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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기억의 비교연구
-비공식 기억을 기억하는 한국 NGO-
이토 마사코(伊藤正子, 교토대학대학원 아시아아프리카지역연구연구과)
들어가며
제1장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개관
제2장 《한겨레 21》의 정보와 한국국내의 반응
제3장 하미촌의 추도비 비문을 둘러싼 대립
1)하미촌에서의 민간인 학살사건
2)추도비의 건립
3)비문을 둘러싼 한국,베트남 각 레벨의 대응
제4장 나와우리의 활동과 하미촌의 살아남은 사람들
결론
들어가며
일본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추진했던 당시의 학생세대인 <단카이>세대가 정년퇴직으로 은퇴하는 시기를 맞아,베트남전쟁을 과거의 역사로 간주하는 장면이 늘어났다.하지만 전쟁당사자인 베트남에서는 전후세대가 70퍼센트이상을 차지한다고는 해도 베트남 전쟁(베트남에서는 항미전쟁抗米戰爭이라고 함)의 승리는 현 정권의 정당성의 원천이며,어렵고 힘든 전쟁을 싸워 빛나는 승리를 거둔 과정 그 자체가 현재 베트남의 공식기억(公定記檍)이 되어 있다. 또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파견한 한국에서는 최근 10년사이에 파월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됨으로 인해 오직 영웅담으로서만 전승되어 왔던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관한 선행연구는,한국의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에 이르러 겨우 몇편의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민주화가 되기 전까지는 군부의 편찬에 의한《파월한국군전사(派越韓國軍戰史)》가 있은 뿐이었지만,90년대에 나온 연구에 의해 파병의 과정이나 동기,배경이 상세히 드러나게 되었다.그 중에는 일본어로 출판된 것,혹은 일본어로 번역된 것,한국인 연구자가 베트남어로 집필한 것도 있으며,본보고의 파병의 정치적 배경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이들 선행 연구에 전면적으로 의거하고 있다([朴根好1993][朴洪英 1993][Ku Su Jeong2000][韓洪九2005][金榮鎬2005]).
본 연구는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상세히 조사,추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경과보고에 지나지 않지만,베트남과 한국에서 수집한 문헌자료와 인터뷰를 토대로 하여,특히, 학살을 경험한 하미촌을 사례로 이하 두 가지 점을 명백히 하고 싶다.
하나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국가수준의 대응과 전쟁피해지의 대응,또한 NGO의 활동을 대비해가면서,전쟁피해에 대한 사죄와,화해가 진전되는 현상을 고찰하는 것이다.그것을 통해 아직까지도 주변국들과 식민지지배와 전후의 화해를 이루지 못한 일본 자신의 존재방식을 재고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
두번째는 피해국과 가해국에서의 전쟁을 둘러싼 공정기억과,공정기억이 될 수 없는 기억의 교착과,민주주의 국가와 기억의 존재방식의 다양성의 관계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다.
제1장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개관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1964년의 통킹만 사건,65년2월의 북폭 개시,같은 해 3월의 미군의 다낭상륙등,베트남전쟁이 점점 심각한 상황이 되어가는 시기와 겹친다.한국은,64년 8월에 비전투부대인 의료반 130명과 태권도교관 10명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제2단계로서 다음 해 65년2월에 군사 원조단 지휘처,육군 야전 공병 1개대대,야전공병 수리유지반,방비대대,운반중대 등,공병부대를 중심으로 합계 2000명이 파견되었다[Ku Su Jeong 2000:64-66].
전투부대를 본격적으로 보내게 된 것은 1965년 10월부터이다.4,480명의 여단(청룡여단)과 13,830명을 포함한 육군 제1사단(맹호사단),군지원사령부,도합 18,500명 이상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Ku Su Jeong 2000:69-72].
미군 총사령부의 웨스트모랜드 장군은 65년 7월에 27만5천명,66년 6월에는 54만5천명의 미군 증강을 요구했지만,65년말 단계에서 미군의 총수는 15만4천명 밖에 안되었으며,44만6천명이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다.그래서 한국의 전투부대 투입을 계획하게 되었다.이것이 제3단계에 해당한다.당시,65년10월22일 퀴뇽에 투입된 맹호사단이 11월부터 12월에걸쳐 빈딘성에서 작전을 수행하여,"용감성"을 증명했으며,미군은 한국군이 베트남 남부의 전장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Ku Su Jeong200:74].
따라서 제4단계의 파병은 보다 대규모로 이루어져 1966년4월부터 10월에걸쳐 퀴뇽의 맹호사단에 보충이 이루어지고 나트랑에 백마사단이 파견되어 한국군의 병력은 4만5천명에 달하게 되었다.[Ku Su Jeong 2000:80-81] 67년부터 72년까지 베트남 남부에 주둔한 병사 수는 5만명에 이르며,한국군이 파병한 8년5개월간의 누계는 325,517명에 달한다[Ku Su Jeong:1].
선행연구가 명확히 한 바에 따르면,당초 베트남 전쟁파병을 적극적으로 미국에 건의한것은 한국정부측이었으며,그 목적은 경제적 실리에 있었다고 한다.朴根好에 의하면,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및 경제원조가 감소경향을 보이면서,박정희정권의 기반이 동요하기 시작했기때문에,미국을 군사지원하는것을 통해 <베트남 특혜>와<파병의 담보>로서 원조를 획득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이것은 한국측의 요구에 의해 작성된 브라운각서(1966년3월)에 구체적으로 문서화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의 항목을 보아도 명백하다.
한국정부에 있어서 베트남은 전쟁터가 아니라 시장이었다[朴根好1993;15].그러나,미국이 지불한 참전병사의 월급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것으로,필리핀이나 태국군 병사의 30-40%에 지나지 않았다고한다.전쟁으로인해 한국이 얻은 가장 큰 대가는 5천명의 사망자와1만명의 부상자를이며,고엽제피해자도 2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韓洪九2005:45-46].
제2장 한겨레21의 보도와 한국국내의 반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기사를 『한겨레21』이라는 주간지에 집필한 것은 한겨레신문의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이었다.한국에서는 1980년에 한창이었던 학생의 민주화운동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의 붕괴와 김대중이 199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것으로 인해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386세대는 여러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구수정은 베트남과 한국이 겨우 외교관계를 수립한 1992년의 다음해인 1993년에 베트남에 건너갔다.그곳에서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 주변에 많은 <비>가 있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1997년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관해 베트남측의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상세히 규명하기위해 호치밍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97년당시 지방에서 외국인연구자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었지만,구수정의 열의에 감동한 베트남 사람들은 연구에 점차 협력하게 되었다.그녀는 한국군이 주둔하고있던 꽝가이성,꽝남성,빈딩성,푸엔성을 돌아보며 성과 현수준의 문헌자료수집외에 마을의 생존자들로부터 민간인학살의 실태를 직접 듣고 다녔다.그러한 성과를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한겨레21》의 기사이다.우선 5월6일의 256호에 <아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타이틀로 게제한것을 처음으로 <베트남의 원한을 기억하라> <우리들의 치부에 빛을>등의 머리기사가 이어진다.
비슷한시기 한국에서는 한국전쟁당시의 미군에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인 노근리문제가 발각되어 미군의 책임을 추궁할경우,자신들이 일으킨 베트남에서의 민간인학살에도 진지하게 대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한겨레21에는 많은 사람들의 찬동의 반응이 있었다.한겨레신문사에 1999년10월부터 모아진 기부금은 1억5천만원(약10만달러)에 달하여 결과 2003년1월 푸엔성에 한월평화기념공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위해 공산주의세력의 침투에 부심하고있는 베트남을 구한다”는 표어를 믿으며 베트남에 보내어져 목숨을 걸고 싸운 당시의 군인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다.《한겨레21》의 캠페인은 죽은 전우와 자신들을 명예를 모독하는 것으로 보였기때문이다.<고엽제후의증전우회>의 멤버 2400명이 군복을 입고 한겨레신문사를 습격,점거하고 기물을 파괴한 사건이 2000년6월에 일어났다.그러나 참전병사들도 물론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아니며,<베트남고엽제피해자전우회>는,이 사건을 언론에대한 폭력이라고비난했다.[金榮鎬2005:15] 반공이라는 관점에서 <자유>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파병했다는 베트남전쟁당시의 대의명분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잘못한 것>이라고 규정한 현재에도 북한과의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에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민주화후에도 한국여론은 분열되어 있다.
《한겨레21》의 보도는 당시의 한국정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김대중대통령은 2001년8월 베트남의 창 득 루온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베트남 파병에 대해 “본의아니게 베트남국민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金榮鎬2005:15]. 김영호는 이러한 김대통령의 “미안하다”는 발언이“사죄”라고 부를 수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해석을 보류하고있다.그것은 김대통령의 야당시절의 발언에서 베트남전쟁당시의 가해자인식이 보이지 않기때문에 가해한 상대로 부터의 요구도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면 「사죄」는 민간의 사죄운동의 요인이 있는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고있다[金榮鎬2005:15].
제3장 하미촌의 추도비 비문을 둘러싼 대립
제3장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한 마을을 대상으로,그곳에 한국의 퇴역군인회의 원조로 세운 비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소개한다.이 사례로 의해 국가가 부(負)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의 어려움을 고찰함과 동시에,피해국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의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고,국가관계를 우선한 나머지 결국은 약한 자인 자국민을 희생하는 베트남측 국가권력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도 밝히고 싶다.
1)하미촌의 민간인 학살사건
꽝남성,디엔반현 디엔즈온사 하미촌(Quảng Nam, điện Ban, điện Dương, Ha My)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오래된 마을인 호이안의 바로 북동쪽에 위치하는 농촌마을이다.이 평범한 베트남 중부의 마을에 돌연히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8년2월24일(음력 1월26일)이었다.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구엔 코이(Nguyễn Cọi)(1945년생,남성),학살의 생존자 팜 티 호아(Phạm Thị Hoa)(1927년생,여성)등에 따르면,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한국군은 하미촌의 서남부 호이안의 캄 호아(Cẩm Hoa)라는 곳에 청룡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한국군은 군사구를 하미촌에 건설하려고,하미촌의 서하미촌락이외의 마을사람들은 다른 장소로 이주시켰다.하지만,서하미 마을은 한자를 쓸 줄 아는 마을의 장로가 한국군 지휘관에게 마을에 남게 해줄것을 편지를 통해 탄원하여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주민들이 남아있었다.당초 주민들과 청룡여단의 병사의 관계는 양호했고 한국군병사들은 마을사람에게 쌀을 나눠주거나,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기도 했다.정세가 안정된것을 알고,이주했던 하미촌의 다른 촌락의 주민들도 이주지에서 빠져나와 서하미촌으로 오게 되었고,인구는 당초의 80명에서 160명정도로 늘어났다.
23세인 청년 코이는,집에 있으면 남베트남 정부군의 병사로 연행되기 때문에 야간에만 집에 돌아오고 낮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주위로 피신해 있었다.그날도 아침 일찍 집을 떠났다.한국군이 밀어닥친것은 아침7시경으로 마을 사람들이 눈치챘을때는 이미 수백명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었다고한다.한국군의 살기 띤 모습은 그때까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코이는 나중에 생각해보았을때,그전날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의 대공세가 있었고 전투에서 대원들이 많이 사상했을기 때문에 한국군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던것이 아닐까 한다.
마을사람들을 공포를 느껴면서도 도합 4개소에 자주적으로 모였다.그 후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발견되기도 하고해서 한국군에 쫓겨 모인 사람들도 있었다.4개의 장소는 다음과 같다.1-3은 서하미촌,4는 돈체(đồng Che)촌이다.
1.레티토(Le Thị Thọ)집 (토씨는 증언자 코이의 어머니)모인 사람12명
2.그엔빈(Nguyễn Binh)집 약50명
3.그엔디에우(Nguyễn điểu)집 약40명
4.즈온(Dương)아주머니집 약10명
1의 지점의 사람들은 포탄를 피해서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지만,한국군인이 M79를 연사하고,수류탄을 던져서 9명이 사망했다.코이의 당시10살인 여동생과 8살인 사촌동생은 상처를 입었지만 살아남았다.코이의 7살난 동생도 그때까지는 숨이 남아있었지만 이틀후에 다낭항에 정박중이었던 독일적십자병원에서 숨졌다.
2의 지점,빈집은 초가집이고 벽이 있는 집이었는데 한국병사가 약50명을 집에 몰아넣고 M79총을 연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빈은 선조의 제단 뒷쪽의 벽돌로 된 공간에 숨었기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았다.호아는 중상을 입었지만 한국병사가 집에 불을 지르고 철수하자 집밖으로 기어나와 구출됐다.또 한명 트옹 티 투(Trương Thị Thu)도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빈 집의 며느리인 구엔 타인 남(Nguyễn Thanh Nam)과 빈씨의 손자로 5살정도였던 구엔 티 리에우(Nguyễn Thị Liễu)는 빈과 같이 숨어서 살아남았다.
3번째지점,디에우의 집에서는 마당에서 거의 전원이 죽었다.당시 1살로 젖먹이였던 구이엔 티 상(Nguyễn Thị Sang)과 3살이었던 구이엔 티 봉(Nguyễn Thị Bong)만이 살아남았다.봉은 아래턱이 없어졌지만,목이 말라 물병을 찾으며 기어다니고 있었다.그 후 다낭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의 병원선에 후송되었다(그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당시 8살이었던 부이 티 마이(Bui Thị Mai)는 부상을 입었고,가족 전원이 그날 죽었다.현재 그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다.
4번째 지점,두옹의 집에서는 전원이 죽었다.
코이는 밤에 집으로 돌아와 자기집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해 가족이 모두 살해된것을 발견했다.그는 디엔고쿠마을의 사람들을 불러 살아남은 사람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밤에 횃불을 켜면 한국군인에게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기때문에,어둠속에서 시체를 모아 매장했다.
하지만 다음날 한국군은 탱크를 몰고와 코이의 집을 부수고,어두워서 채 매장하지 못했던 시체를 포함해 전부 깔아뭉개고 길을 만들었다.'두번 살해당했다'고 코이는 말했다.
2)추도비의 건립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당시 창룡여단의 군인들이 하미촌을 방문하고,손수 모은 기부금으로 훌륭한 “추도비”를 건립했지만,추도비에 새겨진 시의 내용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분규하여 한국 외무부를 통해'추도비'의 내용을 고쳐 쓰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 경위를 다루고자 한다.이에 대해 베트남 측은 처음부터 국가단위,성단위,마을단위로 각기다른 대응을 했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종료후,도이모이정책이 시작하기이전에 학살이 있었던 마을중 몇몇 마을이 복수의 비(Bia trả thủ)를 건립했다.하지만 자금 등의 문제로 비를 세울 수 없었던 마을도 많았다.그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 하미촌을 방문한 당시의 청룡여단의 군인들은,하미촌에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한 자금을 원조하게 되었다.미화 4만달러를 기부금으로 비의 건립이 시작된것은 2001년의 일이었다.
하미촌의 디엔즈온사는 위령비와 집단묘지 건설을 위한 토지를 제공하고,마을 사람들은 노동력을 제공했다.점심 휴식시간은 보통 낮잠을 자며 지내는 습관이 있는 베트남사람들이지만,이 추도비 건설작업을 위해 낮잠도 자지 않고 모두들 자진해서 일했다고 한다.
완성된 비의 전면에는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뒷면에는 학살을 묘사한 시가 새겨졌다.시는 지방에서 능통하다고 알려지고 디엔반 현 내의 디엔남사출신으로,지방지 꽝남신문의 구엔 휴 동(Nguyễn Hữu đổng)기자에게 마을사람들이 의뢰한 것이었다.마을사람들에 의하면 가슴이 꽉 막힐것같은,또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작품으로,당시의 모습과 마을사람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고 한다.시는 디엔반현의 검열을 마친 것이었다.
비가 세워질 예정지는 집단학살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지점 중의 한 곳으로,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는 공터고,이미 몇명의 희생자 묘가 있는 장소였다.다른장소에 희생자의 묘를 만든 마을사람들도 있었지만,추도비가 건립되기때문에 추도비앞 정원부분에 만들어진 집단묘지에 가족이나 친척의 유골을 이장했다.집단묘지에 유골을 이장시키면 적은 액수의 원조가 있을뿐이었지만,마을사람들이 묘를 옮긴 것은 그런 원조 때문이 아니라 추도비와 집단묘지가 매우 훌륭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으로 그곳으로 유골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3)비문을 둘러싼 한국,베트남 각 레벨의 대응
하지만 완성된 비를 시찰하러 온 청룡여단의 참전군인들은 자신들의 사죄를 목적으로 세운 비문에 잔학행위가 너무나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었으며,시의 내용에 대해,일부 어휘를 변경,또는 부분적으로 삭제를 요구하게 되었다.디엔반현 부주석에 의하면 한국의 전우회는 한국정부에를 통해 이러한 수정을 베트남정부에 요청할 것을 요구하였고 한국외무부는 베트남정부에 압력을 가했다.한국정부의 요구는 비의 어구의 수정과 일부의 삭제에 응하지 않을 경우,비의 건설비용의 원조를 중지한다는 것이었다.베트남정부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꽝남성에 압력을 가했다.
“과거에 뚜껑을 닫고 미래를 향하자(khep lại qua khứ, hưong tới tương lai)”라는 슬로건을 내건 베트남정부는 역사상 베트남에 피해를 준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미래의 관계개선을 중시하는 방침을 취하고있다.이 슬로건이 언제 누구의 발언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보고자는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바라며 1990년대초에 내건 방침이었을 것이다.베트남은 역사적으로 프랑스,일본,미국(한국),중국(중월전쟁)과 싸웠지만,도이모이정책개시후 베트남의 공산당과 정부측에서 전쟁피해의 배상청구라는 말을 꺼낸적은 한번도 없다.배상청구는 커녕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 만날때도 과거의 전쟁피해에 대해 베트남측으로부터 이야기하는것을 피하고있다.베트남정부는 “과거에 뚜껑을 닫”지 않는 꽝남성에 대해 정부의방침에 따르도록 한것이었다.꽝남성은 당초,당시의 성인민위원회 부주석 호 치 타인 람(Hồ Thị Thanh Lam 여성)이 “그렇다면 한국에서 원조를 받지 않아도 좋으며 추도비의 건설비용은 꽝남성과 디엔반현에서 원조한다”고 베트남외무성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한국으로부터의 투자는 민간기업뿐만아니라 KOICA등을 통한 정부차원의 원조도 증대하고 있었고 꽝남성에는 특히 많은 병원을 계획,시공중에 있었다.
더구나 2001년에는 성남부의 누이 타인(Nui Thanh)현에 성의 중앙종합병원(Bệnh viện đa khoa trung ương) 건설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한국정부가 암암리에 중앙종합병원의 건설 중지 소문을 냈는지는 잘 모르지만,베트남,외무성은 원조가 취소된다면 꽝남성에 커다란 손실이 될것이라며 꽝남성을 설득했다.
하미촌의 사람들은 진실이 쓰여 있는 것뿐인데 왜 지우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며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실자체가 매우 슬픈 일이라면서,한동안 상부로부터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다.'절대로 지울 수 없다'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지역의 반발에 놀란 베트남 외무성은 꽝남성을 설득하는 것뿐만 아니라,한단계를 뛰어넘어,성의 외교국요원을 디엔즈온사에 파견,설득하게 했다.한국 외무성도 베트남의 말단인 지역 주민들의 완강한 태도에 놀라,디엔즈온사의 간부 9명과 디엔반 현의 인민위원회 주석을 한국에 초대해서 회유책을 폈다.
결국 하미촌 사람들은 수정을 하느니 차라리'뚜껑을 덮겠다'고 하면서 연꽃무늬를 새긴 석판으로 비석의 표면을 덮어,정말로 뚜껑을 덮고 말았다.지역민들은'이것이야말로 과거의 뚜껑을 덮는다는 것이다'며 농담조로 한편으로는 자조조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하지만 이농담에는 '결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마을 사람들의 강한 결의가 담겨져 있다.이러한 경위를 거쳐 낙성식은 2002년이되어야 겨우 이루어졌다.하지만 추도비와 집단묘지 입구의 문에 있던 한국전우회가 원조를 했다는 것을 알리는 게시판은 누군가에 의해 뽑혀져 버렸다.
제4장 나와우리의 활동과 하미촌의 살아남은 사람들
한편,NGO활동이 활발한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베트남 전쟁중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심을 보인 단체가 출현했다.1998년에 설립된 <나와우리>가 그것이다.나와우리의 멤버는 그 해 3월에 출발하는 일본의 NGO피스보트가 주최하는 선박여행<봄바람 아시안 항해>에 초대를 받았다.피스보트는 1982년에 일어난 일본의 교과서문제('침략'이라고 해야 할 것을 '진출'로 표기한 문제)를 계기로 만들어져,와세다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진정한 역사를 배우기 위해,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떤 것을 했는지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듣자” 는 취지로 설립되었다.피스보트는 선상에서 동선한 강사의 강연을 듣기도하고,역사와 평화문제에 대해 승선자끼리 토론을 하기도 하며 여행을 하고 현지에 도착 한 다음에는 현지조사를 통해 피해자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현지사람들과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피스보트HP에 따르면 1998년 봄의 항해는 22회째의 항해로서 454명이 승선했다고 한다.
나와우리의 초대대표였던 김현아에 따르면 다낭항에 도착한 승선자들은 세 프로그램으로 나눠져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그 중 하나가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이라는 테마였으며,한국인 참가자 대부분과 일부의 일본인 참가자가 이 프로그램을 선택했다.이 시점에서 한국인 참가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인가 전혀 몰랐다.거기서 듣게 된 것이 지금까지 소개해온 하미촌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시 30대 전반의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자,당혹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더우기 그러한 문제가 자신들이나 베트남인이 아닌 일본인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 그들의 초조감을 더하게했다.그 후 선상에서 이루어진 토론에서는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은 일본에 사죄하고 반성하라고 요구하면서 베트남에는 왜 사죄하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고“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데 베트남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등,김현아에 의하면“배 안에서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김현아2001:36-37]
그러나 그것을 통해,나와우리의 멤버는 자신들의 힘으로 문제를 명백히 해야한다고 생각해서,현지로 가게 된다.그과정은 김현아의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에 상세하다.나와우리의 멤버들은 호치밍시에 유학하고 이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주목하고 자료수집을 하고 있던 구수정과 합류하여 구수정이 이미 입수한 베트남 공산당정치국이 편찬한 학살에 관한 내부자료를 근거로 조사여행을 떠난다 몇주간에 걸친 여행은 몇년씩 계속되어 참가자중에는 월남전참전한국군인도 있었다.
나와우리는 조사후 2003년부터 한국군이 주둔하고 학살사건을 일으킨 다낭주변,꽝남성,빈딩성,후엔성을 대상으로 몇가지의 프로젝트와 활동을 시작한다.
하나는,한국인 청년과 베트남인 청년(호치밍시의 청년과 마을의 청년들)이같이 노동을 하며 친목을 돈독히하는 것이다.그러한 공동노동에 의해 만들어진것은 처음이 위령비이며 그 후에 포장도로의 건설과 다리의 건설,고령자가된 생존자의 집수리등이었다.같은 베트남인이라도 정부의 “과거에 뚜껑을 덮는다”는 방침에 의해 해당지역의 청년이외에는 베트남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그다지 잘 모를뿐더러 한국군의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그래서 베트남사람 자신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족이 학살당한 뼈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지금도 잊혀진상태에 있는 생존자들을 도와야한다는 사실을 자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위령비에 관해서는 하미촌의 교훈을 토대로,지역 사람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한 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그와 비슷한 학살이 있었던 디엔반현의 디엔안사가 훵니촌에 건설한 위령비는 간소한 형태이지만,나와우리에 의한 소액의 원조와 더불어,그 지방이 설계 및 토지제공,도로주변의 정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한국과 베트남 양국 청년들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다.이는 지역주민들에게도 매우 고맙고 감사하게 여겨지는일이었다.또한 한방의료단과 치과의료단을 매년 베트남에 파견하는 운동도 계속하고 있다.
이들 활동을 통해 증오의 대상이었던 한국의 이미지는 학살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물론 베트남에서 한국의 인기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한류붐의 영향이 크지만,학살에서 살아남은 고령자나 중년이상의 사람들이 조금씩이나마 원한의 마음이 누그러지게 된 것은 이들 활동의 영향이 크다.또 구수정이 피해자인 고령자를 수차려나 방문하고 한국사회에 이 문제를 알리며,미래의 교훈으로 삼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한국인에 대한 증오가 사라졌다고 하는 노인들도 많이 있다.하미촌에서 사건의 모습을 상세히 이야기해준 코이는 어머니와 형제를 학살로 잃었지만,“구수정씨에게는 감복한다”고 말했다.코이는 “학살사건은 지금도 선명히 떠올라서 전부 잊어버린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지만,구수정씨가 우리들을 위해 용감히 분투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을 원망하는 기분은 사라졌다”고 필자에게 전했다.
결 론
한국군이 학살사건을 일으킨 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가면서,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를 수그러지게하고,그 감정을 친근감으로 바꿔온것은 실로 구수정과 나와우리의 활동이었다.한국의 NGO나 개인등 민간의 성실한 활동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베트남사람들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고,기억을 비틀고,왜곡하거나 과거에 뚜껑을 덮는것이 아닌,새롭게 하는것을 통해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본고에서는 기술해왔다.베트남연구자인 필자가 이 문제를 거론하는 목적은 <매국노>라고 불리며 한국국내에서 비난을 받았던 구수정 들의 활동이야말로 실은 피해자인 베트남사람들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연결고리가 되었다는것을 이 문제에 관해서 여론이 분열되어 있는 한국사회에게 제3자의 입장에서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용서>,<화해>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것,또는 국가간의 물질적 원조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것과,이러한 한국과 베트남간의 사례를 통해 일본인으로서 자성하게된것,이것이 본고의 목적중의 하나였다.
결론에서는 2가지의 목적,피해국과 가해국의 전쟁을 둘러싼 공정기억과 공정기억이될 수 없는 기억의 교착과,민주주의체제와 기억의 다양성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자한다.
베트남 정부의 “과거의 뚜껑을 덮고,미래를 항하자”는 정책은 일견,과거를 강물에 흘려보내고,미래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뜻으로 들린다.베트남은 프랑스,그리고 일본,미국(한국),중국등과 독립을 위해 싸워왔다.그래서 과거에 대한 문제를 파해쳐 전쟁책임을 추궁하거나 보상을 요구하자면 끝도없고 많은 나라와 대결을 하는것은 베트남의 현재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코 득책이 아니라는 것이 베트남의 입장이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지나간 것을 강물에 흘려보내는”것은 전쟁에 관한 한 미덕이 아니며,오히려 평화를 위해 〈과거〉를 잊지않는것이야말로 미덕이자,가치관이다[小菅2005:205]. 가해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인정하지않는 일본과는 달리,피해국이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비난받는일은 없지만 시대의 가치관에 역행하는 점은 동일하다.그렇기 때문에 베트남은 물론 학살을 경험한 지방뿐만아니라 구수정이나 《한겨레21》의 보도,NGO나와우리의 활동등 한국의 민간에 의한 어두운 역사를 밝은 곳에 꺼내 과거를 교훈으로 미래에 살리려는 활동과도 미묘한 차질을 빚어왔다.
그것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것이 하미촌에서의 추도비를 둘러싼소동이다.사건당시 하미촌은 영역구분으로는 남베트남정권하에 있었지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정부군,한국군,미군과의 전투의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그리고 혁명전선측에도 남베트남정권측에도 병사를 배출하고있었다.현재의 베트남에는 혁명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에게는 연금이 있고 혁명을 통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가족에게는 경제적으로 원조정책이 있다.그러나 최전방이었던 하미촌의 학살피해자들은 노인,여성,아이들뿐으로 직접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참가해 게릴라활동을 한 사람들이아니다.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나 유가족도 혁명에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아무런 수당도 없다.
이러한 중간적인 마을의 학살사건의 기억은,경제발전에 매진하는것만이 지상명제인 베트남국가에 있어서 파헤쳐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빛나는 승리>에 아무런 공헌도 안 한 생존자들이 말하는 <하미촌의 학살>은 베트남에서는 내셔널리즘과 결부된 기억이 되지 않는다.이점이 한일과 중일관계와 가장 다른 점이다.
더우기 베트남은 현재 「전쟁의 기억」을 내셔널리즘의 중핵으로 두려고도 하지 않는다.장기에 걸친 전쟁에 승리를 거둔것은 베트남공산당의 정당성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공산당이 연명하고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위해서는 국민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하는 경제발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이다.특히 베트남 전쟁중,남베트남정권측에 있던 사람들도 국민으로 다수 소속되어 있는 현재의 베트남에 있어서 <전쟁의 빛나는 승리의 기억>이 반드시 국민전원에게 공정기억으로서 받아들여지는것도 아니다.따라서 경제발전이야말로 국민을 통합하는 최고의 장치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국가에 있어 과거의 가해자측의 부의 역사를 왈가왈부해서 외교관계를 악화시키고,나아가 경제원조에 영항을 끼치는 사태를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이때문에 베트남 국가는“과거의 뚜껑을덮는다”는 슬로건 아래,<국가이익>을 우선하고,현 정권에 공헌이 없었던 전쟁피해자의 목소리를 묵살하게 된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와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재의 베트남이지만,공산당지배하에서,당의 방침은 역시 절대적이다.“과거에 뚜껑을 덮는다”는 방침도 하미촌의 사람들이 결국 당의 지도에 따를수밖에 없었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촌의 말단까지 침투되어 있다.즉,국가수준으로 호소하는 것은 허가되지 않고 공정기억에서 제외되는 다양한 기억은 전승되지 않는다.단지 국가와의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예를 들면 성이나 현수준으로는 인민위원회(일본의 경우 현청이나 시청등의 행정기관에 해당한다)이 학살사건의 추도식을 조직한다든지 독자적으로 학살사건에 대해 조사를 해서 피해자의 명단을 작성한다든지 사건의 개요를 책자로 편집하는 곳도 있다.(빈딩성,꽝남성등)성과 현은 피해의 기억을 성수준,또한 현수준에 국한시키는 것으로 인해 국과와는 다른 독자적인 행동을 함으로 인해 주민들의 불만에 완충제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주5)
그러나, 국가수준의 공정기억이 될 수 없는 상황은 틀림이 없다.
고스가[小菅]는 「내셔널리즘과 강고하게 결합되지 않은 비참한〈과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게된다.전쟁세대의 죽음은 〈과거〉를 둘러싼 감정대립이 어찌했건 해소의 길로 향하게 한다」고 한다[小菅2005:192].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가는 기억을 한국의 NGO관계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자의 입장에서 당사자들과는 다른 회로를 통해 기술하고 기억해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베트남전쟁의 기억을 계속 이야기함으로써 미래의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고 하는 한국NGO의 활동이야말로 국가에 포섭되지않은 전쟁의 다양한 기억을 유지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NGO는 더우기 자국에서,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어두운 기억을 포함해 공정기억으로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한국군이 일으킨 학살사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한국의 공식기억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있다.그때문에 공식기억에서 벗어난 하미촌의 학살사건을 기록한 비문에 대해 수정 삭제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비민주적인 체제아래 국가의 공식기억이 움직일 수 없는 베트남에서는 피해국이면서도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비극의 기억은 계승되지 않는데 비해,민주화된 한국에서는 커다란 반발을 받으면서도,<부의 기억>을 계승하는 움직임이 계속 되고 있다.
(본문중 경칭생략)
각주
1)이와 같이 경제적 이익이라는 실리를 표면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전투부대의 파견요청을 받은 다음으로,그전의 비전투부대 파견시는「도덕적명분론」을 정부는 주장했다고한다[朴根好1993:15]. 도덕적명분론이란,한국전쟁당시에 원조를 받은것에 대한 <보은>과 <자유>세계의 안녕과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에 의한 것이다.
2)金榮鎬에 의하면 《한겨레21》에 의한 한국군의 베트남민간인학살을 파헤치는 것에 대해서는 주월한국대사관뿐만아니라 베트남외무성도 난처한 입장이었다고 한다.이 사건을 취재하려고 했던 로이터통신의 기자는 베트남정부로부터 현지의 당사자에 대한 취재가 허가되지 않았다.베트남정부는 비공식적으로 보도규제방침을 매스컴에 내렸다고 한다.로이터통신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 더이상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베트남외무성으로부터 언질을 받았다.그러나 그 후에 베트남외무성대변인은 “베트남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위해 한국이 행한 활동과 물질적원조에 감사한다”는 성명을발표하고,주한베트남대사는,《한겨레21》의 편집부에 감사장을 보냈다.또한,구엔지니엔외상은,구수정에게 친서를 보내,베트남정부는 과거를 닫기로 주장하고 있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에 협력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타당하고 한국의 시민단체의 활동을 존경하며 감사해한다고 했다[金榮鎬2005:14].
3)당시 남베트남정부통치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미국측의 별칭으로는 베트콩)에 가입했으며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대한 보상만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일반민중으로 미군이나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상도 구제책도 없다.
4)일본은 베트남점령중 1944년말부터 1945년초까지 북부에서 대기근을 일으켰다.인원수의 이론은 있지만,200만명아사사건으로 불리고 있다.“과거에 뚜껑을 덥는다”는 베트남 국책을 빌미로 일본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도 세우고 있지 않다.양심적인 일본인 사이에도“과거에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할때,염두에 두는 것은 대부분 중국과 한국에 대한 것 뿐이다.일본에서 발행되고 있는 200만명아사사건에 관한 책은 베트남인 사진가가 당시에 찍은 사진을 일본인 사진가 소우토메 가츠모토가 편집하여 발표한 단지 1권뿐이다.
5)이와같이 성과 현 수준이 반드시 국가의 방침을 따르지 않으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주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무마시키는 것은 이 안건외에도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독자적인 움직임은 성과 현수준에 국한되며 국가의 방침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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