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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선배 문인들, 김사림 시인 이오덕 선생 외
1976년 6월, 김사림 선생이 교단작가 작품집『아이들 곁에서』를 엮었다. 이 작품집 안에 나는 ‘뻐꾸기’, ‘썰매’ 라는 두 작품을 게재하였다.
뻐꾸기
남진원
푸른 잎이 되어
오늘 숲에 서니
무두 싱그러운
초록빛 친구들
그 속에 뻐꾸기 소리
아직도 먼가
천리 타향에 계신
부모님이 오신 것처럼
그렇게 무심중
찾아온 뻐꾸기 소리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내 옛 친구 같은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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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산중이다. 시인은 이런 산중의 푸른 빛을 좋아한다.
<모두 싱그러운 / 초록빛 친구들 >
이갓은 시인을 둘러싼 숲이다. 그 숲에서 나는 뻐꾸기 소리가 그럴 수 없이 정답다.
그 반가운 것을 < 부모님>과 <옛 친구>에다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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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소리를 듣는 게 왜 저리도 정겨운 느낌이 드는가. 고향집에서 듣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감자 씨를 놓고 감자꽃이 필 무렵이면 들리던 뻐꾸기 소리! 마을에 때가 되면 찾아와 정다운 친구를 부르던 음성 같았다.
뻐꾸기
남진원
진달래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더니
한참 후
연한 나뭇잎 같은
소리가 들렸다
뻐꾹 …… 뻐꾹
…… 뻐꾹
새
잎들도
마치 뽀얀 귀를 열고
가만히 듣는 듯 했다.
( 2024. 12. 9 )
힘든 어른들에게는 그 소리에 기분이 그냥 좋아지고 푸근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예쁜 노래 같았다. 그리고 마을의 봄날은 뻐꾸기 소리에 심심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그때의 순박한 뻐꾸기 소리, 새 잎처럼 마음에서 돋아났다.
썰 매
남진원
야호 -
엎어진다
자빠진다
웃음이
때
굴
때
굴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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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시의 표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수단에 따라 여러 벙법이 될 수도 있고 시의 소재에 따라서도 다르다.
이 시는 시가 짜여진 행과 연 그리고 글자의 모양에서 시를 더 잘 이해 시키려고 노력했다.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래서 <대굴대굴>의 흉내말이 정말 구르는 모양으로 놓여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가 훨씬 살아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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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겨울은 좋았다. 날이 너무 추우면 논물에 얼음이 말갛게 얼었다. 그러면 시갯도를 꺼내 들고 논물이 언 곳에 모여들었다. 종일 시갯도를 타고 들어올 무렵이면 손이 발갛게 얼었다. 그 모스븡ㄹ 본 할머니는 두 손을 꼬옥 뒤고는 방안의 따뜻한 아랫목에 디라고 갔다. 이불을 들고 그 속에 두 손을 넣어 녹여주셨다.
또 눈이 내려도 좋았다. 며칠 만 기다리면 비스듬한 밭에 눈이 쌓여 살짝 얼었다. 집에 있던 함지박을 들고 눈 쌓인 곳 위로 올라갔다. 함지 위에 앉으면 아래로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리 집 뒤의 언덕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밤나무 아래는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지면 걸어 다녀도 발이 빠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둥근 함지박에 앉아 썰매를 탔다. 내려가는 길은 몇 번씩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했다. 그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처럼 해맑기만 하던 그때 그 웃음! 눈 내린 그 밭은 동심이 피어나는 하얀 꿈의 나라였다. 어릴 때 일이지만 지금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1977년 초, 나는 ‘고향의 봄’ 밭을 떠올리며 <김매기>란 시를 써서 3월초, [아동문학평론사]에 보냈다. [아동문학평론사]는 이재철 박사께서 만든 아동문학 전문 문예지였다. 그곳에도 추천제가 있었다. 이재철 박사깨서 전화가 왔다. 아동문예에서 추천을 받았기에 추천을 하지 않고 ‘김매기’ 작품을 발표 작품으로 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김매기> 작품은 발표 작품으로 『아동문학평론』 5호에 게재되었다.
김 매 기
남진원
초록
물바람이
흘러가는
이
랑
이
랑
뿌려논 거름 속에
묻힌 봄 뒤적이며
볕 조각
담는 할머니
봄을 송송
맵
니
다
( 아동문학평론 1977년 5호 )
봄이 되자, 김매는 할머니의 모습과 봄의 싱그러움을 작품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시골에서 생활하여 그런지 몰라도 수건을 두르고 김매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이 작품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다. 바람 부는 모습을 비스듬이 산비탈 모습으로 이미지화 했던 것이다.
3월초, 『교육평론』애도 ‘봄낭 아침에’란 시를 투고하였다. 그랬더니 『교육평론』5월호에 실렸다.
봄날 아침에
남진원
광맥에서
뽑아내는
그런
황금빛과
새
잎속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풀빛의
흔들림
흔들림이
마을을 파랗게 일으며 세울
바람을
후 후
햇살 속으로
불어내고 있었다
저기 쯤인가?
무엇이 간간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
<한국아동문학회 회원>
1975년, 1976년, 1977년 이 때에는 ‘봄’과 ‘아침’이라는 이미지가 늘 떠나지 않았다. 마음은 푸른 싱그러움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래서 ‘봄’과 ‘아침’에 대한 시들이 많았다.
시, <봄날 아침에>는 봄의 이미지를 새롭게 나타내기 위해 글을 쓰다가 나온 작품이었다. 이 당시 내 마음에 차 있는 것은 [아침]과 [봄]에 대한 생각이었다.싱싱함과 싱그러움,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충분히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이 모두 시로 그려졌다.
『아동문예』1977년 8월호에 발표한 ‘아침 교실. 2’,
1977년 10월 『소년』에 발표한 ‘소풍길’
1977년 11월 5일 경향신문에 발표한 ‘화전리의 아침’
1977년 12월 20일 소년조선일보에 발표한 ‘아침’
1977년 12월 한국현대동시선집 『우리도 하늘 만큼』에 발표한 ‘아침’ 등의 작품이 이런 생각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아침 교실. 2
남진원
풀냄새나는 순희 이야기가
꽃냄새나는 순이 이야기가
햇살에 범벅이 되어
소란할 때
몸 헹구던 바람이
얼굴 부비며 얼굴 부비며
말갛게 씻은 몸
드러내고 웃는
아침 교실
새 소리 떼가
귀를 붙잡고 창가에
촤르르 - 촤르를-
거꾸로 쏟아져 박힌다.
『아동문예』1977년 8월호
소 풍 길
남진원
꽃들도 웃음을 문
소풍길 길 속으로
밤새도록 엮어내던
무지개꿈 지고 간다
부신 꿈 노래 떼들을
신이 나게 깔면서 …
일렁이는 함성들이
메아리로 번질 때
꽃사슴도 몰래 숨어
엿듣다 가고
풀잎에 기댄 바람들
고갯짓을 해댄다
새소리 바람소리
푸른 목청 속에서
개울믈은 뭉게뭉게
구름을 싣고 가고
구름은 젖은 아이 떼
거꾸로 태우고 즐겁다
( 1977년 10월 『소년』)
禾田里의 아침
남진원
종지기가 종줄을 당기는 새로
화전리의 아침이 깨어나고 있다
- 날개처럼 부서져 내리는 울창한 햇살의 그물 -
그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하늘이
잎 푸른 가지에 달려
햇살을 훑어내리고
그림자차럼 청청한
바람의 목소리들이 나뒹굴며
휘파람을 분다
「여기는 바람과 하늘이 질척이는햇살의 늪」이라고
그때쯤 새들의 지저귐속에
나와 너의 흰빛 인사의 속살
우리 모두는
가방속에 햇살을 꾸려넣으며
출근을 한다.
( 1977년 11월 5일 경향신문)
아 침
새들이 달려나갑니다
바람이 따라갑니다
그 뒤를
앞 뒷산 골짜기에서 달려온
물소리가
출렁거리는 아침
그 아침을 온통
달구지가 싣고 지나면
분이네 옥이네
순이네 붓들이네 …
“밥 많이 잡수셨능교?
허허 허허허…”
황토 같은 웃음이
볏단처럼 묶여
부산히
동구 밖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저 멀리 순갑이네 굴뚝 위엔
아직도 된장찌개 냄새가
동동
금빛 연기 속에 떠다니고.
( 1977. 12. 20. 소년조산일보 「동시 마을」)
아 침
남진원
새벽이
모여 와서
어둠을
쓸어 간 뒤
뚫어지는
창틈으로
홰를 피며
고여드는
봄빛 아!
부신 햇살을
펴놓기에
바쁘다
( 한국랸대동시선집 『우리도 하늘 만큼』, 1977. 12.)
1960년대는 사회 현상이 매우 어려웠다. 먹을 것도 매우 귀하던 시대였다. 농촌에서 해산물을 먹기가 힘든 시기였다. 5일장이 열리면 장날 장터에 가야 사 올 수 있는 생선들이었다. 농촌에서 생선맛을 보려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장날 30리 길을 걸어서 임계 장에 가야 했다.
오래전에 써 두었던 시들을 보면 시 한편 한편에는 그 시대의 사회상이 반영되어있는 걸 알 수 있다.
꽁 치
남진원
삼십리 장에 가서
콩 팔고 삼베 팔아
벼르고 별러 사 왔었지
숯불 석쇠 위에 올려놓으면
기름이 뚝뚝 물방울처럼
떨어지고
모처럼 맛난 저녁상 앞에
식구들의 이야기도
꽁치 두름처럼 이어졌지
엄마는 남은 토막 아껴 두었다가
다음 날
보리밥 한 술에 고기 한 저름 씩
떠 넣어주면
꼭꼭 씹어 먹다가
할머니 훈훈한 말씀도 함께
꿀떡꿀떡 넘겼지
생선도 사람처럼
귀하기만 하던 시절
장날 저녁이면 마을의 집집마다 숯불에 꽁치를 올려놓고 구웠다. 그 냄새가 마을에 그득히 펴지기도 했다. 보리밥 한 술에 꽁치 한 저름 씩 먹어도 즐겁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1977년 7월에는 이오덕 선생께서 『 새교실 』에 추천된 시 ‘공원’을 읽었다면서 편지를 보내주셨다. 참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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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진 원 선생님
선생님의 시 <공원>을 새교실에서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제는 소년지 7월호가 왔는데, 우연히 아이들 작품 난을 보다가 <주룩지>란 글을 읽고 좋은 작품이구나 싶었어요. 신문 잡지에 나온 아이들의 시란 거의 거짓스럽거나 시가 안 되고 있는 것인데 이번에 이 작품을 참 오랜만에 순진한 아이들의 작품을 대한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이 작품이 또 그곳 화전교 아동의 것이라, 혹시 선생님이 지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하 하략 )
그럼 더욱 건강하시기 바라면서, 몇 자 바삐 썼습니다.
1977년 7월 1일
이 오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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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은 내가 『새교실』9월호에 시 ‘공원’이 발표된 것을 보고 기뻐서 글을 주셨다. 내가 지도하는 이숙자 어린이의 동시 <주룩비>가 소년지에 발표된 것을 보고 또 좋은 동시라는 칭찬을 하셨다. 이밖에 동시 선집을 만들 계획이니 동시 작품을 몇 편 더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이후 이오덕 선생께 작품 몇 편을 보내드린 것 같았다. 이오덕 선생의 편지글이 8월 10일에 왔다. 그 내용은 작품을 창작과 비평사에 보냈는 데 그곳에서도 작품을 엄선하여 발표한다고 조심스레 말씀을 주셨다. 그 후 아마 내 작품은 의도에 맞지 않아 제외된 듯 하였다. 그렇지만 손수 그렇게 마음을 써준 이오덕 선생께는 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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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니 보내온 글. ( 1977.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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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불양력(自不量力) 같은 나의 글재주
‘스스로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다’ 라는 뜻의 말을 ‘자불양력’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글 재주가 이, ‘자불양력’과 같은 것 같았다. 이 말은 전국책(戰國策)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孟嘗君)이 자신의 식읍(食邑)인 설읍(薛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가 설읍을 공격하였다. 마침, 제나라의 대부(大夫)인 순우곤(淳于髡)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설읍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맹상군은 외곽인 먼 거리까지 나가서 영접을 하였다.
“ 초나라가 설읍을 공격했는데 선생깨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을 다시는 뵙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순우곤은 삼가, 명을 받들 뿐이었다고 말하고는 제나라로 돌아갔다. 순우곤은 제나라 왕에게 다녀온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초나라에서 무엇을 보았소?”
순우곤이 대답하였다.
“초나라는 이치를 보르고 설읍은 스스로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무슨 말이오?”
“설읍은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선왕의 종묘를 그곳에 지었습니다. 초나라는 이치를 모르고 설읍을 공격하면 종묘가 위태롭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나라 왕은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며 말했다.
” 아, 선왕의 종묘가 거기에 있었지요!“
하고 말하였다.
제나라 왕은 급히 군사를 몰아 달려가서 설읍을 구하였다.
여기서 설읍을 식읍으로 하고 다스리고 있는 맹상군이 제 위치와 분수를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스스로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면 화(禍)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나 역시 글을 씁네 하며 자만에 빠지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는 데 소홀한 것 같았다. 선배 문인들의 격려 편지글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문단 50년이 되는 지금도 역시 나의 문학적 소양은 몹시 부족하다. 이 부족함을 알고 글 창작에 더욱 힘써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처음 글을 접하게 해 준 최도규 선생님, 이후 여울 ‘감자’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김종영, 권영상, 장영철 시인과의 교류가 있었다.
교육자료와 새교실에서 추천을 해 주신 박경용 선생님과 문덕수 선생님의 지대한 도움이 없었으면 어찌 글을 쓸수 있었을까. 샌터시조상을 심사하신 박재삼, 이근배, 정완영 선생님, 류제하 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분들이다. 그 후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심사를 하신 이상범 선생님, 198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하신 민영 시인님은 물론이고 계몽아동문학상 심사를 하신 박화목, 장수철 선생님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로부터 은혜로움을 입었다. 특히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국민 학교 교과서 수록 작품에 힘을 쓴 김종상, 이상신 교수님께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아동문학평론사의 이재철 교수님, 아동문에 박종현 선셍님 또한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이제 50년이 지난 지금, 고귀한 그분들의 소중한 편지글을 다시 읽으며 나를 일깨우는 시간에 빠져드는 이유이다.
- 정겨운 선배 문인들의 편지글을 보며
글쓰기에 더 힘쓰다
조규영 시인께서 자주 편지를 주셨다. 늘 문학을 사랑하는 조규영 사백의 진심어린 글에 감사하는 마음에 같은 문인으로 동질감과 존경심을 잃지 않고 있다.
(편지글) 1977. 1. 20.
남진원 선생님,
먼저, 축하드립니다.
<아동문예>지, 천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제 서울에서 박경용 선생을 만났더니 , 남선생님을 <새교실, 교육자료, 기타 등> 등에서, 인정하기에 1차는 생략ᄒᆞ고 천료시켰다고 하더군요. 아울러 남선생의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저는 <동아일보> 시상식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가능하면 남진원, 최도규 두 분을 <소년>지에서 천료 시키려고 하였더니 박경용 선생을 만나 이번 <아동문예>지에서 천료기켰다기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울러 박경용 선생도, 진원님의 그 정성어리게 또박뽀박 써 오는 편지에 답장도 못했다며 마음만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아동문예>에 데뷔했으니 부지런히 글 쓰세요.
그리고 이번 여러 문인들을 만났고, 특히 강운회 선생을 만나 강운회 선생님과 자세하게 이야기 하였더니 강선생님도 승낙하였는데, 제가 보기엔 남선생님의 자유시(성인시)가 괜찮기에 일반 tleksd[ 데뷔시켜 달라고 하였더니 힘서 주겠노라 하였으니, “현대시학”이나 “시문학”지 그 어느 족이든, 난 한곳을 택하여 , 좋은 작품을 가려 4-5편 강운회 선생님께 추천시켜달라고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이하 하략 … )
조규영 선생의 깊은 관심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시학이나 시문학에 시 추천은 보류하였다. 새교실에서 추천완료를 끝냈을 때 심사위원이신 문덕수 선생께서 『시문학』시 추천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미『새교실』에서 문덕수 선생의 추천을 1회도 아닌 3회에 갈쳐 추천을 받았기에 더 이상 시 추천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1976년에 동시는 박경용 선생의 『교육자료』,추천, 새교실』에서는 문덕수 선생의 시 추천, 시조에서는『샘터』에서 ‘샘터시조상’ 수상으로 시조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러니까, 동시, 시조, 시는 1976년에 추천과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1996년『문예한국』에서는 문학평론으로 드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2025년은 내게 있어서 문단 50년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1977년 당시 박경용 선생의 편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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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원 선생!
늘 감사합니다. 활약이 부진하다는 충고에 힘입어 이 가을부터는 스스로를 닦달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전번에 추석에도 개봉 않고 보내주신 귀한 선물 취나물 가루는 여태껏 아껴왔는데 셋째놈의 생일이 이달에 있어 떡으로 빚을 심산으로 있습니다.
( 이하 하략 )
앞으로도 자주 소식 주시기 바라오며 이만 줄입니다. 내내.
1977.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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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굥 선생께서는 1977년 7월 5일 취나물을 보낸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 편지를 보내주셨다.
돌이켜 보면 1970년 대의 선배이면서 원로문인들은 후배들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자상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보건대, 이런면에서도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다. 많은 문인들이 보내주신 저작물들도 아지 개봉도 못한 채 그대로 쌓여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제일 죄송한 마음이다.
선배 문인들 중에 제일 마음 편안한 분이 아동문예 박종현 주간님이셨다. 가끔 안부를 묻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 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지금에야 깊은 뉘우침이 몰려든다. 선생님은 가끔 씩 편지글을 주셨다.
남진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늘 주신 글월 받고 , 글월 올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도 댈 수 있습니다만, 그 보다는 매월 나가는 <아동문예>가 바로 답신이요, 저의 마음이 되겠습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지난해 여름 입원했던 사실이나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동문예>는 저의 잡지가 아니라 우리들, 우리아동문학인의 잡지라는 생각 때문에 협조를 바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작품 8월호에 게재합니다.
시론의 작품도 좋았습니다.
우리들, 끝까지 힘찬 우정을 바랍니다.
1977년 7월 24일 박종현
지금 다시 읽어보니 부탁한 일을 내거 들어드렸고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원고도 보냈는데 작품을 8월호에 수록한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그리고 내가 큰 수술한 일도 알렸나 보다. 작고하신 박종현 선생님의 인자한 그 모습이 자구 눈에 어렸다.
[ 1977년. 최도규 현과의 인연 지속되다]
최도규 형이 보낸 편지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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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생
문집 발간으로 ᄇᆞ쁘겠오. 한 번 갔다 온다는 게 그렇게 안돼 몇 자 씁니다.
내일이나 모래에 강릉에 또 가야하니 말이오.
김완성 선생 놀러와 하룻밤 자고 갔지요.
문집 완성되면 한 권 가지고 놀러 오시오. 그럼 기독교 현상 모집 안내 뒷면 뒷면에 적어 보내면서 문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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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마 도규 형이 겨울방학을 벚아 보낸글 같았다. <기독교 교육>현상모집이 2월 25일이나 1977년 12월에 보낸 듯하다.
도규 형은 1977년 기독교 아동문학 현상모집에서 이미 당선의 영예를 안았었다. 나는 이 글을 보고 노냈다. 1978년 기독교교육 현상문예 가작 입상이 되었다.
이렇게 문학의 정보를 알려주어서 글쓰는데 큰 도움을 준 분이 최도규 형이었다.
돌아보니, 최도규 형님께서 많은 편지글을 보내셨다.
1977년 8월 24일 보낸 편지글이 있었다.
8월 27일 보내온 편지 내용은 내가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기쁨에 글을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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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원 선생
아들인가 딸인가?
무척 궁금하군
아기를 낳았으면 우리 집에 절대로 오지 마시오. 그러나 엽서 한 장으로 소식을 주시오
한국아동문학 세미나 패넌트는 하나 더 갖고 왔으니 훗날 전해 주겠오.
글도 좋지만 건강에 특히 신경 쓰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길 부탁이요 나처럼 싸우지 말고 말이오
산이 누럿누럿 해지니 언젠가 함께 매봉산에 오르던 기억이 나는군요
올 가을엔 산에 좀 많이 오를생각이요 그럼 또 소식 전하기로 하고 안녕
77. 8. 24. 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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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좋지만 건강에 더 힘스라는 말까지 글로 전했는데 본인은 왜 그리 빨리 가셨는지........
부부싸움도 형님보다는 내가 더 많이 한 것 같소. ㅎ ㅎ
1977년 9월 7일 온 글은 아들을 낳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받는 원고료에 대한 이야기와 현상공모 작품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글을 쓴지 50년이 되었지만 내가 받은 원고료가 있었던가? 하는 이문이 들었다. 그래도 쓰는 일이 좋아서 배고픔을 달래며 글을 쓰며 살아왔던 것이다. 또 문학 공모 작품에도 부지런히 써서 보냈다. 그래서 1978년 기독교 현상문예에도 가작 입상이 되었다. 이것도 도규 형이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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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생
축하 하네 득남 만세
이제 몇 개월이 지나면 고 꼬마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봇물 터지듯 생긴다네 그래서 글의 소재도 꼬마한테서 많이 생기게 되는 거지 아무튼 순산을 하였다니 내일처럼 흐뭇하군
( 이하 생략 )
1977. 9. 9. 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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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28일에는 우리 아들에 대한 것과 신춘문예 응모에 대한 내용이다. 1977년 보낸 작품은 도규 형이나 나도 모두 응모했지만 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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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생
편지 주어 정말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그래잖아도 지난 3일 신세가 많아 집사람과 함께 남선생 얘기 많이 했었답니다.
언젠가 내가 이곳으로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가 상주이기 때문에 아기에게 혹시 부정이라도 되지 않을까 해서 였는데 정말 그렇게 발을 딱 끊고 편지만 하니 조끔은 섭섭했습니다.
요즈음은 정말 궁금한 게 많군요. 글짓기대회 소식하며 신춘문예 응모 요령도 나 역시 모릅니다. (강원일보 서울신문은 봤는데) 소년중앙도 낙방하고 보면 벌써 세 번째 낙방 재수생이 되었군요 그 바람에 동시도 엉망이 되어 걱정이지요.
남선생 보낸 세 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빠른 발전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꺼지만해도 남선생 작품에 입을 벌리는 것이 조끔식 입을 벌리던 것이 이제 쑥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까와라 / 하늘이 태양을 / 산 위에 붙들어놓고 있다 /
먼 산에 / 꽃눈을 엮는 / 눈이 아린 아지랑이 /
숲속에서 바람은 / 빗자루가 되어 / 물소리를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
정말 좋은 대목 대목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내 느낌을 적어 봅니다.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세 편 다 소재가 너무 흔한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리고 숲속아침과 크레파스화는 가위질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번 읽어 보았지만 주제가 선명하지 못한 것 같네요 그저 비유와 정경묘사에 그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내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나 역시 신춘준비작품 4편을 골라놓고 몇 번 들여다보니 또 신통치 않아 손을 보고 있지만 “평론지” 추천작 “갈대밭에서” 와 같은 글을 써야 입선권에 들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마감이 5 – 8일 사이일 터이니 꿈잘꾸고 응모해 봅시다. 애기 엄마에게 안부 전해주고 항상 건강 관리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77. 11. 28 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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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편지글을 보니 깜짝 놀랐다. 도규 형은 작품에 대한 부드러운 칭찬과 함께 날카로운 지적으로 글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당시 내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 무렵이었고 수술로 건강이 안 좋을 때였다.
지금부터 45년도 더 된 지금이지만 생생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최도규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도 크다.
학교에 계셨기에 최도규 선생님이라고도 불렀더. 또 나이 차이가 10여 년 위여서 편한 대로 형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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