설 ;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가 다 포함하였다. 그리고 중생에게 널리 권해 도심(道心)을 내게 한다는 것은 방편과 원과 힘도 포함하였다. 이러한 10바라밀을 통해서 최상의 결과인 불과를 이룬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4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2> 따라서 행하기를 권하다
十方求法情無異하고爲修功德令滿足하며
有無二相悉滅除하면此人於佛爲眞見이니라
시방으로 법을 구하여 마음 변치 않고
공덕을 닦아 만족케 하며
있고 없는 두 모양을 다 소멸하면
이런 사람 부처님을 참으로 보리라.
강설 ; 일체 존재에 대하여 있음과 없음, 너와 나, 남자와 여자 등 상대적인 차별성으로 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불이성, 무차별성, 공적성으로 볼 수 있으면 이 사람은 부처님을 보리라. 금강경에는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을 보되 비상(非相)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하였다. 즉 존재의 공성만 제대로 파악하면 진리는 눈앞에 있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5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普往十方諸國土하야 廣說妙法興義利호대
住於實際不動搖하면 此人功德同於佛이니라
시방의 모든 국토에 두루 다니며
묘법(妙法)을 널리 설해 이익을 일으키되
실제(實際)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
이 사람의 공덕은 부처님과 같으리라.
강설 ; 부처님을 공덕자(功德者)라고 부른다. 천상천하에서 공덕이 가장 많고 훌륭한 공덕의 소유자가 부처님이다. 그와 같은 부처님이 되려면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무상심심한 미묘법을 널리 설하여 바른 이치의 이익을 일으키되 실제(實際)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6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如來所轉妙法輪이여 一切皆是菩提分이니
若能聞已悟法性하면 如是之人常見佛이니라
여래께서 굴리시는 묘한 법륜은
모두가 다 보리에 나아가는 길
만약 듣고 나서 법성을 깨달으면
이러한 사람은 항상 부처님을 보리라.
강설 ;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문은 일체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어떤 저급한 방편설법을 하더라도 본래의 목적하는 바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자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목적은 있을 수 없다. 법화경에도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오직 하나의 큰 사연[一大事因緣]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나의 큰 사연이란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 즉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고, 그 깨달음 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7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不見十力空如幻이면 雖見非見如盲覩니
分別取相不見佛이요 畢竟離着乃能見이니라
십력(十力)이 공하여 환술과 같은 줄을 보지 못하면
비록 보나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으니
분별로 모양을 취하면 부처를 못 보리니
끝까지 집착을 떠나야 이에 보리라.
강설 ; 십력(十力)이란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의 공덕과 능력을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인용한다. 그와 같이 부처님을 열 가지 힘으로 표현하지만 텅 비어 환영과 같은 줄로 보아야지 만약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나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다고 하였다. 분별로 모양을 취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비로소 여래를 보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28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衆生隨業種種別을 十方內外難盡見이니
佛身無礙徧十方을 不可盡見亦如是니라
중생이 업(業)을 따라 갖가지 다름과
시방의 안팎을 다 보기 어려우니
부처님의 몸 걸림 없어 시방에 두루 함을
다 보지 못함이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십력 가운데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라고 해서 중생들의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이 있다. 참으로 중생들의 업력은 불가사의하여 가지가지가 다르다. 그래서 시방의 안팎을 다 보기 어렵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몸도 걸림이 없어 시방에 두루 하여 보지 못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29
九, 광명각품(光明覺品)
譬如空中無量刹이 無來無去徧十方호대
生成滅壞無所依하야 佛徧虛空亦如是니라
비유컨대 허공의 한량없는 세계가
옴도 없고 감도 없이 시방에 두루 하되
생성과 소멸이 의지한 데 없듯이
부처님이 허공에 두루 함도 이와 같도다.
강설 ; 허공은 무한 광대한 저 우주에 끝없이 펼쳐져있다. 그래서 가고 오고할 것이 없다. 언제나 그곳이 그곳이다. 허공은 생성하거나 소멸함도 없다. 불생불멸이다. 허공 안에 존재하는 지구와 기타 별들만 끝없이 성주괴공을 거듭한다. 허공은 부동성이다. 부처님도 독립된 체성이 없이 드넓은 허공에 두루 한 것이 이와 같다.
사람의 불성생명과 진여자성도 이와 같아서 저 허공처럼 넓고 넓어 무한광대하다. 무한 광대한 허공에 무수한 별들과 사람과 비행기와 자동차와 기차와 새들이 마음껏 왕래하듯이 불성생명과 진여자성 안에서도 출생과 성장과 변화하여 늙음과 소멸과 성공과 실패 등등 일체 것이 변화무쌍하며 천변만화한다. 일생을 통해서 변화무쌍하며 천변만화하지만 그 본래의 자리, 즉 그 소재는 늘 여여 부동한 진여자성과 불성생명이다. 이것이 지혜광명으로 깨닫게 하는 가르침, 광명각품이다.
9, 광명각품 끝
화엄경 강설 제13권 13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강설 ; 문수보살이 아홉 명의 보살들에게 질문하면 각수(覺首)등 보살들이 답을 하고, 다시 여러 보살들이 질문하면 문수보살이 답을 하는 형식으로 설해졌다. 여래의 깊고 깊은 연기심심(緣起甚深)과 교화심심(敎化甚深)과 업과(業果)심심과 설법(說法)심심과 복전(福田)심심과 교법(敎法)심심과 정행(正行)심심과 수행(修行)심심과 일도(一道)심심과 불경(佛境)심심을 묻고 답하는 내용이다.
차례
1, 연기심심(緣起甚深)
1)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묻다
<1> 십사오대(十事五對)
<2> 십사오대(十事五對)의 부지(不知)
2) 각수(覺首)보살의 답
<1> 대답할 것을 허락하다
제 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 연기심심(緣起甚深)
1)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묻다
<1> 십사오대(十事五對)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覺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心性이 是一이어늘云何見有種種差別이니잇고所謂往善趣惡趣와諸根滿缺과受生同異와端正醜陋와苦樂不同이니라
그때에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심성(心性)은 하나이거늘 어찌하여 갖가지 차별이 있음을 보게 됩니까? 이른바 선한 데도 가고 악한 데도 가며, 모든 근(根)이 원만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며, 생(生)을 받음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단정하기도 하고 누추하기도 하며,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것이 같지 않습니까?”
강설 ; 첫 질문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의심할만한 내용을 물었다. “심성(心性)은 하나이거늘 어찌하여 갖가지 차별이 있음을 보게 됩니까?”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태어나는 곳이 다름과 육근과 사대가 각각 다름과 남녀로 태어남이 다른 점과 잘나고 못난 것과 고생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다른 점들의 상반되는 것들이다. 일체가 심성(心性)이라는 한 가지 사실로 만들어 졌다[一切唯心造]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들은 왜 이처럼 각각 다른가라는 문제다.
또 심성(心性)이 하나라는 뜻은 종지(宗旨), 즉 근본 취지를 세운 것이다. 그 심성은 여래장(如來藏)이며 자성청정심이다. 진여자성이며 법성생명이다. 여래장이라고 하면 공여래장(空如來藏)도 있고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도 있으며 일체 번뇌가 없는 경지와 일체 만덕지혜가 충만한 경지도 함께 포함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십사오대(十事五對)의 부지(不知)
業不知心하고心不知業하며受不知報하고報不知受하며心不知受하고受不知心하며因不知緣하고緣不知因하며智不知境하고境不知智로다
“그러므로 업(業)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업을 알지 못하며, 받는 것이 과보를 알지 못하고 과보가 받는 것을 알지 못하며, 마음이 받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받는 것이 마음을 알지 못하며, 인(因)이 연(緣)을 알지 못하고 연이 인을 알지 못하며, 지혜가 경계를 알지 못하고 경계가 지혜를 알지 못하나이다.”
강설 ; 업과 마음 마음과 업, 받는 것과 과보 과보와 받는 것, 마음과 받는 것 받는 것과 마음, 인과 연 연과 인, 지혜와 경계 경계와 지혜가 서로 서로 알지 못하면서 또한 분리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각수보살의 답이 기대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각수(覺首)보살의 답
<1> 대답할 것을 허락하다
時에 覺首菩薩이 以頌答曰
仁今問是義는爲曉悟群蒙이라
我如其性答호리니惟仁應諦聽하소서
그때에 각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인자(仁者)가 이런 뜻을 지금 물으니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라.
내가 그 성품과 같이 답하리니
인자여 응당 자세히 들으소서.
강설 ; 보살이 보살을 지칭할 때 인자(仁者)라고 한다. 첫 게송은 중생들을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을 찬탄하였다. 보살은 무엇을 하든 오로지 중생을 위한다. 답을 하는데 심성의 이치와 같이 답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불교는 언제나 마음의 원리, 생명의 원리, 진여자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해석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서로 알지 못함을 답하다
諸法無作用이며亦無有體性이라
是故彼一切가各各不相知니라
모든 법은 작용이 없으며
또한 체성(體性)도 없어
그러므로 저 모든 것은
각자 서로 알지 못하느니라.
강설 ; 제법(諸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인연으로부터 소멸하는데 그 인연이 가지가지이므로 서로 알지 못한다. 독립된 작용도 없고 독립된 체성도 없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알지 못함의 비유
譬如河中水가湍流競奔逝호대
各各不相知인달하야諸法亦如是니라
비유컨대 강 가운데 흐르는 물이
빠르게 다투어 흘러가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강설 ; 업(業)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업을 알지 못하며, 받는 것이 과보를 알지 못하고 과보가 받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앞 강물 뒷강물이 빠르게 흘러도 서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라는 사대(四大)의 비유를 들었는데 물의 비유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大火聚가 猛焰同時發호대
各各不相知인달하야 諸法亦如是니라
또한 큰 불무더기에서
맹렬한 불길이 함께 일어나지만
서로 각자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3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長風起에 遇物咸鼓扇호대
各各不相知인달하야諸法亦如是니라
또 바람이 길게 불어올 때
물건에 닿으면 함께 흔들리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3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衆地界가 展轉因依住호대
各各不相知인달하야 諸法亦如是니라
또 여러 땅덩이가
차례차례 의지하여 머물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강설 ; 십사오대(十事五對)의 알지 못함을 사대에 비유하였다. 우리의 육신도 사대로 되었고 바깥의 세상과 지구도 역시 사대로 되었다. 그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이 존재하지만 낱낱이 서로 서로 알지 못하고 존재한다. 일체제법이 허망무실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므로 서로 알지 못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차별의 인연
眼耳鼻舌身과心意諸情根이
以此常流轉호대而無能轉者니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과 뜻과 모든 정(情)의 근(根)이
이런 것이 항상 유전하지만
유전하는 주체가 없느니라.
강설 ;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의 6근은 서로 어울리고 엮여서 흘러가면서 천변만화하여 온갖 일을 만들지만 어느 것 하나도 실체가 없다. 그리고 서로 어울리고 엮여서 흘러가면서 천변만화하게 하는 주체도 없다. 모두가 합성하여 이뤄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체 없는 각각의 차별한 인연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3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5> 진여(眞如)가 인연을 따르다
法性本無生호대示現而有生하니
是中無能現이며亦無所現物이니라
법성(法性)은 본래 생(生)이 없으나
생을 나타내보이나니
이 가운데는 나타내는 이도 없고
또한 나타나는 사물도 없느니라.
강설 ; 진여법성, 진여자성, 불성생명이라는 생명원리에는 본래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 없이 생기고 소멸한다. 즉 생로병사 하지만 생로병사에는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다. 온전히 진여자성 덩어리다. 진여자성 덩어리가 그 자성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주관도 되고 객관도 되면서 천백억화신으로 생멸변화를 나타낸다. 법성게에서 그를 일러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한다. 마치 금으로 반지와 비녀와 시계와 불상과 수저 등등을 만들어서 천변만화하지만 금에는 아무런 생멸이 없이 그냥 금일뿐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 자리에 무슨 주관인 금이 따로 있고 객관인 금이 따로 있겠는가. 그래서 생사와 열반이 상공화(相共和)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6> 망심(妄心)으로 분별하여 육근이 있다
眼耳鼻舌身과心意諸情根이
一切空無性이어늘妄心分別有니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뜻과 모든 정(情)의 근(根)이
모두 공(空)하여 자성(自性)이 없지만
망심으로 분별하여 있게 되느니라.
강설 ; 모두가 합성품이다. 합성품을 망심으로 분별하여 그와 같은 실체가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짜로 있는 가유(假有)의 존재들이다. 가짜로 존재하는 것들인데 설사 흩어진들 무슨 잘못된 것이 있겠는가. 가짜는 흩어지는 것이 바른 길이다. 어두운 밤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밝은 태양이 뜨면 하나도 없다. 지혜의 밝은 눈을 뜨면 6근은 흔적도 없다. 밝은 눈으로 보면 색이 곧 공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7> 일체가 무자성(無自性)이다
如理而觀察하면一切皆無性이니
法眼不思議라此見非顚倒니라
이치대로 관찰해보면
모두가 다 자성이 없나니
법안(法眼)은 부사의함이라
이렇게 보는 것이 바로 봄이로다.
강설 ; 내사대(內四大)인 육신이나 외사대(外四大)인 산하대지나 이치대로 관찰해보면 어느 것도 실체가 없다. 모두 합성품이다. 일체존재를 존재의 실상대로 보는 법안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바른 눈이고, 이와 다르게 보는 것은 전도된 눈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8> 자취마저 떨어버리다
若實若不實과若妄若非妄과
世間出世間이但有假言說이니라
진실과 진실치 아니함과
허망과 허망치 아니함과
세간과 출세간이
다만 거짓말이니라.
강설 ; 불적(拂跡)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고 보고 실체가 없다고 본 그 법안(法眼)마저 떨어버린다. 사찰에서는 마당을 쓸 대 뒷걸음질을 하면서 쓴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면서 마당을 쓸면 아무리 깨끗하게 쓸어도 쓸고 간 사람의 발자국은 남는다. 그 발자국마저 쓸어버리기 위해서다. 그것이 자취마저 떨어버리는 이치를 보여주는 행위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교화심심(敎化甚深)
1) 문수보살이 재수보살에게 묻다
(중생을 따르는 열 가지 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財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一切衆生이 非衆生인댄云何如來가隨其時하시며隨其命하시며隨其身하시며隨其行하시며隨其解하시며隨其言論하시며隨其心樂하시며隨其方便하시며隨其思惟하시며隨其觀察하사於如是諸衆生中에爲現其身하야敎化調伏이니잇고
문수사리보살이 재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일체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그 때[時]를 따르고, 그 목숨을 따르고, 그 몸을 따르고, 그 행을 따르고, 그 이해를 따르고, 그 언론을 따르고, 그 마음에 좋아함을 따르고, 그 방편을 따르고, 그 생각함을 따르고, 그 관찰함을 따라서 이와 같은 모든 중생 가운데 그 몸 나타내어 교화하고 조복하십니까?”
강설 ; 부처님이 중생을 따르면서 교화를 펼치는 열 가지 깊고 깊은 사연에 대해서 문수보살이 재수보살에게 질문하였다. 만약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중생은 본래로 공적한 것인가? 아니면 중생은 본래로 부처님인가? 그렇다. 중생은 미혹한 중생이면서 중생은 본래 텅 비어 공적한 존재다. 또한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님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로 보는 관점들을 불교에서는 공관(空觀)과 가관(假觀)과 중도관(中道觀)이라한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중생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로 부처님인 중생을 교화하는데 반드시 따라야할 열 가지 일이 있다. 중생을 제대로 교화하려면 때를 잘 보아서 때에 맞게 교화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목숨과 그 몸과 그 행위와 그 이해 등등을 잘 알아서 알맞은 방편을 써야한다. 이것이 중도적 교화방편이다. 그래서 교화심심이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재수(財首)보살의 답
<1> 대답할 것을 허락하다
時에 財首菩薩이以頌答曰
此是樂寂滅多聞者境界라
我爲仁宣說호리니仁今應聽受하소서
그때에 재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적멸을 좋아하면서
많이 듣는 이들의 경계라
내가 인자(仁者)를 위해 말하리니
인자시여 이제 응당 들으소서.
강설 ; 재수보살이 대답하겠다고 하는 이것이란 교화심심(敎化甚深)에 대한 내용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부처님의 사업이며 불교의 목적사업이다. 불교가 하는 일의 전부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깊고 깊은 이치가 숨어있다. 그래서 교화심심이라고 한다. 중생교화는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교화를 해야 할 사람들의 진정한 성향은 적멸을 좋아한다. 조용히 있는 것을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공부하기를 좋아한다.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쓴다. 이 두 가지 면을 병행했을 때 진정한 교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중생의 몸을 따르다
分別觀內身컨댄此中誰是我오
若能如是解하면彼達我有無니라
분별하여 이 몸을 관찰하건대
이 가운데 무엇을 나(我)라 하리오.
만일 능히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그는 나의 있고 없음을 통달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4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此身假安立이라住處無方所하니
諦了是身者는 於中無所着이니라
이 몸은 거짓으로 되어 있고
머무는 곳도 처소가 없으니
이 몸을 참으로 아는 이는
여기에 집착하지 아니하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4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於身善觀察하야 一切皆明見하면
知法皆虛妄하야 不起心分別이니라
이 몸을 잘 관찰해서
모든 것을 다 밝게 보면
법이 다 허망함을 알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리라.
강설 ; 세 게송은 이 육신을 바르게 관찰하여 더 이상 분별하거나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않는 자세를 밝혔다. 이 몸을 깊이 자세히 관찰해보면 무아(無我)다. 공(空)이다. 무상(無常이며 무상(無相)이다. 가짜다. 거짓으로 되어있다. 허수아비다. 저녁연기며, 아침이슬이다. 물거품이다. 허망하고 허무하다.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노래 부르고 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중생의 수명을 따르다
壽命因誰起며復因誰退滅고
猶如旋火輪이初後不可知니라
수명은 무엇을 인(因)하여 생겼으며
또 무엇을 인하여 없어지는가?
마치 불을 돌리는 바퀴와 같아서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리라.
강설 ; 수명이란 목숨이다.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힘이다. 즉 생명인데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살아있는 것은 숨을 쉼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 호흡기관을 통해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 끊임없이 몸속에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만 모든 생명이 유지되고 그것을 목숨이 살아있다고 한다. 그 또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함하여 임시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합성체(合成體)다. 비유에서 설명한 대로 불을 돌릴 때 나타난 불 바퀴와 같은 것이다. 그 바퀴가 어디가 처음이며 어디가 끝인가. 처음과 끝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바퀴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4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중생의 관찰을 따르다
智者能觀察一切有無常하며
諸法空無我하야永離一切相이니라
지혜로운 이는
일체가 무상(無常)하며
모든 법이 공하여 무아임을 관찰하고
일체의 형상을 영원히 떠나느니라.
강설 ; 사람과 모든 존재는 비록 진여불성이며 자성 청정성이라 하더라도 무상성(無常性)과 공성(空性)과 무아성(無我性)과 무상성(無相性)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으로 보아야 하며, 무아로 보아야 하며, 공으로 보아야 하며, 무상(無相)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일체의 상을 영원히 떠나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5> 중생의 행을 따르다
衆報隨業生이如夢不眞實하니
念念常滅壞하야如前後亦爾니라
온갖 과보가 업을 따라 생기는 것이
꿈과 같아서 진실하지 않으며
순간순간에 항상 소멸하여
앞과 같이 뒤도 역시 그러하니라.
강설 ; 미혹하기 때문에 업을 짓고, 업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모습은 모두 업을 지어서 얻은 과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라 하지만 그대로가 꿈이다. 진실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사라져가고 있다. 단 1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6> 중생의 마음에 좋아함을 따르다
世間所見法이但以心爲主어늘
隨解取衆相일새顚倒不如實이니라
세간에서 보는 모든 법이
다만 마음으로 주인이 되거늘
이해를 따라서 온갖 모양을 취할 새
전도(顚倒)하여 실답지 못하도다.
강설 ; 세간에서 보는 모든 법이 다만 마음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일체 경계는 곧 마음의 변화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유식(唯識)의 이론이다.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의 복잡한 이론이 밑에 깔려있는 내용이다. 아무튼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하여 마음밖에는 따로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 유식사상이다. 이와 같이 보지 못하면 그것은 전도된 견해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7> 중생의 언어를 따르다
世間所言論이一切是分別이니
未曾有一法도得入於法性이니라
세간의 말이란
일체가 분별이니
일찍이 한 법도
법성에 들어가지 못하도다.
강설 ; 세간의 언어란 어떤 언어든지 모두가 의식으로 사량 분별해서 나온 것이다. 그 어떤 복잡 미묘한 철학이론이라 하더라도 사변(思辨)의 결과다. 그러므로 사량 분별을 초월한 진여법성에는 들어갈 수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8> 중생의 생각을 따르다
能緣所緣力으로種種法出生이니
速滅不暫停하야念念悉如是니라
반연(絆緣)과 반연할 바의 힘으로
갖가지 법이 출생하나니
빨리 소멸하고 잠깐도 머물지 아니해서
순간순간 모두 그러하니라.
강설 ; 한 마음 안에 주관이 있고 객관이 있다.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 반연할 바다.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 능히 반연하는 주관이 된다. 소연(所緣)과 능연(能緣)의 관계다. 그러나 모두가 한 마음 안에서 일어나서 가지가지 법을 출생한다. 또한 잠간도 머물지 않고 소멸한다. 생성과 소멸이 변화무쌍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업과심심(業果甚深)
1)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묻다
(과보를 받는 열 가지 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寶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一切衆生이等有四大호대無我無我所어늘云何而有受苦受樂과端正醜陋와內好外好와少受多受와或受現報와或受後報이닛고然이나 法界中엔無美無惡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사대(四大)가 있되 아(我)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거늘 어찌하여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으며, 단정하고 누추하며, 안으로 좋아하고 밖으로 좋아하며, 적게 받고 많이 받으며, 혹은 현생(現生)의 보(報)를 받고 혹은 후생(後生)의 보를 받습니까? 그러나 법계 가운데는 아름다운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나이다.”
강설 : 일체중생의 육신은 평등하게 지수화풍이라는 사대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대는 거짓 이름이며, 사대는 주인이 없다. 그래서 육신도 무아다. 무아에서 무슨 나의 것[我所]이 있겠는가. 또한 고락과 누추와 내외와 다소와 순현보(順現報)와 순생보(順生報)와 순후보(順後報)가 있겠는가. 법계 중에는, 생명원리에는 그와 같은 차별상이 없다. 각각 다른 금의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금이라는 평등만 보인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보수(寶首)보살의 답
<1> 업을 따라 과보가 생기다
時에 寶首菩薩이 以頌答曰
隨其所行業하야如是果報生이나
作者無所有니諸佛之所說이로다
그때에 보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들의 행한 업을 따라서
이와 같은 과보가 생기지만
짓는 이가 없도다.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로다.
강설 ; 인연으로 생기는 업(業)과 과보(果報)는 상속하지만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 짓는 이도 본질이 공성(空性)이며, 받는 이도 본질이 공성이며, 업도 또한 공성이며, 과보도 또한 공성이다. 그러므로 어떤 공덕도 공성이며, 어떤 죄업도 공성이다.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서 열반을 지나간다하더라도 꿈이며 환영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정견이요 이와 다르게 보는 것은 사견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비유(譬喩)
譬如淨明鏡이隨其所對質하야
現像各不同인달하야業性亦如是니라
비유하건대 깨끗하고 밝은 거울이
그 앞에 상대할 사물을 따라서
나타나는 영상이 각각 다르듯이
업(業)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미혹과 업과 과보의 본질이 공성인 점을 비유로 밝혔다. 청량스님은 “만약 법상종의 견해라면 근본 식(識)으로 거울을 삼는다. 지금은 법성종의 견해를 의지함으로 또한 여래장성으로서 밝은 거울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근본 식이든 여래장성이든 쉽게 이해하면 거울이란 마음의 거울이다. 텅 빈 마음자리에 이런 업, 저런 업이 가지가지로 왕래하는 경우를 밝힌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田種子가 各各不相知호대
自然能出生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 밭에 심을 종자가
각각 서로 알지 못하나
자연히 능히 출생하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밭에서 종자가 싹을 발생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밭은 업에 비유하였으니 연(緣)이 되고, 종자는 식(識)에 비유하였으니 인(因)이 된다. 이 두 가지가 상대해야 싹이 나기 때문에 독립된 자성이 없으며 서로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巧幻師가 在彼四衢道하야
示現衆色相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 재주 있는 요술쟁이가
저 네거리에서
온갖 모양을 나타내보이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마술사가 마술로서 비둘기도 만들어 보이고, 카드도 만들어 보이고, 갖가지의 보자기도 만들어 보이듯이 업의 성품도 짓는 대로 가지가지를 만들어 보인다. 근본은 텅 비어 공적하지만 업력은 불가사의하여 재주 있는 마술사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5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機關木人이 能出種種聲호대
彼無我非我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마치 기관(機關)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갖가지 소리를 능히 내지만
그것은 나와 나 아님이 없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기관목인(機關木人)이라는 허수아비는 요즘으로는 녹음기나 전축이나 각종 오디오와 같은 것이다. 오디오에서 별별 소리를 다 내지만 그 속에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기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소리를 낼만한 그 어떤 실체도 없다. 티브이나 컴퓨터도 역시 마찬가지다. 업의 성품도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衆鳥類가 從殼而得出호대
音聲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한 온갖 새들이
모두 알에서 나왔으나
그 소리들이 각각 다르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온갖 새들이 모두 알에서 태어난다. 같은 알이지만 태어나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들은 각각 다르다. 알을 깨서 아무리 찾아봐야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업의 성품도 이와 같아서 업을 짓는 대로 천 가지로 변하고 만 가지로 화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胎藏中에 諸根悉成就나
體相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 비유하건대 태(胎)속에서
여러 근(根)이 이루어지지만
그 형체는 오는 곳이 없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업의 본성은 오는 곳이 없음을 비유하였다. 비록 인연으로 좇아서 온다고 하지만 그 인연도 또한 오는 곳이 없다.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포함되어 있어서 오는 곳이 없다고 한다.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이든 미미한 작은 물 한 방울이거나 씨앗 하나에서 모든 6근이 이미 다 들어 있다. 물 한 방울에 무슨 눈, 귀, 코, 혀, 머리카락, 발톱 등이 있었는가. 온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업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며 무서운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在地獄에 種種諸苦事여
彼悉無所從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 저 지옥의
갖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이
모두 온 곳이 없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지만 지옥에는 아무런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니다. 중생이 고통을 스스로 느낄 뿐이다. 지옥에 위문공연을 간 사람은 같은 지옥에 있다하더라도 즐겁기만 하다. 실체는 없지만 각각 업을 지은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轉輪王이 成就勝七寶나
來處不可得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비유하건대 전륜왕이
아름다운 칠보를 가지지만
그 온 곳을 찾지 못하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왕의 가족으로 태어나거나 부귀공명을 누리는 집안에 태어나면 금은보화와 그 모든 영화를 누린다. 그런데 그가 누리는 영화는 어디에서 왔는지 온 곳을 찾을 길이 없다. 업의 씨앗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諸世界가 大火所燒然이나
此火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또 모든 세계가
큰 불에 다 타버리지만
그 불이 온 곳이 없듯이
업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겁의 불길이 일어나면 모든 세계가 다 타버리고 심지어 바다까지 타 버린다. 가끔은 화재가 일어나서 큰 공장도 타고 큰 빌딩도 타버린다. 불이 타고나면 화재의 원인을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전기일수도 있고 성냥일수도 있고 담뱃불일수도 있지만 모든 전기, 모든 성냥, 모든 담배가 다 그렇던가. 모든 불이 다 그렇던가. 결코 온 곳은 없다. 그와 같이 업도 또한 그렇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설법심심(說法甚深)
1) 문수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묻다
(법문의 열 가지 한량없음)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德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如來所悟는唯是一法이어늘云何乃說無量諸法하시며現無量刹하시며化無量衆하시며演無量音하시며示無量身하시며知無量心하시며現無量神通하시며普能震動無量世界하시며示現無量殊勝莊嚴하시며顯示無邊種種境界이닛고而法性中엔此差別相을皆不可得이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여래께서 깨달은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법이거늘 어찌하여 이에 한량없는 여러 가지 법을 설하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시며,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시며, 한량없는 음성을 연설하시며, 한량없는 몸을 보이시며, 한량없는 마음을 아시며, 한량없는 신통을 나타내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두루 능히 진동하시며, 한량없이 훌륭한 장엄을 나타내 보이시며, 끝없는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 보이십니까? 그러나 법의 성품 가운데는 이러한 차별한 모습을 모두 찾을 수 없습니다.”
강설 ; 설법심심(說法甚深)은 응현심심(應現甚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하여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 지극히 깊고도 오묘한 도리라는 뜻이다. 실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인데 설법에는 어찌하여 그와 같이 많고 많은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세포 속에 온전한 사람이 다 들어있으며 소도 개도 양도 되지도 다 들어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부처님의 깨달음은 실체가 없는데 아침의 샛별에서 왔는가. 금강보좌에서 왔는가. 보리수나무에서 왔는가. 하나의 법에서 펼쳐 보인 화엄경을 저 용수(龍樹)보살은 13천(千) 대천(大千)세계 미진수의 게송(偈頌)과 일사천하(一四天下) 미진수의 품(品)이 있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덕수(德首)보살의 답
<1> 물음에 대한 이익을 찬탄하다
時에 德首菩薩이 以頌答曰
佛子所問義가甚深難可了하니
智者能知此하야常樂佛功德이니라
그때에 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佛子)가 물은 뜻
매우 깊어 알기 어려우니
지혜 있는 이가 이것을 알아서
부처님의 공덕을 항상 즐기도다.
강설 ; 덕수보살은 문수보살을 향하여 불자(佛子)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불자(佛子)라는 말을 얼마나 잘 쓰는가. 실로 우리는 그대로 불자다. 설법의 이치가 매우 깊고 또 깊은 데 그 뜻을 물었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설법을 통해서 부처님의 공덕을 알고, 부처님의 공덕을 자신의 공덕으로 하여 즐긴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비유(譬喩)
譬如地性一에衆生各別住호대
地無一異念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비유하건대 땅의 성품은 하나로서
중생들이 각각 달리 살지만
땅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설법심심(說法甚深)에 대해서 비유로서 밝혔다. 여래가 깨달으신 법은 오직 하나인데 어찌하여 무량한 제법이 펼쳐지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땅의 성품은 동일한 하나인데 별의 별 중생들이 각각 다르게 사는 것과 같다. 동물도 식물도 지역을 따라 모두가 다르다. 저 북극과 남극과 아프리카나 아마존을 보라. 중국과 유럽과 미국을 보라. 이 얼마나 각양각색인가.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火性一이能燒一切物호대
火焰無分別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 불의 성품은 하나로서
능히 온갖 사물을 태우지만
불꽃은 그런 분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설법이 매우 깊고 깊은 도리를 또 불에 비유하였다. 불이란 한 가지 성질로서 그냥 타 오를 뿐이다. 그런데 온갖 사물들이 불에 닿으면 다 타버린다. 흙도 돌도 나무도, 심지어 물도 타버린다. 부처님의 법도 하나의 깨달음에서 이와 같이 다양하게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하신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6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大海一에波濤千萬異나
水無種種殊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 큰 바다는 하나로서
파도는 천만 가지가 다르지만
물은 가지가지의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설법심심을 파도에 비유하였다. 바다는 하나인데 천파만파의 각각 다른 파도가 출렁인다. 출렁이던 파도는 다시 하나의 바다로 돌아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설법도 천만 가지로 중생들의 근기와 수준에 때라 소위 8만 4천 법문으로 펼쳐지지만 결국은 깨달음이라는 하나일 뿐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風性一이能吹一切物호대
風無一異念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 바람의 성품은 하나로서
일체 사물에 능히 불지만
바람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바람이 불어 일체 사물에 와 닿는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은 나무꾼을 시원하게 하고 바다의 바람은 어부를 위험에 빠뜨린다. 나무에 부는 바람도 곡식밭에 부는 바람도 다 각각의 인연을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만 바람의 성품은 하나이듯이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여래가 깨달으신 법은 한가지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大雲雷가普雨一切地호대
雨滴無差別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한 큰 구름이
온갖 땅에 널리 비를 내리되
빗방울은 차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큰 구름이 일어 무수한 비를 내릴 때, 곳곳에서 가뭄을 해소하고 낱낱 식물을 자라게 하지만 그 비의 성질은 하나이듯이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아서 여래가 깨달으신 법은 한가지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地界一이能生種種芽호대
非地有殊異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 땅덩이는 하나로서
능히 갖가지 싹을 내되
땅은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앞에서는 땅의 성질에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땅덩이에 비유하였다. 봄이 오면 땅덩이에서 천초만목이 싹이 돋지만 땅은 언제나 같은 땅이다. 여래의 깨달음은 하나이지만 화엄경의 가르침은 13천(千) 대천(大千)세계 미진수의 게송(偈頌)과 일사천하(一四天下) 미진수의 품(品)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공부하는 가장 작은 화엄경도 39품에 80권이나 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日無雲曀에普照於十方이나
光明無異性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마치 해가 구름에 가리지 않아
시방을 널리 비추나
광명은 다른 성품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태양은 시방세계의 낱낱 사물을 다 비춘다. 그리고 태양빛을 받은 식물은 모두 다 잘 자란다. 그러나 태양빛의 광명은 그 성품이 동일한 하나이다.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空中月을世間靡不見이나
非月往其處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또한 하늘에 있는 달을
세간에서 모두 보지만
달이 그 곳에 간 것은 아니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일 천강에 물이 있으면 일 천강에 달이 있고, 세상의 곳곳에서 사람마다 다 달을 보지만 달이 그곳에 간 것도 아니며 사람이 달에 간 것도 아니다.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아서 가고 옴은 없지만 듣고 믿고 이해하는 사람마다 다 깨닫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大梵王이應現滿三千호대
其身無別異인달하야諸佛法如是니라
비유하건대 대범천왕이
삼천세계에 가득 차게 나타나지만
그의 몸은 다르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강설 ; 여래의 깨달음은 하나지만 온갖 법이 다르게 펼쳐지는 것을 땅과 불과 바다와 바람과 구름과 땅덩이와 태양과 달과 대범천왕의 비유를 들어 밝혔다. 여래소오(如來所悟)는 유시일법(唯是一法)이라하였다. 여래의 깨달으신 바는 오직 한 가지 법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법에서 천백억화신으로 천변만화하는 것이 또한 여래의 법이다. 본래로 법에는 그와 같은 성질을 다 갖추고 있다, 그것이 여래의 일체를 구족한 원만구족성이다. 그러므로 법이 그와 같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5, 복전심심(福田甚深)
1) 문수보살이 목수보살에게 묻다
(보시 과보의 열 가지)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目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如來福田이等一無異어늘云何而見衆生이 布施에果報不同이니잇고所謂種種色과種種形과種種家와種種根과種種財와種種主와種種眷屬과種種官位와種種功德과種種智慧니而佛於彼에其心平等하야無異思惟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목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여래의 복전(福田)이 평등하게 하나인지라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중생이 보시함에 과보가 같지 않음을 봅니까? 이른바 가지가지 색상과 가지가지 형상과 가지가지 집과 가지가지 근(根)과 가지가지 재물과 가지가지 주인과 가지가지 권속과 가지가지 벼슬 지위와 가지가지 공덕과 가지가지 지혜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기에 그 마음이 평등하여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강설 ; 복전심심(福田甚深)이란 법보시나 재보시나 무외보시 등을 베풀었을 때 그에 따른 과보를 받음이 알기 어려워 깊고 깊은 이치가 있음을 밝혔다. 여래의 복전(福田)은 평등하게 하나다. 그런데 받는 과보는 천차만별하다. 왜 그런가? 천차만별한 과보의 형태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색상과 형상과 집과 근과 재물 등등이 서로 다르다. 실은 다 같이 보시를 하더라도 면밀히 살펴보면 다를 것이다. 목적과 마음 씀씀이의 흔쾌함과 아끼는 자세 등등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래서 삼륜(三輪), 즉 베푸는 자와 물건과 받는 이가 모두 텅 비어 청정함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목수(目首)보살의 답
<1> 한 가지 비유로써 전체를 답하다
時에 目首菩薩이 以頌答曰
譬如大地一이隨種各生芽호대
於彼無怨親인달하야佛福田亦然이니라
그때에 목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비유하건대 대지는 하나인데
씨앗을 따라서 각각 싹을 내되
거기에는 원수와 친함이 없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강설 ; 땅은 똑 같은 하나이지만 씨앗이 다르므로 싹도 다르고, 잎도 다르고, 꽃도 다르고, 열매도 다르다. 복의 밭이 같다고 해서 그 결과도 같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인과의 당연한 이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아홉 가지 비유로써 달리 밝히다
又如水一味가因器有差別인달하야
佛福田亦然하야衆生心故異니라
또 물은 한 맛이지만
그릇으로 인해서 차별이 있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또한 그러해서
중생들의 마음 따라 다르니라.
강설 ; 물건을 담는 그릇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그릇은 더욱 중요하다. 같은 물을 담아도 그 그릇이 얼마나 큰가. 모양은 어떠한가. 깨끗한가. 더러운가. 어떤 자세로 놓였는가에 따라 별의 별 차별이 있게 된다. 부처님의 복전도 그와 같으므로 자신의 그릇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법성게에 “하늘 가득하게 보물이 내려와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지만 중생들은 그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음이 다르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7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巧幻師가 能令衆歡喜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令衆生敬悅이니라
또 재주 있는 마술사가
능히 여러 사람을 기쁘게 하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기쁘게 하느니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8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有才智王이 能令大衆喜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令衆悉安樂이니라
마치 지혜 있는 왕이
능히 대중들을 기쁘게 하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대중들을 모두 안락케 하느니라.
강설 ; 그렇다. 부처님의 청정한 복전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이익이 있다하더라도 불법을 깨달아 기쁨을 얻는 것만은 못하리라. 마술사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든지, 지혜로운 대왕이 국민들을 안락케 하든지, 즐겁게 하고 안락케 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淨明鏡이 隨色而現像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隨心獲衆報니라
비유하건대 깨끗한 거울이
사물을 따라서 현상을 나타내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마음을 따라서 온갖 과보를 얻느니라.
강설 ; 부처님의 복전은 거울과 같다. 거울 앞에 어떤 사물이 오든지 오는 대로 정직하게 다 비춘다. 서양인이 오면 서양인을 비추고, 동양인이 오면 동양인을 비추듯이 어떤 마음으로 복을 지었는가에 따라 빠짐없이 다 비춘다. 어찌 국가를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탓하겠는가.
화엄경 강설 제13권 18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阿揭陀藥이 能療一切毒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滅諸煩惱患이니라
마치 아게타(阿揭陀)약이
능히 모든 독을 치료하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번뇌를 소멸하느니라.
강설 ; 아게타(阿揭陀)약이란 모든 병을 다 고친다는 인도의 영약이다. 부처님의 복전도 그와 같이 중생들의 모든 번뇌의 병을 다 고친다. 진실로 부처님의 복전이란 지혜의 가르침으로 일체 번뇌를 다스리는 영약이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日出時에 照耀於世間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滅除諸黑暗이니라
또 해가 뜰 때에
세상을 밝게 비추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모든 어두움을 소멸하느니라.
강설 ; 부처님의 복전이란 마치 태양과 같아서 세상의 어둠을 다 밝게 비추듯이 사람 사람의 어리석음의 어둠을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 실로 부처님의 복전이란 지혜의 태양이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淨滿月이 普照於大地인달하야
佛福田亦然하야 一切處平等이니라
또 밝은 보름달이
대지를 널리 비추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또한 그러해서
모든 곳에서 다 평등하니라.
강설 ; 부처님의 복전은 밝은 보름달과 같다. 정월대보름이나 팔월대보름이나 우리들의 가슴에 항상 떠오르는 그 밝은 보름달이다. 밤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정취가 넘치게 하는 보름달이다. 부처님의 복전도 보름달과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毘藍風이 普震於大地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動三有衆生이니라
비유하건대 태풍이
대지를 두루 진동시키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삼유(三有)의 중생들을 움직이느니라.
강설 ; 삼유(三有)란 삼계(三界)에서 제각기 생존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욕계의 생존인 욕유(欲有)와 색계의 생존인 색유(色有)와 무색계의 생존인 무색유(無色有)다. 부처님의 복전은 초대형 태풍이 전 국토를 휩쓸고 가듯이 삼계의 모든 중생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大火起에 能燒一切物인달하야
佛福田如是하야 燒一切有爲니라
비유하건대 큰 불길이 일어나서
일체 물건들을 다 태우듯이
부처님의 복전도 이와 같아서
일체 유위법(有爲法)을 다 태우느니라.
강설 ; 부처님의 복전이란 큰 불길과 같아서 일체의 유위법을 타 태우고 무위법으로 진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른 채 부처님 앞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부처님에게 복전을 빌면서 부처님께서 다 태워 없애고자하는 유위법을 갈구한다. 부처님은 꿈을 깨고 눈뜬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중생들은 허망한 꿈을 더 깊이 꾸기를 기도하고 불공드린다.
부처님 복전의 깊고 깊은 이치를 밝히면서 땅과 물과 마술사와 지혜로운 왕과 거울과 아가타약과 태양과 보름달과 태풍과 보름달 등을 비유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진정한 복전이란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6, 정교심심(正敎甚深)
1) 문수보살이 근수보살에게 묻다
(열 가지 교법(敎法)의 차별 없음)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勤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佛敎가是一이어늘 衆生이 得見에云何不卽悉斷一切諸煩惱縛하고而得出離이닛고然其色蘊受蘊想蘊行蘊識蘊과欲界色界無色界와無明貪愛는無有差別하니是則佛敎가於諸衆生에或有利益이며或無利益이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근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이거늘 중생이 보고 어찌하여 즉시에 일체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고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러나 그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과 욕계, 색계, 무색계와 무명(無明), 탐욕, 애착에는 차별이 없으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혹은 이익이 있기도 하며, 혹은 이익이 없기도 한 것입니다.”
강설 ; 바른 가르침이 깊고 깊음을 밝혔다. 일반적으로 불교란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떠나서 즐거움을 얻는[離苦得樂] 한 가지 가르침이다. 그런데 고통의 원인으로서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들도 오온(五蘊)을 다 가지고 있다. 오온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무명과 탐욕과 애착에는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등한 상황에서 불교를 공부하여 누구는 이익이 있기도 하고 누구는 이익이 없기도 하다. 그것은 왜 그와 같은가? 이 문제에 대해서 문수보살이 근수보살에게 질문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근수(勤首)보살의 답
<1> 대답해 줄 것을 허락하다
時에 勤首菩薩이 以頌答曰
佛子善諦聽하소서我今如實答호리니
或有速解脫이며或有難出離니라
그때에 근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여 자세히 들으십시오.
내 이제 사실대로 답하리니
혹 어떤 이는 빨리 해탈하고
혹 어떤 이는 벗어나기 어려움이니라.
강설 ; 근수보살이 사실대로 대답할 것을 허락하였다. 말씀과 같이 이익이 있기도 하고 이익이 없기도 하며, 고통에서 빨리 해탈하기도 하고 해탈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음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8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용맹정진(勇猛精進)
若欲求除滅無量諸過惡인댄
當於佛法中에勇猛常精進이니라
만약 한량없는 모든 허물을
소멸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항상 용맹하게 정진할지니라.
강설 ; 어떤 공부든지 그 공부의 성공 여부는 항상 부지런히 용맹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정진하는 길 밖에는 없다. 화엄경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일도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 정답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게으른 사람
譬如微少火에樵濕速令滅인달하야
於佛敎法中에懈怠者亦然이니라
비유하건대 조그마한 불에
땔감이 젖어 있으면 빨리 꺼져버리듯이
부처님의 교법 가운데서
게으른 이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우리나라에도 수 천 년 전부터 1960년대까지는 모든 땔감을 나무에서 얻었다. 그러다가 연탄이 등장하고, 다시 석유가 등장하고, 또 전기가 등장하였다. 그래서 그때에는 물을 한 그릇 끓이려고 해도 반드시 나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료의 발전과정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나무라는 땔감을 사용해 본 사람들은 위의 경문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으리라.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조금 하다가 말고 또 조금하다가 말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적게 하더라도 1년 365일 중에 3백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나마 공부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잘 타오르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19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鑽燧求火에 未出而數息이면
火勢隨止滅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또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불이 나기도 전에 자주 쉬면
불기운이 따라서 소멸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땔나무에 불을 처음 붙이는 방법 중에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원시사회에서 불을 얻을 때 으레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였다. 지금도 아무런 도구 없이 밀림에 들어가서 불을 피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나무와 나무를 끊임없이 마찰하면 열이 나고, 계속해서 더 마찰하면 불이 일어난다. 불교공부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만약 화두를 1분간 들다가 1분간 쉬고, 다시 1분간 들다가 1분간 쉬면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화두를 드는 열기가 식지 않도록 끊임없이 들고 있어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人持日珠호대 不以物承影이면
火終不可得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마치 사람이 화경(火鏡)을 가졌으나
솜털로 햇빛을 받지 아니하면
마침내 불을 얻을 수 없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불을 구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누구나 어릴 때 많이 해본 일이리라. 화경이 따로 없어도 돋보기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만 끈기가 있어야 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화경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하지 아니하면 불을 얻을 수 없다. 경전을 공부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주문을 외더라도 끈기 있게 꾸준히 하지 않는 다면 공부의 불길을 얻기는 어렵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赫日照에孩稚閉其目하고
怪言何不覩인달하야懈怠者亦然이니라
비유하건대 밝은 햇빛 아래서
어린아이가 그 눈을 가리고서
왜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눈을 가리고 보기를 구하는 비유다. 지혜도 없고 지식도 없는 사람을 어린아이에 비유하였다. 공부도 하지 않고 사유도 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으면서 불도가 없다고 말한다면 밝은 태양아래에서 눈을 가리고 햇빛이 없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人無手足하고欲以芒草箭으로
徧射破大地인달하야懈怠者亦然이니라
어떤 사람이 손발도 없으면서
억새풀로 만든 화살을 쏘아
대지를 깨뜨리려 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공부할 생각도 없으면서 불도를 깨달으려는 사람을 비유하였다.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들의 핑계는 한도 없고 끝도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以一毛端으로而取大海水하야
欲令盡乾竭인달하야懈怠者亦然이니라
또 한 터럭 끝으로
큰 바다의 물을 떠내서
모두 다 말리려 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그야말로 얼토당토않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불법을 깨달으려는 사람을 비유하였다. 아마도 더러는 이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又如劫火起에欲以少水滅인달하야
於佛敎法中에懈怠者亦然이니라
또 겁화(劫火)가 일어날 때에
적은 물로 끄고자 하듯이
부처님의 교법 가운데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겁화란 세계가 괴겁에 이르렀을 때 불이 일어나서 지구를 온통 다 태워버리는 맹렬한 불길을 말한다. 바다 밑까지 다 태운다는 겁화다. 그와 같은 불을 어떻게 끄겠는가. 가끔 사찰에 관광이나 하고, 멀리서 불상이나 한 번씩 바라보는 일로 불법을 깨달으려는 경우를 비유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有見虛空에端居不搖動하고
而言普騰躡인달하야懈怠者亦然이니라
어떤 이가 허공을 보고
단정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말로만 허공에 올랐다고 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라는 것이었다. 게으름이란 가장 나쁜 해독이다. 공자도 낮잠을 자느니보다 차라리 바둑이나 장기를 두라고 하였다지 않는가. 참으로 인생에 있어서 게으름의 폐해는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온갖 비유를 들어가면서 게으름을 경책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7, 정행심심(正行甚深)
1) 문수보살이 법수보살에게 묻다
(열한 가지 수번뇌(隨煩惱)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法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如佛所說하야若有衆生이受持正法하면悉能除斷一切煩惱어늘何故로 復有受持正法호대而不斷者니잇고隨貪瞋癡와隨慢과 隨覆와隨忿과 隨恨과隨嫉과 隨慳과隨誑과 隨諂이勢力所轉으로無有離心하니能受持法인댄何故로 復於心行之內에起諸煩惱니잇고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법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약 어떤 중생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 다 능히 일체 번뇌를 끊어 제거한다 하셨거늘 무슨 까닭으로 다시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도 끊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고, 아만을 따르고, 감춤을 따르고, 분심(忿心)을 따르고, 한(恨)을 따르고, 질투를 따르고, 아낌을 따르고, 속임을 따르고, 아첨을 따르는 세력의 구르는 바가 되어 떠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능히 바른 법을 받아 지닐진댄 무슨 까닭으로 다시 마음의 움직임 안에서 모든 번뇌를 일으킵니까?”
강설 ; 번뇌를 분류하는데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3독이라는 근본 번뇌도 따르는 번뇌로 계산하여 열한 가지를 들었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정법을 제대로 받아 지닌다면 당연히 모든 번뇌를 끊어 제거해야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끊지 못하는가. 불법을 수행해도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과 아만심이 따라 일어나고,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것과 분심과 원한의 마음과 질투와 인색과 남을 속임과 아첨하는 마음이 따라 일어나서 그 세력으로 번뇌를 떠나지 못한다.
만약 번뇌를 공(空) 가(假) 중(中) 삼관(三觀)으로 본다면, 번뇌가 본래 공하지만 공한 번뇌를 반드시 소멸하고, 번뇌가 본래로 실상이지만 실상인 번뇌를 반드시 소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이 듣기만 하고 수행하지 아니하는 것을 크게 꾸짖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19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법수(法首)보살의 답
<1> 자세히 듣기를 권하다
時에 法首菩薩이 以頌答曰
佛子善諦聽하소서所問如實義니
非但以多聞으로能入如來法이니라
그때에 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여, 잘 들으소서.
물은 것이 사실과 같으니
다만 많이 듣는 것으로는
능히 여래의 법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강설 ; 자세히 듣기를 권하면서 다만 많이 듣기만 하고 실재의 수행이 없는 것을 크게 꾸짖는 내용을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0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비유(譬喩)
如人水所漂에懼溺而渴死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면서
빠질까 두려워 목말라 죽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불법에 대해서 많이 듣기만 하고 실재적으로 수행하지 않는 것을 꾸짖었다. 먼저 물에 떠내려가면서 물을 마시지 않아 목이 말라 죽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어찌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 되돌아 볼 일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0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人設美饍호대 自餓而不食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음식을 늘어놓고도
스스로 주리면서 먹지 않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맛있는 음식을 잔뜩 늘어놓고도 먹지를 않아 굶주려 죽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원통한 일이겠는가. 불법에 대하여 많이 듣기만 하고 수행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0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人善方藥호대自疾不能救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이 약방문을 잘 알면서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만약 병을 잘 알고 또한 약방문을 잘 안다면 고치지 못할 병이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능력이 있는 대도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리라. 불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0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人數他寶호대自無半錢分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이 남의 보물만 세면서
자기에게는 한 푼도 없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가장 많이 인용하는 명구다. 그렇다. 남의 보물만 세고 자신의 돈은 한 푼도 없다면 그 신세가 오죽하겠는가. 불법에 대해서 많이 듣기만 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도 또한 이와 같으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0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有生王宮호대而受餒與寒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마치 왕궁에 태어난 사람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의 계를 받으면 모두 부처님의 아들딸이다. 부처님의 아들딸로서 아무런 수행이 없다면 왕궁에 태어났어도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화엄경 강설 제13권 20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聾奏音樂에悅彼不自聞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마치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하되
남은 기쁘게 하나 자신은 못 듣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불교를 공부하여 남의 앞에서 강의나 설법만 많이 하고 자신의 수행은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이 마치 귀머거리가 남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으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0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盲繢衆像에示彼不自見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마치 눈 먼 이가 온갖 형상을 수놓되
남에게는 보이면서 자신은 못 보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하는 비유와 같은 내용이다. 그것은 소리고 이것은 몸짓이다. 무엇으로 하든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수용하지 못하면서 남만을 위해 한다면 무엇이 이로우랴. 많이만 듣고 수행하지 아니하면 그와 같으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0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海船師가而於海中死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多聞亦如是니라
비유하건대 바다의 뱃사공이
바다에서 죽는 것과 같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뱃사공이 바다에 빠지는 비유다.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불법의 바다에서 노닐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의지하고 몸을 삼가지 않는다면 그 뱃사공은 바다에 빠질 위험이 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0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如在四衢道하야廣說衆好事호대
內自無實德인달하야不行亦如是니라
마치 네거리 길에서
온갖 좋은 일을 널리 말하되
자신에게는 실다운 덕이 없듯이
행하지 아니하면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말은 잘하나 덕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앞에서 든 여러 가지 비유가 모두 이 한 가지 비유에 포함된다. 수행이란 안으로 실다운 덕을 쌓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실다운 덕이 없이 듣기만 많이 한다면 무엇이 이익 하겠는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실로 많이 듣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듣고 수행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리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0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8, 조도심심(助道甚深)
1) 문수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묻다.
(열 가지 수행)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智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於佛法中에智爲上首어늘如來가何故로或爲衆生하사讚歎布施하시며或讚持戒하시며或讚堪忍하시며或讚精進하시며或讚禪定하시며或讚智慧하시며 或復讚歎慈悲喜捨니잇고而終無有唯以一法으로而得出離하야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불법(佛法) 가운데 지혜가 으뜸이거늘 여래께서 무슨 연고로 혹은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찬탄하시고, 혹은 지계(持戒)를 찬탄하시며, 혹은 감인(堪忍)을 찬탄하시며, 혹은 정진을 찬탄하시며, 혹은 선정을 찬탄하시며, 혹은 지혜를 찬탄하시며, 혹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찬탄하십니까? 그러나 마침내 오직 일법(一法)으로써 벗어남을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강설 ; 조도심심(助道甚深)이라 하였다. 수행에는 주(主) 바라밀과 조(助) 바라밀이 있다. 여기서 주된 바라밀이란 지혜를 뜻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조적 바라밀이다. 물론 불법에서 지혜가 가장 우선하지만 그러나 보조적 바라밀인 기타 6바라밀과 4무량심과 같은 것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지혜라는 한 가지 만으로는 생사에서 벗어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래서 아래의 경문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도사께서 한 법(法)만을 설하여 도(道)를 얻는 이는 없다.”고 하였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지수(智首)보살의 답
<1> 설(說)할 것을 허락하다
時에 智首菩薩이 以頌答曰
佛子甚希有하야能知衆生心하시니
如仁所問義라諦聽我今說호리이다
그때에 지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여 매우 희유해서
능히 중생의 마음을 아시니
어지신 이의 물으신 뜻과 같나니
저가 이제 설함을 자세히 들으소서.
강설 ; 중생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생은 근성도 천만 가지며, 욕락도 천만 가지며, 성품도 천만 가지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한 가지의 법만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조도심심(助道甚深)을 설하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심성(心性)이 같지 않다
過去未來世와現在諸導師가
無有說一法하야而得於道者니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도사께서
한 법(法)만을 설하여
도(道)를 얻는 이는 없느니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1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佛知衆生心의性分各不同하사
隨其所應度하야如是而說法하사대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과 성품이
각각 같지 않음을 아시어
그 마땅함을 따라 제도하여
이와 같이 법을 설하시니라.
강설 ; 중생들의 마음과 성품이 각각 같지 아니하므로 한 법만을 설하여 도를 얻을 수는 없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8만 4천 근기를 위한 8만 4천 법문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8만 대장경이라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근기 따름을 찬탄하다
慳者爲讚施하고毁禁者讚戒하며
多瞋爲讚忍하고好懈讚精進하며
아끼는 사람에겐 보시를 찬탄하고
계(戒)를 파하면 계행(戒行)을 찬탄하며
진심(瞋心)이 많으면 인욕을 찬탄하고
게으른 사람에겐 정진(精進)을 찬탄 하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亂意讚禪定하고愚癡讚智慧하며
不仁讚慈愍하고怒害讚大悲하며
생각이 어지러우면 선정(禪定)을 찬탄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겐 지혜를 찬탄하며
어질지 못하면 자민(慈愍)를 찬탄하고
성을 내어 헤치면 대비(大悲)를 찬탄 하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憂慼爲讚喜하고曲心讚歎捨하시니
如是次第修하면漸具諸佛法이니라
근심이 많으면 환희를 찬탄하고
마음이 굽으면 버릴 것을 찬탄하시니
이와 같이 차례로 수행하면
모든 불법(佛法)을 점점 갖추리라.
강설 ; 6바라밀과 4무량심(無量心)을 경우를 따르고 상황을 따르고 사람을 따라 알맞게 설하여 교화해야하는 것을 밝혔다. 상황이 이와 같은데 어찌 한 가지 법만을 주장하겠는가. 근본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이지만 여러 가지 기도법(祈禱法)이 생기고 여러 가지 기복법(祈福法)이 생긴 것도 모두가 사람들의 성향을 따른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여러 가지 수행으로 결과를 이루다
如先立基堵하고而後造宮室인달하야
施戒亦復然하야菩薩衆行本이니라
마치 집터를 먼저 닦고
그 뒤에 집을 짓듯이
보시(布施)와 계행(戒行)도 또한 그러해서
보살의 모든 행의 근본이니라.
강설 ; 보시와 지계는 수행의 기본이다. 예컨대 마치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먼저 닦은 뒤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다. 즉 건물의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建城郭은爲護諸人衆인달하야
忍進亦如是하야防護諸菩薩이니라
비유하건대 성곽을 세우는 것은
모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듯이
인욕과 정진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들을 보호 하느니라.
강설 ; 인욕과 정진은 마치 성곽을 세워서 모든 백성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즉 인욕으로 자신을 기키고 정진으로 계속 나아가게 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譬如大力王을率土咸戴仰인달하야
定慧亦如是하야菩薩所依賴니라
비유하건대 큰 힘을 가진 왕을
온 천하가 다 우러러 받들듯이
선정과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들의 의지하는 바이니라.
강설 ; 선정과 지혜는 마치 큰 힘이 있는 왕과 같아서 모든 보살들의 의지하는 바가 된다고 하였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선정과 지혜가 잘 갖춰져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의지처가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1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亦如轉輪王이能與一切樂인달하야
四等亦如是하야與諸菩薩樂이니라
또 전륜왕이
능히 온갖 즐거움을 주듯이
자, 비, 희, 사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에게 즐거움을 주느니라.
강설 ; 전륜왕이란 사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큰 왕이다. 즉 천자와 같은 지위다. 전륜왕은 온 천하 사람들의 행복을 책임진다. 자, 비, 희, 사와 같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베풀면 일체 중생의 행복을 책임지게 된다. 조도심심(助道甚深)이라 하였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중에 하나가 수행을 강조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방법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9, 일도심심(一道甚深)
1) 문수보살이 현수보살에게 묻다
(가지가지로 다른 열 가지 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問賢首菩薩言하사대佛子야諸佛世尊이唯以一道로而得出離어시늘云何今見一切佛土의所有衆事가種種不同이니잇고所謂世界와 衆生界와說法과 調伏과壽量과 光明과神通과 衆會와敎儀와 法住가各有差別이니無有不具一切佛法하고而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현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오직 한 가지 길로 벗어남을 얻으셨거늘, 어찌하여 일체 부처님 국토에 있는 여러 가지 일이 가지가지로 같지 아니함을 보게 됩니까? 이른바 세계와 중생계와 설법과 조복(調伏)과 수명과 광명과 신통과 대중이 모임과 가르치는 의식과 불법의 머무름이 각각 차별이 있습니다. 일체 불법을 갖추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이가 없습니다.”
강설 ; 제불세존은 오직 일도(一道)로서 생사를 벗어났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갖가지로 같지 아니한가. 세계와 중생계와 설법과 조복(調伏)과 수명과 광명 등등의 차별이 있는가?
화엄경 강설 제13권 22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현수(賢首)보살의 답
<1>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時에 賢首菩薩이以頌答曰
文殊法常爾하야法王唯一法이니
一切無礙人이一道出生死니라
그때에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문수보살이여, 법이 항상 그러해서
법왕께서는 오직 한 법이시니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느니라.
강설 ;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라는 말은 원효스님께서 시내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국의 불교는 신라시대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국민들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서 그 토대를 삼았다. 의상스님은 화엄 법성게를 지어 이생을 마지막으로 하직하는 사람들이 듣고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49재의 마지막 시간에 법성도(法性圖)를 돌면서 이별의 노래로 들려드리도록 하였다.
원효스님은 경남 천성산 화엄벌에서 일천 명의 수행자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일천 명의 성인을 배출하였다고 하여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부른다. 또 한국의 불교도들은 일 년을 맞이하는 정월 초에 화엄성중 기도를 올려서 한 해를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불교는 오로지 화엄불교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 다시 화엄불교가 부활하여 화쟁(和諍)과 원융과 조화와 소통으로 세상이 다시 평화로워야 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一切諸佛身이唯是一法身이며
一心一智慧니力無畏亦然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오직 한 법신(法身)이시며
한 마음 한 지혜이시니
힘과 두려움 없음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일체에 걸림이 없는 수행자는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며, 일체제불은 오직 한 법신이다. 한 법신이란 한 마음이며, 한 지혜다. 또 일불승(一佛乘)이다. 일불승이란 곧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오직 모든 것을 구족한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근기를 따라 보는 것이 다르다
如本趣菩提에所有廻向心하야
得如是刹土와衆會及說法이니라
처음 보리에 나아갈 적에
가진 바 회향심(廻向心)과 같이 해서
이와 같은 세계와
대중과 설법을 얻느니라.
화엄경 강설 제13권 22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一切諸佛刹이莊嚴悉圓滿이나
隨衆生行異하야如是見不同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장엄이 모두 원만하나
중생들의 행이 다름을 따라서
이와 같이 보는 것도 같지 않도다.
강설 ; 제불세존은 모두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으나 중생들은 그 행위가 다름을 따라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부연하여 해석하다
佛刹與佛身과衆會及言說이여
如是諸佛法을衆生莫能見이니라
부처님 세계와 부처님 몸과
대중의 모임과 그 말씀이여
이와 같은 모든 불법을
중생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其心已淸淨하고諸願皆具足한
如是明達人이라야於此乃能覩니라
그 마음이 이미 청정하고
모든 원(願)이 다 구족한
이와 같이 밝게 통달한 사람이라야
이것을 능히 보게 되리라.
강설 ; 앞의 게송에서는 중생들이 보지 못함을 밝혔고, 여기서는 마음이 청정하고 원이 구족하고 지혜가 명달한 사람은 능히 볼 수 있음을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隨衆生心樂과及以業果力하야
如是見差別하니此佛威神故니라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이로다.
강설 ;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되는 것임을 밝혔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佛刹無分別이며無憎無有愛로대
但隨衆生心하야如是見有殊니라
부처님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미워함도 사랑함도 없으나
다만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이와 같이 다름이 있음을 보도다.
강설 ; 부처님의 세계란 사람사람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무차별성과 청정성과 자유자재성에서 증애심이 없는 경지이다. 본래로 다 갖추고 있으나 각자가 분별을 일으키는 관계로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되어 어둡게 된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2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以是於世界에所見各差別이니
非一切如來大仙之過咎니라
그러므로 온 세계에
보는 것이 각각 차별함이니
일체 여래와
대선(大仙)의 허물이 아니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一切諸世界에所應受化者는
常見人中雄하나니諸佛法如是니라
일체 모든 세계에
교화를 받을 사람은
사람 중의 영웅을 항상 보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도다.
강설 ; 대선(大仙)은 곧 부처님이다. 사람 중의 영웅도 역시 부처님이다. 바로 사람 사람의 진여불성이며, 자성청정성이며, 법성생명성이다. 언제나 이 위대성을 깨달아 모두가 부처님으로 차별에 이끌리지 말고 당당하게 활발발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0, 부처님의 경계심심(境界甚深)
1) 여러 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묻다
(부처님의 열 가지 경계)
爾時에 諸菩薩이 謂文殊師利菩薩言하사대佛子야我等所解를各自說已로소니唯願仁者는以妙辯才로演暢如來의所有境界하소서
그때에 모든 보살들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불자여, 우리들이 아는 바를 각자 말씀드렸사오니 오직 원컨대 어진 이께서는 미묘한 변재로 여래가 소유하신 경계를 말씀하여주소서.”
강설 ; 그동안은 문수보살이 다른 여러 보살들에게 낱낱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보살이 일일이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다른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질문하고 문수보살이 대답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부처님의 경계를 묻는다. 부처님의 경계는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지혜를 대신할 수 있는 문수보살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대답하는 것이리라.
何等이 是佛境界며何等이 是佛境界因이며何等이 是佛境界度며何等이 是佛境界入이며何等이 是佛境界智며何等이 是佛境界法이며何等이 是佛境界說이며何等이 是佛境界知며何等이 佛境界證이며何等이 是佛境界現이며何等이 是佛境界廣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의 경계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인(因)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제도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에 들어감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지혜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법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말씀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앎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증득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나타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넓음입니까?”
강설 ; 앞에서는 부처님 경계의 전체적인 것을 물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명칭을 들어서 물었다. 부처님 경계의 원인과 부처님 경계의 제도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감과 지혜와 법과 설법과 앎과 증득과 나타남과 광대함까지 열 가지를 일일이 물었다. 이 모든 경계가 실은 사람 사람의 진여불성의 경계이기도 하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문수보살의 답
<1> 여래 경계의 광대함
時에 文殊師利菩薩이以頌答曰
如來深境界여其量等虛空하시니
一切衆生入호대而實無所入이니라
그때에 문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여래의 깊은 경계여
그 양(量)이 허공과 같으시니
모든 중생이 다 들어가되
실은 들어간 것이 없도다.
강설 ; 여래경계의 허공성을 먼저 말하였다. 즉 진여불성의 경계는 허공과 같으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들어가도 실은 들어간 것이 없다. 우리가 사는 이대로 진여불성의 허공성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억겁 불가설
如來深境界의所有勝妙因은
億劫常宣說하야도亦復不能盡이니라
여래의 깊은 경계의
수승하고 미묘한 원인은
억 겁 동안 항상 연설하여도
또한 능히 다할 수 없도다.
강설 ;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인(因)인가에 대한 답이다.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수승하고 미묘한 원인이라 한다. 너무나 미묘하기에 억겁동안 설명해도 다하지 못한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4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3> 부처님 경계의 제도
隨其心智慧하야誘進咸令益케하시니
如是度衆生이諸佛之境界니라
그 마음과 지혜를 따라서
나아가기를 권해서 다 이익하게 하시니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로다.
강설 ; 부처님의 경계에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권유하여 수행해 나아가서 이익하게 하는 것이 부처님 경계의 제도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5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4> 부처님 경계가 세간에 들어감
世間諸國土에一切皆隨入하사대
智身無有色하시니非彼所能見이니라
세간의 모든 국토에
일체를 다 따라 들어가지만
지혜의 몸은 색상이 없으시니
저 세간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은 지혜다. 지혜의 몸이다. 지혜의 몸은 형상이 없어서 세간 일체 국토에 다 들어가지만 그들은 능히 볼 수 없다. 지혜의 몸은 본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일체인의 진여불성과 법성생명의 무상성(無相性)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6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5>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과 같다
諸佛智自在하사三世無所礙하시니
如是慧境界가平等如虛空이니라
모든 부처님은 지혜가 자재하사
삼세에 걸림이 없으시니
이와 같은 지혜의 경계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도다.
강설 ; 부처님은 지혜가 자재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걸림이 없다. 또 허공과 같이 평등하다.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경계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7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6> 일체 경계를 다 안다
法界衆生界가究竟無差別을
一切悉了知하시니此是如來境이니라
법계와 중생의 세계가
구경에 차별이 없음을
일체를 다 밝게 아시니
이것이 여래의 경계로다.
강설 ; 여래의 경계란 법계와 중생의 경계를 모두 차별 없이 다 안다. 그러므로 법계도 여래의 경계며, 중생계도 또한 여래의 경계다. 법계와 중생계와 여래의 경계가 구경에는 차별이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8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7> 모든 음성을 다 안다
一切世界中에所有諸音聲을
佛智皆隨了하사대亦無有分別이니라
일체 세계 가운데에
있는 바의 모든 음성을
부처님의 지혜로 다 따라 아시나
또한 분별이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의 지혜경계는 일체세계의 음성을 다 안다. 그것은 곧 여래가 음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면서 하나다. 이것이 여래의 일체성(一體性)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39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8> 식(識)으로서 알 수 없다
非識所能識이며亦非心境界라
其性本淸淨을開示諸群生이시니라
식(識)으로써 알 바가 아니며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니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을
모든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도다.
강설 ; 여래의 경계는 궁극적으로 식(識)으로서 능히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다. 식과 마음과 함께할 뿐이다. 주객을 나누어서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여자성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이다. 그 성품은 본래 텅 비어 청정하다. 이 구절은 화엄경의 또 하나의 명구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40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9> 업도 번뇌도 아니다
非業非煩惱며無物無住處며
無照無所行일새平等行世間이시니라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며
사물도 없고 머물 곳도 없으며
비춤도 없고 행할 곳도 없어서
평등하게 세간에 행하도다.
강설 ; 여래의 경계는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다. 사물도 없고 머물 곳도 없다. 능히 비추는 주체도 없고 비춤이 어디에 가 닿는 곳도 없다. 평등하다. 다시 말하면 여래의 경계는 모든 것이어서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41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0> 한순간에 다 안다
一切衆生心이普在三世中이어늘
如來於一念에一切悉明達이시니라
일체중생들의 마음이
삼세에 널리 있거늘
여래는 한 순간에
일체를 다 밝게 통달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경계가 매우 깊고 깊음을 밝히는 경계심심(境界甚深)에 대해서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묻고 문수보살이 답을 하는 내용의 마지막 게송이다. 부처님의 경계가 아무리 깊고 깊더라도 그 목적은 중생들의 마음을 잘 알아서 그들을 교화조복하려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42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1, 총결(總結)
1) 사바세계의 온갖 차별
爾時此娑婆世界中에一切衆生의所有法差別과業差別과世間差別과身差別과根差別과受生差別과持戒果差別과犯戒果差別과國土果差別을以佛神力으로悉皆明現하니라
그때에 이 사바세계 가운데 일체중생의 법(法)의 차별과 업(業)의 차별과 세간의 차별과 몸의 차별과 근(根)의 차별과 생(生)을 받는 차별과 계(戒)를 지니는 과보(果報)의 차별과 계를 범하는 과보의 차별과 국토의 과보 차별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 ; 보살들이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부처님의 경계가 깊고 깊음을 드러내서 밝히는 내용의 총결이다. 먼저 사바세계 중생들의 온갖 차별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환하게 다 나타났음을 말하였다. 부처님의 위신력이란 깨달음의 지혜며, 부처님 정각의 내용이며, 진여자성과 법성생명의 위신력이다. 그 위신력에는 전체성과 원만구족성이 본래로 갖춰져 있기 때문에 중생의 온갖 차별을 환하게 다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중생의 법이란 중생이 수행하는 법이다. 곧 계학과 정학과 혜학 등등의 차별을 들 수 있다. 업이란 유루업도 있고 무루업도 있다. 세간차별이란 집(集)은 고의 원인이며 고는 그 결과다. 몸의 생김새와 종류도 각각 같지 않다. 근(根)의 차별이란 근기의 차별이다. 수생(受生)차별이란 태생과 난생과 습생과 화생이 각각 다르다. 지계에는 인간과 천신들의 승렬(勝劣)의 차별이 있다. 범계에는 삼악도에도 경중의 차별이 있다. 국토는 의지하여 사는 곳이 더러운 곳과 청정한 곳의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이 천차만별한 중생의 세계를 부처님은 깨달음의 지혜로 환하게 다 알고 다 본다. 그것은 곧 우리들 진여본성에 본래 갖춘 청정광명성이며 원만구족성의 한 표현이다.
화엄경 강설 제13권 243
제十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2) 법계의 온갖 차별
如是東方百千億那由他와無數無量無邊無等과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인盡法界虛空界一切世界中에所有衆生의法差別과乃至國土果差別을悉以佛神力故로分明顯現하시니南西北方과四維上下도亦復如是하니라
이와 같이 동방의 백 천억 나유타와 수 없고, 한량없고, 끝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 법계와 허공계의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법의 차별과 내지 국토의 과보 차별을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았습니다.
강설 ;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바세계의 온갖 차별을 그와 같이 나타내듯이 온 법계와 허공계의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법의 차별과 내지 국토의 과보 차별을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보살문명품 끝
제1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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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긴글 너무나 고맙습니다 성불하소서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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