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맛 한낮에도 영하에 머무르는 기온에 자동차와는 달리 온 몸이 바람에 노출된 상태로 몇시간씩 달리면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이럴 때 만나는 뜨거운 음식은 맛을 떠나 그 자체로 감동이다. 등대식당의 들깨수제비를 뜨고 있는 허영만 화백. 사진|김경민
자전거에는 자석의 자력으로 작동되는 속도-거리계가 달려있다. 오전에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에서 출발해 황혼 속에서 아산방조제를 건넜을 때 거리계에 찍힌 주행 거리는 90km.
9월에 강화도에서 출발한 이후 가장 긴 거리를 달린 끝에 드디어 경기도를 벗어나 충청남도에 진입한 것이다.
뜨겁고 진한 맛의 닭개장으로 하루 종일 칼바람을 뚫고 달린 허기와 추위를 몰아내고 기운을 차린 뒤 첫 숙제는 하룻밤을 묵을 적당한 야영터를 찾는 일이었다.
허영만 화백이 선호하는 야영터의 선정 기준은 꽤 까다롭다. 우선 주변에 가로등 같은 불빛이 없어야한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노숙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달빛, 별빛을 보며 잠드는 것인데 주변이 환하면 하늘을 제대로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가나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조용해야한다. 야영의 낭만 중 손꼽히는 ‘절대고독’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허화백과 함께 백두대간 종주, 대한민국 영해 외곽선 일주항해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들과 달리 ‘집단가출’에 처음으로 동참한 탓에 노숙에 익숙치 않은 홍석민이 볼멘소리를 한다.
“어둡고, 조용한 곳이요? 우리가 뭐 어둠의 자식들도 아닌데…. 그런 곳은 산짐승들이나 좋아하지 사람이 있을 곳이 됩니까?”
홍은 자전거 전국일주의 첫 야영 때 맨 땅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을 펼쳐 눕는 것을 보고 기가 질려 혼자서 인근 모텔에서 잤던 전과가 있다.
탈영(?) 전력이 있는지라 댓바람에 “그래? 비박하기 싫으면 집에 가라”는 소리가 나오자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꼭 못자겠다는 것은 아니구요”라며 꼬리를 내리고 만다.
삽교함상공원에서 북쪽 해안을 따라 잡초 우거진 해안 논둑길을 라이트를 켜고 한참을 헤맨 끝에 맷돌포 뒷산 꼭대기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제법 큰 2층짜리 팔각정이 설치되어있는데다 서해대교와 평택항의 휘황한 불빛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경치가 그만인 곳이었다.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집단가출호 선원 출신인 김상덕 씨가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팔각정으로 찾아왔다. 그의 배낭 안에는 올해 수확한 포도로 담근 포도주가 들어있었다. 이른바 보졸레 누보. 아직 숙성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풋내가 살짝 났지만 신선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그만이었다. 침낭의 지퍼를 올려 눈만 내놓고 천구 가득 펼쳐지는 별들의 우주쇼를 보다 잠이 들었다.
허영만 화백과 정상욱 상무의 자전거는 세상에 단 두 대 밖에 없는 희귀 자전거다. 자전거를 1:1로 주문 제작하는 회사, 런웨이 바이크를 운영하고 있는 필자와 이진원이 특별히 두 사람의 체형과 스타일에 맞춰 프레임을 만들고 도색을 하고, 부속을 별도로 구입해 직접 조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속적인 관리와 정비, 튜닝이 필요한 민감한 기계. 문제는 우리 제품을 쓰고 있는 두 명의 고객과 함께 전국일주를 하다보니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손질까지 해주는 신세가 된 것이다. 브레이크나 변속기처럼 일상적인 튜닝이 필요한 부분에 살짝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전거를 대체 어떻게 만들었길래 이 모양이냐?”는 농 섞인 질타가 쏟아진다. 심지어 체인의 기름때까지 닦아놓으라는 진상에 가까운 고도의 불량 고객들. 그냥 일반 자전거를 사서 타게 할 걸 그랬다. <삽화=허영만>
“우리는 모두 두바퀴 패밀리” 3차투어의 종착지인 석문방조제 부근 성구미포구 선착장에 도착한 자전거 식객팀과 당진 짐자전거 MTB클럽 회원들. 짐자전거클럽 회원들은 하루 종일 우리 일행과 함께하며 자신들의 주요 활동 무대인 당진의 숨겨진 맛과 자전거로 주행하기 좋은 코스를 안내해줬다. 사진|신훈중
“노숙은 민가서 멀리”…아, 깐깐한 허화백
“가로등 불빛 NO! 도로서 떨어져야 ‘절대고독’ 위해 산속으로 들판으로” 추위에 덜덜 주린배 쥐고 야영터 물색
앗싸! 항구 불빛 내려다보는 팔각정 발견 마침 집단가출팀 김상덕씨 반가운 방문
배낭 안 포도주 풋내 나면 어떠리 달님 가고 별들의 우주쇼 올때까지 친구여 잔을 들어라!
등대식당의 간판메뉴는 들깨수제비지만 허화백은 수제비가 나오기 전 입맛돋구기용으로 상에 올라온 부추무침에 집중했다. 싱싱한 부추를 집에서 담은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무친 뒤 직접 짠 참기름 한방울로 화룡점정했다. 부추무침은 이 집 음식의 내공을 말이 필요없이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사진|이진원
등대식당 주방에서 도란도란 정답게 수제비를 떼어넣고 있는 강화엽(빨간조끼), 화임 자매. 전남 해남이 고향인 자매는 수십년의 타향살이에도 불구하고 남도의 손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김경민
● 정성스런 손맛…등대식당 부추비빔밥과 들깨수제비
다음날 아침 일찍 삽교함상공원 어시장에서 코스와 음식 가이드를 자청한 당진 MTB동호회 짐자전거 클럽 회원 10명과 합류했다. 이 지역 정보에 훤한 짐자전거 클럽 회원들은 자동차 도로를 극도로 기피하는 우리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삽교방조제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32번 국도를 우회하는 오프 로드로 안내했다.
국도로 가는 것보다 2배 이상의 거리지만 야산을 넘고, 마을 오솔길을 누비고, 논밭사이로 넘나드는 길은 정겹고 유쾌했다. 현지 자전거 동호인이 아니라면 죽었다 깨나도 찾을 수 없을 듯한 절묘한 길을 신나게 달려 점심 무렵 옛 당진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등대식당에 도착했다.
짐자전거 클럽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추천된 등대식당의 간판 메뉴는 흔히 먹기 힘든 들깨수제비. 하지만 자전거 식객들은 들깨수제비가 서빙되기 전 애피타이저 격으로 먼저 나오는 부추비빔밥에서부터 일찌감치 감동했다.
주인 강화임 씨가 커다란 양푼에 싱싱한 부추를 썰어 넣고 간장, 깨, 마늘, 고춧가루로 번개처럼 무쳐낸 부추를 보리밥에 넣어 비비는데 갓 짜낸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리니 금상첨화다. 숨이 죽지 않은 부추의 아삭아삭 씹히는 느낌이 일품인데다 함께 나온 뚝배기 된장찌개와 미각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
들깨수제비는 육수에 들깨를 갈아 넣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척척 떼어 넣어 끓이는데 국물 맛도 깊고 풍부했지만 적절히 찰지고 잡내가 없는 우리밀수제비 자체의 식감이 압권이었다.
멸치젓갈이 들어간 김치에서 호남의 그윽한 맛이 포착되어 안주인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출가해 당진에 정착한 것이 30년이 넘지만 원래는 전남 해남이 고향이란다. 고향을 떠나 강산이 3번 변하는 동안 어느새 충청도 사투리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지만 남도의 손맛을 간직해오고 있는 것이다. 등대식당이라는 이름도 고향의 등대를 떠올려 지은 상호. 주인 자매에게서 부추 무침 비법을 전수받은 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1. 비박 스타일의 야영은 낭만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뜨끈한 구들장에서 잠을 잔 것에 비해 아침에 몸이 다소 무겁게 마련이다. 야영 후 새로운 하루의 라이딩을 시작하기에 앞서 체조로 몸을 풀고 있는 허화백(오른쪽)과 정상욱 상무. 사진|신훈중
2. 허영만 화백과 필자가 삽교의 노상 어판장에서 싱싱한 활어와 조개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주머니는 횟감으로 자연산 우럭을 최고로 쳤다. 사진|신훈중
서해안고속도로를 오른쪽으로 두고 성구미포구를 향해 금암리, 송석리, 삼월리, 무수리, 가곡리를 지나는 길은 야산과 간척지 평원으로 이어져 호젓하고 달릴 맛이 났다. 짐자전거 클럽 회원들은 이제 길을 찾기 수월해졌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만류해도 기어이 성구미 포구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대열의 앞뒤에서 일행을 에스코트했다.
가곡리 못미쳐 세원안들에서 석문방조제 쪽으로 강의 하구에는 대평원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눈이 시원하다. 작물이 다 거둬진 쓸쓸한 빈 들판은 오리 떼와 까마귀 떼가 스산하게 비행하고 있었다.
바람막이가 없는 개활지로 나오자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오리털 파카까지 챙겨 입고, 우리로서는 다소 빠른 시속 20km를 유지해도 한기가 뼛속까지 스민다.
자전거 식객들은 전국일주를 시작하기 이전엔 겨울철에 라이딩을 해본 경험이 없다. 대원들은 이제 시작된 본격적 추위에 앞으로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 아마도 무안이나 목포에 도착할 즈음에야 봄이 올 것이고 서산, 태안, 광천, 보령, 군산, 김제, 고창을 지날 때까지 길 위에서 추위를 피할 길은 없을 것이다.
“다음 투어 때는 북극 탐험대의 복장이 필요하겠는데요?”라는 막내 김경민 대원의 얘기에 모두들 웃고 말았지만 대원들은 방한 대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우리가 달릴 길 위에 겨울은 이미 깊숙이 와있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moto14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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