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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자료 V.
세계관 충돌의 한 예
- 이슬람의 세계관 이해 -
세계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는 관점 혹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느 한 공동체가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며 혹은 싸워나가면서 형성된 세계 이해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단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처해진 환경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 환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항목에서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한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많은 경우에 무슬림들 자신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이해하고 소화하고 적용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이 후자는 이슬람학의 관심이기보다는 다분히 문화/종교 인류학적인 관심인데, 본 항목에서는 이러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모든 무슬림들의 내면에 습득되고 뇌리 속에 각인됨으로써 무슬림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관 전제들(worldview assumptions) 가운데 핵심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이슬람에는 기본적인 6가지 믿음의 내용이 있다. 무슬림은 알라를 믿으며, 알라의 천사들과, 알라의 책들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믿는다. 그리고 알라의 절대 작정을 믿으며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믿는다. 여기서는 이 가운데 이슬람의 세계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관과 알라의 작정, 그리고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관점/믿음들을 다루기로 한다.
알라
이슬람의 가장 기본은 신앙고백이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마지막) 선지자이다(la ilaha illa allah, muhammad rasul allah)”라는 그들의 신앙을 모든 무슬림들은 거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반복하여 고백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들이 교육받는(enculturation) 내용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tauHid)과 무함마드의 마지막 선지자됨(risalah)이다.
알라는 전지전능한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 어떤 존재도 알라에게 비견할 수 없다. 무슬림들의 신관(view of God)은 매우 엄격한 유일신관이다. 알라는 숫자적으로도 한 하나님이다. 고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슬람의 신관에 위배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슬람의 신관은 인간의 매우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의 유일성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가장 잘 맞게 설명하고 있다. 즉 알라는 숫자적으로 단일신이라는 신 개념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의 오묘한 삼위 하나님의 개념은 이슬람에서는 가장 큰 신성모독의 죄(shirk)가 된다.
또 알라는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단지 꾸란을 통하여 그의 뜻이 계시될 뿐이다. 그러므로 알라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이 아들이 있으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계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냈다고 하는 기독교의 신 이해는 무슬림들에게는 오직 신성모독일 뿐이다. 꾸란 112번째 수라(章)는 이슬람의 신관을 잘 요약하여 준다.
1절: 알라는 오직 유일하고 하나뿐인 신이시다. 2절: 알라는 영원하시며 절대자이시다. 3절: 그는 자녀를 낳지도 않으시며 자녀로 태어나지도 않으신다. 4절: 그와 같은 이가 없다.
이슬람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 형성될 때에 이 유일신 사상(tauHid)은 가장 중요한 무함마드의 메시지였고 오늘날도 이 사상은 이슬람의 모든 문화의 기저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메시지의 근본은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과 절대성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초기 메시지 역시 우상을 타파하고 유일하신 신 앞으로 사람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랍 사회를 그들의 육적 조상인 아브라함의 종교로 돌이키고자 하는 종교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알라에게 순복”이라는 의미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슬림들의 “종교”와 “세계관”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편의상 우리는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내용은 무슬림들의 종교인 이슬람의 기본 교의의 내용들과 같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2) 알라의 절대 주권과 작정(qadr)
무슬림들의 문화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로 이 신관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의 토속적인 세계관의 차이들이 각 이슬람 사회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슬람권 내의 사회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신관에 대한 투철한 그들의 충성 혹은 헌신(allegiance)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관은 자연히 그 사회의 정신세계(혹은 문화의 정신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고, 역으로 이슬람권 사회의 보편적 성격을 알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신관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해하게 되는 알라의 속성은 어떠한가 알아보자.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쓰의 전통에 의할 때에 알라는 엄격하고 장차 모든 죄를 다 심판할 신이시다. 비록 알라의 이름이 꾸란에는 항상 자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ar-rahmani, ar-rahim)로 등장하지만 이슬람의 신관은 알라의 엄중함과 그의 두려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절대주관자이다. 중세기 수피 신학의 초석을 놓은 가잘리(al-Ghazzali)에 의하면 알라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필요 없다. 사랑은 사람이 필요를 느낄 때에 생기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알라는 어떠한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신이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알라를 자비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뿐이지 알라가 자비하신지에 대하여 무슬림들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자비의 개념은 알라가 용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지, 기독교에서처럼 이미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용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라의 용서와 자비는 조건적이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신의 속성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어느 정도 주권적인가 하면, 그는 모든 선과 악을 다 작정하였다. 가잘리와 같은 학자들의 신 개념에 의하면, 알라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로는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꾸란 5:20, 7:178-179, 14:4, 11:118-119, 32:13 참조) 결국 죄도 알라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라의 작정에 반론을 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 주권자이며 인간은 오직 순종을 요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라 50:16에 의하면 알라는 인간의 대정맥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신으로 묘사되지만, 이 구절은 알라가 창조자로서 그만큼 인간의 모든 깊은 곳을 다 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절이 알라가 인간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슬람의 신 개념은 인격적인 계시이기보다는 어떤 힘(Power)의 계시인 듯하다. 그는 자비한 신이라기보다는 자비할 수도 있는 전능의 신이다.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계시는 결국 그의 힘의 계시이다. 인간의 고뇌 속에서 만나지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며 거역하는 자들에게 승리자로 다가오는 그러한 능력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중요한 이슈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전능자에게 순복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된다. 그 결과 정통 이슬람에서는 율법학이 발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이다. 알라는 근본적으로 승리의 신이시다. 그에게 실패나 패배는 있을 수가 없다. 설사 하나님의 아들이 있어서 인간 세상에 왔었다고 하더라도, 죄인들에게 어이없이 당하고 십자가에서 치욕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승리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승리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슬람은 기실 그 처음 발흥 때부터 매우 현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현실성은 이슬람이 지금까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특징으로 항상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기본 세계관이 절대 주권자의 개념, 힘, 불가지론적인 신관이라는 아이러니 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사회 역시 이러한 개념들이 사회의 구조 속에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왕국의 전통을 고수하거나 독재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신관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무슬림들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와 사랑과 존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의 중요한 중추 역할을 해 왔다.
(3) 선지자 무함마드
이슬람의 기본 신앙의 교리나 모든 행사를 살펴보면 무함마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물론 무함마드가 어떤 신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교리를 이슬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에게 어떤 신격을 부여하는 것을 중죄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신앙이나 삶 속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들의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꾸란 24장 52절과 54절과 56절에 보면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꾸란에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곧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알라의 뜻이 가장 완벽하게 계시된 것이 바로 무함마드 선지자를 통하여서라고 꾸란은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상으로 무슬림들의 정신 속에 어린 시절 때부터 각인이 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옴으로 인하여 참 종교인 아브라함의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성을 향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완전한 것을 완성시킨 무함마드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며, 참 개혁가요 참 신앙인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무함마드는 수피즘의 시조로 여겨진다. 수피즘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우주의 신비한 운행의 중심 축에 놓여 있는 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꾸란에는 그를 완전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알라의 모든 칭찬과 전권을 받아 알라의 뜻을 계시하는 데에 마지막으로 사용된 위대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완전한 인간(perfect man)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혹은 하디쓰(Hadith))는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항상, 꾸란만큼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많은 경우, 실제로 꾸란보다도 더 많이 연구되고 가르쳐지기도 한다. 중세기 이슬람의 신비주의(Sufism)를 정통 이슬람의 경지로 승화시킨 대학자 가잘리(Ghazali)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생애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참 행복의 열쇠는 순나를 따르며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를 가리킴]를 모방하는 데에 있다. 그의 모든 출입과 움직임 그리고 조용한 시간들, 심지어 그의 식사하는 자세, 잠자는 일, 말하는 법까지 모두 그를 모방하는 것이다. . . . “[알라의] 사도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것들을 받으라. 그리고 그가 금지하는 것을 하지 말라”(꾸란 54:7). 그러므로 그대는 바지를 입을 때는 앉아야 하며 터번을 쓸 대에는 서야 한다. 그대는 신발을 신을 때는 오른발부터 신어야 함 먹을 때는 오른 손을 사용해야 한다. . . . 무함마드 아슬람은 멜론을 안 먹었는데 그 이유는 알라의 사도가 그것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에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ragg의 책에서 인용, The Call of the Minaret.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92.)
이렇듯이 무함마드의 일거수일투족은 진짜 무슬림이라면 따라야 하는 삶의 모든 행동 규범이 되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의 무의식 속에 가장 중요한 세계관의 전제요 가치요 충성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꾸란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무함마드는 결코 무죄한 인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무함마드는 무죄하고 완벽한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대다수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여겨져 왔다. 무함마드의 삶은 결국 알라의 뜻에 완전히 부합된 그러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슬람의 핵심은 무함마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무함마드를 욕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을 모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 전체를 그리고 알라를 모욕하는 일이다. 중세기에 서구 교회가 무함마드를 모욕하였고 종교개혁시에 역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무시하여 버림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서방을 영원한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선교 현장에서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의 세계관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세계관이 얼마만한 힘이 있는 것이며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라고 나름대로 폭로하며 복음을 전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모든 경우 무슬림들의 분노를 샀고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 경우도 꽤 있었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닌가를 무슬림들과 따지기 전에, 선교사와 같은 외부인들은 먼저 무함마드가 무슬림 문화의 핵심이며 이슬람 정신세계의 축이라는 현실과 그 정신적 역동성을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작 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세계관과 충돌만 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모전만 치른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었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로 역사적인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한 탐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슬람의 학자들과 지성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탐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학문의 방향성 역시 무함마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 진영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나름대로 발견한 다양한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의 생애의 진위가 아니다. 모든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함마드의 순나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삶 속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함마드는 절대적인 위치를 이미 지난 14세기 동안 확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과거의 인물로 끝나지 않는다. 특별히 수피 신비주의에 오게 되면, 무함마드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심지어 중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에서처럼 대속의 의미를 갖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의 구원을 도와줄 수 있으며 무슬림들을 위하여 변호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인으로 모든 수피들은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중세 수피즘의 대학자인 가잘리는 무함마드의 사후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죽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바로 알라가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할 수 있는 자이다.” 그때 알라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오 무함마드여, 네 머리를 들고 말하라. 너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중보를 하여라. 그리하면 응답받을 것이니라.”(Andrew Rippin의 책에서 인용. Muslims: Their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New York: Routedge, 2001:52-53.)
이렇듯이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꾸란의 계시를 받고 그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신앙과 존경과 사랑은 그들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토속적인 이슬람의 현상을 관찰하면 (소위 민속 이슬람 folk Islam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현상) 무함마드나 알라의 개념은 많이 약화되고 주로 정령숭배와 샤마니즘이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충정은 모든 무슬림들의 세계관의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비무슬림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무함마드에 대하여 과학적이고도 역사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때에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무슬림 사회의 타부를 건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함마드는 단순히 그들의 역사 속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만이 아니며, 또 신앙과 충성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만이 아니라,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투사(projection)한 그들의 자존심이며 궁극적인 자기 정체(identity)인 것이다.
(4)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과 이슬람의 세계관의 핵심 비교
그러나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어느 한 인물이 그토록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의 중심에 깊이 자리 잡아 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복음적이며 정상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참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세계관의 핵심인 믿음(assumption)과 가치(value)와 충성(allegiance)의 대상으로 모신 사람이다. 즉, 참 하나님과 참 중보자 예수가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참고로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오는 “영생”의 의미를 보라.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이,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 참 무슬림이란 shahadah, 즉 그들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이슬람의 신앙고백 역시 기독교에서처럼 두 가지 신앙의 대상을 고백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혹은 진정한 무슬림이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알라)과 그분이 보낸 마지막 선지자에 대한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적 신앙고백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믿음”의 전제(assumption)를 형성해주기 때문에 큰 힘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기독교의 신앙 고백의 구조와 이슬람의 그것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 신앙고백되듯이 이슬람에서 역시 전능신 알라와 그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가 고백된다(shahadah). 신과 중보자에 대한 이러한 고백들이 이슬람의 정통 교리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선지자일 뿐 중보자는 아니다. 실제로 꾸란을 비롯한 정통적 가르침은 중보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무함마드는 거의 중보자의 위치에 올라가 있으며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서 무함마드의 위치는 거의 신격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본 고에서는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현상적 및 심리적인 부분들만 다루므로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는다.이러한 유사성의 원 인을 나는 두 가지로 본 다. 하나는 사탄의 모방을 통한 기 만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영혼 깊 은 곳에 있는 "종교성"이다. 특 별히 후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부 분과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인 도자를 찾는 부분으로 나 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종교적 성향"에 진리의 하 나님은 응답하시는 것이며, 사탄은 종 교들을 통하여 틀린 대답으로 사 람들의 마음을 기만한다고 본 다. 이 부 분은 내가 본문에서 현재 다루로자 하 는 범주에서 벗어나므로 더 깊이 언급하지 않 는다.
특별히 이슬람의 문화를 보면 이러한 신앙고백은 어려서부터 이루어진다. 이미 앞의 2호에서 언급했듯이 동질문화권에서의 문화화 과정(enculturation)을 통하여 이러한 문화적 지식은 뇌에 각인되고, 따라서 그렇게 각인된 내용들은 당연한 것으로 믿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수학적인 공식을 믿는 것과 같은 그러한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신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무슬림들과 같은 강한 세계관의 힘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믿는 것을 의심하면서 (cf. 고후 13:5) 자신이 과연 믿음 안에 있는지 확증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의심은 악이다. 절대로 알라와 무함마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그 리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여간해서는 어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고백은 신학적 고민과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기보다는 "문 화화 과정"을 통한 세계관 형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적 신념은 종교나 철학적 신념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문화적 신념으로서의 믿음의 형태는 때 로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보인다. 어려서부터 모 태 신앙으로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은 하 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구 속하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 는다. 그것은 신앙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어 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주변 환경을 통 하여 "문화화"되었기 때 문이다 (enculturated into his/her Christian society or church). 그러다가 이 러한 문화적 신념이 무너지는 어 떤 계기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의 모 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도 한 다. 이것은 무슬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단 지 무슬림 사회는 이러한 의심이나 탐 구 혹은 "paradigm shift"을 허용하지 않 기 때문에 내면에 묻어두고 있 을 뿐이다. 자유가 좀더 보장되어 있 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의 심이나 흔들림은 진정 진리의 하 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 회가 되며, 소위 paradigm shift를 경험하고 난 뒤 의 신앙고백은 그야말로 "고백적"인 고백이 된 다.
그러면 이슬람 문화권에서 "문화화 과정"(enculturation)을 통하여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의 사고에 형성된 세계관의 힘이 어떠한지 간단히 살펴보자. 그 세계관의 내용들은 알라(신)에 대한 내용들과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내용을 축으로 하여 상당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는데, 본 고에서는 이슬람의 신조들을 모두 다룰 수가 없으므로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기본 골격 두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아랍어로 "타우히드"라고 하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며, 또 "리 쌀라"라고 하는 무함마드의 선지자됨에 대한 강한 신념과 충성이다. 신에 대한 개념이 어려서부터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의 신관과는 전혀 다르게 각인된 무슬림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무슬림 전도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 어려운 것은, 무슬림들이 믿는 무함마드에 대한 신념이다. 어떤 면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충성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구세주이며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해 보일 때가 많다. 실제로 이슬람의 문화권에서 알라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멀리 있는 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일상 생활을 비롯하여 그들의 영적인 부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함마드의 언행이다. 무함마드의 행적을 기록한 "하디쓰"(Hadith)는 따라서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원인자(causality) 역할을 한다.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함마드는 곧 이슬람의 대표이며 상징이다. 무슬림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그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것은 이슬람을 모욕하는 것이요 이슬람 문화와 사회 전체를 경멸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강한 집착으로 무함마드를 추종하고 충성하는 무슬림들에게 우리가 진정 충성해야할 대상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어떠한가? 앞에서 지적한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슬람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다분히 개인적인 일이다. 물론 집단적인 회심이 일어나며 가문 대대로 기독교가 전수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역시 "구원"의 개념은 개인적인 회심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지, 기독교 사회나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형성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성장과 성숙의 문제이며, 이미 자신의 문화권에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각인된 자신의 옛 세계관의 믿음의 전제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 과 충 성(allegiance) 의 대 상들을 기독교의 믿음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으로 바꾸기 위하여서는 상당한 "영적인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과 새사람 혹은 속사람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렇듯 내면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고 계속하여 기독교적인 진리에 의하여 기존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이슬람의 가치관과는 근본적인 다른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계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5) 선교: 세계관의 충돌
위에서 이슬람권에서의 예를 들었듯이 복음을 다른 종교권이나 기독교를 모르는 사회에 가서 전할 때에 우리 는 세계관의 충돌을 반드시 예상해야 한다. 선교는 다른 말로 하면 세계관을 바꾸 도록 돕는 사 역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 서, 죄 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 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의견을 갖 고 있다. 그리고 이 각자의 의견은 자신 의 성장배경에서 얻어진 문화화된 지식에 근거 한다. 자신의 문화화된 지식에 의해서, 즉 자신이 지금 까지 갖고 있 는 세계관에 의해서, 신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자신 에 대해서 등 등 사람들은 자 신의 의견 내지 는 신념을 갖 는다. 그 렇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 관을 바꾸지 않고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기독교인들의 믿는 바를 긍정해줄 수 있고 동의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동의를 해도 자신의 세계관이 복음의 진리로 바꿔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신 을 구원시킬 만한 "믿음"은 아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남의 이야 기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 는 믿음이란 세계관의 내용인, 믿음의 전제들과 가치 들과 충성의 대상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따 라서 회심이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 교의 성경적 진리의 세계관을 소개할 때에 사람들은 세계관을 바꾸 고 싶지 않은 일반 적 성향 때문 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들 의 세계관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바람직하다. 이것을 선교학에서는 "상황화 과정"(contextualization)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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