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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Che, Ernesto Guevara, 1928-1967)
1928 게바라(Ernesto Guevara, Che Guevara, 1928-1967)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o, Argentine)에서 태어났다. 맑스-레닌 혁명가.
가족: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Ernesto Guevara Lynch),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Celia de la Serna)[Ana María], 그의 누이(Celia), 동생( Roberto, Juan Martín), 5남매 중 첫째
- 아버지는 교권 반대자였으며 스페인 내전 중에는 공화주의 지지자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을 지지했으며 견고한 반 페론주의자
1932(넷) 어린 에르네스토에게 심각한 천식이 발병.
1948(스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천식으로 병역 면제. 그럼에도 럭비를 좋아했다.
1950(스물둘)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으로 4천 마일이나 되는 여행을 한다.
1951(스물셋) 재학 중이던 1951[1952]년에 나이 많은 친구, 나병학을 전공자인 알베르토 그라나도(Alberto Granado)와 함께 오토바이로 라틴아메리카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오토바이 남미 여행 일기》: 9개월간의 여행
1952 볼리비아에서 1952년 민족 혁명에 이은 노동자의 봉기와 농지개혁을 목격.
[1952 첫째 여행(Itinéraire du premier voyage réalisé en 1952 avec Alberto Granado (lignes rouges = voyage en avion). / Guevara et Granado sur l'Amazone, 1952.]
-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3(스물다섯) 6년 과정 의사 면허 취득.
1953-1956 체 게바라의 둘째 여행(1953-1956).
1953 7월 26일 운동(mouvement du 26 juillet, 1953). 깃발: M-26-7
카스트로의 최후진술 〈역사가 나에게무죄 판결을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178)〉
1954 과테말라에서 게바라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이끄는 급진적인 정부가 미국이 지원하는 카스틸로 아르마스에 의해 무너지고 멕시코로 쫓겨 가야만 하는 모습을 본다.
1955(스물일곱)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저녁 처음 만났다고 한다.)
7월 26일 이후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인 아닌 네 명 중에 한명이 게바라였다.)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 훈련에서 체는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페루 여성인 일다 가데아(Hilda Gadea, 1925–1974: de 1955 à 1959)와 첫째 결혼하여 딸 일디타를 낳는다.
1956[스물여덟] 11월 카스트로와 함께 그란마(le Granma)호 82명과 더불어 출발했다. (큐바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1958 체의 편지(Lettre du Che au CICR, 24 juillet 1958.)
1958[서른]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Le Che à la bataille de Santa Clara, 1958).
1958년 12월 27일 밤, 체 게바라는 340명의 전사를 이끌고 병력이 10배 이상이며 탱크와 전투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12월 28일 새벽, 체의 부대는 산타클라라에 잠입했다.
12월 29일에 제2군을 이끌고 쿠바 제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1959[서른하나] 체게바라와 더불어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ivar, 1901-1973, 쿠바정치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다(1959)
Che Guevara à cheval dans la Sierra Maestra, 1959
카스트로의 혁명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를 역임.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Aleida March (de 1959 à 1967)와 둘째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아이를 갖는다.
1959년 7월 15일, 31세의 게바라는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7월 24일 히로시마현 직원안내를 받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
일본각지를 시찰한 후, 27일에 일본을 떠나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수단, 유고슬라비아, 가나, 모로코를 방문하고 9월 8일에 하바나로 돌아갔다.
- 체 게바라는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처형하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쿠바의 토지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60(서른둘) 5월(?) 10회 아바나에서 ‘헤밍웨이 낚시대회’에,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그의 부인이 함께 갔다. 체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 이 대회 우승자는 카스트로였다.
1960[서른둘] 게릴라 전쟁(La guerra de guerrilla (« La guerre de guérilla »), 1960.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0 체 게바라(당시 산업부 장관), 쿠바에서 시몬 보봐르(Simone de Beauvoir)와 사르트(Jean-Paul Sartre)를 만나다. 사르트르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충만한 인간 존재였다( que le Che était «l'être humain le plus complet de notre époque»).
1961[서른셋] 게바라는 산업장관을 맡아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열린 미주국가연합회의에 참석.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제기한, 라틴 아메리카를 위해 제안된 진보동맹을 맹렬히 비난. *- 그후 4년 동안 그는 쿠바의 대사로서 세계를 순방한다.
1961 브라질 대통령 과드로스(Jânio Quadros, 1917-1992)으로부터 훈장(l'Ordre de la Croix du Sud)을 받음:
1963년 사진 –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알레이다 마르치, 카밀로, 일다, 체 게바라, 세리아, 알데이다(De gauche à droite: Aleida March, Camilo, Hilda, Che Guevara portant Celia, Aleida, 1963).
1964[서른여섯] 가명여권 사용. 라몽 베니테 페르만데스(Ramón Benítez Fernández), 은밀한 여행을 하였다. .
1964년 12월 체게바라는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미국 뉴욕에 갔다.
1965[서른일곱] 모스크바 방문(Che Guevara à Moscou, 1965).
이집트 낫세르 만남(Che Guevara et Gamal Abdel Nasser, 1965).
[체는 아르헨티나 원정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선발대가 자리를 잡으면 자신이 뒤따라 들어갈 계획이었다. 전직 저널리스트였던 마세티를 사령관으로 한 원정군은 체코, 알제리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들어가 살타에서 게릴라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살타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965 3월 체 콩고로 출발 - 떠나기 전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긴 편지 마지막 구절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oria Siempre)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1965 [4월] 게바라는 직접적으로 세계 혁명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쿠바를 떠난다. 그는 아프키라를 여행하고 결국 콩고에서 게릴라전에 뛰어든다. [콩고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1965년 10월 3일에 피델은 체의 작별편지를 새로운 쿠바 공산당 중아위원회의 행사에서 공개했다. -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oria Siempre)
1966년 7월 (콩고에서 실패한 후) 체는 피델을 제외하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하고 쿠바로 돌아왔다. 체는 또다시 수십 명의 게릴라와 함께 볼리비아의 혁명을 실현하지 위해 1966년 10월 쿠바를 떠났다.
1966[서른여덟] 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 (1966-1967).
1966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는데, 일련의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스무 개의 새로운 베트남'의 도화선이 될 것을 목표로 한다. 게바라는 변장을 하고 11월 볼리비아로 들어간다. -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궁극 목표는 아르헨티나였다. - 앤더슨(Jon Lee Anderson, 1957-) 견해]
『쿠바에서 사회주의와 인간(Le Socialisme et l'Homme au Cuva, 1966)』,
1967[서른아홉] 미 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과의 수개월에 걸친 크고 작은 접전 끝에 10월 8일 바예그란데 마을 근처에서 사로잡힌다.
- 볼리비아 장교가 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마지막 질문을 했었다. "게바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체는 대답했다고 한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 바리엔토스 대통령에 의해 처형된다.
1967 10월 9일 그는 볼리비아 라 히게라(La Higuera, Bolivie)에서, 미국 CIA에 의해 암살 당했다.
- 10월 10일 미국 CIA는 체게바라 사진을 발표했다.(Exposition du corps de Che Guevara à Vallegrande. Photo prise par un agent de la CIA, 10 octobre 1967.)
- 그는 자신이 처형당할 때 12,000달러의 현금과 롤렉스(Rolex) 손목시계를 지참하고 있었다. 현금은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였으며 롤렉스 손목시계는 그 시계가 정확도 높은 시계였기 때문에 게릴라 전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소유하고 있었다. [이 돈에 관해서는 검증이 안 된다.]
- 어록 중에서 “만약 우리들에게 공상가 같다고 한다면, 구제할 방법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몇천 번이라도 대답해 주지. [바로 그렇다!]”
- 3 쿠바 페소 지폐의 인물이 체 게바라이다.
*
1967년 10월 8일,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칭했다.
1968 『볼리비아에서 일기(Journal de Bolivie, 1968)』
1981 장 코르미에(Jean Cormier, 1943-2018)는 1981년 남미를 여행하다가 체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린치((Ernesto Guevara Lynch)를 만난 것을 계기로 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산타클라라 혁명광장 가장자리 중심에 체 게바라 동상을 세웠다. 20주년이다.
1990년대 초 쿠바에 가서 만든 MBC 특집 다큐멘터리 3시간 방영
1997년 7월 양손이 없는 체의 유골이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 감식팀에 의해 발견되었다(다른 9명의 시체와 함께). 체의 유골은 비포장 활주로 아래쪽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다른 여섯 구의 유골과 함께 누워 있었다. 발굴 후 게릴라들의 유골은 관에 담겨 쿠바로 옮겨져 그해 10월 산타클라라 시 외곽에 지어진 웅장한 묘지에 공개 이장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후 체 게바라가 드디어 제2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7 존 리 앤더슨(Jon Lee Anderson, 1957-), 뉴욕지 해외 특파원 기자의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Che Guevara: A Revolutionary Life, 1997) 출간 (번역, 허진, 안성열(옮긴이) 플래닛, 2010-07-29, 1176쪽)
2006 Vente de tee-shirts du Che lors de la fête de l'Humanité en 2006.
2007년 10월 8일, 그의 서거 40주년.
2008 딸 알레이다 게바라도 2008년 5월에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방문하였다.
**연관 인물들 **
1809 구티에레즈(Juan María Gutiérrez, 1809-1878) 아르헨티나, 정치가, 법학자, 측량사, 시인,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작성자. 외무부장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총장.
1884 펠리페(León Felipe, né Felipe Camino Galicia de la Rosa à Tábara, 1884-1968)(à 84 ans), 스페인 시인, 극작가
1892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1892-1938), 시인, 페루의 광산촌 산티아고 데 추코에서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혼혈로 태어났다. 1915년 대학을 졸업.
1899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 미국의 소설가, 저널리스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1936년 스페인 내전 참전),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쿠바에서),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01 바티스타(Rubén 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1901-1973) 쿠바 군인, 미국 앞잡이 독재자. 1952년 쿠데타. 1954년 집권. 1959년 카스트로에 의해 축출.
1902 기옌(Nicolás Cristóbal Guillén Batista, 1902–1989), 쿠바의 시인, 언론인, 정치 활동가, 작가.
1904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
1905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다재다능한 철학자로서 노마드처럼 살았다.
1908 보브와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 프랑스 여성 철학자. 페미니스트.
1925 가데아(Hilda Gadea Acosta, 1925–1974) 여성 혁명가, 페루 경제학자, 공산주의자, 작가. 게바라의 첫 부인(de 1955 à 1959). - 이 여성이 체에게 맑스와 레닌을 가르쳤다고 하다.
1926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 1959년 체게바라와 더불어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ivar, 1901-1973, 쿠바정치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1959) 쿠바의 혁명가이며 최고 수반>
1928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it Che, 1928-1967), 저술 게릴라 전쟁(La Guerre de guérilla), 쿠바에서 사회주의와 인간(Le Socialisme et l'Homme au Cuva, 1966) 볼리비아에서 일기(Journal de Bolivie, 1968)
1928 코르다(Alberto Díaz Gutiérrez, 예명 Alberto Korda, 1928-2001) 쿠바 하바나 태생. 쿠바 사진가. 체게바라 사진(Che Guevara, le Guerrillero Heroico, 1960)으로 유명하다. 이를 변형한 유명한 체의 이미지는 피트파트릭이 한 것이라 한다.
1932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1932-1959)[스물일곱] 쿠바의 혁명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군인, 정치가. 쿠바혁명참가, 아바나 입성. 쿠바혁명 3걸, 피델, 체, 카밀로.
1936 볼프 비어만(Karl Wolf Biermann, 1936-) 독일 시인, 구동독의 반체제 저항시인. 체 게바라의 시를 남겼다.
1940 드브레(Régis Debray, 1940-) 프랑스 작가, 미테랑 정부에서 고급공무원, 1960년 파리고등사범학교(ENS) 수석입학, 1965년 철학교수자격 통과, 공산주의 학생동맹, 카스트로의 초청으로 1965년 말에 큐바로 가서, 그리고 체게바라와 볼리비아로, 1967년 게바라와 함께 있었다.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어 감옥생활. - 정보과학 영역에서 매체학(la médiologie)을 창안했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 서양에서 시선의 역사(Vie et mort de l'image. Une histoire du regard en Occident, 1991)
1943 꼬르미에(Jean Cormier, 1943-2018) 바스끄 출신 프랑스 기자, 작가, 영화감독. 럭비와 체 게바라의 저술들로 유명하다. Che Guevara, 2002 Che Guevara: compagnon de la révolution, 2008 체 게바라: 계시들의 시기(Che Guevara, le temps des révélations, 2017(Le Rocher, 528 p.)
1946 피츠파트릭(Jim Fitzpatrick, 1946-), 아일랜드 예술가. un artiste irlandais connu pour avoir modifié la photo du Che prise par Alberto Korda ; 짐 피츠(Jim Fitzpatrick)의 체 게바라 초상화(사진)를 변형.
(5:07, 56LLF) (5:24, 56LMA)
** 우리나라에서 체에 대한 소개 – 엄청 많다(정리 중)
1997 CHE 체의 일기, 체 게바라 저, 거리문학제, 1997년 10월 31일, 207쪽. - 이 책 <체의 일기>는 그가 볼리비아 혁명전에 본격 참여한 66년 11월 7일부터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돼 처형되기 이틀 전인 67년 10월 7일까지 쓴 메모형식의 일기다. |
2000 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 이재석 역, 이후, 2000년 09월 30일, 208쪽 - 스물셋 청년 시절의 여행 일기이다. 1951년에서 1952년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이 일기에는 백인의 후손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의사의 길을 걷던 한 젊은이의 열정과 모험 그리고 인간애, 세계애[cammaradrie, cosmopoltan]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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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 장 코르미에 저 | 실천문학사 | 2005년 05월 25일, 720쪽.
꼬르미에(Jean Cormier, 1943-2018) 바스끄 출신 프랑스 기자, 작가, 영화감독. 럭비와 체 게바라의 저술들로 유명하다. 체 게바라(Che Guevara, 2002, 체 게바라, 혁명의 동무(Che Guevara: compagnon de la révolution, 2008, 체 게바라: 계시들의 시기(Che Guevara, le temps des révélations, 2017)(Le Rocher, 528 p.)
먼 저편: 체 게바라 시집
체 게바라, 이산하(옮긴이), 문화산책, 2002-11-25, 125쪽
이산하(1960-) 경북 영일,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1982년 필명 ‘이 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던, 운동권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 최대한 원전의 뜻을 왜곡시키지 않는 선에서 의역을 가미한 시 속에는 레닌과 트로츠키, 모택동, 보들레르, 랭보, 네루다 등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시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한 혁명가의 초상과 단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개정판 ]
체 게바라 저 | 황매 | 2012년 06월 15일, 287쪽
역자, 홍민표: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현재 출판 기획과 편집을 하고 있다. 역서로는 『레닌』이 있다.
- 그 문장 속의 아름다움과 야생성은 이 낭만적인 인물에게 준 감동을 우리에게도 불어넣어준다. 거침없고 생기가 넘치며 재치와 유머가 빛을 발한다.
체 게바라 자서전: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의 삶 [ 개정판, 양장 ]
체 게바라 저 | 황매 | 2007년 09월 07일 | 456쪽 원제 : Self Portrait Cheguevara
역자 : 박지민,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 『초록빛이 사라지고 있다』등을 번역했다.
- 지난 세기 낭만적인 혁명가로 ‘소비’되었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맑스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던 정치가로 활발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 게바라 자신이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쿠바의 ‘체 게바라 연구센터’와 호주의 ‘오션출판사’가 체의 모든 기록들을 모아 전집의 형태로 기획한 15권 시리즈 가운데 첫 권으로 윤문이나 가필이 아니라, 전적으로 체 게바라 자신이 남긴 수많은 육필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저 | 실천문학사 | 2009년 06월 26일 316쪽
구광렬(具廣烈, 1956-), 멕시코국립대학교에서 중남미문학 박사. 시인
- 1967년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닌 홀쭉한 배낭 속에는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나머지 한 권의 노트는 시가 적혀 있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베일에 싸여 있었다. 체 게바라가 빼곡히 써 놓은 69편의 시. 그는 전운이 감도는 전장에서 시를 필사했다. 여기에는 그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 1902–1989), 레온 펠리뻬(León Felipe, 1884-1968)의 시가 담겨 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아프리카 시절(1965년 3월~1966년 3월), 쿠바 시절(1966년 4월~1966년 10월), 볼리비아 시절(1966년 11월~1967년 10월 초) 등 3기로 나누어 69편의 시들을 살펴보았다.
구티에레즈(Juan María Gutiérrez, 1809-1878) 아르헨티나, 정치가, 법학자, 측량사, 시인,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작성자. 외무부장관,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총장.
체 게바라, 혁명적 생애(Che Guevara: A Revolutionary Life, 1997)
존 리 앤더슨(지은이), 허진, 안성열(옮긴이) 플래닛, 2010-07-29, 1176쪽
존 리 앤더슨(Jon Lee Anderson, 1957-)「뉴요커」지의 해외 특파원인 저자
허진(옮긴이) 서강대 영어영문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
안성열 (옮긴이), 한국외국어대학교 무역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
- 1992년 존 리 앤더슨은 지난 30년간 남편과 관련된 출판물을 위해 입을 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체의 미망인 알레이다 마르치(Aleida March (de 1959 à 1967))로부터 죽은 남편의 전기를 집필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 그리고 볼리비아 정성들과 체를 죽인 장본인인 마리오 테란까지 만났다. .. 1995년 11월, 앤더슨은 마침내 세기적인 특종을 잡았다. 퇴역한 볼리비아 장성 마리오 바르가스 살리나스의 자택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던 중에 그로부터 28년간 비밀에 묻혀 있던 체의 매장지에 대한 언급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 발굴 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마침내 1997년 7월 양손이 없는 체의 유골이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 감식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체의 유골은 비포장 활주로 아래쪽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다른 여섯 구의 유골과 함께 누워 있었다. 발굴 후 게릴라들의 유골은 관에 담겨 쿠바로 옮겨져 그해 10월 산타클라라 시 외곽에 지어진 웅장한 묘지에 공개 이장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후 체 게바라가 드디어 제2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6:38, 56LLF) (7:14, 56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