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취하라, 술로, 노래로
그대가 원하는 그 무엇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휘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끊임없이 취하라
보들레르, <취하여라>
내 글은 남편 빼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읽어도 상관없다. 바람피운 남편, 아내부터 눈치채고 바람피운 아내, 남편 빼고 다 안다는 말이 있다. 이 고백을 남편이 몰랐으면 좋겠다. 말로는 해명이 어려운 것들이 있다.
정신분열과 금단현상으로 미쳐버린 빈센트 반 고흐, 상남자 헤밍웨이, 마성의 피카소, 인상파의 시조 마네, 파격적인 인물인 드가, 평생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보들레르, 불행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지옥의 방랑자 랭보, 작지만 탈인상주의의 거장 툴루즈 로트렉, 미스터리한 에드가 앨런 포( fuck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 ing)의 마음에 불을 지핀 압생트(Absinthe)를 먼저 준비해야겠다.
린이나 참이슬로는 남편의 마음을 달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압생트는 한때 독주로 알려져 금지되었다가 밀주가 성행하자 1980년대부터 다시 제조가 허락되었다. 향쑥의 라틴어인 압신티움에서 유래한 이 술은 가격이 싸고 도수가 70%를 넘어서 고흐처럼 가난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단한 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위로였다.
각설탕과 압생트에 불을 붙여 녹인다. 강렬한 맛과 에메랄드빛 초록색은 사람들을 유혹했다. 악마의 맛을 안겨주었다. 나도 그 맛을 알고 있다. 스스로가 알코올중독자임을 고흐는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약쟁이에 알코올중독자란 것을! 그냥 인간이고 싶어서 쑥대신 향쑥에 마음을 뺏긴 밤이다. 아름다운 초록색과 구멍 뚫린 숟가락 사이에 녹아내리는 각설탕!
날 잡아서 막 흘러내리기 시작한 농염한 촛불과 달달한 각설탕과 압생트를 준비해서 고해처럼 해야 하는 말이 있다. 뜨거운 촛농처럼 농밀한 눈물을 떨구면서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원히 그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 최근 정신과 약의 부작용인지 노화의 결과인지 원인이 애매한 현상이 생겼다. 사건 개요부터 정리해 보자.
포토 그래픽 메모리 같은 나의 기억력이 사라졌다. 초등학교 때 1학년 때, 사실 국민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을 반에서 1등으로 외웠던 나의 영민함은 이제 다 사라지고 없다. 참고로 짝꿍은 못 외워서 담임선생님께 혼나고 남기를 1년 동안 했지만 실패했다. 내가 좋아하는 권력형의 남자 대통령 박정희의 서명이 좋아서 쉽게 외웠다. 세월이 흘러 다시 외우길 시도해 보았지만 석고 같은 뇌는 점점 굳어져서 이젠 " 아! 옛날이여!"가 되었다.
1번 사건 핸드폰의 펜을 잃어버렸다. 쌤썽(SAM SUNG) 정품 펜은 생각보다 비싸다. 문제는 사자마자 또 잃어버렸다. 3번째 펜 사건으로 남편을 향한 내 권력이 크게 줄었다. 싹싹 빌고 2번이나 새로 샀다. 꼬맹이라고 부르는 남편 앞에 돌멩이인 나도 더 이상 젊은 여자인 척하고 싶지 않다. 치매노인이라고 정직하게 고해성사해야겠다.
"이 정도면 소녀 이제는 치매 틀딱이옵니다."
2번 사건 태블릿 펜을 잃어버렸다. 집 밖을 나가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펜이 사라졌다. 내 생에 마술을 처음 부린 것 같다. 현란한 라틴어인 압신티움, 박테리움, 입실로움같은 마법의 주문을 만들어야겠다. 코로나로 마녀사냥당한 후 염력이 생긴 것 같다.
3번 사건 음식물 쓰레기 폐기용 카드를 분실했다. 일회용처럼 한번 쓰고 잃어버렸다 다시 샀다. 8시간이 지나야 사용 가능이라고 했다. 두 번째 카드를 비 오는 날 쓰자마자 또 잃어버렸다. 아! 이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다. 밖을 돌아다닌 적도 없고 수위 아저씨께 여쭤봐도 모른다고 했다. 일주일에 많아야 2번 정도 짧은 시간 외출하는 나로선 이해불가의 일이다. 집안에 슈뢰딩거의 상자가 있나 보다. 아인슈타인조차 인정하기 싫어했던 양자역학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순간 이동이 뭔지를 알 것 같다. 내 인생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느낌이다.
4번 사건 여동생이 우울증 환자인 언니를 위해 사준 10돈짜리 금목걸이를 택시에 놓고 내렸다. 정형외과의사, 문원장님께서 목걸이를 빼라고 하셨다. 16대나 되는 염증 치료 주사를 맞고 몽롱한 정신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택시에서 카드를 꺼내다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택시가 떠나고 바로 카드사를 통해 택시회사로 전화를 했지만 "모르쇠"였다. 경찰서에 신고하면 찾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냥 덮어버렸다. 경찰서라는 단어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지난 시간의 아픔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물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상황이지만 그냥 싫었다. 돈이고 뭐고 다 싫었다. 어떻게든 신고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데 마음 접었다. 동생이
"언니, 1년 넘게 찼으면 본전 뽑은 거니까 마음 다치지 마."라고 말했다.
이 모든 사건은 애교에 불과하다. 기타 등등의 사건은 생략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만들고 싶지 않다. 눈물, 분노, 횡포, 폭력과 싸운 지난 세월 난 모든 것에 화산처럼 솟던 의욕을 잃었다. 사실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씩씩하고 용감했던, 무조건 저지르면 잘하던 나를 잃어버렸다.
5번 사건 이건 정말 이혼이나 졸혼당할 것 같아서 마음속에 숨기고 살고 싶은 건이다. 프랑스혁명의 단초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처럼 내 인생에 큰 치명타를 가할 것 같다. 독일 왕이자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처럼 이탈리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눈밭에 엎드려 머리 풀고 속옷 차림으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 같은 남편한테 무릎 꿇고 3박 4일은 빌어야 할 것 같은 대형 사건을 저질렀다.
아버님께서 국방과학연구소에 계실 무렵, 프랑스 출장 갔다가 큰맘 먹고 사 온 가보인 몽블랑 만년필을 잃어버렸다. 언젠가는 남편도 알게 되겠지! 40년이 넘은 그 모델은 다시 구할 수도 없고 각인도 있었다. 나름대로 온갖 방도를 다 찾아봤다. 대체 불가능의 것이 되어있었다. 아버님께선 작년에 돌아가셨다. 유언으로
"몽블랑 펜 잘 간직해라!"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다.
병원에서 연명치료받다 고생만 하시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남편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편도 내가 말하지 않으면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다. 남편이 죽기 전
"몽블랑 만년필 잘 있지?"라고 물을 확률은 0%이다. 절망과 우수라는 색채로 삶이 바뀌어 버리는 순간, 물건에 대한 모든 집착은 사라진다.
물론 내가 너무 빠르거나 이른 죽음 앞에 시기를 놓치고 홀로 남은 철새처럼 초라하게 죽어가는데 남편이 불쑥
"몽블랑 펜 어디에 있냐? 보고 싶네 "라고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인지를 물어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남편이 대학 졸업식 때 사준 몽블랑 펜에 새겨진 내 이름이 이젠 죽은 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게 더 참혹할 수도 있다.
마음 다칠 일들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난 너무 많은 일들을 저질렀다. 서로 다른 시간이 아니길 빌어본다. 오늘 말 없는 남편이
" 치매가 오는 순간 존엄사를 신청하자. 정체불명의 삶을 살진 말자."라고 먼저 말했다. 입속의 검은 혀가 돋아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벌어질 일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삶이라는 구속에 잠금 해제를 하고 날아가는 순간이 그려진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모둠 회처럼 맛보았다. 내 남은 삶을 잘 살아갈지 의문이 든다. 지독히도 많은 죽음을 보았다. 언제나 죽음은 준비된 개인기여야 한다. 어찌 살아야 할까? 고민해 보는 밤이다. 아무 욕심이 없음으로 난 자유다.
세월이 나를 좀먹어 낡아진 날, 문득 알았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정말 고난도의 것이라는 것을! 보고 싶은 이들만 보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도 되는 날 알았다. 보고 싶은 이도 하고 싶은 일도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여고시절, 친한 친구가 "성인 놀이" 한 것을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날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웠다고 했다. 남자인 신부님 앞에서 고백하는 순간, 아주 먼 우주나 깊은 동굴로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밖에서 10번 소리 내어 시인하면 죄가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보면 그게 그렇게 큰 죄였을까? 잘 모르겠다. 그 당시 친구는 18년 인생, 가장 후회하는 짓을 했다고 인정했다. 난 슬쩍 삶의 지혜를 그녀로부터 훔쳤다. 고수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잊어버린다. 본인 스스로 망각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모를지도 모르는 진실은
"응, 아니야."이다. 폭력은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 망각은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까? 망각이 두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밤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