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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테일러 [Robert Taylor]
생년월일 : 1911. 8. 5 ~ 1969. 6. 8
출생지 : 미국 네브래스카
신 장 : 182cm
헐리우드의 미남 배우 계보는 무성 영화 시대의 루돌프 발렌티노로부터
시작하여 타이론 파워-게리 쿠퍼-로버트 테일러-록 허드슨-로버트 레드
포드를 거쳐 탐 크루즈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다 프랑스 배우이긴 하지만
알랭 들롱을 빼 놓을 수 없겠지요.
그중에서 특히 빛나는 인물은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1911~1969)
입니다. 선이 굵으면서 부드러운 조각 같은 외모인데, 영화 전문가들과
일반 대중 모두 그를 고전적인 의미에 있어서 사상 최고의 미남 배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갈매기 눈썹에, 우뚝한 코,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 희고 고른 치아,
단단한 체격 등 어디 한 곳 흠잡을 구석이 없는 완벽한 미남입니다. 약간 처진 윗 입술끝이 웃을 때
면 활처럼 휘어 올라가 달콤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출연작은 ‘춘희(Camille, 1936)', '애수(Waterloo Bridge, 1940)', '쿼바디스
(Quo vadis, 1951)’, '흑기사(Ivanhoe, 1952)' 등이 있습니다. 주로 멜로물과 사극에서 활약하면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만 그 흔한(?)아카데미상 하나 받지 못 하였고, 영화사에 걸작으로 칭송되는
작품도 없는 불운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대표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대의 최고 스타인 비비안 리(Vivien Leigh)와 함께 출연한 '애수'
입니다. 안개 낀 워털루 다리 위에서 마스코트를 매만지며 회상에 잠기는 신으로 시작되는 비련
의 멜로물인데, 이 영화에서 그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장교로 출연하며 세기의 연인이 되었지요.
사실 그는 군복을 입은 모습뿐만 아니라 사극, 현대물, 전쟁영화, 서부영화를 막론 어떤 영화에
서든 모든 의상이 다 잘 어울렸는데, 그 만한 배우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올드 팬들의 기억
에 남아있는 서부영화 ‘고스트 타운의 결투(The Law And Jake Wade, 1958)에서는 위 아래 검정
일색인 옷에 검정색 모자를 쓰고 출연하는데, 악한인 리차드 위드마크에게 시종 끌려만 다니는
역할이어서 답답했지만, 스타일은 역시 멋스러웠습니다.
또 한명의 액션호남스타인 스튜어트 그랜저와 함께 나오는 해양활극영화인 ‘형제는 용감하였다
(All The Brothers Were Valiant, 1953)’ 를 보면 그가 얼마나 카리스마 넘치는 미남스타인지 진가
를 알 수 있습니다. 로버트 테일러가 빛나는 흑요석 같았고, 스튜어트 그랜저는 채석장의 칙칙한
화강암 같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요. 영화에서 로버트 테일러의 매력이 스튜어트 그랜저를
압도 합니다. 그 멋있는 스튜어트 그랜저를.
그는 또 다른 대표작인 쿼바디스에서 로마제국의 군단장으로 출연, 강인하고 절제된 매력을 보여
주었는데, 함께 출연한 데보라 카의 청순한 아름다움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데보라 카도 일세
를 풍미한 배우였었는데, 고귀함을 타고난 이 여배우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하여 안타
깝습니다. 후보에는 여섯 번이나 올랐지만, 고작 말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는 데 그쳤지요.
우리나라 여성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3대 멜로영화로는 '애수'를 비롯하여 전 회에서 소개하였던
‘카사블랑카’와 콧수염이 멋있는 로날드 콜맨, 꿈꾸는 듯한 눈빛의 그리아 가슨이 출연한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 1942)' 를 들 수있습니다. '마음의 행로'는 1차 세계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를 그의 아내이자 비서인 여주인공이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내용의 영화
인데,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때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요.
참,'애수'에서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무도회에서 춤출 때 깔리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애잔한 선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선율이 두 사람의 파국을 암시하지요.
한때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영웅 미후네 토시로(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음)가 동양의 로버트 테일러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짙은 눈썹과 강단있는 외모
는 로버트 테일러보단 오히려 ‘혈(血)과 사(沙)’에 나오는 타이론 파워를 닮은 듯합니다.
아름다운 '비비안 리' 와 다정한 미소가 일품인 로버트 테일러와 의 가슴아픈 사랑
의 눈물과 안개 자욱한 워털루 브릿지 지금은 찿아보기 조차 힘든 흑백영화 의 명작
이라 생각이 든다. 여성용 멜로 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준 이 작품은 원작은 원래 반전
적 색체가 짙은 작품이라 하는군요. 그것을 각색해서 주인공의 슬픈사랑 이야기쪽
으로 촛점을 맞추어 애정영화 로 변화시키고 매력적인 배우들을 기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운 영화 라고 합니다. 1940년 작품이니 엄청 오래된 영화
바로 1940년대와 50년대 영화팬들을 사로 잡았던 최고의 미남배우
로버트 테일러다. 물론 예명이다.
본명은 Spangler Arlington Brugh 라는 다소 어려운 이름.
그저 여자 관객들을 끌어모을 만한 잘생긴 남자배우감으로 발탁되어 배우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한 그는 그 수려한 용모 덕에 평단의 혹평을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빼어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촬영장에서 성심성의를 다하며 동료와 스탭들의 호감을 사는 성실남이었다. 1936년 당대의 대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공연한 춘희(Camille)에 이르러 마침내 '로버트 테일러도 연기를 할 줄 안다'는 익살스런 호평을 얻었고 진정한 연기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귀족적 풍모의 당당한 미남, 로버트 테일러의 출세작은 단연 애수(Waterloo Bridge, 1941)다. 비비안 리와 공연한 이 영화 한 편으로 그는 단박에 전세계 여성팬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워털루 브릿지 위에서 중년의 장교가 추억에 잠긴다. 공습을 피하는 도중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젊은이들의 운명은 전쟁의 와중에 얽히고 꼬여, 결국 여자 스스로 사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트럭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사랑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가슴 아프게 끝나버린 비련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전세계 영화팬들로 하여금 눈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시게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무튼, 이 영화 한 편으로 로버트 테일러는 풋내기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면서 당대의 배우로 올라섰고, 동시에 손에 닿을 수 없는 헛된 연모의 대상으로 전세계 여성의 가슴 속에 깊숙히 자리잡았다
애수 중에서... 비비안 리와는 두번 째 공연작이다. 하지만 애초 비비안 리는 남자 주인공 로이 역을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기를 원했고, 로버트 테일러가 낙점된 데에 불안해했다. 당시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로버트 테일러는 정말 그림같은 남자지만 분명 미스캐스팅'이라고 불평했지만, 나중에 비비안 리는 개인적으로 '애수'를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이라 밝힐 정도였다. 좀 웃기는 얘기다. 왜냐면 이 당시에는 이미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미 서로의 가정을 박차고 나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둘 다 서로의 배우자가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꽤 오래 지속됐다. 아무튼 결과론이지만, 남자 주인공 역에 로버트 테일러를 캐스팅한 것은 MGM 영화사 최고의 선택이었다. 1년 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세계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해, 캐스팅 문제까지 입김을 불어넣을 힘이 있던 비비안 리가 계속 고집을 부려 로이역을 올리비에 경이 맡았더라면... 아마도 영 딴판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 1911년 네브라스카 출신인 그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담당교수를 무척이나 따랐던 모양이다. 그가 LA의 포모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테일러도 그를 따라 학교를 바꿀 정도였다. 그 결정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연극활동중 그는 MGM 영화사의 스카우터에게 픽업이 된다. 빼어난 용모 덕을 본 것이지만, 이후 그의 용모는 배우경력에 실상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가 다양한 배역을 시도하는데 오히려 장해가 되었고, 연기력을 인정받는데도 걸림돌이 된 것이다. 헐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미남자인 그의 주변에 여자가 들끓지 않았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고질적인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그리 믿는다.) 라나 터너 바바라 스텐윅 1939년 당대의 여배우였고 네 살 연상인 바바라 스탠윅(두번째 결혼)과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유독 많은 작품을 공연한 에바 가드너(이 여자의 남성편력은 대단히 유명하다)를 비롯한 다수의 여배우들과 심심찮게 염문을 뿌리며 바바라의 속을 끓인 끝에 결국 1951년 이혼했다. 로버트가 라나 터너와 바람을 피운 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니 그녀도 잘생긴 남편 때문에 무척이나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같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대면대면 지내지 않았으니 그녀는 로버트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이후 그녀는 로버트 테일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수입 15%를 부양비로 받으며 독신으로 늙었다
바바라 스탠윅과 공연한 'This is My Affair(1937)'.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대여배우 바바라 스탠윅은 로버트 테일러에게 푹 빠져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 제목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일찍이 비행기 조종을 배웠던 로버트 테일러는 2차대전 중에 해군에 입대해 항공교관으로 복무했다. 비행과 사냥, 낚시여행을 즐겼던 그는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 이름을 바바라 스탠윅의 애칭인 '미시'로 붙일 정도였으니 꽤나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1940년대의 섹스 심볼'로 알려진 에바 가드너는 배우인 미키 루니와 이혼후, 유부남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가 가정을 박차고 나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대서특필 되었고 그후에도 하워드 휴즈 등 명사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헤밍웨이와도 교분이 있었던 그녀는 그 인연으로 스페인에서 유명 투우사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 등 숱한 남성편력을 자랑했다. 그런 그녀가 몇 편의 영화를 공연했던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를 그냥 놔두지 못했던 것은 뻔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혼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했었나 보다. 말년을 좀 비참하게 보낸 그녀를 위해 거액의 병원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례식 때는 수백명의 조문행렬 뒤를 검정색 리무진 한 대가 따랐는데, 그 속에 슬픔에 잠긴 시나트라가 타고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51년 그의 이름을 다시 횃불처럼 밝혀준 명작이 탄생했다. 데보라 카와 공연한 쿼바디스(1951)다. 네로시대의 로마 장수와 박해받았던 기독교도 처녀와의 사랑을 그린 대하역사물로 큰 히트를 모아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110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단다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쓴 로마 장수의 고전적 카리스마가 썩 잘 어울린 로버트 테일러에게 적역이었다고 할만한 이 영화에서 사실 남자 관객들은 도도한 고전미를 자랑하는 데보라 카에게도 넋이 나갔다. 특히, 보라색 드레스 차림으로 처형되기 위해 콜롯세움 한 가운데로 끌려나올 때의 그 아플만치 아름답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다. 월터 스콧의 고전을 영화화한 아이반호(1952)에서는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공연, 한 영화에 두 명의 테일러가 이름을 올렸다. 아마 우리나라 개봉명은 '흑기사'였을 것이다. 중고등학생 단체관람을 많이 한 영화 중 하나다. 쿼바디스를 통해 검증된 그의 고전적 이미지로 인해 다수의 사극물에 출연했다. 원탁의 기사들(1953). 근데 또 에바 가드너다. 스튜어트 그렌져와 공연한 형제는 용감하였다(1953). 명작으로 길이 남을 영화까지는 아니었지만, 로버트 테일러의 명성과 독특한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50년대 후반부터 그의 캐리어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제작사를 세워 제작을 겸하기도 하던 그는 말년까지 계속 활동하다가 1969년 폐암으로 죽었다. 향년 58세. 흡연가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한 얘기지만, 그는 상당한 애연가였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절친한 친구였으며,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고인을 기리는 조사를 읽었다.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별을 남겨둔 채로 그는 정말로 밤하늘의 한 점 별이 되었다. 사실, 로버트 테일러는 '불운한 배우'였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가 오히려 배우로서의 성장을 방해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상복도 없었고, 어마어마한 필모그래피를 남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올드 영화팬들의 가슴속에 그는 영원히 '세기의 미남'으로 남아, 전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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