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와 우리 가족사
은천 박승연
“동서, 잘 지내지? 8월 2일 날 운천 고모부님을 뵙고 오는 길에 아버님 묘소에 다녀왔어. 그런데 무궁화가 만발했더라.”
“네에…….”
“참! 아버님은 무궁화꽃 사랑이 남달랐지, 동서! 아버님을 뵙는 듯이 정말 반갑더라.”
“형님! 저희는 한 달 전에 다녀왔어요. 형님! 완전 무궁화 꽃동산이지요?”
둘째 형님과의 통화 내용이다.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선산 입구에 들어서니 묘소를 둘러친 무궁화꽃 향연이 한창이다. 오래 전 시아버님이 그려놓으신 수채화 같은 풍경이다. “에미야, 어서오너라. 아범아 어서오너라.”하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시아버지의 품성을 닮은 꽃이 우릴 반긴다. 6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자손들이 선산에 오면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구석구석을 꽃동산으로 가꾸셨다. 봄이면 피어나는 진달래, 철쭉꽃……. 몇 그루의 과실수, 그리고 그렇게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가꾸시던 무궁화나무가 그것이다. 음력으로 6월 9일은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생신날이다. 그래서 무궁화꽃이 피어나는 여름이오면 시아버지가 그리워서 꽃동산 속에 누우신 묘소를 찾는다.
시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 경찰관생활을 하셨다. 그런 아들의 직업 탓에 시할아버지는 6.25동란 때 경찰관 가족이라 해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셨다. 시할아버지는 육척 장신에 자유를 자기 몸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셨기에 단 한 마디의 ‘살려 달라.’는 타협도 없으셨고 돌아가시면서도 의연하게 ‘대한민국만세’를 외치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시대 때에는 일본 순사가 동네 주민을 괴롭히는 것을 본 시할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면서 일본 순사의 뺨을 때렸다가 고초를 겪으셨다고 한다.
6.25 동란 때, 다리 밑에서 시할아버지와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함께 총살을 당하셨고, 그 장면을 마을 주민들이 목격해서 시아버님에게 알려주셨다고 한다. 그때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께서는 집 옆에 딸린 텃밭에 땅굴을 파서 위에는 소나무를 베어다 꽂아 위장해놓은 굴속에 피신해 있다가 마을이 조용해지자 밖으로 나오셨단다. 급박한 상황에서 함께 피신하지 못했던 아버님 생각에 통곡하면서 당신 때문에 짧은 생을 마감하신 아버님을 한 밤중에 남몰래 시신을 수습해 오셔서 지금의 선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면서 무궁화가 전국적으로 보급될 때쯤 시아버지께서는 시할아버지 묘소 주변에 무궁화나무를 심어 무궁화 꽃동산을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살아생전 시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며느리인 나에게 자주 들려주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십여 년 전부터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들어가실 가묘를 만들어 놓으시고 가묘 둘레에 무궁화나무를 또 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일편단심’이라는 무궁화의 꽃말처럼 당신은 조국과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일편단심으로 무궁화나무를 심고 사랑하며 가꾸셨다. 한식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멀리 파주에까지 가셔서 새로운 품종의 무궁화나무 묘목을 사러 가시곤 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하루는 생전에 무궁화나무에 남달리 애착을 보이신 아버지에게 남편이 “아버지! 왜 무궁화나무를 그렇게 많이 심으세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래, 무궁화 꽃이 좋아서 많이 심는 거란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의 꽃이기에 좋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많은 꽃들이 화무십일홍(花㒇十日紅)이지만 무궁화꽃은 백여 일 이상 계속해서 피고 지는 꽃이라 오래 볼 수 있어 좋단다. 세 번째는, 순수한 꽃의 자태와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혹독한 핍박을 받은 꽃인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니? 이렇게 ‘민중의 꽃’으로 지금까지 사랑 받고 있어 나는 무궁화 꽃이 너무 좋구나.”라고 하셨다.
한 달 전의 일이다. 남편은 선산에 다녀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아버지가 무궁화 묘목을 심었을 때 나는 그 뜻을 몰랐어…….”
말끝을 흐리더니 나에게 무궁화 꽃에 대한 추억을 말해준다.
지금은 개발로 포천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당시 집둘레에도 시아버지는 많은 무궁화나무를 심으셨다. 그래서 남편은 어릴 때부터 한 여름이면 흐드러지게 핀 무궁화꽃의 고운 자태를 보며 무궁화꽃 안에 날아든 벌도 잡고 냄새도 맡으며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며 뒤를 돌아봐 움직이는 사람을 찾는 놀이를 하고 나면 흠뻑 젖은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풀냄새도 나면서 달착지근한 맛을 내는 무궁화 꽃몽우리를 따서 빨아먹곤 했다고 말한다.
“아니 여보! 무궁화 꽃을 어떻게 먹어요? 나는 진달래꽃을 먹어보긴 했는데 무궁화 꽃을 먹는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요.”
“응, 달착지근한 맛이 먹을 만 했어.”
“네에…….”
“그 시절에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거든. 지금처럼 먹을 것이 흔하지는 않았지. 정말 배고픔을 달래주던 추억의 꽃이야, 그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강산에 우리 나라꽃…….”
하더니 잠시 눈시울을 붉힌다.
“여보!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라 가사가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어.”라면서 눈가를 훔치더니 계면쩍은지 또다시 속엣말로 흥얼거린다.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강산에 우리 나라꽃…….”
무궁화는 우리 겨레의 꽃이다. 구한말부터 태극기와 함께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꽃이다. 일제강점기시대에는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노력에도 견뎌온 꽃, 또 다른 무궁화의 꽃말처럼 ‘영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시아버지는 시할아버지도 아무 죄 없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셨던 시할아버지의 아픔을 꽃으로 승화하고 싶으셨나 보다. 당신이 떠나고 나도 자손들이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게 100여 평의 둘레에 무궁화나무를 가득 심어놓으셨나 보다.
며칠 전인 2013년 8월 12일, 나는 조간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울시민 200명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서울시민 62%가 무궁화 꽃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궁화 꽃이 정작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대학생은 무궁화 꽃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는 봤지만 실제로는 거의 본적이 없다.’라는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서울에서 무궁화꽃을 본 기억이 없다. 시아버지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이 없었다면 지금 무궁화 꽃을 쉽게 볼 수 있었을까? 지금은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대신해서 남편이 해마다 가지를 쳐주고 농약도 뿌려주며 애틋하게 돌보고 있다. 너무 크게 자라 손이 닿지 않는다. 아마 하늘나라에 계신 두 어른께서도 자손들이 무궁화나무 보고 좋아하는 걸 바라보며 웃고 계실 게다. 시할아버지, 시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당신들은 진정한 애국자(愛國者)라며 가슴에 ‘무궁화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다. 지금은 자손들의 가슴으로 이어져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당신들의 얼굴인 듯하다.
나라의 꽃이라 칭해왔지만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꽃이다. 넝쿨장미나 벚꽃처럼 모든 국민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끔 심고 관리해야 한다. 무궁화꽃과의 추억이 많이 생길 수 있게 학교 화단과 관공서의 화단, 아파트 화단, 공원의 조경수나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하고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움직이다 억지로 멈춘 동작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이 그립다.
첫댓글 선생님의 무궁화꽃 사랑속에 묻혀 봅니다. 환절기 건강 챙기시구요.....
찾아주심에 감사드려요
맞아요...소중한 무궁화꽃을 잊고사는 날이 더 많네요. 저도 반성해야 할 듯요.
그래요 우리의 꽃 많이 사랑해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