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환한 서두름과 기다림의 꽃망울
남 진 원
1976년 가을, 수술 후 몸이 불편했지만 근무처인 황지읍 화전리 학교로 올라왔다. 아내의 돌봄이 있었기에 그나마 수술 후에도 무리한 글을 쓰고 학교에 나갈 수 있었다.
『교육자료 』에선 7월호로 추천을 마무리하였다. 이제 남은 건『새교실 』이었다. 7월 어느달 작품을 보냈다. 추천에 대한 기다림, 몸의 완쾌에 대한 기다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쓴 시 한 편 ‘나비’를 응모하였던 것이다.
나 비
남진원
꽃망울 가득한
꽃밭에
나비 한 마리 날아와
재
깍
재
깍
돌아가는
숨소리
들어보고
아직
멀었나
살그머니
오늘도
돌아갑니다
이런 내용의 짧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의 소망과 기다림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탄광촌 학교의 관사에서 지냈는데 관사라는 게 아주 낡고 허름하였다. 부서질 것 같은 흙벽에 오래된 스레트 지붕의 길쭉한 집이었다. 방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너 사람이 앉기에 족했다. 방문을 세게 닫으면 흙벽의 흙들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하였다. 옷가지나 물건을 놓으면 앉을 자리가 비좁았다. 그 낡은 관사는 산 쪽을 향해 있었고 관사 뒤편으로 단층 자리 두어 칸 정도의 교실로 된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한 칸만 있고 나머지는 새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이미 부수어버린 공터였다. 내가 가끔 산책을 위해 나가던 곳은 바로 그 교실 뒤편의 공터였다. 공터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고 그곳에서 피어나려는 꽃망울들을 보았다. 마침 나비가 날아와 맴돌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의 기다림과 맞물린 서정성이 나의 느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초, 추천 완료 소감을 보내라는 통지를 받았던 것이다. 시 ‘나비’는 이렇게 하여 1976년 『새교실』 12월호로 추천이 완료된 것이었다.
나비에 새겨놓은 시적인 기다림 이전에 나는 어릴 때 작은 기다림이 있었다. 어머니가 늦봄과 초여름 사이가 되면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가셨다. 돌아오실 때엔 산나물 보퉁이에 가려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산나물 보퉁이만 보였다. 마당에 풀어 헤쳐 놓은 산나물에서는 깊은 산속의 산냄새가 물씬 퍼져나왔다.
나는 산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머니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라 나물 속에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물 보따리 안에는 물오른 소나무 순이 들어있었다. 그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것을 입으로 벗겨 먹으면 달콤한 물이 나왔다. 우리는 그것을 송구라고 하였다. 나는 동생들과 송구를 기다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송구를 먹는 모습을 보고 땀을 닦으시며 행복해 하셨다.
1975년 나는 최도규 형이 알게 된 어린이 잡지 『소년』에도 추천 작품을 투고 하였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1976년 3월의 어느 날 도규 형이 『소년』을 보여주며 말했다. “ 야, 추천이면 추천이지. 후보작은 또 뭐냐?‘ 하였다. 들여다 보니 도규 형과 내 작품이 추천 후보작으로 나왔다. 나는 추천이 안 되어도 후보작이라도 되었으니 내심 무척이나 기뻤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표정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나도 맞장구를 쳐댔다. ”그러게 말이어요 후보작이 어딨어요? 추천작으로 해야지. “ 하면서 함께 역정을 냈다. 그 작품이 바로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을 그린 ’기다림‘ 이었다.
기 다 림
문설주에
그리던
어마 얼굴 빼어 물고
골목길
가득 채우는
눈망울
장에 가신
엄마의 길은 멀고
가뭇가뭇
어둠만 쌓여가는데
동글동글 그리는
동그라미 따라
뱅글뱅글
따라 도는
엄마의 얼굴
( 1976. 『소년』추천 후보작 )
( 2024. [어머니 물동이길 ] 수록 )
이후 더 이상 『소년』에는 작품을 보냐지 않았다. 1978년 신규 교사로 화전학교에 온 김진광 선생은 『소년』에 추천 작품 공모를 하였다. 그리고 후일 그는 『소년』을 통해 동시 추천 완료를 하였다.
당시 『소년』지는 김원석 선생이 편집장이었다. 김진광 선생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소년]사를 찾아 김원석씨를 만난 모양이었다. 덕분에 최도규 형과 나도 김원석 선생을 더욱 잘 알고 친분을 쌓았다.
소년에 추천 후보작으로 발표된 내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 있었다. 화천에 계시던 도규영 사백이었다. 그는 강원아동문학회에서 만나면 『소년』의 추천후보작인 ’기다림‘에 대해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겉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기쁨이 컸다. .
이런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은 시 ’산나물‘에도 나타나있다.
산나물
하루 해 벗해 가며
저물도록
부르트도록
나물 뜯던 우리 엄마
자욱자욱 아린 손
얼마나 힘드셨을까
산보다 큰 보퉁이
나물 속에서 꺼내 주시던
파릇한 송구나무
입으로 벗겨내며
씹어보던 물맛 단맛
엄마는 땀을 닦으며
우릴 보고 계셨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산나물
해가 기울어야 묵직한 보따리를 이고 들어오시는 어머니, 작은 산을 이고 오시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산을 밟다가 오신 어머니 몸은 온통 푸른 산 냄새였다. 보따리에서는 깊은 산속의 참나물이 잠에서 깨어난 듯 와르르 쏟아져 나오고 나물 잎사귀에선 파릇파릇한 뻐꾸기 소리가 새어나왔다. 거기에 산의 싱싱한 기운이 안개처럼 퍼졌다. 나물 포기들 사이엔 어김없이 송구 몇개도 끼어 있었다. 동생과 나는 물오른 송구를 신들린듯 벗겨 먹었다. 산에서 자란 나무의 생기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몸이 간질간질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산나물 삶는 냄새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잉크 방울처럼 잠 속에 풀어지고 있었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기다림의 의미
사람은 누구나 기다림이 있다. 살아가면서 어떤 목표나 목적이 있으면 기다림이 있는 법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기다림의 종류도 다양하다. 생일날을 기다리고 입학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기다림도 있다. 헤어진 사람들은 더욱 가슴 아픈 기다림을 원할 것이다. 나 역시 글 속에서 내 꿈의 실현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다.
간혹 나이 많은 어른들은 죽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때가 되면 죽고 싶지 않아도 찾아올 죽음이 아니던가.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더 나이가 들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비가 꽃망울을 보고 꽃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참 아름답다. 그러나 사실 나비가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게 사람의 생각이지 그러니 그런 생각들이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기다리며 사는 얼굴은 허전해 보이지만 맑고 깨끗하다. 기다림은 탐욕과는 다른 청순한 모습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화가는 좋은 예술 작품 만나기를 기다리고 도공은 우수한 백자의 탄생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좋은 작품이 태어나길 기다릴 것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작품 역시 그 내면에 ’기다림‘이 있기에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가끔 환한 서두름 속에서 기다림을 갖는다. 환한 서두름이 있기에 기다림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