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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바랍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詩)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현세의 삶을 끝마친 다음에도 죽음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고자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들 어 봅 시 다 |
묵시21,1. 3-4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隨後,我看見了一個新天新地,因為先前的天與先前的地已不見了,海也沒有了。我聽見由寶座那裡有一巨大聲音說:「這就是天主與人同在的帳幕,他要同他們住在一起;他們要作他的人民,他親自要『與他們同在,』作他們的天主; 他要拭去他們眼上的一切淚痕;以後再也沒有死亡,再也沒有悲傷,沒有哀號,沒有苦楚,因為先前的都已過去了。」
새 겨 봅 시 다 |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
코핼렛에서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生有時,死有時,栽種有時,拔除栽種的亦有時코헬3,2)고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시간으로 측정되고 시간 안에서 우리는 변함니다. 수를 다하고 늙어서 죽는 것은 당연하게도 보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灰塵將歸於原來的土中,生氣將歸於天主,因為原是天主之所賜코헬12,7)이 순리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 때문에 죽음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故此,就如罪惡藉著一人進入了世界,死亡藉著罪惡也進入了世界;這樣死亡就殃及了眾人,因為眾人都犯了罪:成義也是如此―― ) 우리는 죽음을 자각하기에 자신의 죄와 유한성을 인정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구원, 곧 하느님의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에서 비롯된 형벌이라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 뒤에 우리 또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로마6,3-11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難道你們不知道:我們受過洗歸於基督耶穌的人,就是受洗歸於他的死亡嗎?我們藉著洗禮已歸於死亡與他同葬了,為的是基督怎樣藉著父的光榮,從死者中復活了,我們也怎樣在新生活中度生。如果我們藉著同他相似的死亡,已與他結合,也要藉著同他相似的復活與他結合,因為我們知道,我們的舊人已與他同釘在十字架上了,使那屬罪惡的自我消逝,好叫我們不再作罪惡的奴隸,因為已死的人,便脫離了罪惡。所以,如果我們與基督同死,我們相信也要與他同生,因為我們知道:基督既從死者中復活,就不再死;死亡不再統治他了,因為他死,是死於罪惡,僅僅一次;他活,是活於天主。你們也要這樣看自己是死於罪惡,在基督耶穌內活於天主的人。)
그런데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 옮아감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딸서 우리의 영원한 삶은 벌써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성령의 도움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것, 모두가 이미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것들을 절대화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만을 향해 살아갈 때, 삶의 목표를 단순히 현세적인 성공에서 찾지 않고 미래의 완성을 지향할 때, 삶의 행복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서 구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를 통해 추구할 때, 우리는 영원한 삶을 지금부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느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여 응답하기를 바라시지만,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끊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영원히 떼어 놓는 불행입니다. 그레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你們不要害怕那殺害肉身,而不能殺害靈魂的;但更要害怕那能使靈魂和肉身陷於地獄中的)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않고, 가장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분입니다. 순교자들에게 하느님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깊이 깨닭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던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당하는 모든 시련과 박해가 반드시 피흘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려면 큰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해치는 흐름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삶에 대한 불안 때문에, 명예와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돈이나 권력이나 쾌락 등을 우상으로 섬기고 미신 행위에 빠져 들 수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는 것이 편해지면 신앙의 도덕적, 사회적 요청을 성실히 따르기보다 마음의 평안과 건강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신비적 체험이나 여러 행태의 비술(祕術)에 몰두합니다. 이러한 사조를 ‘유사 영성 운동’(類似靈性運動)이라고 하는데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뉴에이지
196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뉴 에이지(New Age) 운동은, 무신론적이고 물질적인 현대 세계의 정신적 공허를 탈피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우리 사회에도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예술, 과학등의 분야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신은 만물안에 존재하고 만물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기본 원리로 하는 뉴 에이지 운동은, 신비 체험을 강조하면서 정신적 명상에 깊이 들어갈 때에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유일하신 창조주이며 인격신이 아니라 다만 우주의 신적 에너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유일한 메시아가 아니라 단지 많은 우주적 에너지의 화신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 시대의 메시아였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신 세계 운동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기 시작한 운동으로, 급변하는 사회적 흐름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정신세계 운동은 보편적 가치나 사회적 윤리보다는 선, 명상, 요가, 신비주의, 초능력, 정신 집중등 개인의 정신적-내면적 세계에 대한 몰입을 강조합니다.
기 수련 운동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운동입니다. 원래 기 수련은 몸과 맘을 단련하는 전통적인 심신 수련 방법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최근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단순한 건강으로 좋은 것이지만, 영적 세계와의 교감을 강조하거나 영적 각성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오히려 ‘신흥 종교’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적-육체적 건강과 안정을 보장하거나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고 통제한다는 명상, 요가, 도(道), 선(禪), 기공(氣功), 단전(丹田) 호흡 등 건강 요법이나 수련 방법을 강조하는 유사 영성 운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기공과 단전 호흡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동양 전래의 심신 수련 방법인데 치츰 무술(武術) 방법, 질병 치료법, 정신 수양법, 초능력 개발법, 더 나아가 신흥 종교적 성격까지 띠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 체험’을 ‘성령 체험’과 같은 것으로 가르침니다. 또한 모든 물체는 에너지로서의 ‘기’를 갖고 있으며, 이 에너지는 물체가 소멸되더라도 다른 물체로 옮겨 가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된다는 일종의 환생(還生)을 주장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등은, 우리가 아무런 분별력도 없이 접하게 될 때, 우리를 교회나 그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에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에페4,14-使我們不再做小孩子,為各種教義之風所飄盪,所捲去,而中了人的陰謀,陷於引入荒謬的詭計) 하고 경고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우리의 삶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과 인간 구원의 역사를 완결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에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따로 구분하시고
마태13,24-30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耶穌給他們另設了一個比喻說:「天國好像一個人,在自己田裡撒了好種子;但在人睡覺的時候,他的仇人來,在麥子中間撒上莠子,就走了。苗長起來,抽出穗的時候,莠子也顯出來了。家主的僕人,就前來對他說:主人!你不是在你田地裡撒了好種子嗎?那麼從那裡來了莠子? 家主對他們說:這是仇人做的。僕人對他說:那麼,你願我們去把莠子收集起來嗎? 他卻說:不,免得你們收集莠子,連麥子也拔了出來。讓兩樣一起長到收割的時候好了;在收割時,我要對收割的人說:你們先收集莠子,把莠子捆成捆,好燃燒,把麥子卻收入我的倉裡。」)
마태16,27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因為將來人子要在他父的光榮中同他的天使降來,那時,他要按照每人的行為予以賞報)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여 있으면서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때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강합니다.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분께서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9,13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我不是來召義人,而是來召罪人。」)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신뢰하고, 죄의 결과로 오는 악영향을 이겨 내려는 참된 노력을 기울이며, 우리도 또한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요구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들을 거부하는 신앙의 삶은 분명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자녀들이 이겨 낼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실 뿐만 아니라 ---
1코린10,13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你們所受的試探,無非是普通人所能受的試探;天主是忠信的,他決不許你們受那超過你們能力的試探,天主如加給人試探,也必開一條出路,叫你們能夠承擔)
로마4,3-5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因為經上說:『亞巴郎信了天主,天主就以此算為他的正義。』 給工作的人工資,不算是恩惠,而是還債;但為那沒有工作,而信仰那使不虔敬的人復義之主的,這人的信德為他便算是正義,這纔是恩惠。)
야고1,2-4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我的弟兄們,幾時你們落在各種試探裡,要認為是大喜樂,因為你們應知道:你們的信德受過考驗,纔能生出堅忍。但這堅忍又必須有完美的實行,好使你們既成全而又完備,毫無缺欠。)
어떠한 시련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루카22,28-30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在我的困難中,與我常常相偕的,就是你們。所以,我將王權給你們預備下,正如我父給我預備下了一樣,為使你們在我的國裡,一同在我的筵席上吃喝,並坐在寶座上,審判以色列十二支派。)
우리가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삶을 살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의탁하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때 이러한 신앙의 삶은 가능하며, 그것은 우리의 승리를 보증합니다. “하느님께서 태여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1요한5,4-5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因為凡是由天主所生的,必得勝世界;得勝世界的勝利武器,就是我們的信德。誰是得勝世界的呢?不是那信耶穌為天主子的人嗎?)
정 리 해 봅 시 다 |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영원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영원히 떼어 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이익을 위한 우상 숭배나 미신 행위를 배격하고, 우리의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해치는 그릇된 주장이나 사조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삶을 살면서 성령께 의탁하고 그리스의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다 짐 합 시 다 |
*자신의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놓고, 매년 그 내용을 갱신하는 기회를 갖도록 합시다.
*단순히 마음의 평안과 건강 증진 차원에서 기 수련에 참여하더라도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합시다.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 할 유행적 사조는 의식적으로 피하도록 합시다.
알 아 둡 시 다 |
묵시문학(默視文學)
묵시 문학은 성경에 매우 독특한 전통에서 유래하고 있는 문학 형태로서 기원 전후 2세기 사이에 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침략과 재난, 그리고 종교적 박해로 신앙의 위기를 겪을 때입니다. 이때에 활약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고 사악한 무리들은 기필코 하느님의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백성들에게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묵시 문학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아모스서, 즈카리아서, 요엘서, 다니엘서, 요한 묵시록)
이 예언서들의 특징은 상징적 단어들을 사용하고 환상적인 짐승들을 등장시키며, 우주를 지배하는 제2위적 존재로서 천상적 인물을 소개하고 우주 대변혁을 예고합니다. 묵시문학은 대부분 하느님의 뜻이 모두 실현된다는 내용과, 선과 악의 싸움에서 하느님께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시는 과정을 상징적으로소개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믿는 이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곧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느님의 최존적인 승리를 강조합니다.
묵 상 합 시 다 |
마태5,11-12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幾時人為了我而辱罵迫害你們,揑造一切壞話毀謗你們,你們是有福的。
你們歡喜踴躍罷!因為你們在天上的賞報是豐厚的,因為在你們以前的先知,人也曾這樣迫害過他們。」)
2코린5,9-10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為此我們或住在或出離肉身,常專心以討主的喜悅為光榮。因為我們眾人都應出現在基督的審判台前,為使各人藉他肉身所行的,或善或惡,領取相當的報應。)
묵시22,12-13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記住!我快要來。我隨身帶著報酬,要按照各人的行為還報各人。我是『阿耳法』和『敖默加』,最初的和最末的,元始和終末。)
묵시22,20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為這些事而作證的那位說:「的確,我快要來。」「阿們。主耶穌,你來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