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30년, 인생 30년, 제2의 고향
이신백
(lsbjohn@naver.com)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 온지 어언 30년이 흘렀다. 도봉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려온 광주산맥(한북정맥)의 축석령을 넘어 사패산을 만들고 남쪽으로 뻗어 솟구친 산이다. 도봉산은 예로부터 수도서울의 진산으로 사랑받아왔다. 도봉산은 세계에서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산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이름 있는 산이기도 하다.
도봉산 기슭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도봉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중건을 위해 헐어 없어져 현재는 빈터만 남아있는 상태다. 도봉구는 훌륭한 인물들도 다수 배출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들이 여럿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법제, 사법, 법률, 윤리의 초석을 놓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자 정치인 고하(古下) 송진우, 독립 운동가요 역사가요 국어, 국문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를 비롯 저항시인 김수영, 벽초 홍명희 소설가 등이 그들이다. 사회운동가이자 종교인이요 언론인 함석헌, 민족문화유산 보존에 기여한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도봉의 인물들이다.
산자수명한 도봉구에는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도 많이 거주해왔다. 지난 11월1일 유네스코(UNESCO)가 동아시아 최초로‘문학창의도시’로 지정한 부천시의 경우 인구가 87만 명인데 등단 문인 수는 70여 명이란다. 도봉구는 인구가 38만여 명인데 도봉문인협회에 등록된 회원수가 120여 명에 이른다. 부천시는 인구 일만 이천여 명에 문인이 한 명꼴인데 도봉구는 인구 삼천여 명당 한 명의 문인이 살고 있는 샘이다. 이만하면 문인, 문향(文香)의 도시라 할 만 하지 않은가.
그뿐인가. 우이동 둘레길 자락에 자리 잡은 도선사를 비롯한 원통사, 망월사 등 사찰과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와 정의공주 묘, 그리고 전형필 가옥 등 서울에선 보기 드문 문화유산들이 있다. 방학동 연산군 묘 앞에는 수령 830년에 높이 25미터 둘레 10.7미터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그 늠름한 위세를 자랑한다. 서울 어느 고을에 이런 곳이 있나. 도봉구를 이루는 창동, 방학동, 쌍문동, 도봉동 가운데 창동은 교통, 문화, 스포츠, 주거의 중심지요 창동역은 전철 1호선과 4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30년 전 도봉은 서울의 외곽지대에 위치하면서 도봉산 등이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공기도 맑은데다 전철 1호선 외에 4호선이 갓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여 주거환경으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생각되었다. 이 시기 난생 처음으로 창동역 서편에 자리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현재의 잠실 롯데 백화점과 롯데월드타워, 올림픽 공원 교통회관 등 지역은 당시 사시사철 공사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에 옛 시영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소음, 진동, 분진 그게 싫었다. 젊을 때라 경제성에 둔감한 탓이기도 하다. 분양받아 이사 온 창동역 바로 옆 S아파트(2동)는 남향으로 14층 동(棟)이었다. 이 동의 12층에 입주했더니 앞에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밤이면 남산 서울타워가 보일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창동역 주변은 대부분 밭이었고 밭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채소류를 재배할 때라 농촌출신에다 농학도인 나는 농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도심지까지 가는 데는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멀다고 느껴지는 게 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후 삼십년이 지난 오늘날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큰 아이와 유치원생이던 작은 아이 모두 창동에서 성장해서 이제는 30대 후반의 사회인이 되었다.
나는 16년 전 퇴직한 그 해에 생애 두 번째로 분양받아 입주한, 문화고등학교 부근의 창4동에 자리한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옆에는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갖춘, 잘 정비된 도로와 방학천이 흐르고 있다. 집에서 나와 5분가량 동쪽으로 걸어가면 중랑천이 있고 개천 양옆으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각 두 줄씩 시원하게 깔려있다. 나는 이 중랑 천변을 따라 의정부 호장교에 이르는 왕복 10Km의 산책로를 20년이 넘도록 한해에 오십여 회 이상 달리고 있다. 이 코스는 나에게 시상(詩想)의 발상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달리다 보면 서서히 시상이 떠오른다. 덕분에 퇴직한 이래 13년 연속 흔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고 수십 편의 시를 써서 내년이면 시인 등단과 함께 시집도 낼 예정이다. 공동주택 22층의 북향 창문을 열면 도봉산의 만장봉과 자운봉의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봉구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잘 갖춰진, 최고의 주거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8만 도봉구민은 어디에서 살던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 나와 10-30분정도면 우이동 둘레길을 걷든 도봉산 등 산행을 하든 도봉산에서 중랑천으로 흐르는 여러 갈래의 개천 길을 따라 걷을 수 있고 문화유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김수영 문학관, 함석헌 기념관에 가면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도봉구에서 삼십년을 살다보니 도봉은 제2의 고향이라기보다는 사실상고향이라고 여겨진다. 부산에서 출생하여 고향인, 제철산업의 메카 광양에서는 실제거주기간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졸업 할 때까지, 그 후 학창시절 방학기간 등 십여 년에 불과하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봉은 불혹(不惑)을 일 년 앞둔 나이에 이사 와서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고희(古稀)가 되도록 살면서 함께 해로하는 부부처럼 도봉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내 고장, 내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정지용 시인은 팔십여 년전 ‘고향’이라는 시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 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진하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울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동방시론> 2호. 1932.7)라고 읊었다. 정지용이 살던 일제 강점기의 고향이 이럴 진데 이십 일 세기를 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말해 무엇하랴.
'헤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했듯이 헤어져 연락이나 만남이 없이 살아온 친인척이나 초, 중등학교 동창생들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애틋한 정(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 아니던가. 사는 곳의 여러 공동체에서 자주만나며 함께 어울리는 일원이 내 친인척이요 친구요 내‘고객’의 시대가 되었다.
서울생활 40여 년 가운데 40-60대 인생의 황금기를 도봉에서 보내보면서 직장 퇴직 후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고장의 발전을 위하여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다. 우리의 쉼터요 일터인, 살기 좋고 편안한 공동주택단지 조성을 위하여 아파트 동(棟)대표를 하면서 도봉구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연합회장을 수년간 맡아 활동하기도 하고 평화 통일 기반조성을 위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팔년간 열심히 활동하며 통일, 안보분야 토론회에 이백여 차례 참석하면서 견문을 넓혀 이 분야에 전문가 수준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도봉문화원을 비롯 도봉문인협회, 도봉서원, 성균관 도봉 유도회의 일원으로서 도봉의 문화 창달에 일익을 하며 산다.
2010년 9월에는 <수필시대>로 한국문단에 등단한데 이어 11월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G20정상회의 때 영어통역 자원봉사를 한 후 수기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신정(新正)때 청와대 초청을 받음으로서 도봉의 이름을 올렸다. 꿈과 희망, 열정과 도전적 자세로 노후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내 고장 발전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간다. 그러기에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학창생활을 통하여 국문학에 대한 기초실력을 갖추고 2월이면 학사 학위를 얻는다. 지난해 9월엔 한국어문회가 시행한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에 합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움을 바탕으로 기회가 오면 재능기부도 하려한다. 올해 12월이면 고희에 이른다. 틈틈이 쓰고 있는 시, 수필, 자서전 글을 모아 어느 시점에 책으로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인생은 어디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어릴 적의 ‘고향’ 개념이 퇴색되어 가는 가운데 기성세대 대부분의 고향인, 쇠락해가는 농촌과 쇠퇴산업이라는 농업을 되살리기 위해 ‘고향세’를 신설하자는 운동이 농민단체들과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현실에서 수십 년 살아온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해에는‘제2의 고향 사랑’운동을 펼쳐보면 어떨까.
도봉 30년, 인생 30년! 제2의 고향, 도봉구! 참여로 투명하게, 복지로 행복하게! 도봉구 파이팅! (끝) (2018.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