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사람이 입었거나 손때가 묻은 것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물이며 이 정령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장원이나 미용실하면 여자들만이 가는 금남의 영역이었다. 한데 근간 보도된
바로는 서울의 번화가에 있는 미장원이나 미용실에 남자들이 많아 드나들어
여자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하다. 지금 여기에서 남성의 중성화, 여성의
중성화를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도시에서의 미장원이라는 금남 영역에 남자가 드나들어 중성화하기 시작한
것은 1__2년밖에 안 된다.
그리하여 지금은 '유니섹스 뷰티살롱'이라 하여 남자의 이발은 여자의 미장원에
가서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고, 따라서 미국 주요 도시의 도심지에는 남자
전용의 이발소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홍, 청, 백의 나선형 이발소 표지는 지방에
가지 않고는 찾아 보기 힘들게 돼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천한 유니섹스 미장원이 한국에 예민한 감염도를 보인 것은 주의를
끈다. 대체로 외래 문화에 예민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피부로 느껴온 터이지만
이같은 예민한 문화감염에 어떤 한국문화의 특질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발소 가는 것이 두려웠다. 소독약내가 풍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수술도구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는 이발소가 어딘지 병원만 같곤 해서
시골의 미개 환경에서 자랐던 탓인지 두렵기 그지 없었다. 이 잠재의식 탓인지 자란
후에도 이발소 기피증은 여전하였다.
런던을 여행하던 중, 격식을 갖춘 예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이발소를
찾아갔다. 물론 나의 생리에 따라 큰 길가로부터 들어가 있는 허술한 삼류 이발소를
찾아들었던 것이다.
들어서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발의자였다. 박물관에서나 보듯한 낡고 손때가
번지르르한 나무의자였기 때문이다.
치과병원의 의자만큼 온갖 장치와 장식이 붙어 있는 한국의 최신형 이발의자와
너무나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쿠션도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자마자 두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 팔꿈치가 닿는 부분이 오목하게 패여 있음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그 매끄럽게 패인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일부러 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뭇 사람의 팔꿈치의 마찰에 의해 파여진 성상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 성상에 압도되어 이 이발의자는 언제 때 것이냐고 물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발사의 대꾸가 1809년에 4대조 할아버지가 이곳에 이발소를 차릴 때 맞춘
것이라 했다.
곧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4대째 자기가 가업을 물려받았으며 곁에 있는 한
청년을 가리키며 저 아들이 가업을 물려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의자를 신형 의자로 바꾸고 싶은 의사는 전혀 없다 하고 2백년 된 의자를
후대에 물릴 뜻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수동장치에서 전동장치로 다시 세면장치로부터 마사지장치로 마냥 모델 체인지를
숨가쁘게 해온 한국의 이발의자에 대해서 이분에게 말해 준다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이같은 소비구조를 둔 영국문화와 비겨 볼 때 한국의 유니섹스 미장원 대두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대체로 유럽의 소비수요라는 것의 구조는 한국이나 미국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국 가정에 초대받아 가보거나, 또 한국 친구들이 세들어간 집을 가보면 그 집에
설비돼 있는 세탁기나 냉장고, 청소기 등은 대체 20년 이상된 것들인데 예외가
없었다. 가구도 그렇다. 가구 모델이 한국처럼 10년 단위로 바뀐다면 유럽 사람들의
그것은 100년 단위로 바뀐다. 그만큼 낡고 묵었다.
런던에서 전기기구점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물론 최신형 기구도 있지만
한국에서 일제시대에만 보았듯 한 낡은 기구부속들도 적지 아니 진열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50년 전에 샀던 전기기구를 그대로 쓰고 있는 사람이 많기에 그같은
부속이 계속 팔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낡더라도 쓸 수 있는 데까지 쓴다는 것이 유럽에 있어 소비라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소비유형은 곧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의 실용원리와는 관계없이
세탁기든, 텔레비전이든, 가구든, 소파든, 자동차든 항상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개발되어 눈부신 신진대사 기능으로 차례차례 버리는 그런 소비문화다. 달리 말하면
한국에 있어 이같은 기계적 내구소비재들은 문화적으로 내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용과는 동떨어진 왕성한 새모델 지향의 소비구조 때문에 광고의 범람도 한국과
미국은 유사점이 있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북구에도 광고란 거의 부재에 가깝다.
물론 런던의 지하철이나 에스컬레이터의 양쪽에 광고가 많이 나붙어 있고 신문에도
광고난이 있으며 TV의 방송에도 커머셜은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번잡하지 않고 또
극성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별반 어필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문광고 말고도 신문에 끼여 든 10여 종의 광고 쪽지의 홍수,
10분이 멀다 하고 튀어나오는 TV의 커머셜, 우편을 통해 들어오는 할인 쿠폰,
전화를 통해 침투하는 상품권유, 거기에 문을 두들겨대는 각종 세일즈맨....
뭣인가 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게끔 한다.
유럽의 장사들은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인지 상품을 지키고 있는 사람인지 분간을
못할 만큼 손님에게 무감동하다. 큰 가게든 작은 가게든 물건을 팔기 위한 어떤
작위를 전혀 볼 수가 없다.
성냥 같은 서비스 용품을 손님에게 공짜로 주는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서 한국과
일본과 미국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에서 성냥이 필요하면 3펜스 내지 5펜스를 내고
사지 않으면 안 된다. 라이터가 영국에서 별나게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이 성냥을
산다는 번거로움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와 같은 소비 패턴의 차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시간관의 차이다. 한국인은 대체로 유럽 인에 비해 시한 감각이 짧고 빠르다. 곧
어느 짧은 시한 안에 무엇인지 해내야 하며 그 시한이 지나면 또다른 시한 속에
들어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시한의식이 강하다. 터키에는 '오늘 일을 못다하면
내일이 있다.'는 격언이 가치를 발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이 가치를 돋보이고 있다.
변화가 심한 한국의 기후풍토 아래서 농사는 어느 시한 안에 무슨 일을 꼭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한의 연속으로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지방에서 어느 시기의 닷새 동안에 초벌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져 농사를
망치거나 감수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그 시한 안에 반드시 초벌김을 매야 한다.
그런지 다시 며칠 후에는 그날부터 닷새 안에 두벌김을 매지 않으면 안 되게끔
시한의 구속을 받는다.
이같은 한반도의 시한성 농사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소비의 시한성을 짧게
하지 않았나 싶다. 둘째로 행복관의 차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있어
'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미래의 문제다. 남이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어느 사람에게
행복 여부를 물어도 그 자신이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이란
언제나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상태이며 현재는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래에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 한국인과 또 미국인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향유하고 있는 각종 가구나 세탁기,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등 물질문명의 도구들로 만족을 못한다. 보다 좋고 크고 비싼 새것을
욕구하며 살기에 만성적인 욕구 불만에 걸려 있는 것이다. 곧 객관적 판단은
아랑곳없이 주관적으로는 항상 불행하다. 런던교외에서 가난하게 사는 노동자와
농민을 상대로 '소득이 지금보다 갑절로 늘었다면 무얼 하겠는가'하는 설문 조사
결과를 본 일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설문에 많은 대상자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고 '지금 수입으로 그다지 큰 불편은 없다', '돈보다
여가가 더 필요하다', '그 돈으로 장미나 가꾸겠다'는 등 현재 자신이 영위하고 있고
생계에 만족을 하고 있음이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외국문물이나 새로운 문물에 예민한 한국인의 체질은 이같은 행복관의 차이에서는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겠다.
미국의 지방신문을 보면 러미지 세일(rummage sale)이라는 표제의 광고가 자주
눈을 끈다. 우리나라 신문들의 구인, 매매, 구직, 개인교수 등, 3행 안내광고처럼
러미지 세일이라는 항목 아래 시일과 장소를 명시해 놓고 있다.
러미지란 낱말이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본래 색출, 검색이라는 말인데
쓸모없는 잡품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곧 러미지 세일은 쓸모없는 생활도구를 파는 수시성의 미니 개인시장이다.
우리 생활주변을 돌아보면 쓸모는 없지만 아직은 쓸 수 있는 생활 도구가 적지
아니 널려 있다. 유행에 뒤늦은 옷가지, 싫증난 넥타이, 성장한 후의 아이들 옷가지,
세트에서 짝을 잃은 가구나 식기 등등 어쩌면 쓰고 있는 생활도구보다 쓰지 않고
있는 생활도구들이 더 많은 주택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 쓸모없는 생활도구가 어느 만큼 축적이 되면 지방신문에 이
러미지 세일란에 광고를 낸다. 그러고서 주로 주차장 공간에 이 쓸모없는
러미지들을 진열해 놓고, 광고 보고 이 미니시장을 찾아온 고객들에게 판다.
러미지 세일을 개리지 세일로 통칭하는 것은 이 중고품 거래가 주로 주차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클라호마를 여행할 때 나는 일부러 이 개리지 세일을 하는 한 회계사부인의
차고를 구경한 일이 있다.
차고 안에 비닐 끄나풀로 줄을 매고 중고품 옷가지 10여 점을 걸어 놓았으며,
벽돌을 쌓아 판자로 걸쳐 놓고 그 위에 중고 주전자며 아이들 노리개, 그리고
남편이 습득하고 난 회계관계 서적 너댓 권 등 잡품이 놓여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중고 브래지어를 들고 자기 젖가슴에 맞춰보고
있었으며 대여섯 살 돼보이는 꼬마 손님이 로켓 노리개의 시동법을 주인에게 물어
보고 있었다. 값은 이 미니시장의 주최자가 임의로 정하긴 하지만 대치로 1달러를
넘는 것이 별반 없었다. 체크무늬의 소녀용 스커트가 50센트요, 노리개들은 10센트
안팎이었다. 이 미니시장에서 나온 모든 상품을 판다고 해야 겨우 30달러 내외 밖에
안되는 돈이다. 따지고 보면 품삯도 안 된다. 개리지 세일이란 이득을 보는
'장사'라기보다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쓸모 있는 사람에게 양도하는 그런 정신적
배려를 기조로 한 거래습속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미니시장의 안주인으로부터 커피 대접까지 받았는데, 내가 외국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찾아온 손님에게 차대접을 하고 세상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일종의 낙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개리지 세일의 번창뿐만 아니라 중고품에 대한 미국 사람의 감각이 우리 한국
사람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물자가 많은 미국인지라 쓰던 물건이 좀 낡거나 부서지면 곧잘 버리는 문화의
범주에서 미국 사람들을 이해하고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그들에게
체질화된 중고품에 대한 감각 때문인지 오히려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더 잘
버린다.
뉴욕의 한국인 친지집에 머물고 있었을 때 일이다.
날을 정해서 쓰지 못할 폐품이나 쓰레기를 집 앞에 내놓으면 시에서 트럭을 돌려
거둬가는데, 이날 한국인 친지는 낡아서 삐걱거리는 의자 하나를 버리고자 쓰레기
봉지와 더불어 집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이 친구는 시의 트럭이 오기 전에 그
의자가 먼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면서 나를 창가에 불러대는 것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애완용 개를 차의 뒤칸에 싣고 지나가던 한 중년의 백인
부인이 차를 멈추고 이 낡은 의자를 트렁크에 싣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부인이 몰고
있는 차는 나의 친지가 몰고 있는 차보다 세 곱절이나 비싼 고급차였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갓난아이가 있는 집에 초대받아 갈 때 선물로서 그 아이가 입을 헌 옷을 갖고
간다면 우리 한국에서는 평생 원한을 살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입던 옷을 선물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그러기에 웬만한
가정에서 아기들 옷은 남의 집에서 선물받은 헌옷으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의 백화점에 가면 어린이 복장 코너가 가장 화려한데 비해 미국
백화점에 가면 가장 초라한 코너가 돼 있는 이유를 알 만하였다.
블루진은 낡아야 좋고 또 꿰맨 것일수록 멋이 나며 해어진 엉덩이나 무릎에
패치를 대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멋이 되고 유행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미 선망의 이병적인 단계에까지 고양되고 있는 한국에서의 사정이지,
미국 사람들은 멋도 유행도 아무것도 아니다. 진스문화란 곧 낡은 것일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중고품 문화에서 파생된 필연이지 멋이나 유행과는
인연이 없다.
이 중고 감각과 관련해서 연상되는 것은 카터 대통령 부인이 취임식날 밤의 축하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다.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반대로 6년 전에 만든 중고
드레스였던 것이다. 6년 전이라면 카터가 주지사에 당선됐던 해인 것이다. 그 지사
취임식날 한 번 입고 그 후 백악관에 초대되었을 때 두번째,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날 세 번째 입은 것으로 보도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비난의 소리도 없지 않았다.
일국의 대통령 부인이 일세 일대의 성스러운 날에 중고품 옷을 입는다는 것은
품위에 관한 문제라는 상류사회에서의 비판이 그것이고 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퍼스트 레이디의 둔한 센스의 표현이라는 패션계의 비판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축하 파티에 동부인하고 나온 카터 대통령은 마이크 앞에서,
"여러분, 이 드레스 훌륭하지 않습니까."고 말하여 크게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근검하다는 이미지업을 위한 대통령의 쇼는 아닌 것이다. 바로 중고품 감각을
이뤄 놓은 살아 있는 청교도 정신의 전통을 거기에서 볼 수 있다 하겠다.
이 중고품 감각과 기독교의 상부상조의식이 복합하여 점블세일이라는 다른 한
습관을 이뤄 놓기로 했다. 종교단체든 부인단체든 반드시 단체가 아니더라도 임의로
점블세일을 개장한다. 이 점블세일은 목적이 있다. 베트남 난민을 돕는다든지,
방글라데시의 홍수 난민을 돕는다든지 하는 목적을 내세우고 광고를 하면 뜻 있는
사람들은 중고품 몇 점씩 을 희사를 한다. 그 희사품들을 늘어 놓고 즉매를 하여 그
즉매에서 나온 돈을 목적을 위해 쓴다. 이것이 곧 점블세일이다.
한 달에 한 번쯤 오클라호마의 시민들은 오렌지 빛깔이 나는 엽서 한 통을 받기
마련이다.
구세군에서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중고물자를 얻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가구, 의류, 서적 등 쓸모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지구에서의
회수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 '구세군'이란 붉은 글씨를 써서 불요품을 현관 앞에
내놓아 주십시오.
당일이 되면 '구세군'이라고 크게 써 붙인 진흥의 트럭이 나타나 거리를 돈다.
낡은 옷장이며 테이블 등 대형 가구들도 아낌없이 내놓는다.
구세군은 이 중고품들을 본부로 가져가 그 일부는 무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그 일부는 구세군 직영의 중고품매점에서 일반에게 판다.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양복 아래위 한 벌이 2달러이기에 자선적인 장사이며 그 이득금은
자선이나 트럭 경비에 충당한다.
구세군과 유사한 것으로 굿윌(선의)이라는 조직도 있다.
이 역시 비영리 단체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중고의 생활 물자를
분배해 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구세군과 다른 것은 그 회수방법이다. 굿윌에서는 슈퍼마켓이나 주유소의 입구
같은 사람 나들이가 많은 곳에 커다란 쇠상자를 설치해 놓는다. 이 쇠상자에는
우체통처럼 커다란 투입구가 나있어 불요중고품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곳에 투입할
수 있게 돼 있다.
이같은 일련의 중고품 자선은 중고품에 혐오를 느끼지 않는 문화감각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과 다른 한국의 문화 감각 가운데 하나로서 이 중고품을 둔 혐오를 들 수가
있다. 한국인은 남이 입었던 것이나 썼던 것에 대체로 혐오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체취가 스민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보지 않고 정령적으로 본다. 곧 그
사람의 어떤 정령이 스민 영적인 존재로 본다. 어느 한 사람이 입었거나 손때가
묻은 것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물이며 이 정령적 영역(teritory)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중고품 감각에 대한 세련과 숙달은 소비절약이나 근검절용생활의 내적인
촉진제로서 중요한, 그리고 개발돼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