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순 변호사님의 방문과 두 가지 제안
2007년 2월 어느 토요일 오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예! 교촌농촌체험학교입니다.”
“저희는 지역을 다니며 농촌마을을 연구하는 사람들인데요. 오늘밤 교촌마을에서 숙박을 할 수 있나요?”
학위논문을 쓰기위해 마을을 다니며 조사하는 여대학원생 같았다.
“마을 숙소는 마땅찮은데 안계면에 있는 여관을 잡아 보시죠!”
“불편한 마을회관도 상관없어요. 저희들은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몇 분이신데요?”
“저를 포함해서 세 명입니다.”
편리한 시설보다 주민들과의 대화가 우선이라는 말에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제가 몇 군데 알아보고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토요일 오후, 이곳저곳을 전화해도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숙소가 불편해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안했다면 나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 속에 형식적인 조사가 아니라 정말 농촌을 위하는 기운이 느껴졌기에 체험학교 숙소를 제공하기로 결정을 했다.
단 세 사람을 위해 단체숙박 시설을 제공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나도 주말을 반납하고 체험학교에 대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조금 늦게 도착 할 것이라는 사전 양해는 있었지만 밤이 늦도록 무작정 기다리고 있자니 은근히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거절하고 집에 갔으면 편하게 쉬고 있었을 텐데 뭔 고생이고!’
밤 10시 30분경, 후회가 스트레스로 변하여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을 때 체험학교 주차장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왔다.
승합차에서 아가씨 한명이 내리더니 자기가 전화를 한 박은주연구원이라고 인사를 했다. 이어 머리숱이 조금 부족한 교수님 같은 한분이 승합차에서 내렸다.
인사를 하기위해 가까이 다가가니 TV에서 많이 본 분이라 깜짝 놀랐다.
박원순 변호사님이셨다.
‘아니 박원순변호사님 같은 분이 이 촌구석에는 어쩐 일로 오셨을까!’ 처음에는 어리 둥절 했는데 사무실에 들어가 명함을 받으면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지역과 마을 탐방을 다니는데 이번이 의성지역 탐방이라고 하셨다.
박은주연구원이 사전 약속된 의성지역 분이 연락이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교촌마을에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속된말로 교촌마을 방문은 사전 약속의 취소로 이루어진 땜빵이었다.
비록 계획에 없었던 땜빵방문이지만 이러한 인연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질서의 틀 속에서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농촌을 위하는 에너지가 서로에게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통해 이 에너지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사전 약속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만약 체험학교 숙소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만남의 인연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연의 씨앗과 운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였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나누도록 하고 일단 내일 아침식사와 약속의 취소로 날아가 버린 오전 방문지를 소개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침식사는 식당보다는 집으로 모시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체험학교에 손님이 세분 오셨는데 내일 아침식사 되겠나?”
“귀찮은데...”
“손님이 박원순 변호사님이신데 우리 집에서 모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나?”
“알았다!”
평소 손님을 꺼리는 집사람도 손님이 박원순 변호사님이라 말하자 흔쾌히 대답을 했다. 오전 일정 장소는 오후 일정으로 잡혀있는 사곡면 산수유마을과 동선을 맞추면 좋을 것 같아 바로 옆 마을 춘산면 효선리에 계시는 의성 농민회 김정욱 회장님께 부탁전화를 드리니 점심식사까지 책임져 주시기로 했다.
손님이 박원순 변호사님이라 말하니 집사람도 김정욱 회장님도 두말없이 허락 해 주었다. 운전을 해 온 남자 연구원과 나는 같은 숙소를 사용했는데 ‘희망제작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자세히 설명을 듣게 되었고 기부와 나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소 마음이 있었던 아프리카를 후원할 수 있는 기관을 추천 해 달라고 했더니 ‘유니세프’를 소개 해 주어 며칠 후 후원회원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면소재지에 있는 집으로 박원순 변호사님과 연구원을 모시고 갔다.
비록 찬과 맛이 없는 아침상이었지만 모두 아침밥을 깨끗이 비워 주셨다.
식사를 마친 박변호사님은 교촌마을과 나에 대해 인터뷰하셨는데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노트북에 꼼꼼히 기록하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교촌마을 방앗간에 들러 부녀회원들과 대화를 나누시고는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소기업발전소’와 연계하여 사업을 확장 해 나가는 방법을 제안하셨다. 교촌마을에서의 일정은 끝났지만 농촌의 발전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의성을 방문 해 주셨기에 춘산면 효선마을, 사곡면 산수유 마을까지 안내를 해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승합차에 함께 올랐다.
춘산면 효선리 의성군 농민회 김정욱 회장님 집에 도착했다.
김정욱 회장은 우리나라 유기농업 1세대이신 故 김영원 장로님의 장남으로 고향에서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유기농과 야채효소공장 ‘효선농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김정욱 회장님은 농촌의 아픈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고 형수님은 부실한 우리 집 아침식사와 달리 푸짐한 점심상을 차려주셨다. 식사 후 야채 효소공장인 ‘효선농장’에 들러 설명을 듣고 다음 장소인 산수유마을로 이동하였다.
사곡면 산수유마을은 행자부가 주체한 「제1회 살기 좋은 마을자원경영대회」대상과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공모에 우수상을 차지하여 2007년부터 3년간 20여 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주민들을 위한 문화시설과 관광자원 개발 및 편의시설 등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을 이장님을 인터뷰 하신 박원순 변호사님은 마을주민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관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하셨다.
의성에서의 마지막 방문 장소인 안사면 ‘쌍호공동체’를 가기 전에 체험학교에 들러 먼저 내려야 했다. 끝까지 안내를 해 드리고 싶었지만 동선이 반대방향이라 인사를 드려야 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박원순 변호사님이 두 가지를 제안 하셨다.
“송 선생님 떠나기 전에 두 가지를 제안 드리고 싶은데 하나는 책 출판이고, 하나는 희망제작소 객원 연구원입니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동을 하는 승합차 안에서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마 나를 좋게 보신 모양이었다.
한 가지 제안도 놀랄 일인데 두 가지 씩이나 갑자기 제안을 하시니 당황스러워
“생각해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별생각이 든 나중에 이 대답을 엄청 후회하게 되었다.
박원순 변호사 일행이 떠난 뒤, 동시대의 거물과 1박 2일을 함께한 것도 영광인데 두 가지의 일을 제안 받았으니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박원순 변호사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회활동을 조금하는 편이라 저명인사분들과의 만남이 가끔 있는 편이다. 그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박원순 변호사님은 사회적 위치와 달리 자신을 먼저 낮추고 자기 이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그 내용들을 노트북에 꼼꼼하게 기록하셨다.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님의 입에 붙어있는 말은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없습니까?”였다.
나 같이 하찮은 마을 머슴도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고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알량한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박원순변호사님은 겸손이 가식이 아니라 정말 몸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지식인들이 현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현장에 무관심한데 주말마다 지역과 마을을 방문하여 불편한 잠자리와 부실한 식사도 마다하지 않는 소탈한 모습에 배울 점이 너무 많았다.
박원순 변호사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시구나!
두 가지 제안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책 출판은 개인적인 소원이라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원은 일이 많을 것 같아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제작소에서 전화가 오면 ‘책 출판’은 받아들이고 ‘객원연구원’ 정중히 사양을 해야지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도 전화가 오질 않았다.
‘혹시 생각 해 보겠다는 나의 대답을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것은 아닐까!’
그때 ‘고맙습니다.’라며 단번에 받아들여야 했었는데 괜히 ‘생각 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여 굴러 온 복을 다 차버린 것 같아 그때 확실하게 대답을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가만히 있으면 책 출판은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교촌마을에 다녀갔던 박은주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이후 아무런 지시가 없어서 연락을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박원순 변호사님께 전화를 걸어
“지난번에 제안하신 책 출판 작업 준비해도 되나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박원순 변호사님의 기억에서 나의 존재가 잊혀지는 것이 두려웠다.
기억에서 잊혀지면 책 출판의 소원도 날아가 버리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희망제작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 활동을 하면서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책 작업을 하자고 정식으로 제안 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경북 의성에서 머나먼 서울에 가끔 올라가 큰 얼굴을 보여 드렸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제안을 하셨을 때 바로 대답을 바로 했어야 했는데....’
책 출판에 대한 하나의 기회가 없어진 것이지 개인적인 소원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비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를 알아보고 계약을 하여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인생이란 참 재미있다.
‘꿈을 꾸어야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만 ‘얻으려고 애를 쓰면 얻을 수 없다.’는 말도 있고 ‘마음을 비우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책 출판에 대한 집착이 거의 사라진 어느 날, 서울 지역번호가 찍힌 전화가 왔다.
난 강의 의뢰인 줄 알고 전화를 받았다.
“예, 송종대입니다.”
“저, 박원순입니다.”
난 희망제작소에서 주관하는 농촌마을개발과 관련 된 토론회에 발제자나 토론자로 섭외를 하시는 줄 알았다.
“송 선생님 작년에 책 출판 제가 제안 했잖아요. 작업 시작 합시다.”
한달 만 일찍 전화를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 안타까웠다. 자비 출판이라 이미 50%의 대금을 지급 한 상태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하고 계약을 해 버렸는데요”
“그래요 이번 주에 송선생님 처럼 전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출판 준비모임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는데 어떻게 하죠”
“그럼 책 출판과 상관없이 일단 모임에 참석은 해 보겠습니다.”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출판준비모임에 참석 해 보니 전국에서 활동하는 쟁쟁한 활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에세이집 출판을 앞두고 있어 책을 다시 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출판모임에 참석해 보니 체험마을운영실무 중심으로 원고를 정리하면 되겠다는 용기를 얻게 되어 원고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9년 7월
‘체험 삶의 현장으로 놀러 오세요’ 라는 책이 희망제작소 우리 강산 푸르게 총서 25권으로 정식 출판이 되었다.
2011년 10월 26일
교촌마을을 방문하셨던 박원순 변호사님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셨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 송종대는 책을 출판 하게 할 만큼, 박원순 변호사님은 서울시장이 되게 할 만큼 닦아놓고 쌓아놓은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돈이 필요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공덕이 필요하다.
어느 한 사람의 전화, 어느 한 사람과의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알 수 없다. 인연의 씨앗이 어떤 인연의 나무로 성장할지는 시간이 지나보아야 알게 된다.
* 2007년 2월 교촌마을을 방문하여 인터뷰한 내용은 2011년 8월 출간 된 ‘마을, 생태가 답이다.’라는 책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