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에는 레위인들이 거처할 도성 중에 도피성을 마련하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1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라. '내가 모세를 시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지정하여,
3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그 곳으로 피하게 하여라. 그 곳은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다.
도피성의 존재 이유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해주는 데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살인자가 도망을 해서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그 살인자를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정당한 권리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살자, 즉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오살자를 보호하기도 하고 일정기간 수감생활을 하도록 하는 지금의 교도소 역할로 도피성을 두도록 한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도 여러 번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21장에는 레위인들에게 준 성읍에 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41~42절을 보겠습니다.
41 이스라엘 자손이 차지한 유산의 땅 가운데서, 레위 사람이 얻은 것은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과 거기에 딸린 목장이었다.
42 성읍마다 예외 없이 거기에 딸린 목장이 있었다.
레위인들이 거처하는 성읍은 모두 형제지파 안에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주민센터가 동마다 하나씩 있어서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나 지역별로 교회가 자리하고 있어서 주민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현실을 생각하시면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땅에 대한 분배가 모두 마쳐졌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토지분배에 대한 내용이 13~21장에 걸쳐 길게 이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메시지 중심이 아니라, 각 지파에 속한 지역에 대한 명칭의 나열이 대부분입니다.
이 본문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기록이었습니다. 각 지파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은 물론이고, 땅의 위치와 경작지의 성격에 따라 종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지파별 땅문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상황에 비추어보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를 나누고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어느 도시와 산간지역이 어느 도에 포함되는지를 정확히 정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경기도 내에서도 인천과 김포의 경계를 나누고, 안성과 평택의 경계를 나누는 등의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그 경계를 자세히 설정하지 않으면 지역별 분쟁의 소지가 생길 수 있기에, 그 경계를 정한 이유와 함께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성서통독을 할 때, 이런 본문은 그냥 훑어보고 넘어가도 됩니다. 아니,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이 본문은 이삼천년 전 고대 이스라엘의 땅문서일 뿐 오늘의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기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통독을 한다는 분들 중에는, 이런 본문들까지 하나하나의 글자마다 모두 성령의 영감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자세히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별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없는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는 무리하고 위험한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길게 이어진 지파별 토지 분배, 그러니까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분배한 일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여호수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3~45절입니다.
43 이와 같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44 주께서는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사방에 평화를 주셨다. 또한 주께서는 그들의 모든 원수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그들의 원수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였다.
45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을 다 주셨답니다.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졌답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 기록은 여호수아서의 다른 기록들과 모순됩니다. 16장 10절을 보겠습니다.
10 그러나 그들이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살며 종노릇을 하고 있다.
17장 12절도 보겠습니다.
12 므낫세 자손이 이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기록은 사사기에 들어가서도 계속됩니다.
이렇게 서로 일치하지 않는 기록들이 앞뒤로 뒤섞여 있어서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성서본문을 꼼꼼히 읽으면 성서는 절대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리적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본문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서의 최종 편집자는 서로 모순되는 이런 기록들을 왜 그대로 담았을까요?
모세오경을 강해할 때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들에게는 성서무오설이라는 황당한 교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을 타고 내려오는 설화들 속에는 전달하거나 전달받는 사람의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세오경의 최종편집자도, 여호수아서의 최종편집자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기억이나 기록들을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지 잘 모를 때는 그냥 있는 그대로 다 존중해서 서로 충돌하는 기록이라도 함께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해주신 땅을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에 진입한 선조들이 다 정복했다고 진실로 믿었던 후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진보적인 학자들도 여호수아 당대는 아니지만 다윗의 시대가 되면 실제로 가나안땅을 거의 다 정복했다고 보편적으로 인정하니까요.
그 다윗 이후의 시대를 살았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빠짐없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정복됐는지 다윗 시대에 정복됐는지 그 역사적인 과정까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냥 가나안땅이 다 정복되었다는 그 점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생각이 문서로 기록되고 그 기록들이 후대로 이어져서 최종편집자에게 채택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 왕 이전까지는, 그러니까 여호수아 당대에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이 분명히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냉철한 기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록한 자료들이 후대로 이어오면서 역시 최종편집자에 의해 채택되면 이렇게 서로 다른 기록들이 한 책 안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사실을 호도하는 성서무오설이라는 교리로부터 자유로우면 되는 것입니다. 성서가 모순을 말하면 ‘아, 이건 모순이구나’ 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성서가 금쪽 같이 귀한 말씀을 하면 ‘아, 이 말씀 정말 귀하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교리의 전제를 가지고 성서를 보지 맙시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봅시다. 모순은 모순대로 인정하고 유치한 서술도 유치한 대로 그냥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삼천 년 전 사람들의 기록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에 담긴 모든 문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가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는 금광석과 같습니다. 걸러내야 할 불순물도 많고 폐기처분해야 할 쓰레기도 담겨 있는 금광석입니다. 그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내야 우리는 비로소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용광로가 바로 성서비평학이고 현대신학입니다. 그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우리는 성서의 진실에 한발 한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쉽지 않은 과정을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