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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계몽철학자, 리쩌허우
들어가며
인류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10년간의 대동란’이었던 문화대혁명을 마감하고 현대중국에서 이른바 新시기가 도래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그 당시 정치 무대에 덩샤오핑이 오뚜기처럼 세 번의 실각을 딛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화려하게 등장했다면, 사상계에서는 리쩌허우李澤厚(1930∼ )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제2의 5·4 新문화운동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80년대는 그 동안의 사상적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다양한 서구문화의 수입과 소개, 그리고 전통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점철된 문화 붐의 시기였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지만 당시 공산당이나 국가 기관의 갖가지 사상적 통제가 엄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부흥론이나 철저재건론 등 전통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갖가지 중서문화 비교가 시도되었다. 그 와중에서 리쩌허우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일찍이 50년대 말기 20대 후반의 나이에 미학美學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혁명’의 시기를 외로운 사색으로 통과한 그는 《비판철학의 비판》(1979)과 《美의 역정》(1981), 그리고 《중국근대사상사론》(1979), 《중국고대사상사론》(1985), 《중국현대사상사론》(1987)과 같은 사상사와 미학사상, 그리고 철학에 걸친 일련의 저작을 내놓으면서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개혁·개방’하였다.
그는 80년대 중국사상계의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유려하면서도 솔직한 문체로 문화-심리구조나 침적1) 또는 실용이성實用理性과 같은 참신한 용어를 구사하면서 중국 전통문화를 해석하는 한편 서체중용西體中用과 같은 대담한 주장을 던져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학설이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이른바 철학사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사이고, 중국의 역사는 농민과 지주의 투쟁사이며 문학사는 리얼리즘과 非리얼리즘의 투쟁사라는 과거의 창백한 방법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적 방법이나 개념을 구사하면서 매우 유려한 필치로 사상사에 대해 참신한 해석을 내리는 동시에 현실에 대해서 매우 도전적인 문제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외 언론은 그를 중국사상계의 제일인자라거나 팡리즈方勵之, 진 타오金觀濤, 원위앤카이溫元凱와 함께 중국사상계의 사대금강四大金剛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 전후로 중국 내에서 자유주의적 지식인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처럼 그를 천안문 사건의 정신적 지주라고 부르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고별혁명》이라는 책을 보면 그는 당시 학생 지도부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92년에 출국하여 십여 년에 달하는 해외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의 콜로라도 대학 등에서 미학과 중국사상사, 그리고 《논어》의 강의와 연구로 보내다가 최근에 귀국하였다. 1996년 5월 아시아·아프리카 철학자대회 겸 한국철학회 춘계발표회 참석차 우리나라를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같은 시기에 방문한 하버마스에 가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독하고 불우했던 젊은 시절
리쩌허우는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서 우체국 고급직원이었던 아버지와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활은 비교적 윤택하였으나 그의 나이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집마저 화재로 소실되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성적은 우수해서 호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남성립일중湖南省立一中에 합격하였지만 돈이 없어 다니지 못하고, 학비 및 식비까지 보조하는 성립제일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 역시 명문이었다.
이 시절 그는 특히 자신과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쉰魯迅과 모성애로 가득 찬 빙신氷心의 작품을 아주 즐겨 읽었다. 특히 루쉰을 통해 냉정하고도 비판적이며 분노하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보수적 학풍에 만족하지 못하여 일요일이면 시내 서점에 가서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과정에서 주동적으로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마오쩌둥의 문건을 전달하는 작은 혁명 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여 공산당에 가입할 기회가 있었으나 모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결국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그의 형제를 어렵게 키우던 홀어머니마저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어머니는 그가 평생 가장 사랑하고 숭앙하는 인물이었는데 항상 밭가는 일에 힘쓰고 수확에 연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新중국 성립 전에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잠시 하다가 1950년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생활이 아주 곤란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어두운 숙소에서 주로 혼자 독서하고 글을 쓰면서 보냈다고 한다. 이 당시 런지위任繼愈의 근대사상사 강의를 듣게 된 것을 계기로 캉여우웨이康有爲와 탄스통譚嗣同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북경대학에는 중국철학사로 유명한 펑여우란馮友蘭이 있었으나 강의가 허용되지 않았다. 졸업 후 이런저런 사정과 폐병 때문에 대학에 남지 못하고 막 성립된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배치되어 《철학연구》의 창간 작업을 담당하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저명한 문학잡지에 중국고대 서정시의 인민성 문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강유위 담사동 사상연구》(1958)라는 책을 출판하는 등 문학, 사상사, 철학(미학)의 분야에 걸쳐 영향력 있는 글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는다. 모두 그의 나이 30세 이전의 일이었다.
주체성 실천철학과 침적설
특히 〈미감, 미 그리고 예술을 논함〉이라는 논문은 그의 이름을 드날리게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특이하게도 50년대와 80년대에 미학 붐(美學熱)이라고 할 정도로 미학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미학이 다른 학문 분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와의 연관성이 비교적 멀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1956년 당시 미학 관련 大토론이 벌어졌을 때, 미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주쾅치엔朱光潛의 자본계급의 미학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 분위기상 주쾅치엔의 이론은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에 리쩌허우가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차이이蔡儀의 유물주의 미학를 극복해야만 했다.
차이이는 인식론의 입장에서 미학 문제에 접근했는데 그에 따르면 美란 객관사물의 객관 속성(즉 전형성)이었으며 미감은 우리의 의식이 이러한 전형성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와 미감 중에 어느 것이 일차적이고 어느 것이 이차적인 것이냐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의식이 얼마나 정확하게 객관 속성을 반영하느냐의 각도에서 심미활동을 분석하게 되어 인간의 지위와 기능이 마음의 지위와 기능의 문제로 대치되어 버린다. 그 결과 심미활동 중에 인간의 능동적 지위를 강조하게 되면 주관주의로 흐르는 폐단이 있게 되고, 주관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면 항상 기계적 반영론의 함정으로 빠져버리는 병폐를 낳게 된다.
그런데 리쩌허우가 생각하기에 개체로서의 인간이 심미적 각도에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類로서의 인간(인간 전체)의 실천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켜 본래 인간과 대립적이었던 자연을 어느 정도 이른바 ‘인간화된 자연’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주체와 객체의 교량으로서 실천이라는 범주를 美의 본질에 관한 사고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커다란 공헌이었다. 그에 따르면 미의 본질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미의 역사적 생성 과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따라서 미와 관련된 인간의 지위는 단순히 감상자나 인식자라는 피동적인 지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는 실천자로 승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70년대 중반 이후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통해 ‘주체성 실천철학’으로 발전한다. 이는 과거 자신이 중시한 실천이라는 범주에 내포되어 있던 주체성의 의미를 돌출시킨 것이다. ‘주체성’ 개념은 두 가지 이중적 내용과 함의를 포괄하고 있는데, 첫 번째 이중적 의미는 외재적인 의미, 즉 공예工藝-사회의 구조의 측면(여기서 공예는 생산기술을 말한다. 나중에는 이를 工具本體라고 명명하였다)과 내재적인 의미 즉 문화-심리의 구조의 측면(나중에 이를 情感本體라고 하였다)을 함축하고 있고, 두 번째 이중적 의미는 인류 전체(大我)와 개인(小我)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서 전체 인류의 공예-사회구조의 측면(즉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구성하는 사회의 물질적 기초의 측면)이 결정적 작용을 한다고 보지만 그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문화-심리구조2)의 측면이다. 그는 개체의 각도에서 주체성의 주관적 측면인 문화-심리구조를 주체성 철학의 주제로 삼아 지성, 정감, 의지를 포괄하는 인간 본성의 구체적 양태를 매우 강조한다. 이러한 주체성 관념의 의의는 심미 활동에 내재된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명확히 한 점에 있으며, 중국미학이 오랫동안 철학과 문예 사회학의 울타리에 머물고 있던 국면을 타개하여 인류학, 문화학, 역사학, 심층심리학과 같은 학과로 개방시킨 점에 있다.
그리하여 인간 본성이란 더 이상 단순히 사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이 서로 삼투하고 자연성과 사회성이 융합된 것임을 밝혀 극좌사조에 포박된 인성을 구출해낸 것이다. 이렇듯 진취적 정신과 무한한 개방성을 갖춘 주체성 개념은 당시 개혁 개방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급속히 유행하게 된다. 한편 주체성 관념의 돌출에 따라 실천에 대한 해석도 변화한다. 과거 50년대의 실천 개념이 자연과 인간 자신을 개조하는 물질적 역량으로서의 거대한 가능성에 착안한 것이라면 이제 그는 실천이 체현하고 있는 자유로운 선택과 우연성이라는 개체적 측면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의 총체적인 주체적 실천은 어떻게 구체적인 사회 구성원의 내재적 문화-심리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바로 누적되고 침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침적설’은 이렇게 해서 제출된 것이다. 이는 이성적인 것, 사회적인 것, 그리고 역사적인 것이 어떻게 감성, 개체, 그리고 심리 속에 표현되는지에 대해 연구하다가 창안한 개념으로 이를 통해 사회적, 이성적, 역사적인 것은 일종의 개체적, 감성적, 직관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침적설은 개인의 지위와 작용을 충분히 긍정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체성 실천철학은 감성과 이성, 개체와 군체, 자연과 필연 등이 이율배반의 상태로 남아 있던 칸트철학을 역사유물론적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의 각도에서 칸트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유명한 《美의 역정》(1981)은 침적설을 중국 미학사상에 적용한 간략한 중국미학사상사라고 할 수 있는데, 원시시대부터 명·청 시대까지 각 시기별 고전 문예(조각, 회화, 문학, 서예 등)의 핵심적 특징을 중심으로 박물관의 시대별 코너를 순례하듯 경쾌하게 서술한 책이다.5·4 운동에서 비롯되어 문화혁명 때 정점에 달했던 反전통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보통의 중국인들에게 전통은 부정의 대상이거나 텅 빈 황무지와 같이 받아들여졌는데, 그의 붓끝에서 전통은 이제 경탄과 찬미의 대상으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50년대이래 끝도 없이 계속된 미학의 기본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겨울 끝자락에 봄을 알리는 한 송이 매화였다.
일반적 미학 관련 책이 이론을 앞세워 문예창작물의 생동감을 죽여 버린다든지, 문학 따로 예술 따로의 서술방식을 취하는 것에 반해 이 책은 중국문화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종합적 심미감을 안겨준다. 한 젊은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당시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단숨에 그의 숭배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인 펑여우란은 ‘죽은 역사를 살려낸’ 大저작이라고 극찬해마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미학과 미술사이며 동시에 중국문학사이고 중국철학사이자 중국문화사라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진나라 이전인 선진시기의 이성주의만을 다루고 송명이학宋明理學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사상사 3부작을 통한 계몽
그는 사상사 방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사상사 3부작이 바로 그것이다. 제일 먼저 쓰여진 《중국근대사상사론》(1979)은 50년대에 수행했던 탄스통, 캉여우웨이에 대한 연구를 근대사 전반으로 확대하여 완성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캉여우웨이를 필두로 하는 청나라 말기 개량파의 변법유신變法維新 사상은 혁명에 반대했기 때문에 점차 반동화되어 갔다는 당시 대륙학계의 정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혁명만이 중국의 정치, 사회, 역사의 진보의 동력이라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십 년 동안 비판받아왔던 왕궈웨이王國維, 량치차오梁啓超를 조심스럽게 최초로 긍정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또한 옌푸嚴復를 다루면서 주제와 별 상관 없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데 그쳐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옌푸의 이해는 개량派의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깊었다. 그는 자본계급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유경쟁, 그리고 개인이 사회의 단위라는 것 등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을 정치와 경제 및 이른바 적자생존의 생존경쟁의 각도에서 논증하였다. 아울러 민주정치도 자유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하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영국派의 자유주의 정치사상인데 평등을 강조하는 프랑스派의 민주주의 정치사상과 다르다. 중국에서 전자는 개량파가 주장하는 것이고 후자는 혁명派가 신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무역을 기치로 삼는 영국의 자본주의는 수백 년 동안 다른 자본주의 국가(예를 들면 프랑스)보다 더욱 안정되고 공고하며 적응성이 강한 정치체제와 제도를 확실히 건립하였다. 그 우월성에 대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할 만한 과제이다. 옌푸의 당시의 안목은 예리했다.3)
여기서 이미 그가 90년대 이후 제기한 고별혁명론, 즉 중국은 이제 혁명이 아니라 개량의 길을 가야 한다는 주장의 단초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고대사상사론》(1985)은 《美의 역정》을 저술하면서 구상한 침적설을 고대사상사에 적용하여 중국인의 전체적 주체성으로서의 독특한 문화-심리구조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탐색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공자재평가〉(1980년에 발표)는 국내외적으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글이다. 그에 따르면 孔子의 인학구조仁學構造, 즉 공자를 비롯한 선진 유가儒家의 仁에 관한 사상은 혈연기초血緣基礎, 심리원칙心理原則, 인도주의人道主義, 개체인격個體人格이라는 네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적 구조 혹은 시스템이다.
여기서 혈연기초는 공자가 수호하려고 했던 주례周禮가 혈연을 기초로 하여 등급질서를 체계화한 주周나라의 씨족 통치질서였음을 말한다. 심리원칙은 통치질서와 사회규범으로서의 禮를 공자가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의 자연적 정감이나 심리의 내재적 요구에 기초해서 확립하려고 했음을, 인도주의는 원시씨족체제가 구비하고 있었던 민주성과 휴머니즘을, 개체인격은 인학사상에 내재한 개체인격의 능동성과 독립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심리원칙을 가장 강조하고 있지만 어쨌든 공자의 인학사상은 이러한 네 가지 요소가 상호 제약하면서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게 되면서 ‘실용이성’4)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구조의 원형이면서 중국 문화사에서 일찍이 해체된 적이 없으며 거대한 융합 기능을 하는 자족체이다. 다시 말하면 공자의 인에 관한 사상은 사상이나 습속, 사고, 생활양식에 역사적으로 침적되어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구조라는 하나의 문화 패턴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이 인생과 생활에 대해 긍정적 자세를 견지하고, 사변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며, 귀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사를 중시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정욕의 만족과 평형을 유지하며 반이성적인 것에 광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를 보수 반동적 인물로 매도하던 문혁이 종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공자를 ‘중국 문화의 대명사’라고 재평가한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이런 ‘보수적’ 접근은 자신의 주체성 철학과 근대사상사론에서 계몽을 주장하던 태도에서 미묘하게 후퇴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젊은 학자들로부터 전통을 고수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현대사상사론》(1987)에서 그는 다시 계몽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이 가장 잘 드러난 글이 〈계몽과 구망救亡의 이중변주〉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혁명과 문학혁명을 구호로 내걸었던 新문화운동은 실질적으로 탄스통, 옌푸嚴復, 량치차오의 계몽운동의 연속이었으며, 고유한 전통과 철저히 결별하고 서양문화를 전반적으로 수입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몽적인 신문화운동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운동과 합류하게 되자 처음에는 서로를 보충하고 생성하는 관계였다가 점차 정치 구망(망해가는 나라를 구한다)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주의적 주제가 사상 계몽의 개인주의적 주제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적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유물론(그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고 파악한다)에서 벗어나 도덕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 것이나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문혁이 출현하게 된 것은 모두 이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중국현대사에서 굴절되고 좌절된 계몽이 다시금 철저하게 요청된다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서체중용西體中用을 주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루쉰 옹호파인 그는 루쉰의 사상을 ‘계몽을 제창하고 계몽을 초월한다’로 개괄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계몽을 제창하는 데 머물지 않고 초월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일군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중국 자유주의의 비조鼻祖로 높이 재평가받고 있는 후스胡適가 일찍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바로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리쩌허우는 ‘구제할 수 없는 낙관주의자’라고 자칭했던 후스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루쉰魯迅만이 이러한 강한 고독을 엿보고 탐구하고 드러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5)
이와 연관하여 그는 80년대 말부터 점차 정감본체情感本體(정감이 일체의 근원이고 최후의 실재다)를 중시하기 시작한다. 이 개념은 과거에 사용하던 문화-심리구조라는 용어가 비록 개인의 감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공예-사회구조(도구본체)의 직접적 확장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보완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현대화된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개체의 정신적 생존의 측면이 중요해진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먹어야 살지만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정 때문에 산다는 것이다. 정은 성性(도덕)과 욕欲(본능)이 사람마다 다양하게 배합된 것으로 결코 체계화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바로 거기에 삶의 참 의미와 존재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송명이학이나 현대신유가現代新儒家가 강조한 理나 성은 모두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지식과 도덕의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두 개의 세계(지상과 천상)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정신에도 부합한다. 매우 중국적이면서도 서양의 실존주의 특히 하이데거 사상의 영향이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중반에 자신의 철학의 뼈대를 정리한 《철학탐색록哲學探尋錄》(《世紀新夢》에 재수록됨)에 잘 드러나 있다.
전통으로의 복귀?
90년대 초 그가 대륙을 떠난 후 중국사상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활발히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던 많은 학자들은 상아탑으로 돌아가 학술적인 작업에 매진한다. 그 동안 그다지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왕궈웨이王國維나 천인취에陳寅恪 같은 학자형의 인물들에 관한 연구들이 대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국학열國學熱이다. 또한 시장경제의 확산에 따른 지식인의 절망감을 토로한 인문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계몽적 지식인들의 분화의 계기가 된 新좌파와 자유주의 논쟁도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사상가가 점차 사라지고 학문가들이 도드라지는” 시대였다. 리쩌허우는 그 사이 《논어금독論語今讀》(1998), 《기묘오설己卯五說》(1999), 《역사본체론歷史本體論》(2002)을 내놓는다. 그는 중국의 문화-심리구조의 형성에 《논어》가 미친 중대한 영향에 주목한다. 《기묘오설》에서는 모우종싼牟宗三과 두유명杜維明 등의 유학 3기설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유학 4기설을 제창한다. 그리고 중국전통문화의 원류를 탐색한 무사전통巫史傳統설6)을 새롭게 제기하기도 한다.
이른바 유학 3기설에서는 유학사상의 발전 과정을 공맹유학을 1기, 송명리학을 2기, 모우종싼을 핵심으로 하는 현대신유가를 3기로 설정하는데, 리쩌허우가 보기에 이는 유학을 심성-도덕 이론의 측면에서 일면적으로 개괄한 것이다. 그는 공맹순孔孟荀 철학을 1기, 경세론經世論을 강조한 한대漢代의 유학을 2기, 송명이학을 3기로 설정하고, 마지막 4기는 앞 시기의 성과를 이어받으면서도 이와는 다른 특색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현대신유학은 송명이학에 대한 현대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제외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철학을 암시하는 유학 4기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역사본체론》이다.
그는 역사본체론의 첫 번째 범주로 도度(적당한 정도)를 설정하고 있는데 도구를 적절히 사용하고 제조할 줄 아는 물질적 실천이 인류 생존에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도구본체工具本體라고 부르는데 심리본체心理本體와 함께 역사본체론의 두 본체를 이룬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도는 점차 구조화되고 형식화되는데, 이것이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선험적으로 보편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적 실천이 역사적으로 누적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역사가 이성을 건립했다는 것이다(歷史建理性). 그런데 도는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이성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포괄적이며 과학과 예술 창조의 원천이기도 하다.
도를 역사본체론의 제일범주로 설정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가장 근원적인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고 삶에 있어 경제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혁명적 철학을 ‘조반유리造反有理’(통치자나 통치질서에 반항하고 반발하는 것은 이치가 있다)라는 말로 아주 생동감 있게 개괄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런 유물사관을 아주 중국의 통속적 어법을 사용해서 ‘밥먹는 철학(吃飯哲學)’이라고 명명한다. 그가 인간은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것은 중국전통사상에 대한 반성이며 생산력의 발전보다 계급투쟁에 몰두했던 중국적 특색의 현대화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언어를 근본으로 보았던 서양의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역사는 텍스트에 불과하다고 보아 역사의 객관적 법칙성을 무시하는 新역사주의적 조류를 겨냥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역사적 유물주의의 신봉자이다. 허나 역사의 두 가지 의미, 어떤 사물이 특정한 시공과 환경의 산물이라는 역사의 상대성과 독립성의 의미와 역사란 인류의 실천경험이나 의식 혹은 사유의 부단한 계승이라는 역사의 절대성, 혹은 누적성의 의미 중에 후자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자를 강조한 마르크스와 일정한 차별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중국전통의 실용이성을 강조하는데 실용이성은 본래 현실생활의 도구로서 이성을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실체보다는 과정이나 기능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실용이성은 역사적으로 누적되고 침전되었다는 점에서 선험이성이 아니며 그렇다고 反이성도 아니고 비이성적 생활 속의 실용적 합리성이다. 선험적 이성의 눈이 아니라 역사적 인간을 통해 이성과 反이성의 실용성을 검토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때 실용이성은 리쩌허우가 이성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합리성을 수용하면서 反이성에 맞서 이성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성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와 연관된다. 리쩌허우는 도덕은 이성의 응취凝聚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복이나 현실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이성이 개인의 사적 욕망이나 이익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이나 신의 뜻을 강조하는 절대주의 윤리학을 리쩌허우는 종교성적宗敎性的 도덕道德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이를 준수하면서 세속적 쾌락과 다른 존엄이나 숭고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적 욕망이나 행복을 압도하는 도덕적 절대명령이나 이른바 천리天理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이에 대해 리쩌허우는 禮는 습속에서 기원한다고 답한다. 종교적 도덕은 일종의 사회적 도덕이라는 것이다. 이를 경험이 변하여 선험이 되었다고 말한다(經驗變先驗). 禮란 일정한 시공간적 환경의 제약 속에 놓인 일정한 집단이 자신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공동으로 지켜야 할 행동방식이지만, 즉 사회적 도덕이었지만 성인이 예를 제정하였기 때문에 보통사람은 이를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초사회적인 현상으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도덕은 종교적 도덕의 신분이나 이름으로 등장한다. 특히 입세入世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가사상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중국에서는 종교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은 줄곧 구분되지 못하고 혼용되어 왔다. 비록 이러한 유교적인 예교를 벗어나려고 했던 도교나 불교가 존재했지만 이들 사상은 모두 정치와 거리를 두고 세속생활을 피했기 때문에 유학과 다른 자기 나름의 도덕적 체계를 진정으로 구축하지는 못했다. 20세기초에 중국의 지식인들이나 일반 민중이 마르크시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중국의 전통 유학과 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 인생을 중시하는 전통적 유학사상처럼 마르크시즘은 중국인들에게 신앙과 정감과 이성과 혼용된 다시 말하면 종교, 정치, 윤리 세 요소가 합일된 인생관과 우주론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정치종교’로서의 중국적 마르크시즘은 불교나 노장철학으로의 출입이 자유로웠던 유학보다 구속력이 훨씬 강했다. 리쩌허우는 종교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하고 현대사회의 사회적 도덕은 개인을 단위로 한 사회계약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부인권을 가진 원자적 개인을 설정하고 이러한 개인이 계약을 통해 사회를 이루었다는 자유주의적 사회사상은 사실 비역사적 가설에 불과하다. 중국사회의 예를 들어봐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없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자유로운 정치적 참여를 주장하지만 오히려 정치적 무관심이 점차 커지고, 언론의 자유를 제창하지만 실제로는 거대 언론의 지배를 받게 되어 부자유에 빠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점차 정신적으로 공허해지고, 인간관계는 점차 메마르게 되어 버린다. 新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 곳곳에서 문화적 종교적 충돌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공동체주의에서는 사회와 분리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집단적 가치가 우선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리쩌허우는 공동체주의 이론이 일정한 합리성이 있고 비역사적 자유주의가 결코 이상이 될 수 없지만 중국의 역사와 현실에서 기초해서 보면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보다 합리성이 크다고 파악한다. 왜냐하면 중국적 현실에서 공동체주의 논리는 개인을 말살하고 과거로의 회귀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던 상태에서 전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단계로 역사가 발전해 왔다면 전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자유주의는 비역사적이고 개인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공동체주의는 반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구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앙 혹은 정감과 관계 있는 종교적 도덕과 이성적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사회의 사회적 도덕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리쩌허우는 이를 위한 방안으로 리우샤오펑劉小楓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자본주의)적 윤리의 원천으로서 기독교의 원죄 관념을 수입해야한다든지, 혹은 장하오張灝처럼 중국전통 속에서 유암의식幽暗意識(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경각의식)을 찾는다든지, 아니면 민본사상에서 민주주의를 발굴해내려는 시도는 불필요하다고 본다. 차라리 양자의 모순과 충돌을 중시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협조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리쩌허우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향토자연에 대한 감정 등(즉 天地國親師)이 풍부한 중국전통사상을 윤리의 기초로 삼아 잘 승화시킨다면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개인 중심의 현대적 사회적 도덕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기대한다.
중국의 전통 사상은 또한 심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쓰임새가 있다. 산다는 것은 역사의 진전에 따라 점차 심리적 사실이 되어간다. 리쩌허우는 이를 심리가 본체가 된다(心理成本體)라고 말한다. 그의 도구본체가 마르크스주의를 이어받은 것이었다면 이러한 심리본체는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계발된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 시간의 재로 남은 희, 노, 애, 락의 감정들! 이외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라고 고통스럽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종교의 품이나 텅 빈 심연과 같은 하이데거의 존재로 돌아가야 하는가. 리쩌허우는 여기서 중국전통으로 복귀한다. 심리본체는 바로 유학적 전통으로 하이데거가 던진 문제를 소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찍이 주희朱熹가 불교철학이 生과 死라는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生死事大) 인생의 풍부성과 구체성을 몰랐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학적 체계의 구축을 통해 불교를 소화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한 사상사적 과제라고 할 만하다. 리쩌허우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중국문화에서 범인도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생활이 곧 예술이라고 보고 삶의 자잘한 정과 그 즐거움에 주목했던 전통을 낙감문화樂感文化라고 개괄한다. 그리고 삶의 흔적으로 남은 정감과 심리가 바로 진실이라고 역설한다.
근자에 발굴된 곽점 문헌 속의 “도는 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道由情生)”는 구절은 우리가 일찍이 놓쳐버렸던 중국고대사상의 감추어진 면모를 드러내주고 있다. 팡푸龐朴에 의해 유정주의唯情主義라고 명명된 이러한 고대 사상의 정情의 중시는 리쩌허우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에 의해 새롭게 포착된 유학은 지상의 세계를 초월한 천상의 세계를 설정하지 않은 현실의 종교이며, 도자기를 빚어내듯 정감을 소조陶情하는 가운데 자아를 예술품으로 만들라는 심미적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나오는 말
개혁·개방 이후 모든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낙후된 중국의 현대화는 그들 연구의 출발점이고 전제였다. 리쩌허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채택한 지 이미 20여 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도도한 세계화의 흐름에 그 거대한 몸을 맡겼으며 이에 따라 계급정당이었던 공산당은 국민정당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루쉰의 사상에 대해 “계몽을 제창하고 계몽을 초월한다”는 말로 개괄한 적이 있지만 이는 바로 자신의 사상적 모색의 핵심적 과제이기도 하다. 계몽이 이성의 보편성, 동일성, 필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이를 초월한다는 것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감성의 구체성, 다양성, 우연성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서구의 현대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동시에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중국의 전통사상을 새롭게 발굴하고 해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계몽의 제창과 계몽의 초월의 과제를 도구본체와 심리본체를 강조하면서 달성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중국의 사상계를 비판적으로 일별한다면 다양화와 전문화의 화려함 뒤에 가리워진 마르크스주의의 교조화, 중국사상의 골동화, 서양사상의 모방화라는 곤경과 마주하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리쩌허우가 걸어온 사상적 역정은 단연 돋보인다. 한편에서는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다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을 고수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사수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긍정 부정의 평가를 떠나 그가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의 교과서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았고 현실적 문제의식과 연결시켜 전통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였으며, 서양사상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자기 철학의 독립성을 관철시켜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량을 해야지 혁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혁명으로 점철된 중국의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반성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고(《告別革命》, 1995), 新좌파와 자유주의 논쟁에 대해 양자 모두에 비판적 태도를 표시하는 등 자신의 역사 철학적 문제의식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물론 심도 있는 천착보다 경쾌하고도 솔직한 필치에 의한 문제제기에 그치고 있기는 하다.(《己卯五說》, 1999) 최근에는 자신의 철학을 “역사가 이성을 건립하였고, 경험이 선험으로 변하였으며, 심리心理가 본체로 변화한다”는 세 명제로 개괄하고 있는데(《歷史本體論》, 2002) 이성(인류, 역사, 필연)에서 출발해서 감정(개인, 우연, 심리)으로 귀결된 그의 철학은, 크게 보면 덩샤오핑의 시대를 상당부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처럼 보인다.
덩샤오핑의 구상이 대체적으로 현실화된 이때 리쩌허우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낙관적 철학의 운명은 다소 비관적이다. 그가 유학 4기를 주장하면서 자주 중국의 실용이성이나 낙감문화, 또는 정감본체를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주체성 철학의 후퇴라거나 죄의식이나 참회가 결여된 낙후된 전통으로의 회귀가 아닌가 하는 일각의 비판도 있지만 중국사상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현대성을 따라잡고 또 뛰어넘으려는 그의 철학적 여정은 미래 중국철학의 새로운 탐색에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며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다.
산 끊기고 물 다하여 길 없는 줄 했더니(山窮水盡疑無路),
버들가지 그윽하고 꽃 밝은 또 한 마을 나오네(柳暗花明又一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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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내용>
1) 인간 주체성의 역사적 생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가 누적과 침전을 결합해 만든 용어로 중국어로는 積澱이다. 《미의 역정》과 《중국고대사상사론》은 침적설을 구체화한 저작이다.
2) 문화-심리구조(文化-心理結構)란 심리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문화의 작용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그러나 인간은 諸 사회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감성적 개체로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작용을 접수하면서 능동성을 갖는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structure가 아니라 forma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
3) 리쩌허우, 《중국근대사상사론》(인민출판사, 1979), 281쪽
4) 樂感文化, 하나의 세계(一 世界)와 함께 그가 중국의 전통사상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하는 중요한 용어다. 원래 실천이성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칸트의 개념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실용이성이라고 고친 것이다. 실용이성은 유가사상이 강조하는 윤리적 실천이나 행위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사변적 사유도식의 형성과 대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유용성을 진리의 기준을 삼는 듀이의 실용주의와 유사점이 있으나 天道나 天命과 같이 객관적 기준이나 질서를 인정하는 점은 다르다. 리쩌허우, 〈실용이성에 대해 다시 말한다〉, 《나의 길을 가련다(走我自己的路)》, 중국 盲文出版社, 2002년.
5) 리쩌허우, 김형종 역 《중국현대사상의 굴절》, 지식산업사, 1992년, 139쪽.
6) 유학이 종교를 대체한 중국의 정교(政敎) 합일의 비밀이 무술(巫術)이 사(史)를 통해 일찍이 이성화(理性化)되었던 무사(巫史) 전통에서 찾고 있다. 유학이 반철학(半哲學)이나 반종교(半宗敎)에 머문 것이나 중국문화의 특징으로 거론하고 있는 실용이성, 낙감문화, 하나의 세계관은 모두 무(巫)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무는 ① 주로 왕의 정치활동에 복무했기 때문에 세속성과 실용성이 강했고, ② 매우 복잡한 기교적 규범을 가졌으며, ③ 강한 주동성과 예견성을 갖추고 있으며, ④ 이성이나 인지성이 분명한 활동이기는 하지만 정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묘오설》, 중국전영출판사, 3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