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과천현(果川縣)에 머물렀다. 아헌(衙軒)을 부림헌(富林軒)이라고 이름짓고,
내사(內舍)를 온온사(穩穩舍)라고 이름지었는데, 어필(御筆)로 현판(懸板)을 썼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9권 '과천현에 머무르다'편에 나온 기사이다.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의 원묘를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천봉할 때
1790년 2월 11일(임술) 과천객사에서 머물던 곳이 온온사이다.
이때 정조는 ‘주위경치가 좋고 쉬어가기가 편하다’ 하여 객사 서헌에 ‘온온사라는
편액을 내린 것이다.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건물이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궐패와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향궐망배를 행하는 곳이었다.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는 조선 인조27년(1649)에 축조 되었다.
과천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창건했고,
현종 7년(1666)과천현감 남창조가 객사 서헌을 축조하였다.
과천의 객사가 동-서의 두채의 건물로 되어 있는 것은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왕이 남행할 때 대개 과천을 경유하며 묵어야 했으므로
다른 지방의 객사보다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말기 고종때는 과천현의 현청사로, 1914년 일제가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을
시흥군으로 통폐합하면서 과천군이 과천면으로 된 후에는 면청사로 사용되었고,
1932년 김완식 면장때 면청사를 새로짓고 온온사란 현판을 게첨하였다.
이는 현관을 밖으로 결구하고 유리창을 다는등 일본식 건물로 본래의 온온사 건물 모습은 아니었다.
1986년 12월 12일 온온사는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옛날 온온사의 건물형태를 알 수 없어 전남 승주군의 낙안객사를
본떠 복원하였기 때문에 당시 보다 규모가 적어져 재조사가 요구된다.
현재의 온온사 건물은 석축위에 정당 3칸, 좌 -우익실 각 3칸을 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구조로 팔작 지붕집에 중앙에 맞배집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
조선시대 객사는 일반적으로 정당의 바닥에 돌이나 기와를 깔았다.
마루를 놓은것이 다르며, 초석(주춧돌)과 석축의 부재가 다양하게 나타나는것은
과천초등학교를 비롯해 주위에 산재해 있던 부재를 모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온온사 건물주위를 1994년에 지표조사를, 1996년에 발굴조사를 한결과
담장내외에서 많은 건물지가 나왔는데 훼손이 심해 온온사에 부속된 건물지였는지,
과천현관아의 다른 건물지였는지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온온사 건물 뒤편에서 계단유구 및 계단위 평지에 두줄의 석렬유규가 나타났다.
계단은 건물을 오르내리는 계단이고 두줄으 석렬은 적어도 두 번이상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된다.
온온사 건물 오른편에 초석(주춧돌)을 놓기위해 마사토와 적심을 다져 넣은 건물 유구가 나타났고
현담장 밖에서는 담장터로 추정되는 유구가 나타났다.
과천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온온사의 초석과 동일한 유형의 원형 초석이 반만 남아 있다.
초석의 돌출된 방향으로 또 다른 초석이 놓였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