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우 여행11 - 수서호 공원에 절기를 표시한 24교 다리에서 수양제를 회상하다!
10월 26일 양자강 북쪽에 자리한 오래된 도시 양저우 扬州(양주) 에서 거위안 정원 을
보고는 차를 타고 서우시후궁위엔 瘦西湖公园 (수서호공원) 에 입장해 운하를
걸어서 중국의 다리 가운데 최고의 걸작 으로 꼽힌다는 五亭桥 (오정교) 다리를 봅니다.
五亭桥 (오정교) 다리는 1757년에 세워진 아치형 석조 교각 위에 5개의 정자 가 서있는
독특한 형태인게 인상적입니다? 계속 걸어서 연화교(蓮花橋) 를 거쳐 라마교 사원
蓮性寺(연성사) 에 이르러 이름 그대로 흰 탑인...... 바이타 (白塔 백탑) 를 구경합니다.
청운헌과 영용화계 를 지나니 왼쪽으로 나가면 서대문이고, 오른쪽에 운하를 끼고 걸으니
희춘대(熙春臺) 승선장 으로 유람선 을 기다리는 학생들로 만원을 이룬걸 보는데....
희춘대는 청나라 24경으로 춘대영월 로 불렸다는데 건륭제가 어머니 생신잔치 를 한 곳이라?
희춘대 (熙春臺) 승선장 바로 옆에는 24교 표지석 이 보이는데..... 수양제 가 건설했다는
저 우아하게 생긴 아치형 석조다리 는 바로 그 유명한 二十四橋(이십사교) 다리로
24교 라는 이름은 두무 의 "양주한작판관에게" 라는 글에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 합니다.
24교 다리 는 길이 24m 로 24개의 기둥 이 있는데...... 기둥은 24절기를 상징 한다고 합니다.
예로 부터 우수(雨水)에는 대동강 물도 풀린다고 했으니 개구리가 나온다는 경칩 에,
청명이며 춘분 같은 절기 를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인줄 알았더니 중국 수입품 이라?
그것뿐만 아니라 명절 도 중국 명절인 설과 한식, 단오, 추석과 동지 를 쇠는 것인가 봅니다!
우리도 고유 명절 이 있었으니 5월 삼한 수릿날, 10월에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에
상달제 그리고 12월 부여 영고 는 설날과 단오와 추석등 중국 명절에 밀려 사라졌는데...
중국의 세련되고 멋진 선진문명 이 들어오니 소박하고 질박한 우리 명절을 대체한 것으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문자를 발명하지 못하고 이민족의 한자" 를 받아들인 탓이라?
문자가 없으니 고조선 나라를 말로만 다스리다 오랜 세월이 지나 중국에서 한자 가 들어오는데.....
山(산)의 우리말은 "뫼" 이고 江(강)의 우리말은 "가람" 이며 동서남북을 뜻하는 우리말은 잊어
버렸으나 뱃사들이 동풍을 샛바람이라고 하니 동해는 "샛바다" 이고 백두산은 "흰머리뫼" 라?
중국은 우리 조선의 적 이었으니 늘 침략과 약탈에 전투 가 이어진지라 한자도 유입이 늦었습니다!
우리가 문자(글자) 를 발명하지 못한 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라 했으니 나라의 크기가 작고 구조 가
간단해 말로 통치하는데 별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지는데..... 고조선때 한나라 침략 과 고구려때
위나라 및 연나라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에 수도 주민의 대부분인 5만명이 중국땅
으로 끌려갔으니, 그 "철천지 원수들의 문자인 한자" 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여겨집니다.
붉은색 옷의 남녀들이 기념촬영 을 하기에 혹시나 싶어 기대 했더니 우리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마쳤나 봅니요? 그러고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선착장 에서 운하 를 구경하는데.... 진(陳)
나라를 멸망시켜 400년만에 중국 통일 의 대업을 이루고 대운하 를 완성한 "수나라 양제"
가 떠오르는데..... 그는 진왕(晉王) 에 봉해진 후인 589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을 넘습니다.
수양제는 병주와 이 도시 양주(揚州) 의 총관 을 역임하고는 형 양용을 모함 해서 태자의
자리 를 빼앗습니다. 차남으로 태자 자리에 오른 양광 은 604년 수나라 황제 에
오른후 만리장성 을 수축했고 낙양에 동경(東京) 을 조영했으며 남북을 연결
하는 저 대운하 (大運河) 를 완성하고는 서원(西苑) 을 조성하며 이궁(離宮) 을 건설합니다.
613년에는 고구려에 제2차 침공 을 하다가 양현감의 반란 이 일어나 철수했는데 대업례와
대업율령(大業律令) 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 같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만년에 사치스런 생활이 극에 치달아 백성의 원망은 높아져 전국에서 군웅들이 봉기 합니다.
나중에는 도처에서 반란 이 일어나는 와중에 이 도시 강도(江都, 양주) 를
남순(南巡) 하다가 신하 우문화급에게 살해 되었으니 허무한 종말 이라.....
수양제 (隋煬帝) 양광(楊廣) 은 천고의 폭군 으로 조정 대신들을 살해 하고 사방으로
무력을 과시해 3차례에 걸쳐 고구려 원정 을 행해 민력을 피폐 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강남을 순행 하는 바람에 국고가 텅 비었으니 반란 이 잇따르는 가운데
강도(江都, 양주) 에서 시해 를 당한 뒤 후대인들에게 폭군 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대운하 를 건설하고 만리장성 을 수축함으로써 국방을 튼튼히 하고
운하를 통한 남북 교역을 활성화 했으며..... 법률을 정비하고 호한융합(胡漢融合)
을 통해 중국의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서기 604년 맏형인 양용(楊勇)을 사사 하니 막내 동생인 한왕 양량 이 병주에서 반기 를 들자.....
대신 양소를 보내 평정하고 모반에 가담한 이민(吏民) 20여만호를 모두 유배형 에 처해집니다.
이해에 양자강의 남조인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후주 진숙보 가 병사 하자 수나라는
그에게 대장군, 장성현공을 추증하고 그에게 양(煬)의 시호 를 내렸으니 시법
(諡法) 에 따르면 “양(煬)”은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잔악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14년 뒤 수양제가 우문화급에 의해 교살 을 당하자 당나라 창업주인 당나라 고조 이연 이
수양제 에게 똑같은 바로 저 “양(煬)” 의 시호 를 내렸으니...... 업보 인가? 이를 어쩌랴?
수양제 양광 은 배를 타고 북쪽에서 지금의 강소성 양주(揚州) 에 해당하는
남쪽의 강도 (江都) 로 유람 하기 위해 황하 이남과
회수 이북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 100여만명을 동원해 운하 를 뚫게 했습니다.
“통제거(通濟渠)” 라고 하는데.... 낙양의 서원(西苑) 에서 승선하면 곧바로 황하 로 나아가
하남의 변수(汴水)와 산동의 사수(泗水) 를 거쳐 회하 에 이르게 되는 거대한 운하 입니다.
그는 회하 남쪽의 백성과 장인 10여명 을 동원해 “한구(邗溝)”를 뚫었으니..... 산양(山陽) 에서
장강(양자강) 에 이르는 운하 입니다. 운하 양쪽으로는 황제 전용의 어도(御道) 를
만들고 폭 40보 도로 양옆에 버드나무 를 심었으니 자신의 성씨가 “양” 인 것을 감안한 것이지요?
고구려 정벌 을 위해 낙양에서 지금의 북경에 이르는 영제거 (永濟渠) 를 뚫고, 군량을 신속히
조달 하기 위해 강도에서 지금 항주에 이르는 강남하(江南河) 도 뚫었습니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묶어 “대운하” 로 통칭했으니 수만 척에이르는 거대한 배 를 건조했던 것은 물론입니다.
뱃길 이 열리면서 “호한융합” 이 촉진되고 남북교역 이 활발히 전개되어 부국강병
을 실현 한 점 등은 인정할 수 있으나.... 당시 백성들에게는 재앙 이었습니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피일휴(皮日休) 는 “변하회고(汴河懷古)” 에서 읊었습니다.
수나라는 이 운하로 인해 패망 했다 하지만 [盡道隋亡爲此河]
지금까지 천리에 걸쳐 물길이 통하고 있다 [至今千里賴通波]
호화로운 용주 타고 남행만 하지 않았어도 [若無水殿龍舟事]
황하를 다스린 우임금 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共禹論功不較多]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명신 서문표(西門豹) 는 이같이 말한 바 있으니 “백성은 일이
성사된뒤 즐거움을 함께 할 수는 있으나 우려스러운 일을 함께 시작할수는 없다.”
양광은 605년과 606년 그리고 612년, 3차례 에 걸쳐 호화롭기 그지 없는 60미터
짜리 거대한 배 용주(龍舟) 를 타고는 남쪽 강도(양주) 로 순행을 떠났습니다.
용주 는 높이 45척(尺), 길이 200척(60미터) 에 달하는 4층 거대한 누선(樓船) 이었는데
4층에는 군신이 정무를 논하는 정전(正殿) 과 침식을 하는 내전(內殿), 집무실인
동서의 조당(朝堂) 이 있었으며..... 2, 3층에는 금,옥으로 장식된 120개의 방 이 있었습니다.
황후 를 위해서는 “상리주(翔螭舟)” 로 불리는 별도의 누선을 만들었는데 하늘로 비상하는
뿔이 없는 용 이라는 뜻으로 크기만 약간 작았을 뿐 장식과 모양은 똑같았습니다.
부경(浮景) 명칭의 3층으로 된 거선 7척은 실내수영장 처럼 물놀이 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백호와 현무, 주작 등의 이름을 지닌 배가 1,000여척 에 달했으니
여기에는 후궁과 왕공, 백관, 외국 사신, 승려, 도사 등을 태웠습니다.
청룡과 평승(平乘) 등의 명칭을 지닌 규모가 작은 배는 수천척 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12위(衛) 에 달하는 금위군 이 승선했다고 합니다.
매번 순행 할 때마다 배를 끌기 위해 8만여명 에 달하는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용주와
상리주 등은 9,000여명 이 끌었으니.... 이들을 일컬어 “전각(殿脚)” 이라고 했습니다.
전각들은 비단 으로 된 화려한 옷을 입고 배를 끌었으며 배가 깃발을 펄럭이며 줄지어 강도로
갈 때.... 무려 200리에 걸쳐 오색비단을 펼쳐놓은 듯해 보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았습니다.
게다가 운하 양안의 도로 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기병 들이 줄지어 이들 배를 호송한 까닭에
500리에 걸친 도로 주변의 주현 은 이들에게 급식 등을 제공하느라 경황 이 없었다는데
610년 수양제가 강도(양주)에서 도성 으로 돌아올때 이궐에서 부터 어가 를 준비시켰습니다.
어가는 1,000승 에 달하는 수레 와 1만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의장대 가 호위했다고 합니다.
수양제 는 낙양성 정문인 단문(端門) 에서 군신들의 조현을 받았는데 태자 양소(楊昭) 가
병사했으나 몇마디 애도의 말 만 한후 평소 처럼 커다란 연회를 베풀고 가무 를 즐겼습니다.
616년 강도(양주) 에 있는 관원들이 수양제에게 아부 하기 위해 기왕의 용주
보다 훨씬 화려한 대용주(大龍舟) 를 만든 뒤 낙양 까지 끌고 갔습니다.
용주의 건조 등으로 출세한 우문술(宇文述) 등이 재차 순행에 나설 것을 권하자...... 금위군을
지휘하는 임종만이 홀로 상서로 극력 만류 했다가 당일 조정 뜰에서 장살(杖殺) 당했습니다.
양광 은 월왕 양동에게 도성의 수비 를 맡긴 뒤 또다시 강도(양저우) 순행 에
나서고자 했으니... 출행에 앞서 시를 써서 총애하는 궁인 에게 전했습니다.
강도(양주)가 너무 좋은 까닭에 출행하는 것이니 올해에만 잠시 떨어져 있자는... 내용
이었다는데 그러나 결국 이것이 마지막 이별 이 되고 말았습니다. 승지 최민상 이
건국문 앞에서 도적이 각지에서 발호 하고 있는 까닭에 출행해서는 안된다 는
표문을 올리자 수양제가 최민상의 양옆 뺨과 입술을 도려낸 뒤 이내 목을 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반대등 만난을 무릅쓰고 결행한 제3차 강도(양저우)
행이었건만 이 도시 양저우(양주) 에서 우문화급의 반란으로 목숨이 스러질 줄이야....
첫댓글 오정교,백탑,24교다리-길이 24미터로 24개의 기둥으로 24절기가 적혀있는모양입니다
우리네 24절기가 중국에서 온것이었군요.우수,경칩,청명등 곧 있으면 입추,말복가 옵니다.
수양제 양광의 일대기를 자세하게 적어주셧군요.
수양제가 대운하건설이랑 만리장성축조는 잘 한 일이군요.
하지만 호화유람으로 나라를 망쳣군요.
중국은 고대로 부터 끝까지 음력을 사용했습니다만
농업국가이다 보니 농사를 짓기 위한 24절기는
양력을 사용해서 정한게 실용적으로 보입니다.
이 24절기는 다른 문화와 함께 한국에 도입되었구요!
아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