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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캬무니 붓다: 초기 성전에 묘사된 역사적 붓다
마성, 대숲바람, 2010, P. 440.
- 마성(摩聖) 이수창(李秀昌, 1957-) 마산 출생, 법호 해불(解佛).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초기불교 인간관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
*이 책은 사캬족의 싯달다가 붓다로서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글로 쓰여서, 노력만 하면 읽고서 붓다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 책을 쓴 스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한 사람의 노력은 중생들의 위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삶을, 새로운 되기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말로 쓸 수 있는 우리글이 있다. 나로서는 다중지성이 성립하는 것은 말과 글을 인민이 모두 함께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세종이 위대하다. 이 말과 글,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인민은 평등과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저력(권능)이 있고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인민은 스스로 아라한으로 붓다로 가는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력하는 이가 드물 뿐이다.
세상의 변화는 우선 한자 세대에서 한글세대의 이전에서 올 것이다. 그 변곡점에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을 번역하여 인민이 누구나 접근하게 해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실록을 번역했다는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기술과학에 의한 행복과 평등의 실현의 길은 막다른 골목에 있는 느낌인데, 생명과 생태를 통한 자유와 지복의 길을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싯달다의 삶의 과정과 그의 깨달음은 이 후자의 길을 제시했고, 수행했으며, 도피안(到彼岸)을 넘어가 열반에 이르렀다고, 이 책을 읽으면 느낄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지만 꼭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1995년 쯤에 벩송과 스피노자의 비슷한 길을 보았고, 그리고 프로이트도 같은 길인가 해서 보았는데, 프로이트와 벩송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프로이트가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 불교와 전례 전승 무당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 제국을 따라 우리 땅에 크리스트교가 팽배한데, 그 종교성의 관점이 상징계에 관련이 있으며, 게다가 라깡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 같다. 불교의 기본은 그런 상징계를 설정하지 않고, 스스로 위상을 찾고, 그 자기 위상을 개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장을 하는 것이리라. 이는 자기의 위치로서 주체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위상 속에 있음(자연 내재 존재)을 깨닫고, 선업(善業) 또는 공감을 통해, 그리고 보시(희사) 또는 아가페를 통해, 실현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 불교라 본다. 위상을 성찰하는 방식이 “념처경”에 잘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자연이라는 위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삶(사는 것이 먼저다)를 싯달다가 깨달으면서, 그 경지에 이른 붓다로 존경받게 된다. 간단히 <태어나고 살고 무너져 가는 것,>, 태어나서 살다가 사라진다. 이 숙명, 자연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당연히 탐진치(貪瞋癡)를 벗어나, 함께 행복(즐거움 도덕)과 자유(공동체의 실현, 종교)를 찾아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53WKE)
* 책을 반이상 읽어가다가 알게 된 주소 *****
http://kr.buddhism.org/%EB%B6%93%EB%8B%A4%EC%9D%98-%EC%83%9D%EC%95%A0%EC%99%80-%EC%82%AC%EC%83%81/
여기에 이 책 초고 원본이 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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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캬무니 붓다: 초기 성전에 묘사된 역사적 붓다, 2010(마성, 대숲바람, P. 440)
§00머리말
불전에 관한 자료는 너무나 많다. 불교 문헌 중에서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문헌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 부른다. .. 오래된 불전만 하더라도 20여종에 이른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산스크릐트어로 씌어진 마하와스쿠(Mahavastu, 大事, 대사),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불교 시인 아쉬바고사( 마명, 馬鳴, Ashvaghoṣa, 80?-150?)가 지은 붓따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불소행찬) 자따까(Jataka, 本生譚 본생담)의 서문에 해당하는 「인연품(因緣品)」등이 있다. 한역으로는 랄리따위스따라를 번역한 보요경(普曜經)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이 현존한다. (6)
한편 불전은 크게 남전(南傳) 북전(北傳) 간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남전에서는 붓다의 생애를 1) 탄생(誕生), 2) 성도(成道), 3)전법(傳法), 4) 입멸(入滅)이라는 네 가지 사건(사대불사 四大佛事)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북전에서는 팔상성도(八相成道)로 표현한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세상에 태어나시다),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괴로움의 실상을 느끼다), 4) 유성출가상(逾城出家相, 성을 넘어 출가하시다),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시다).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마왕을 항복시키다), 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진리를 설하시다),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법신으로 상주하시다) 등 여덟가지로 묘사하다. (7).
이 책에서는 붓다의 생애에 포함되어 있는 신화와 전설적인 요소들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 붓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9)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설법문안에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 2003년 4월호부터 2006년 12월까지 4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책은 그 때 연재했던 글들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11)
2010, 4월 /창원의 팔리문헌연구소에서/ 마성(摩聖) 합장 (12)
*차례 13-19 / 약어표 20-21 / 일러두기 22
§01. 제1장. 붓다시대의 역사적 배경 23
1. 붓다 탄생 이전의 인도 / 1) 인도의 자연 환경 2) 언어의 다양성 3) 힌두 문화의 형성
2. 붓다 시대의 사회적 배경 / 1) 베다 종교의 출현 2) 정치적 과도기 3) 상업 발달과 도시화 / 4) 반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01.1.1)
오히려 그들은 본래 산스크리트어나 힌디어로 된 인도의 호칭인 ‘바라뜨-칸다(Bharat -khanda)’ 또는 ‘바라뜨-와르샤(Bharat-varsa)’라 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바라따 족의 서사시 마하바라따(Mahabharata)(전10세기 설화) 속에서 처음 나타나며, 자이나교 성전(聖典)에서도 사용되었다. (26)
[7000 메르가르(Mehrgarh)[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7000~3200년의 신석기 유적지이며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주의 카치 평원에 있다.
3300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 또는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기원전 약 3300-1700년에 있었으며,
3200-1900 하라파 문명(civilisation harappéenne)[청동기 문화]: 이 시기의 도시들 모헨조다로(Mohenjo-daro), 하라파(Harappa), Dholavira, Ganweriwala, Rakhigarhi)
2600 모헨조다로(Mohenjo-daro)(인더스 강 하류 도시), 하라파(Harappa)(인더스강 중류 도시). - 비아리야계 드라비다인들의 문명이다.
[2650 길가메시Gilgamesh, ou Gilgameš, Bilgamesh) - 바빌론 설화.]
1500 아리야(Arya)인의 인도 침입.
1000경 아리아인들이 동쪽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으로) 침입. 마하바라따(Mahabharata)(전10세기 설화)- 후세 알려진 인도 문화. ]]
§01.2.1)
그들은[도래인] 자신을 아리야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했다. 아이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 등에서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36)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Veda)라는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베다에 의지해 세습적 바라문이 야냐(yanna, 공희供犧)와 같은 종교의식을 집행함으로써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려했다. .. 아라야인은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다. .. 이렇게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은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다. (37)
§01.2.2)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 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했고, 또한 전제 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하고 있던 종족들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했다. (40) [그리스의 데모스제도도 부족들 사이의 공화제인 셈이다?, 신라의 화백제도도 공화제에 가깝다?]
§01.2.3)
붓다 시대에 있었던 사회 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는 데 바땅을 이룬 근본 기조는 촌락사회 기구로부터 도시국가 기구에로 변동이다. (41)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세기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 /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다. (42)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야냐는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다. 현세 이익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의 부수된 동물의 희생을 혐오스럽게 여겼으며, 그 효과도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뿌자(puz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시작되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Siva) 또는 비슈누(Visnu)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 동시에 인간의 지식 발달은 종교적으로도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다. (43)
‘바라문 중국’[중앙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동인도는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가 강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지역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 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어었을 것이다. 이런 사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들은 사마나(samana, 사문, 沙門)라는 출가 유행자 그롭이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했다. 붓다도 그런 사문의 한 사람이었다. (44)
§02. 제2장. 석가국의 실체와 위상 45
1. 붓다의 가계 / 1) 석가족은 어느 종족인가 2)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2. 석가족의 나라 / 1) 석가국의 실체 2)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3)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02.1.1)
그러나 석가족(Sakya, 釋家族석가족)의 인종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깊이 있게 진해됨에 따라 석가족이 비(非)아리야 계통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47)
[아일랜드계 영국 인도학자] 스미스(Vincent A. Smith, 1843–1920)가 사캬무니 붓다는 몽고 인종이었다는 설을 제기했다. .. 티베트 장례풍습과 사법 절차가 행해졌던 점을 증거로 들어.... .. 그러나 하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48)
그리고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 s.d.)는 초기 경전을 근거로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에서 석가족은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49)
나라 야스아키의 지적에 따르면, “그 후의 불교문화의 발전을 살펴보면, 비바라문적 토착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요가 중시, 사리(유골) 숭배, 스뚜빠(탑) 숭배, 동물숭배, 지모신(地母神) 계통의 야크샤니(Yaksani, 불전의 야차夜叉, 약차(藥叉)의 여성), 그 남성으로 귀령(鬼靈)의 하나인 야크샤 숭배, 나가(Naga, 뱀, 용신龍神) 숭배 등이 그러한 것이다. (51)
§02.1.2)
초기경전인 수따니빠따(Suttanipata)에 사캬무니 붓다가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태생(가문)은 사끼야(Sakiya)입니다...” (52-53)
§02.2.1)
불교는 사캬무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 /.. 그러면서도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 ... 이미 다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Kosala, 憍薩羅교살라) 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는 국가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석가국이라고 부른다. (56-57)
§02.2.2)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왓투였다. (57)
법현(法顯, 337-422) 불국기(佛國記) .. 현장(玄奘, 602?-664)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 1814–1893)까삘라왓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스미스(Vincent Arthur Smith, 1843–1920)의 연구.
까삘라왓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仙人(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왓투(vatthu)’란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이다. ...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은 탓에 어느 것이 꼭 맞는 설명인지 말하기가 무척 어려운 점이 있다. (59-60)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uvaku, 甘蔗王감자왕)라고 한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한다.... (60)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붓다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았다. 붓다의 부왕 이름이 깨끗한 쌀밥을 뜻하는 수도다나라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은 짐작이 간다. (61)
§02.2.3)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한다. (6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군주제와 공화제 두 가지가 있었다. (61) [군주제는 아리아계, 공화제는 비아리아계.]
고따마(Gotama, 喬答摩, 교답마)라는 석가 일가의 가문의 이름도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 (62)
이렇게 고따마 싯닷타는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약화되어 힘을 잃었을 때 태어났다. ... /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 그는 꼬살라국에서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깊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63-64))
§03. 제3장. 붓다의 탄생과 젊은 시절 65
§03.0.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캬무니 붓다(Sakyamuni Buddha)를 가리킬 때,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釋尊(석존)’이라 부른다. .. 중국에서는 석가모니 세존(釋迦牟尼 世尊). .. ‘석가(釋家)’라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붓다가 출생산 종족의 이름이지 붓다를 직접 지칭한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67)
석가모니 세존의 호칭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Buddha)“이다. .. 붓다는 불교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본래는 보통명사이며 자이나교(Jaina)에서도 사용된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뜻이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석가모니불 이전에 여섯 명의 붓다가 존재했다고 설하고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고따마(Gotama, 喬答摩, 교답마)라고 하는 그의 족성(族姓)에 따라 고따마 붓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67-68) [싯닷타는 초기 경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아마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73)]
‘사캬’란 고따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牟尼(모니)]’란 ‘거룩한 분[聖子(성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사캬족 출신의 성자’라를 뜻(68) [사캬족의 현자]
1. 붓다의 탄생 / 1) 탄생에 관한 전설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3) 붓다의 탄생지 4) 탄생 연대
2. 탄생게에 대하여 / 1) 여러 문헌에 나타난 탄생게 2) 불전 문헌에 나타난 탄생게
3. 붓다의 젊은 시절 / 1) 태자의 어린 시절 2) 태자의 교육 3) 태자의 결혼
§03.1.1) 탄생에 관한 전설
도솔천하강설(兜率天 下降說)
도솔천은 보살이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되기 전에 그 준비를 위해 잠시 머문 곳이다. (70)
태자는 선뜻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걸음을 내딛고서 오른 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사자후를 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이다. (71)
비록 정전(正典)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71)
§03.1.2)
숫도다나왕에게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태자를 얻은 것은 아마도 왕의 나이 마흔을 넘기고 나서였던 것 같다. ..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와다하(Devadaha 天臂城, 천비성)로 향했다. 그런데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i) 동산에 이르자 산기를 보여 꽃이 만발한 무우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다. (7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불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달라고 부탁했다. (73)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
§03.1.3)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라고 전해진다. 1896년 퓌러(Alois Anton Führer, 1853–1930)가 발견한 아소까(Asoka, 阿育王, 아육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붓다 석가모니가 탄생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74)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다(hida buddhe jate Sakyamuni)”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마치 “어제 깍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76) .
§03.1.4)
불멸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으로 보는 학설 ...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 (76-77)
첫째는 서력기원전 약 560-480년 설이다. ...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성자들이 불멸후 ‘율장’에다 점을 하나씩 찍어온 기록)에 의하면 486년설(수정485년)... (77)
둘째는 서력기원전 약460-380년 설로서, 아소까(전273-전232, 재위268-)왕의 즉위가 불멸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하면... (77)
§03.2.0 - [게(揭) 추어 올리다: 짧은 문구로 설명을 다하기 위한 말투(parole)이다] [탄생게(誕生偈)는 탄생이 아니라 열반에,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완전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게이다.]
탄생게는 붓다가 태어날 때,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을 땅을 가리키며 설한 사구게(四句偈)를 말한다. ..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탄생게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03.2.1) -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爲尊) 요도중생생로병사(要度衆生 生老病死) ...
... “천상천하유아최승(天上天下唯我最勝)대장엄경 「전법륜품」 (79)
“... 스스로 나고 죽는 근본을 보아 / 이 몸은 마지막 다시 나지 않으리.” (79)
붓다는 처음 깨달음을 이룬 뒤, 다섯 고행자들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웰라(Uruvela, 優樓頻螺, 우루빈나)를 떠나 바라나시(Baranasi, 波羅奈城, 파라나성)의 녹야원으로 가던 도중에 우빠까(Upaka, 優波迦 우파가)라는 아지와까(Ajivaka, 邪命外道) 교도를 만났다. (81)
그러나 탄생게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전반부는 붓다의 위대함과 존귀함이, 후반부는 삼계의 중생들을 모두 편안하게 하겠다는 붓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88)
§03.3.1)
이모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마야부인의 동생] ...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빅쿠니(Bhikkuni, 比丘尼, 비구니)가 되었다. (88-89)
여의족(如意足) [그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03.3.2)
“태자가 취학을 한 것은 일곱 살경부터였을 것이다. ..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을 베다를 배웠다.”(93)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문(文)의 분야만이 아니라 무(武)의 분야도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94)
§03.3.3)
태자가 결혼해서 라훌라(Rahula, 羅睺羅라후라)라는 아들을 얻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95)
§04. 제4장. 출가와 성도 97
1. 붓다의 출가와 수행 / 1) 출가의 동기 2) 구도의 편력
2. 고행과 중도의 실천 / 1) 수정에서 고행으로 2) 고행의 실천 내용 3) 중도의 실천 4) 중도의 실천적, 철학적 의미
3. 붓다의 깨달음 / 1) 깨달음의 완성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3) 깨달음의 내용
4. 악마의 유혹 / 1) 고행과 애욕의 유혹 2) 악마 유혹 전설의 의미
5. 깨달음의 즐거움 / 1) 윤회의 삶은 끝나다 2) 깨달음의 경지 3) 깨달음의 즐거움
§04.1.1) 출가의 동기 99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숫따(Mahapadana-sutta, 大本經, 대본경에는 과거 세의 비바시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 노인, 질병, 죽음, 수행자 ... (100) [生老病死(생로병사)는 나중에 명제화한 것이리라.]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은 후대 불전문학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 普曜經(보요경)에는 ... 동문을 나와 노인, 남문을 나와 병자, 서문을 나와 죽은자, 북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고서 ... (100)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를 결심하고, 그날 밤 마부 찬나(Channa, 차익車匿)에게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건척)를 채비시키라고 명령했다. (102)
위 경전들의 내용은 세상에 늙음, 병듦, 죽음 이라는 세 가지가 없었다면 붓다는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103)
§04.1.2) 구도의 편력 104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 테리카타(Therigatha, 長老尼偈(장로니게)의 주석서를 보면, 싯닷타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였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라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싯닷타는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고 만다. (104)
이들[박가와]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마(Brahma, 梵天 범천)와 해와 달 및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104) [이 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 랄리따위스따라에는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104)
[알라라 칼라마는 마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다. (104-105)
마가다(Magadha, 摩揭陀마갈타)국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왕사성)에서 ...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스승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다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 수정주의(修正主義)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 (105)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가가하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우루빈나, 優樓頻螺)의 세나니가마(Senaigama, 장군촌(將軍村)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니련선하, 尼連禪河)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고행림(苦行林)이라 불리던 그곳은 현재 보드가야(Bodhgaya) 동쪽에 있었다. ... 그는 새롭게 결심하고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다. (106)
[고행중] 빔비사라왕(Bimbisara, 頻婆娑羅빈파사라)의 제안 ...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은 욕망[탐욕]의 충족을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탐욕]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위해 출가한 것이라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 (107)
§04.2. 고행과 중도의 실천 107
§04.2.1) 수정에서 고행으로 107
붓다는 라자가하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가야伽耶) 교외, 우루웰라 세나니(Senani)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 강 근처에 도달했다. .. 수정을 버리고 고행으로 나아갔다. (108) [고행은 자이나교단의 방식이다. 교주는 마하휘라(Mahavira 대웅大雄)이다.]
§04.2.2) 고행의 실천 내용 109
경전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안자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109)
§04.2.3) 중도의 실천 112
마침내 고행을 포기했다. 제일 먼저 고행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 깨끗이 씻어냈다. 그리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선생善生)가 공양올린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했다. .. 수정주의와 고행주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중도 Majjhima Patipada)였다. (112) - [어쩌면 개인의 인성론에서 행복, 건강, 즐거움을 실행하는 도덕은 중도론일 것이다. 공동체론은 희사(喜捨, 보시)론 일 것이다. 치(癡)를 벗어나는 것은 다중지성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화엄세상은 다중지성의 공감에서. -자유라는 주제는 파라노이아에 대립으로서 나왔을 것 같다. (53VMH)]
§04.2.4) 중도의 실천적, 철학적 의미 113
[육사외도(六師外道)] 이를 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i)는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주장했다.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 수, 화, 풍, 고(苦), 낙(樂), 명아(命我) 등 7요소를 인정했고, 아지와까(Ãjlvaka)[숙명론]로 대표되는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 지, 수, 화, 풍, 허공(虛空), 득(得), 실(失), 고(苦), 낙(樂), 생(生), 사(死) 등 12가지 원리를 주장했다. (114)
§04.3. 붓다의 깨달음 116
1) 깨달음의 완성
§04.3.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117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 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 sutta)(薩遮迦大經살차가대경)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 “..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셋째 지혜이다. /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수(受)]은 나의 마음[심(心)]을 사로잡지 못했다.” [나로서는 열반에 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악순환(le cercle vicieux)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그러면 생성(태어남)은 무엇인가, 니체의 주사위놀이는 이런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 말라르메의 “책”의 비유 용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천사흘 밤”도. ]
3) 깨달음의 내용
§04.4. 악마의 유혹 125
§04.4.1) 고행과 애욕의 유혹 126
악마의 유혹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경집)에 편찬되어 있는 「빠다나-숫따(Padhana-sutta, 精勤經 정근경」이다. (127)
악마 나무찌 / 악마의 군대 / 빠삐만[波旬(파순)]의 세 딸들의 유혹.
§04.4.2) 악마 유혹 전설의 의미 132
§04.5. 깨달음의 즐거움 134
1) 윤회의 삶은 끝나다 / 2) 깨달음의 경지 / 3) 깨달음의 즐거움[해탈의 희열(la joie)]
§05. 제5장. 붓다의 초기 교화 활동 145
§05.1. 범천의 권청 [(梵天勸請)] 147
§05.1.1) 정각자의 고독 147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완전히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붓다 자신뿐임을 알게 되었다. ,, “나는 차라리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중하고 가까이 하면서 살리라.” (148)
그런데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에서는 범천(梵天)의 입을 빌리지 않고, 붓다께서 직접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일체 세간에 살고 있는 생류(生類) 중에서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 해탈(解脫, vimutti),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nanadassana)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가까이 하여 그에게 의지하고 공양, 공경하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간의 인천(人天), 마(魔), 범(梵), 사문(沙門), 바라문(波羅門)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일체의 세간에서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나는 의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내가 깨달은 법(法)’을, 내가 지금 마땅히 가까이 하고 공양, 공경하며 성심껏 존중할 것이다.”7)라고 했다. (149) [자연이 자기에 의한 자기 형성과 그 자연을 통한 각(覺)이 있다.]
§05.1.2) 범천의 권청 150
하여튼 붓다께서 범천의 간청에 의해서 최초로 설법을 하려고 결심한 ‘범천권청’의 설화는 그 실재성 여부를 떠나서 불교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가 매우 깊다. (155)
§05.2. 전도의 개시 156
§05.2.1) 첫 설법의 대상
붓다께서 처음 법을 설하기 위해 그 대상으로 생각한 두 사람의 스승과 다섯 비구는 모두 출가자들입니다. 전도를 시작함에 있어서 붓다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불교 교단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나 목갈라나(Moggalana, 目犍連) 등도 모두 이교(異敎)의 가르침을 받들어 제자를 두고 이미 일파를 이루고 있던 출가사문으로부터의 개종이었던 것입니다. (157)
§05.2.2) 우빠까와의 만남 158
[아지바까(Ajivaka, 邪命外道) 교도인 우빠까(Upaka, 優波迦)가 세존을 만났으나 알라보지 못했다.]
§05.2.3) 바라나시 여행
다섯 수행자들과 재회. [콘다냐(교진여), 밧디야, 카샤파, 마하나마, 아싸지]
§05.2.4) 종교의 성지 바라나시 162
어쨌든 붓다께서는 붓다가야(佛陀伽倻)에서 약200㎞나 떨어진 갠지스강 맞은편 기슭인 바라나시까지 걸어갔다. 왜 거기까지 가서 제일성(第一聲)을 올렸을까? 오래 전부터 빔비사라(Bimbisara, 頻婆裟羅)왕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가다국에서 왜 최초의 설법을 하지 않았을까? (163)
바라나시(Baranasi, 波羅奈城)라는 명칭은 이곳이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바라나(Barna) 강과 아시(Asi)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두 강 모두 큰 하천이라고 부르기에는 적당치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로부터 바라나시는 하르드와르(Haridwar), 웃자인(Ujjain), 마투라(Mathura), 아요다(Ayoda), 두와르카(Dwarka), 칸치푸람(Kanchipuram) 등과 비견되는 칠대영장(七大靈場)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3만 이상의 바라문 승려가 살고 있으며, 또 연간 백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이 찾아듭니다. 강기슭에는 가트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목욕장이 줄지어 있습니다. (164).
§05.3. 초전법륜 165
§05.3.1) 최초의 설법 165
이와 같이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했고, 또한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다. (166)
§05.3.2) 최초 설법의 의의 167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7) [각(覺)한 붓다가 있고 법을 설법하고 다섯 비구가 수계를 받음으로써, 불법승(佛法僧)의 삼보가 성립한다.]
§05.33) 전법륜경의 내용 168
§05.4. 불교 교단의 성립 173
§05.4.1) 다섯 제자와 상가의 성립 173 [4원소: 지수화풍.]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 밧파(Vappa. 婆破, 婆濕婆),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 밧디야(Bhaddhiya, 跋提伽, 婆提) - 구족계를 받다.]
§05.4.2) 야사의 출가 177.
다섯 명의 비구들로부터 귀의를 받은 붓다는 다음에는 바라나시에 사는 부유한 장자의 아들인 야사(Yasa, san. Yaśas, 耶舍)를 교화하여 출가시켰다. (177)
§05.4.3) 재가신자-우바새와 우바이 178
한편 야사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호의 아들들로서, 비말라(Vimala, 無垢 무구), 수바후(Subāhu, 善臂), 뿐나지(Punnaji, 滿足), 가밤빠띠(Gavampati, 牛王)였습니다. 이들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습니다.8)
§05.4.4) 전도의 길179
[전도선언(傳道宣言)]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웰라(Uruvela)의 세나니(senāni) 마을로 간다.”
§05.5. 초기의 교화 활동 182
1) 깟사빠 삼 형제 182
캇사파(Kassapa, 가섭迦葉) 3형제는 불의 신 ‘아그니(agni 화신)’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으며,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했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또는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렀다. (182)
이들 삼형제 중 첫째는 우루벨라 깟사빠(Uruvelā Kassapa, 優樓頻螺迦葉 우루빈나가섭)이다. 그는 우루벨라 숲속에 살고 있었기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다. 둘째는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인데, 그는 우루벨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 강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팔리어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다. 셋째는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입니다. 그는 하류(下流)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도 200명의 제자가 있었다. (182)
2) 불의 설법[연소경(燃燒經)] 187
붓다는 이제 6년 전에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87)
[‘불의 설법[연소경(燃燒經)]] 이 법문의 핵심은 외부의 불보다 인간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무서우며, 그 불길을 꺼버리고 해탈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189)
§05.6.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의 교화 189
§05.6.1) 라자가하와 초기불교 교단 189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는 붓다 당시 인도의 4대강국(四大强國) 중의 하나인 마가다(Magadha, 摩揭陀)국의 수도(首都)였다. 라자가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옛 도시는 기립바자(Giribbaja, 山圍域)로 널리 알려졌던 언덕 위의 요새, 즉 산성(山城)이었다. 이 산성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능숙한 건축가였던 마하고빈다(Mahāgovinda)왕이 설계하고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신도시는 산기슭의 평지에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세웠다. 신(新), 구(舊) 도시 모두 기립바자(Giribbaja)로 불렸다. 그 이유는 주위에 빤다바(Pandava, 白善山), 깃자꾸따(Gijjhakūtā, 靈鷲山 영취산), 베바라(Vebhāra, 負重山), 이시기리(Isigili, 仙人掘山), 베뿔라(Vepulla, 廣普山) 등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190)
중국의 현장이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는 바라문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매우 황폐화되어 있었다.(192) [지형의 변화로 산천도 의구(依舊)한 것만은 아니다.]
§05.6.2) 빔비사라왕과의 만남 193
빔비사라왕은 붓다를 찬탄한 뒤, 자신을 재가 신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붓다에게 귀의하겠다고 맹세했다. (194)
“비구들이여, 나는 승원을 받기로 하였다.” (197)
§05.7.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귀의
붓다께서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라자가하 부근에는 여러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도 25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우빠띳사(Upatissa, 優波帝須 우파제수)와 꼴리따(Kolita, 俱律陀 구율타)라는 두 사람의 수제자(首弟子)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붓다께 귀의하여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사리불)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 목건련)이다. (197)
§05.8. 디가나카와 마하깟사빠의 귀의 206
후대 불전(佛傳)에는 계속하여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 장조)와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 대가섭)의 귀의나 고향인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 가비나위성)을 방문하여 사캬족(Sakya, 釋迦族)을 교화했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다. (206)
1) 디가나카의 귀의 206 / 2) 마하깟사빠의 귀의 209
붓다가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한다. 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제1차 결집을 실시했다. (214)
§06. 제6장 붓다의 고향 방문과 석가족 교화 215
§06.1. 붓다의 까삘라왓투 방문 217
§06.1.1) 최초의 까삘라왓투 방문 217
붓다는 일생동안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 가비라위성)를 몇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붓다께서 성도(成道)한 뒤 고향을 찾게 된 최초의 방문이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성도 후 첫 겨울을 라자가하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성도한 뒤 6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설이다. 전자는 붓다께서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고, 후자는 꼬살라(Kosala)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Sk. Śravastī, 舍衛城)에서 고향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217)
숫도다나왕은 .. [신하이며 아들의 친구였던] 깔루다이(Kaludayi)를 파견했다.(218)
“세존이시여! 우리의 가계(家系)는 마하삼마따(Mahāsammata)의 끄사뜨리야(kshatriya) 가계이며, 끄사뜨리야는 단 한 번도 걸식을 행한 적이 없소.”라고 왕은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답변했다. “왕이시여! 그 왕계(王系)는 당신의 가계(家系)이지만, 나의 가계는 디빵까라(Dīpamkara, 燃燈佛), 곤단냐(Kondañña, 憍陳如佛 교진여불)에서 까싸빠(Kassapa, 迦葉佛)에게로 전해져 온 붓다의 가계입니다. 그 분들과 수천의 붓다들은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했던 것이오.”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은 붓다의 이복동생이자 마하빠자빠띠의 아들인 난다(Nanda)의 왕실 성별식(聖別式)이 거행되었다. 이것은 붓다의 경우처럼 16세가 되면 별도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난다가 결혼할 시기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날 붓다는 자신의 발우를 난다에게 맡기고 축복의 게송(mangala)을 읊으시고, 발우를 돌려받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우를 들고 붓다의 처소까지 따라왔다. 그러자 붓다는 난다에게 만일 출가한다면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를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그러자 난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난다를 출가시켰습니다. (223)
§06.1.2) 라훌라 어머니와의 재회 223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
그날 붓다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왕의 초대에 응하여 왕궁에서 공양을 했다. 붓다가 공양을 마치자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모든 여인들이 붓다에게 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라훌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가 도덕적으로 어떤 결함도 없다면 붓다가 그녀에게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말하고, 두 수제자와 함께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는 붓다의 발에 엎드려 손으로 발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를 그곳에 대었다. 숫도다나 왕은 라훌라의 어머니가 붓다가 출가한 이후에 스스로 모든 사치를 포기했으며, 붓다가 가사를 걸치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을 듣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지냈다고 붓다께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붓다는 라훌라마따에게 짠다낀나라 자따까(Candakinara Jātaka)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그녀 역시 충절이 대단했었다는 내용이다. (225)
§06.1.3) 라훌라의 출가 인연 227
라훌라의 출가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어 율장, 「대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27)
“비구들이여,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을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惡作)을 범하는 것이다.” (229)
후대의 문헌에서는 라훌라를 붓다의 십대제자 가운데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밀행제일이란 계율을 정해진 그대로 세세한 것까지 지켜, 실천하는 데에 제일이라는 뜻이다. (231)
§06.2. 석가족 사람들의 출가 231
석가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과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어 율장 「소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다르면, 이들 석가족 청년 여섯 명이 출가할 때 우빨리(Upali 우파리 優波離)도 함께 출가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아난다와 데와닷따가 먼저 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232)
§06.2.1) 밧디야(Bhaddiya, 跋提伽발제가, 婆提파제)
밧디야는 깔리고다뿟따(Kāligodhāputta)로도 불렸다. 왜냐하면 그는 샤카족의 귀부인이었던 깔리고다(Kāligodhā)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귀족 출신의 승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숫도다나 왕의 뒤를 계승한 왕이었기에,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출가자였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를 ‘귀성제일(貴性第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34)
§06.2.2)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아나율): 천안제일(天眼第一) / 3) 낌빌라(Kimbila, 金比羅) / 4) 바구(Bhagu, 跋俱) / 5) 아난다(Ānanda, 阿難): ‘다문제일(多聞第一)’, ‘정념제일(正念第一)’, ‘행지제일(行持第一)’, ‘근시제일(近侍第一)’ / 6)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제파달다) (239-239)
§06.2.7) 우빨리 [(Upali, 優波離우파리)]
우빨리는 석가족 명문 인사들에게 봉사해온 이발사였다. ...그는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을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 데 매우 엄격했다. 그래서 그는 ‘지율제일(持律第一)’ 또는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다.(239)
§07. 제7장 교화 지역과 교단 정비 241
§07.1. 교화 지역과 불교 중국(佛敎中國) 243
1) 마가다국에서의 교화 활동 243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벨루와나 외에도 의사 지바까(Jīvaka, 耆婆 기파)가 기부한 망고 숲(Jīvakambavana)을 비롯한 정사(精舍)들이 여러 곳에 건립되었다. 붓다는 라자가하 근처의 깃짜꾸따(Gijjhakūtā, 靈鷲山 혹은 耆闍崛山, ‘독수리 봉우리’의 뜻), 삿따빠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 랏티와나(Latthivana, 杖林) 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펼쳤다. (244)
2) 꼬살라국에서의 교화 활동 244
이와 같이 원래 이 땅은 제따 태자가 소유하였던 원림(園林)이었기 때문에 ‘제따와나-아나타삔디까라마(Jetavana-Anāthapindikārāmā)’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은 ‘제따 태자의 원림에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운 정사’라는 뜻이다. 한역에서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였으며,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보시제일(布施第一포시)’이라는 호칭과 함께 80명의 으뜸가는 제자들의 명단에 들어있다. (246)
법구경주(法句經註)에 의하면, 비사카는 시집올 때 값비싼 옷을 입고 왔는데, 그 옷을 희사하여 정사를 건립하겠다고 붓다께 요청했다. 붓다의 승낙을 받고 목갈라나가 감독하여 9개월이 걸려 사왓티 동쪽에 2층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위, 아래 각각 500실을 갖춘 큰 규모였습니다. 이 승원의 이름은 뿟바라마(Pubbārāma, 東園)이지만, ‘미가라마뚜-빠싸다(Migāramātu- pāsāda, 鹿母講堂 녹모강당)로 더 널리 알려졌다. (247-248)
꼬살라 국왕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 파사익)도 나중에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붓다께 귀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빠세나디 왕은 제따와나(기원정사) 반대편에 ‘라자까라마(Rājakārāma, 王園)’ 즉 왕실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사왓티에서 붓다의 으뜸가는 후원자는 아나타삔디까, 비사카, 숫빠와사(Suppavāsa), 빠세나디였습니다.10)
3) 그밖의 중요한 교화 지역
붓다의 교화지역은 ‘불교중국(佛敎中國)’과 거의 일치한다. 불교중국(Majjima- janapada 또는 Majjhima-desa)이란 원래 ‘수계(受戒)할 때 필요한 10명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중앙지역’을 의미한다. 이른바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중국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종류의 율장에서 규정하고 있다. (250)
§07.2. 초기불교 승단의 계율 251
1) 초기의 출가 생활 251
인도 사회에서 출가자가 출현한 것은 붓다시대 이전이었다.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세속생활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상냐신(samnyasin, 遁世者 둔세자: 세속을 버린 자)이라 했고, 도(道)를 구하여 힘쓰기 때문에 사마나(samana, 沙門 사문: 노력하는 자)라고 했다. 또한 유행을 일로 삼기 때문에 빠리와자까(parivajaka, 遊行者 유행자: 편력하는 자)라 불렀으며, 주로 삼림에 머물렀기 때문에 아란야까(aranyka, 삼림에 머무르는 자)라고도 했다. 자이나교에서는 야띠(yati, 苦行者 고행자; 노력자)등으로 불렸다.불교에서는 보통 빅쿠(bhikku, 比丘비구), 빅쿠니(bhikkuni, 比丘尼 비구니)라 호칭한다. 이 비구와 비구니의 단체를 승가(Sangha 僧伽)라고 하는데,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둘로 구분된다. (251)
일반적으로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네 가지 생활 원칙[四依法(사의법)]을 준수했다. 이른바 음식은 탁발[乞食(걸식)]에 의존했고, 옷은 버려진 천 조각을 모아 만든 것[糞掃衣(분소의)]을 입었으며, 머무는 곳은 나무 아래[樹下坐(수하좌)]였고, 약은 소의 오줌을 썩혀 발효시킨 것[陳棄藥(진기약)]으로 해결했다. (251)
따라서 붓다는 엄격한 금욕생활, 즉 두타행(頭陀行)을 강요하지 않았다. / 그러나 데와닷따는 출가자라면 반드시 다섯 항목을 평생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비구들은 평생 삼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2) 비구들은 평생 걸식해야 하며 청식을 받으면 죄가 된다. 3) 비구들은 평생 분소의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를 입으면 죄가 된다. 4) 비구들은 평생 나무아래 거주해야 하면 집안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5) 비구들은 평생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아니해야 하며 먹으면 죄가 된다. (252)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데와닷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다섯째 불육식(不肉食)에 대해 붓다는 자기를 위해서 죽인 것이라는 견(見) 문(門) 의(疑)의 셋에 해당되지 않는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했다. 즉 붓다는 삼정육(三淨肉)을 허용했던 것이다. (252)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엄격한 고행주의자도 쾌락주의자도 아닌 현실주의자였다. ... / 이러한 성격은 또한 모든 율장의 대부분의 항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계율의 제계(制戒)가 수범수제(隨犯隨制)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붓다는 유연한 사고로 수행자들에게 주체적 성찰을 통한 자각적 몸가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상황윤리 계율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 붓다의 관점이다. (253-254)
2) 계율 제정의 배경 254
이처럼 교단의 인원수가 늘어나면서 통제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한 규칙을 계(戒, sīla)라고 한다. 계의 조항은 교단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제정해 실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통털어서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1) 처음에는 붓다께서 가르친 생활상의 대원칙인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는 것으로 충분했다.
3) 계율의 제정 256
교단이 점차 확대되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허락]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삼귀의문(三歸依文)을 세 번 외움으로써 승단의 입단이 허락되었다. (256)
[나중에는] 출가자에게는 독신 금욕의 범행(梵行, brahmacariya)이라고 하는 청정행(淸淨行)의 실천이 엄격하게 요청되었다. (257)
4) 계율의 의의 257
승가에 들어가 수행하려는 비구 개인의 결의를 ‘계(戒, sila)’라 하고, 승가 단체로서 규칙을 ‘율(律, vinaya)’이라고 한다.
단체로서 규칙은 매년 한 번 열리는 안거의 행사나 보름마다 열이는 포살(布薩, uposatha) 의식 등과 같이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규칙을 말한다. 이것은 승가의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 작지계(作持戒)라고 하며, 율장에서는 승가의 운영 법규를 모은 ‘건도(犍度, khandhaka)’에서 설해지고 있다. (260)
§07.3. 비구니 교단의 성립과 발전 261
1) 비구니 교단의 성립 261
비구니 승가(Samgha, 僧伽)의 성립은 불교 교단사에서 획지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승가가 언제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처음 붓다는 여성의 출가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261)
2) 팔경법과 비구니 승가의 성립 264-278
팔경법(八敬法, Attha-garudhammā)은 비구니 승가의 성립과 지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비구니 승가의 성립에 대해서는 율장의 「비구니 건도(比丘尼 犍度)」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64)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볼 때, 비구니 승가는 붓다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붓다의 입멸 후에는 그다지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세력이 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2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여성의 몸 그대로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에 근거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성변성남자성불론(女性變性男子成佛論)’ 등을 말하는 문헌들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붓다의 참뜻이 아님은 거의 확실합니다.8)]
3) 비구니의 출가 설화 278
마하빠자빠띠에 이어서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사캬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비구니 승가가 형성되었다. 비구니 중에는 비구를 능가하는 자질을 갖추고 폭넓게 활동을 전개한 이도 있었다. 비구니들의 출가 설화는 [팔리어 경전인] 테리가타에 기록되어 있는 이외에도 여러 경전과 그 주석서에 가끔 등장하고 있다. (278)
여성 출가의 설화는 그밖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성 출가자에 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에 진력한 아난다 존자가 나중에 비난을 받는 등, 불교 교단 통제 상의 갖가지 문제를 야기 시킨 일을 기술한 문헌도 찾아 볼 수 있다. (282)
§08. 제8장. 붓다의 마지막 여로 283
§08.1. 최후의 여정에 오름 285
1) 대반열반경 285
그러나 붓다의 만년(晩年), 즉 입멸 전후의 사정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남전의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의 세 가지 경전에서는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는 그 대표적인 경전이다. 현재 팔리어 대반열반경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어 역본,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 경전은 다른 부파에서도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5-286)
2) 라자가하에서 설한 칠불퇴법287
대반열반경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반 년 내지 일 년 정도 전 라자가하의 깃자꾸따(Gijjhakūta, 靈鷲山, 耆闍崛山 기도굴산)에 머물고 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무렵 마가다국의 아자따삿투(Ajātasattu, 阿闍世 아도세) 왕은 왓지(Vajji)국을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287) [왓찌족의 칠불퇴법(七不退法)]
3) 최후의 여정에 오름
라자가하를 출발했다. 제일 먼저 암바랏티까(Ambalatthika) 동산에 도착했다.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의 ‘왕의 집(Rājâgāraka)’에 머물렀다. (289-290)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에서 마음껏 머문 다음, 날란다(Nālanda, 那爛陀)를 향해 출발했다. 붓다는 날란다에 도착하여 그곳의 빠와리까(Pāvārika)의 망고 숲에 머물렀다. (290)
4) 빠딸리 마을과 갠지스강 291
이어 붓다는 날란다를 떠나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 있는 빠딸리가마(Pātaligāma, ‘빠딸리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했다. (291)
§08.2. 안거와 붓다의 유수행
1) 꼬띠가마와 나디까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너신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띠가마(Kotigāma, ‘꼬띠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설했다. (293)
이처럼 꼬띠 마을에서 충분히 머문 다음,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나디까(Nādika)마을에 도착하여, 그곳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 벽돌 회관)’에 머물렀다. (295)
2) 웨살리의 암바빨리 동산 296
나디까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와 제자들은 베살리(Vesāli, 毘舍離城 비사리성)로 이동하였습니다. 베살리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암바빨리(Ambapāli, 菴波婆利, 암파파리)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습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습니다. 그 자세한 설법 내용은 생략합니다. / 당시 베살리에는 ‘암바빨리’라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습니다. (296)
다음 날 [유녀] 암바빨리는 자신의 정원에 정성껏 요리된 딱딱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붓다와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공양이 끝나자 암바빨리는 붓다에게 “세존이시여! 이 원림[동산]을 부처님을 으뜸으로 한 비구 승가에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98) [기생 암몰라녀(菴沒羅女)가 불교에 귀의하여 동산을 승단에 보시한 암라수원(菴羅樹園, Āmraplivana)은 훨씬 이전의 이야기이다.]
3) 벨루와가마에서의 안거 298
붓다께서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서 마음껏 머문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벨루와가마(Beluvagama, 橡村상촌, 상수리나무 마을)로 이동했다. 그때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298)
4)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와 사념처(四念處) 300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도 자기의 섬[自洲]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10) / “아난다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 느낌(受)에 대해 … 마음(意)에 대해 …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300-301) [나로서는 벩송의 DI가 념처경의 심층자아와 닮았다고 본다. 즉 자아는 의식총체 속에 머물고 있다. 벩송은 그 자아가 어디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의식의 흐름(지속)으로 파악하라고 한다. - ‘법귀의 = 지속’일 것이다.]
§08.3. 입멸의 예고 302
1) 짜빨라 영묘에서 302
붓다께서 벨루와가마(Beluvagama)에서 우기(雨期)의 안거(安居)를 보내고 있을 때, 심한 병에 걸려 격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정진을 통해 자신의 병을 훌륭하게 극복해냈다. 우기가 끝나고 붓다는 다시 웨살리(Vesālī)로 돌아왔는데, 어느 날 탁발을 마치고, 짜빨라 쩨띠야(Cāpāla cetiya)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02)
쩨띠야(cetiya, Skt. caitya)는 원래 ‘성스러운 나무 혹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붓다 당시의 제띠야는 ‘노천의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이기영(李箕永) 선생은 쩨띠야를 흔히 ‘묘(廟)’ 또는 ‘예당(禮堂)’이라고 한역되지만, ‘신성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석조(石造) 혹은 벽돌로 된 것들은 대개 마우리야 왕조[전 320-전 185]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塔婆) 모양의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 위에 만들어진 토총(土塚) 또는 그 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 위에 총(塚)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쩨띠야는 투빠(thupa, 塔婆)[스투파(Stūpa, 塔婆)]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3) 이 쩨띠야를 영어로는 ‘tumulus’(古墳), ‘sepulchral monument’(무덤의 기념물), ‘cairn’(돌무더기) 등으로 번역하는데,4) 우리말로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쩨띠야를 불교의 사찰로 이해하면 잘못된 것이다. (302-303)
2) 지진이 일어난 까닭 305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중지했다. .. 대지진이 일어났다. (305)
지진의 원인에 대하여 아난다 존자에게
“우선 첫째로 아난다여! 이 대지는 수계(水界) 위에 있고, 수계는 풍계(風界) 위에, 또 풍계는 허공(虛空) 중에 있다. 그런데, 아난다여! 풍계에 어떤 원인으로 큰 바람이 불면, 그 큰 바람은 수계를 진동하게 한다. 수계가 진동하면 대지(大地)도 진동한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1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 다음으로 아난다여! 이곳에 한 사람의 사문 혹은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神通力)이 있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자. 혹은 대단한 초능력(大神通力), 대단한 역량을 가진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대지의 관상(觀想)을 행하고, 혹은 한없이 수(水)의 관상을 행할 때, 그것은 이 대지를 대단히 그리고 격심하게 진동하게 하고, 격렬하게 진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2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306)
“아난다여! 이제는 너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어쨌든 아난다여! 나는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것이라고 곧 이별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하겠느냐? 태어나고 살고 무너져 가는 것,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무너지지 말라’고 막더라도, 그것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느니라. 이러한 것을 아난다여! 여래는 이미 내던지고 배제하며 방출하고 버렸으며 벗어났다. 그리고 유수행(留壽行)도 나는 버렸다. 이리하여 여래는 결정적인 말을 했느니라. ‘머지않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라고. 이제 와서 생명을 영원토록 하겠다고 하여 그 말을 취소한다는 것은 존재의 도리(道理)에 위배되는 것이다.” (307)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이익과 안락한 진리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예컨대 네 가지 바르게 사념하는 경지[四念處], 네 가지 바르게 노력해야만 하는 것[四正勤],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 다섯 가지 선한 과보의 뿌리[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지분[七覺支],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 등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308)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이니라. 비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나는 너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알려야만 하리라. 명심해서 들음이 좋으리라.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有爲)은 결국 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여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리라. 여래는 이제부터 3개월 후, 열반에 들 것이니라.” (309)
이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퍼지니,
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여, 끝없이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하여
선계(善戒)를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시한 법(法), 율(律)을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은 다하리. (309)
이상에서 살펴본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우기의 안거가 끝나자 붓다께서 웨살리로 탁발을 나갔다. 그때 아난다에게 여래는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일겁(一劫) 혹은 그 이상으로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게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붓다께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악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3개월 후 입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역본(譯本)에서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309-310)
짜빨라 사당에서의 ‘생명력의 포기’는 붓다의 입멸[열반]에 있어서 필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수하여, 시자(侍者) 아난다의 허물과 악마의 유혹이 곁들여집니다. 붓다의 입멸 후 아난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몇 가지 허물을 문책 당하게 되는데, 짜빨라 사당의 사건이 가장 큰 것이었다. 아난다는 그러니까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며, 이것도 민속학에 많은 사례가 있는 일반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난다가 악역을 맡은 것으로 하여 붓다의 열반을 미화하다. 유다를 악역으로 묘사하여 예수를 도덕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 평등 종교는 아난다를 존자로 올렸다. - 위계 종교는 심판을 가장(假裝)한 것이다. (53WKC)]
§09. 제9장. 붓다의 입멸과 다비 313
§09.1. 마지막 공양-수까라 맛다바 315
1) 웨살리와의 이별
반다 마을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는 핫티가마(Hatthigāma, 象村, 코끼리 마을), 암바가마(Ambagāma, 菴婆羅村, 망고마을), 잠부가마(Jambugāma, 閻浮村, 장미사과나무 마을)를 거쳐 보가나가라(Bhoganagara, 善伽城)에 도착했다.
2) 마하빠데사 [(四大敎法, Mahāpadesa)] 337
보가나가라(Bhoganagara, 善伽城)에서 비구들에게 마하빠데사(四大敎法, Mahāpadesa)에 대해 설했다. (337)
3) 쭌다의 공양 318
한편 붓다께서 보가나가라에서 마음껏 머문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빠와(Pāvā)로 향했다. 그리고 빠와 마을에 도착하여 대장장이 쭌다(Cunda, 純多, 淳陀)의 망고 동산에 머물렀다. 대장장이 쭌다는 붓다와 비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물 중에 ‘수까라-맛다와(Sūkara-maddava)’라는 음식도 있었다. 붓다께서는 준비한 음식 가운데 ‘수까라-맛다와’가 있는 것을 아시고, 대장장이 쭌다에게 “이 음식은 나에게만 주고, 비구들에게는 다른 음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 그리고 남은 그리고 남은 수까라-맛다바는 구덩이를 파 그곳에 모두 묻도록 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이것을 먹더라도 완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와 범천, 신들과 인간들, 사문과 바라문을 포함하더라도 붓다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319) [‘수까라-맛다와’의 전설이 많을 것 같다.]
4) 뿍꾸사와의 만남
말라족의 아들인 뿍꾸사(Pukkusa)가 선정(禪定)의 깊이에 대해 여쭈었다. (323)
§09.2. 입멸의 땅: 꾸시나라 324
1) 꾸시나라의 살라 숲에서 [꾸시나라: 부다의 입멸지]
붓다께서 빠와(Pāvā) 마을에서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음식으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아난다 존자에게 히란냐와띠(Hiraññavati)강(江) 맞은편 언덕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 구시나라)에 있는 말라족의 우빠왓따나(Upavattana)동산의 살라(Sālā, 紗羅) 숲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324)
붓다의 탄생지(誕生地), 성도지(成道地),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 입멸지(入滅地) .. 이 네 곳이 붓다의 사대성지(四大聖地)가 되었습니다.
2) 붓다의 유해와 장례법 325
“아난다여! 너희 출가자는 여래의 유해를 모시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말라. 너희들은 단지 출가 본래의 목적을 향하여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면서 지내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에 대해 각별하게 깊은 숭경의 생각을 품고 있는 현자가 왕족이나 바라문, 자산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니라. 그러한 이들이 여래의 유해를 모실 것이니라.” [아라한은 정진하라!, 불상이나 사리를 모시지 마라.]
“아난다여! 너는 나의 입멸을 한탄하거나 슬퍼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아난다여! 너에게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別離)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 .. 너는 또한 사려 있는 말과 사려 있는 배려로써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게으름피우지 않으면서 일심으로 시봉하였다. 아난다여! 너는 많은 복덕을 지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게으름피우지 말고 수행에 노력하여 빨리 번뇌 없는 경지에 도달함이 좋으리라.” (327) (305쪽에도 있다)
3) 마하수닷사나왕 이야기 328
옛날에 마하수닷사나(Mahā-Sudassana, 大善見王)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정의로운 왕이었으며, 사방의 세계를 평정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전륜성왕을 상징하는 일곱 가지 보물[七寶]4)도 갖추고 있다. 그의 왕궁은 동서로 12요자나(yojana, 거리의 단위), 남북으로 7요자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하수닷사나 왕의 수도였던 꾸사와띠(Kusāvati)가 바로 붓다 당시의 ‘꾸시나라’였다. (328) [이야기는 수밧다에게로 연결된다.]
4) 수밧다의 귀의 329
그때 마침 꾸시나라 마을에는 수밧다(Subhadda)라는 편력행자(遍歷行者)7)가 머물고 있었다. 그도 오늘 밤 [사문 고따마]붓다가 열반에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329-330)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사문, 바라문으로서 모임이나 교단을 가지거나 혹은 교단의 스승으로 잘 알려지고 명성도 있으며, 교조(敎祖)로 불러지는 매우 존경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 예를 들면 뿌라나 깟사빠(Pūrana Kassap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ī), 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haputta) 등이 있습니다.그런데 이런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어느 누구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아니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깨달았고, 그 밖의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330)
“수밧다여! 그 어떤 법(法)과 율(律)이든지, 거기에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없을 것이다....” (331)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수밧다는 곧바로 붓다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몸담고 있던 사람의 개종은 4개월이 경과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시기가 오면 수밧다를 출가시켜 구족계(具足戒)를 수여하도록 지시했다. (331)
§09.3. 다비와 사리의 분배 332
1) 붓다의 마지막 말씀 322
“... 아난다여! 내가 떠나면 찬나(Channa) 비구에게는 브라흐마-단다(brahma- danda, 梵壇罰 범단벌)을 부가하라. 세존이시여! 그러나 브라흐마-단다란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찬나가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비구들은 그에게 말하거나 훈계하거나 충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브라흐마-단다이니라.” (332)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다.” (335) [어렵고 드물다. 정진하라...]
2) 붓다의 입멸 335
또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帝釋天)도 시를 읊었습니다.
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 [열반에 들다, 안식에 들다.]
3) 붓다의 유해 화장 337
이때[입멸] 수밧다(Subhadda)8)라는 늙은 비구가 이제 대사문이 떠났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망발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하깟싸빠는 불멸후 곧바로 제1결집을 개최했다. (338)
4) 사리 분배 339 [사리 舍利, (유해遺骸)]
그래서 도나(Dona) 바라문이 중재에 나서, 사리를 평등하게 8등분하여 각 종족에게 배분했다. 그리고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는 도나 바라문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삡팔리와나(Pipphalivana)의 모리야(Moriya)족도 붓다의 입멸 소식을 듣고 뒤늦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분배를 끝낸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재를 가지고 돌아갔다. (339)
§09.4. 붓다의 위대한 덕성 340
1) 붓다가 갖춘 여덟 가지 위대함 340
붓다가 갖춘 여덟 가지 위대함은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셋째 경인 「전존경(典尊經)」에 설해져 있다. ‘팔무등법(八無等法)’이란 다른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오직 붓다만이 갖춘 여덟 가지 위대한 특징을 말한다. (340)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경전에서 “여러분, 여래는 지진․등정각의 십호를 구족했습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지진의 십호를 갖춘 부처님과 같은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부처님의 십호구족(十號具足)을 찬탄한 것입니다. 십호(十號)란 ‘붓다의 열 가지 호칭[如來十號]’를 말합니다. 이른바 응공(應供) · 정변지(正遍知) · 명행족(明行足) · 선서(善逝) · 세간해(世間解) · 무상사(無上士) · 조어장부(調御丈夫) · 천인사(天人師) · 불(佛) · 세존(世尊)입니다. 이 열 가지 호칭의 원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①존중과 공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arahant, 應供), ②완전히 깨달은 자(sammāsambuddha, 正遍知, 正等覺者), ③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자(vijjācaraṇasampanna, 明行足), ④잘 건너간 자(sugata, 善逝), ⑤세상을 잘 아는 자(lokavidū, 世間解), ⑥가장 높은 자(anuttara, 無上士), ⑦사람을 잘 길들이는 자(purisadammasārathī, 調御丈夫), ⑧신과 인간의 스승(satthā devamanussānaṁ, 天人師), ⑨깨달은 자(Buddha, 佛, 覺者), ⑩존귀한 자(bhagavā, 世尊)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원래 ‘붓다의 열 가지 호칭’에는 ‘여래(如來, Tathāgata)’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단어는 붓다가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만 사용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343)
위에서 설명한 ‘여덟 가지 비교할 수 없는 법’을 통해 붓다가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붓다의 고귀한 인격과 위대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실 붓다는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인격을 완성했던 분이다. (348)
2) 붓다의 열 가지 호칭 348
- 십호(十號): 부처의 열 가지 호칭치별칭(別稱) 1) 여래(如來, Tathāgata): 참 됨을 몸소 갖추고 있는 분. 2) 아라한(阿羅漢, s. Arhat) 응공(應供),: 세상에서 공량과 우러름을 사고 있는 분. 3) 정각자(正覺者, Sambuddha)[정변지(正遍知)]: 올바로 깨달음을 얻은 분. 길게는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 Anuttara Samyaksambuddha) 혹은 정등각자(Samyaksambuddha)로 일컬어짐. 4) 명행족(明行足, Vidyācarana Sampanna): 하는 일에 허물이 없는 분. 5) 선서(善逝, Sugata): 뛰어나게 참됨에 다다른 분. 6) 세간해(世間解, Locavit):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분. 7) 무상사(無上士, Anuttara puruşa):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 8) 조어장부(調御丈夫, Puruşadamya sārathin): 사람을 다루고 바르게 이끌어 가는 분. 9) 천인사(天人師, Śāstā devamanuşayānām): 신들과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분. 10) 불(佛 Buddha) 깨달은 자. 세존(世尊, Bhagavat) 모든 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자, 세간에서 가장 존귀한자. (349) (불과 세존을 하나로 해서 십호이다) [앞에서 여래는 싯달다가 자기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하고, 신자가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1)을 제회하면 10)의 두 가지를 합하여 십호(十號)이다.]
상좌부 불교도들은 삼보에 귀할 때마다 여래 십호를 늘 암송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붓다께 구원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도의 올바른 신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가 귀의한다는 것과 보호나 원조[기복]을 구한다는 것, 이 둘은 전혀 다른 두 개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붓다는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358) [라깡의 상징계와 들뢰즈의 실재계, 이 둘은 전혀 다른 두 영혼론이다. 마찬가지로 한편 관념론과 주지주의, 다른 한편 자연주의(스피노자와 벩송), 이 둘은 전혀 다른 삶의 양태를 말하고 있다. - 서양의 정신분석학은 상징계의 억압과 명령에 의한 정신병리적 징후에 대한 오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니체와 들뢰즈가 해소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의 내용은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나로서는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야만과 억압의 징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하기보다, 불전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해소하는 길이라 여긴다. (53WKD)]
§10. 제10장.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 359
§10.1. 뛰어난 출가 비구 361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훌륭한 장점들을 여러 대중 앞에서 칭찬했다. 팔리어로 씌어진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증지부)와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361)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에게는 그 다양한 장점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함께 가는 길이 갈대다발처럼 다양체이기 때문이다.]
1) 팔리어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들 362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비구 제자들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은 안냐꼰단냐(Aññākondañña, 憍陳如 교진여)
지혜제일은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초능력의 으뜸은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
청빈으로 으뜸은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
세속을 초월한 눈을 가진 이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가장 높은 가문의 출신은 밧디야 깔리고다야뿟따(Bhaddiya Kāligodhāyaputta),
아름다운 음성으로 제일은 라꾼따까 밧디야(Lakunttaka-bhaddiya)
사자후(獅子吼)를 하기로 제일인 자(者)는 삔돌라 바라드와자(Pindola Bhāradvāja),
설교자(說敎者)로서 제일인 자는 뿐냐 만따리뿟따(Punna Mantāniputta)
짧게 설해진 것을 상세하게 해설하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 대가전연)이다.” (349)
[죽 제자들의 설명이 나열되어 있다. ...]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들
§10.2. 뛰어난 출가 비구니 371
불교의 승가(Sangha, 僧伽)는 비구와 비구니의 이부중(二部衆)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승가는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다. 원론적으로는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의 우열(優劣)은 없다. (371) [당연히 우열이 없겠지, 우열은 전제적 사회 체제를 모방하면서 생겼으리라, 21세기 조계종이 로만 카톨릭을 닮아가는 것도 평등보다 우열을 따르고 있다. (53WKE)]
1) 팔리어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니들 372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들
“비구들이여! 나의 여성문(女聲聞, sāvikā) 비구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다린 이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비구니요,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케마(Khemā) 비구니요,
초능력을 갖춘 이는 웃빨라완나(Uppalavannā) 비구니요,
계율에 능숙한 이는 빠따짜라(Patacāra) 비구니요,
설법을 매우 잘한 이는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요,
선정에 뛰어난 이는 난다(Nandā) 비구니이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정진한 이는 소나(Sonā) 비구니요,
투시력을 가진 이는 사꿀라(Sakulā) 비구니요,
속히 통달한 이[速通達]는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 비구니요,
과거의 생을 기억한 이는 밧다 까삘라니(Bhaddā- kapilānī) 비구니요,
대신통력을 얻은 이는 밧다 깟짜나(Bhaddā-kaccānā) 비구니요,
조잡한 가사를 두른 이는 끼사고따미(Kisāgotamī) 비구니요,
믿음을 실현한 이는 시갈라마따(Sigālamātā) 비구니이니라.” (372)
[비구에게나 비구니에게나 권능의 같은 실현화가 있는 것이다. 평등하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니들
§10.3. 뛰어난 재가 우바새 380
1) 팔리어 니까야에 언급된 우바새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열된 뛰어난 우바새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인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들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귀의(歸依)한 자는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ā)1) 두 상인,
보시자 중 제일은 수닷따(Sudatta) 장자 즉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長者),
많은 설법자 가운데 제일은 찟따(Citta) 장자 즉 맛치까산디까(Macchikasandika),
사섭법(四攝法)으로써 대중을 통솔하는 자 가운데 제일은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
음식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 가운데 제일은 석가족의 마하나마(Mahānāma),
보시를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 자 가운데 제일은 베살리 출신의 욱가(Ugga) 장자,
승가를 가까이서 받든 자 가운데 제일은 핫티(Hatthi) 마을 출신의 욱가따(Uggata) 장자,
절대적 신앙을 가진 자 가운데 제일은 수라 암밧타(Sūra Ambattha),
사람들로부터 총애를 받은 자 가운데 제일은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
신뢰할만한 자 가운데 제일은 나꿀라삐따(Nakulapitā) 장자이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우바새
§10.4. 뛰어난 재가 우바이 390
1) 팔리어 니까야에 언급된 우바이 390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열된 뛰어난 우바이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인 우빠시까(Upāsikā, 優婆夷 우파이)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여성신자로서
최초의 귀의자는 세나니(Senāni)의 딸인 수자따(Sujātā)이다.
승단에 공헌한 자 가운데 제일은 미가라(Migāra)의 어머니인 위싸카(Visākhā)이다.
박식한 자 중 제일은 쿳줏따라(Khujjuttarā)이다.
자비심을 가지고 머무는 자 중 제일은 사마와띠(Sāmāvatī)이다.
선정(禪定)의 힘을 가진 자 가운데 제일은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이다.
특별한 음식을 보시한 자 가운데 제일은 숫빠와사 꼴리야디따(Suppavāsā Koliyadhītā),
간병인 가운데 제일은 숫삐야(Suppiyā)이다.
흔들리지 않는 성실한 이 가운데 제일은 까띠야니(Kātiyānī)이다.
친밀한 관계자 가운데 제일은 나꾸라마따(Nakulamātā)이다.
소문으로까지 믿음을 일으킨 자 중 제일은 꾸라라가라(Kuraraghara)의 우바이 깔리(kālī)이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우바이 399
한역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여자신도의 원래 이름을 추정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401)
부록: 불전에 관한 자료 403
1. 팔리어로 전해진 불전 405
2. 산스크리트어로 전해진 불전 408
1) 『마하와스뚜(Mahavastu, 大事)』
2)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方廣大莊嚴經)』
3) 『붓다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3. 한역 불전
4. 중국에서 찬술한 불전
5. 2차 자료(Secondary Sources)
* 참고 문헌 419 / * 찾아보기 428.
# 저자 마성 스님의 초고: 인터넷 주소
http://kr.buddhism.org/%EB%B6%93%EB%8B%A4%EC%9D%98-%EC%83%9D%EC%95%A0%EC%99%80-%EC%82%AC%EC%8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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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무니 붓다(Sakayamuni Buddha)
*
1922 이기영(李箕永, 1922-1996) 황해도 봉산. 경성제국대학 동양사 전공,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불교사, 불교 철학으로 박사학위. 1960년 귀국한 이래 동국대학교 교수. 석가(1965)(1차개정 1999, 2차개정 2007), 원효사상(1967) 한국불교연구 원효사상연구 불교개론강의 석가(1999)
1922 원의범(元義範, 1922-2017) 우촌(尤村) 평북 정주, 전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불교인식 논리학 전공.
1923 한갑진(韓甲振씨 1923k-) (70.한진흥입회장), 부처님 생애(1993)고희기념.
1931 김지견(金知見, 1931-)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화엄학 박사. <東京大學, 1973,>
1936 리영자(李永子, 1936-) 여성 천태학자 겸 불교여성학자. 동국대 학석사, 일본에서 박사. 동국대 불교대원장.
1941 박선영(朴先榮, 1941-) 동국대 교수, 교육철학. 佛陀의 敎育思想(1981)
1953 박경준(朴京俊, 1953-) 동국대 출신, 동국대 교수, 응용불교학, 불교사회사상 전공 「원시불교의 사회 경제사상 연구」(1992, 박사학위 논문)
1957 마성(摩聖) 이수창(李秀昌, 1957-) 마산 출생, 법호 해불(解佛).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초기불교 인간관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 사캬무니 붓다, 2010
1957 박문기(1957-) 종호 스님, 중국 선학 전공, (동국대 불교대학장)은 "경전 율장에 나타난 삼보정재와 출가수행자의 윤리(1997)" .
1958 문을식(文乙植, 1958-), 인도철학, 요가학, 불교학. <가우다빠다의 不生說과 龍樹의 中道說 - 中道說에 비추어 본 不生說, 동국대, 1995, 이기영>
1961 최봉수(1961-), 부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석·박사. 팔리경전이 들려주는 고타마 붓다(1994), 마하박가(1), 1998「原始佛敎資料論」「原始佛敎의 緣起思想硏究」「原始佛敎와 形而上學」「불교의 진리」「업과 윤회」가 있으며, 그외 논문 10여 편이 발표되었다.
1964 이현옥(李賢玉, 1964-) 동국대학석박. <청변의 공사상 연구, 1997, 동국대, 김인덕>, 「女性成佛의 근거와 그 의미」, 불교학보 제40호, 2003,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1965 조준호(趙晙鎬, 1965-) 델리 대학 박사. 근본불교 전공.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 A Critical Study Based on the Pali Texts.(붓다개념에 대한 연구 : 빠알리 경전에 나타난 일국토 일불설에 대한 비판), 델리대학, 1999, K.T.S.Sarao.> 「석가족의 인도-유럽인설에 대한 반박」(2001)
1965 안양규(1965-) 서울대 학사, 동국대 학석, 영국서 박사. <Budddhology in the mahaparinibbana and its commentary, 1998, 옥스포드, Richard Gombrich.> 「개인의 자율과 승단의 유지-붓다의 유훈을 중심으로, 2000)」, 「붓다의 입멸과 관련한 아라한의 자살(2002)」
*
1814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 1814–1893)은 영국 출생, 인도고고학의 아버지. 원래 기술자. 1831년 이후 인도 고고학에 전념하여 1834-1854년까지 마니킬라, 사르나트, 비슬라 등의 유적지 발굴. [깨달음의 장소: 보리수 지역 발굴(1881)
1843 스미스(Vincent Arthur Smith, 1843–1920) 아일랜드 출신의 인도학자, 예술사가. The Early History of India, from 600 B. C. to the Muhammadan conquest, 1904.
1843 리스 데이비스(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 영국의 팔리어 교사. 팔리 텍스트 학회 설립자. Rhys Davids, T. W., Stede, William (eds.) (1921-5). The Pāli Text Society's Pāli–English Dictionary.
1847 스나르(Émile Charles Marie Senart, 1847-1928) 프랑스인 인도학자. 불교와 힌두교 연구. 『Essai sur la légende du Bouddha, 1875』
1852 페페(William Claxton Peppe, Peppé, 1852–1937), 영국 아마추어 고고학자. 1898년 붓다 유골 항아리 발굴.
1853 퓌러(Alois Anton Führer, 1853–1930) 독일 인도학 학자. / 1895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퓌러(Alois Anton Führer)가 네팔 남부 지역을 탐험하다가 우연히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발견하였고, 석주에 새겨진 문장을 해독했는데, 거기에 '아소카 왕이 석가모니불의 탄생지인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석주를 세웠다. Monograph on Buddha Sakyamuni's birth-place in the Nepalese tarai (1897)
1869 토마스(Edward Joseph Thomas, 1869–1958) 영국고전학자. 서적상. 불교연구자.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1927)(1927, 3rd. ed. 1952),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1933).
1889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 인도의 독립 운동가, 정치가. 사회주의 성향인 네루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 운동을 했는데, 현재도 인도 민중들은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투쟁하는 민중운동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계급투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발견, 1946
1898 알테카르(Anant Sadashiv Altekar, 1898–1960) 인도의 역사가, 고고학자, 동전 연구가. 1957년 붓다 유골 항아리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
1901 사토 미츠오(佐藤 密雄 좌등밀웅 さとう みつお、1901-2000)は、仏教学者、浄土宗僧侶。 富山県出身 ) ; 『仏教教団の成立と展開 佐藤密雄集』教育新潮社、1967 (昭和仏教全集); 『律蔵』大蔵出版〈佛典講座〉、1972、第2版1975、第3版1980、新装版2003
1907 라훌라(Walpola Rahula Thero, 1907–1997) 스리랑카 불교 스님, 학자, 작가. 영국 노스웨스턴 대학 역사 종교 교수.
1907 와타나베 쇼코(渡辺 照宏, 도변 조굉, わたなべ しょうこう、1907-1977)は、日本の仏教学者。 「佛教」(岩波新書 1956); 「新釈尊伝」(大法輪閣 1966、新版1990/ちくま学芸文庫 2005)
1912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는 일본의 인도철학자, 불교학자이다. 도쿄 대학 명예교수이며, 일본 학사원 회원. 『佛教語大辞典』刊(東京書籍 全3巻、1981年に縮刷版全1巻が刊). 불교의 세계(김지견 역)
1914 피야다시(Piyadassi Maha Thera (Sinhala: පියදස්සි මහා ස්ථවිරයන් වහන්සේ, 8 1914–1998) 스리랑카 불교 승. The Buddha, His Life and Teachings(1982, 스리랑카),
1920 다야틸레케(Kulatissa Nanda Jayatilleke, 1920–1970) 스리랑카. 불교철학 권위자.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1963)
1936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1936–2014) 스리랑카 출신 불교학자. 불교철학의 역사(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1992)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 s.d.) 태국의 불교학자,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My Political Thought on the life of the Buddha, 2000)」
후지타 코타츠(s.d.)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후지타 코타츠 등 저, 권오민, 민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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