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싸움, 포도송이, 하양 까망, 하이텔 바둑동 엠티, 행마이야기 -우형愚形
혼자 있을 때는 인터넷 바둑을 두자, 회돌이, 흑백의 요정, 18급은 외로워
패싸움
이제민
상수의 말을 거의 다 잡았다고
기쁨의 탄식을 할 때
교묘히 패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 말이 다 살았다고
방심한 틈을 타
시간이 흐르면
살며시 조여 오죠.
패가 나면 긴장이 고조되어
판은 어지럽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팻감들.
팻감을 잘못 써
어느덧 대마는 죽고
상수의 말을 잡았을 땐
그 기쁨 누가 알랴?
패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패싸움.
------------------------
·월간『바둑』1997년 6월호 「돌소리 글소리」란
포도송이
이제민
안경 너머로 보이는
고통의 돌들
방황의 나날이에요.
한 점 한 점 뭉쳐
포도송이 되어도
꿋꿋이 견뎌 나가요.
모양이 사납고
회돌이가 두려워도
강하게 둬 나아갈 뿐이에요.
저 멀리 보이는
먼 행로
슬픔의 연속이에요.
하양 까망
이제민
수많은 길이 나있는
조그만 네모 안 승부의 세계
뒤돌아올 수 없는 희뿌연 안개 속을
나란히 걷고 있네.
화합을 하다가도
서로 격돌하고
눈치를 보다가도
금세 어울리는 하양 까망
모난 마음에 제멋대로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인내심을 기르고
깊고 복잡한 미로를
홀로 두드리며 폴짝 뛰어본다.
그림자 밟듯 숨바꼭질하는
너와 나는 하양 까망.
------------------------
·『한국시대사전(개정증보판)』 2011년 3월
하이텔 바둑동 엠티
이제민
바둑동으로 인연이 되어
대국도 하고
대화도 나누지만
마음 한편엔
그리움 쌓여만 가고
너의 모습
너의 목소리
궁금증을 간직한 채
참석한 바둑동 엠티
실제 모습은
기대와는 다르지만
느낌만은
오랜 기우棋友처럼
다정하게 다가온다.
마음속에 간직한
기나긴 날들을 다 풀어헤치려니
하룻밤이 너무 짧기만 하구나.
* 2000년 6월. 하이텔 바둑동 무주 엠티를 다녀와서
행마 이야기 -우형愚形*
이제민
잘못한 게 없는데
살리려고 했는데
옥죄오는 굴레
누구나
한번쯤 겪는 고통
빈삼각, 바보사각
포도송이처럼 나쁜 모양의 표본
뭉치면 망한다는 바둑의 격언
하지만
절묘한 순간에는
우형이라도 둘 수 있어야 한다.
*우형(愚形) : 돌이 뭉쳐 능률적이지 못한 형태.
빈삼각과 포도송이가 대표적이다.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혼자 있을 때는 인터넷 바둑을 두자
이제민
혼자 있을 때는
인터넷 바둑을 두자.
비가 와
집에서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을 때
긴긴밤
잠도 안 오고
머릿속에 잡념만 혼란스러울 때
멀리 사는 친구
가까이 사는 벗
만나기 뭐하면
인터넷 바둑을 두자.
편한 반바지 차림으로
음악을 들으며 맥주 한잔
주전부리도 하면서
기우棋友를 만나
바둑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보자.
회돌이
이제민
잔잔히 흐르는
평온한 세상에
회돌이를 당한다.
낚싯바늘의 미끼처럼
상수가 던져 놓은 떡밥에
눈은 멀고
회오리 같은 회돌이
순식간에 내 수는 줄어
힘도 못 쓰고 똘똘 뭉치네.
중앙은 별천지가 되어
고개를 내밀지도 못하고
이제는 공수를 투하하지만
부담은 더 커져만 가네.
회돌이 한방에 판은 그르쳐
패국이 되었네.
앞으로는 눈을 크게 떠
회돌이를 조심해야지.
흑백의 요정
이제민
하얀 도화지 아이들의 꿈
한점한점 놓는 흑백의 요정
눈목자로 훨훨 날고
날일자로 껑충껑충
입구자는 엉금엉금
티끌 하나 없는 파아란 하늘
행마는 사뿐히
공격은 날렵하게
수비는 튼튼하게 하는 요정들.
하늘로 한 칸 껑충 날갯짓
살며시 비마 내려앉아
중앙에 세력의 연막을 치면
무리수 연발하는 상대.
갈 길은 멀어
수상전은 시작되고
정상에 다다르려 하면
패로 어리둥절 만드네.
요정의 나라에선
묘수를 찾는 노력이
반상에 널리 퍼졌네.
18급은 외로워
이제민
18급은 외로워요.
바둑 두자고 해도
아무도 안 둬주고
그냥 쳐다보기만 해요.
18급은 슬퍼요.
누구도 초보시절 겪었을 텐데
내 마음 너무 몰라줘요.
죽은 말도 못 잡고
살은 말은 죽이는 이 하수
매번 가일수한다 해도
결국 죽어버려요.
18급은 서러워요.
“잘 둬봤자 18급이지” 하며
되지도 않는 수나 연발하는 상대
정말 미워요, 얄미워요.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상수로 가는 날이 곧 오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