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공신이며 안동 권씨의 시조. 본성(本姓) 김(金). 본래 신라에 속하였고, 뒤에 후백제(後百濟)의 지배하에 있던 고창(古昌: 安東)의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견훤(甄萱)이 신라 경애왕(敬哀王)을 자살하게 한 데 대해 분개하던 중 930년(고려 태조 13) 고려가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로부터 권씨(權氏)의 성(姓)을 하사받고,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의 계(階)를 받았으며, 아부공신(亞父功臣)에 책록되고, 동궁(東宮)의 스승인 정1품 태사(太師)의 벼슬에 올랐다.
능동(陵洞)의 묘역(墓域)
시조 권행(權幸)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파곡리에 있으며, 천등산 봉정사 뒤 조화곡(造花谷)의 자좌(子坐)이다.
묘가 있는 마을의 이름은 금계(金鷄)이며 속칭 검제(黔堤) 또는 능동(陵洞)이라 한다. (慕齋藏原記에서) 자좌(子坐)란 묘 자리의 방향이 정남향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시조의 묘역(墓域)은 천하에 비길 대 없는 명당이며, 풍수지리학을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감히 그 빼어난 지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조(始祖)의 묘역이 천하의 명당이라는데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부터 약 350여년 전, 땅에 떨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그것은 이여송이가 미륵불의 머리부분을 칼로 처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청병(請兵)으로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李如松)은 난이 평정되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훌륭한 인물이 날 자리를 골라 혈(穴)을 끊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여송이가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큰 미륵불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필경 저 미륵불 때문이라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서 미륵불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서야 말발굽이 떨어져서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칼로 잘린 까닭에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피 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 떨어진 머리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볼록볼록 나오게 다듬어 놓았는데, 지금 보면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놓은 것 같다.
그때 이여송이가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서후면 능동(陵洞)에 천하의 명당이 있으므로 부장(副將)을 불러서, 자신의 목을 쳐서 그 명당자리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부장(副將)은 [그곳이 명당이기는 틀림이 없으나, 이미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있다면 공연히 목숨만 잃게 되니, 일단 그 명당에 가보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이여송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니, 과연 그곳에는 우리 시조(始祖)의 묘가 들어서 있었다. 그 것을 본 이여송은 [아깝도다. 천하의 명당인데, 나와는 인연이 없구나.]하며 한탄했다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는 듯 남악기(南岳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공(公)의 묘는 안동부 서후면 검제, 천등산에 있는데, 안동부에서의 거리는 약 20리이다. 정유년(丁酉年: 1592) 겨울에 희(憘)가 명나라 장수 부총병(副摠兵) 이방춘(李芳春)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공의 묘에 성묘하고 참배하니, 묘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권성(權姓)을 갖인 선비 십 여명이 와서 함께 자리를 하며 참배했다. 묘 부근에 큰집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봉정사(鳳停寺)이다.]
천등산(天燈山)은 안동부에서 서쪽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비롯되어 여러 고을을 연이어 내려오니 그 줄기와 굽이를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봉오리가 영남 북부지역에 이르러 한 크고 우뚝한 봉우리를 이르니 이른바 학가산(鶴駕山)이다.
안동, 영주, 예천의 삼각분기점에 위치한 이 산은 학(鶴)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해발 882m로 동쪽에 일월산(日月山) 서남쪽에 팔공산(八公山) 멀리 북쪽으로는 한 줄 소백산맥이 아련히 보이고, 산기슭마다 명문취락(名門聚落)을 항성하고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학가산의 줄기가 남으로 달려가서, 봉정사(鳳停寺)의 뒷산인 천등산(天燈山)으로부터 재기 (再起)한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한 가지가 남쪽으로 굽어 내려와, 흩어져 여러 갈래를 이루었는데, 그 작은 한 가지가 서쪽으로부터 동쪽 가지와 더불어 둥글게 돌아 간 산중에, 바로 고려 때의 태사(太師) 권공(權公) 행(幸)을 안장한 묘역(墓域)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 태사공을 장사하고 모신 이래 4,5백 년이 되도록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년 책임지고 제사를 이어 받은 자가 없었고, 산소와 산 역시 황폐하니 그 묘역을 분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부끄럽게도 시조(始祖)의 묘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화(成化) 연간에 태사(太師)의 18세손인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충주(忠州)로부터, 안동 출신인 이조정랑(吏曹正郎) 배소(裵素)의 따님을 처로 맞이하여 안동부의 땅인 풍산현하회촌(豊山縣河回村)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루는 여지승람(興地勝覽)을 펼쳐보다가 시조 태사공의 묘소가 있는 곳을 책 속에서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 묘는 너무나 오래 실전(失傳)되어, 비석(碑石)도 없고 산도 황폐하였으며, 세월 또한 오래 흘러갔으므로 쉽게 찾을 만한 표식이 없었다.
그래서 술사(術士)와 더불어 산과 능선에 올라가, 오랫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답사한 끝에 비로소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그 곳이 오래도록 많은 자손들이 찾던 태사공의 묘역(墓域)임을 발견하고 또한 확인했다.
그래서 평창공은 흙을 모아 봉분(封墳)을 쌓고 장차 비석을 세우려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卒)하게 될 때, 태사공(太師公) 묘 밑에 장사해 줄 것을 유언하고 떠났다.
자신이 태사공 발아래 묻힘으로서, 다시는 시조의 묘를 실전(失傳)되지 않게, 몸으로 지키려한 충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인 배씨가 공의 생존시에 먼저 졸(卒)하여 태사공 묘소 계하(階下) 몇 걸음 되는 곳에 이미 매장했으므로, 공의 분묘는 그 묘 아래에 모셨다가 뒤에 비위 묘와 공의 묘를 합장하여 모시니, 지금 태사공 묘 아래에 있는 제이의 무덤이 곧 평창군사 부부의 묘이다.
그 뒤 평창공의 아들 유(裕)와 작(綽) 등이 평창공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세계(世系)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부모의 뜻을 받들어 태사공의 묘에도 작은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묘갈(墓碣) 뒤에 소상하게 적었는데, 글은 곧 유(裕)의 사위 이종준(李宗準)이 짓고 썼다.
뒤에 유(裕)와 작(綽) 등은 전에 살던 평창(平昌)으로 돌아갔고, 그 사위인 호군(護軍) 증사복시정 (贈司儀寺正) 유소(柳沼)의 부처를 태사공이 계신 남쪽 산기슭에 합장하니, 그때부터 류씨가 이곳을 대대로 지키며 수호하게 되었다.
만력(萬曆) 무자년(戊子: 1588)에 관찰사(觀察使) 권극지(權克智)가 남방을 다스릴 때, 순시길에 안동에 와서 墓所를 참배하고 경내에 사는 종인(宗人)들과 함께 제사를 올렸을 때, 일하는 관속(官屬)들이 잘못 하여 비석에 부디 쳐서, 비석이 깨지니 관찰사가 곧 종인(宗人)들과 의논해서, 돌을 사서 깍고 다듬어 좋은 날을 택해서 고쳐 세우려 할 때, 류성룡(柳成龍)이 또한 공(公)의 외손이라 하여, 그에게 그 사실을 기록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公)의 훈업(勳業)은 사책(史冊)에 실려 있고, 자손은 보첩(譜牒)에 갖추어져 있으며, 혜택은 일국(一國)에 미쳤으니 다시 거듭 말할 바가 없으며, 삼가 입석(立石)한 전말을 대강 기록하여 후세들에게 상고할 바 있게 한다.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건대 공(公)을 태사(太師)라 하였으나, 예전 각자(刻字)에 실려 있지 아니하므로 의심스러워 감히 가입(可入)하지 못한다.
만력16년 무자월(서기 1588). 자현대부 예조판서 류성룡이 짓고, 22세손 권오(權晤)가 쓰고, 만력16년 윤6월 초3일에 세우다.
시조 묘소에 관한 외손(外孫) 류운룡(柳雲龍)이가 쓴 한문의 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분묘가 많으나, 왕의 분묘가 아니고 일반 사족(士族)의 묘 가운데 천 년을 넘도록 잘 보전되고 지켜져 내려온 묘는, 우리 시조 묘 이외에 그 유래가 드물다.
같은 삼태사(三太師)인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시조의 묘만 해도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어언 실전(失傳)되어, 단(壇)을 모아 분묘(墳墓)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만 봐도, 우리 집안이 시조(始祖)의 묘소를 잘 모시고 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운 일임을 능히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