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랏한지마을
대청댐을 끼고 굽이굽이
언덕을 넘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오지마을
왜구를 피해 금강 뱃길을 거슬러 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정착한 벌랏마을이 있다
샘봉산 기슭에서 키운 닥나무를
껍질이 무르도록 가마솥에 삶은 다음
벗기고 말리고 두드리고 다시 삶으며 한지가 태어났다
벌랏나루를 통해 대전까지 팔려 간 한지는
사람들의 밥이 되어 주었다
금속활자 발상지인 청주의 인쇄업 발달에
한지는 큰 몫을 했다
문에 바르면 창호지
족보. 불경. 고서의 영인(影印)에 쓰이면 복사지
사군자나 화조(花⿃)를 치면 화선지
연화장 청첩장으로 쓰이면 태지(苔紙)라고 불렸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마을 전답이 수몰되고
벌랏 나루터를 통한 금강 뱃길이 막혀
사람들 왕래마저 끊기자 많은 주민이 고향을 떠났다
한때는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한지 체험객들이 붐볐으나
코로나 영향으로 방문이 끊긴 다음
시간이 멈춘 듯한 한지 마을에는
지붕이 내려앉은 집들이 보이고
체험장인 ‛벌랏한지마당‚의 출입은 거미줄이 막고 있다
돌아오는 길
환청인 양 한지마당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있다
이오동 세 번째 시집 갈대 습지 중에서
벌랏한지마을 ― 사라져가는 종이의 고향
벌랏마을은 닥나무에서 한지를 길어 올리던 마을이다.
껍질을 삶고, 두드리고, 말리고, 다시 삶아낸 끝에 태어난 종이는 사람들의 밥이 되었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청주의 인쇄술 발전에도 큰 몫을 했으며, 창호지·족보·불경·화선지로 다양하게 쓰였다.
그러나 대청댐 건설로 전답이 수몰되면서 마을은 쇠락했다.
한때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돼 체험객이 붐볐으나, 코로나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마을은 고요한 폐허가 되었다. 지붕은 내려앉고, 출입구에는 거미줄이 걸렸다. 그러나 시인은 귀환의 환청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종이는 사라져도, 기억은 여전히 마을을 지탱한다. “종이는 닳아도 기억은 닳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남는다
벌랏한지마을은 종이의 고향이자, 사라진 문화의 애잔한 증언이다.
첫댓글 마을 전경이 아른거립니다
한 번 가보셔요 생각들이 많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