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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국불교학회, 2012.8.31. 鏡虛惺牛(경허성우)의 몸과 마음: 김성순ㆍ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목 차 Ⅰ. 서론 요약문 경허는 몸과 마음에 대해, 몸은 청정하지 못한 것: 마음은 부처이자 신령한 것이라는 이원분리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아는 것일 뿐 몸과 관련된 현상은 하찮고 유한한 것이며, 따라서 그의 몸이 지어내는 현상인 파계행 역시 다 허망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경허는 모든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마음이며, 이 마음조차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인 해탈을 위해서는 윤회와 인과의 근원이 되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경허의 자기 변증에 따르면, 자신의 파계와 일탈의 행위들은 마음 안에서 빚어진 것들이 아닌, 마음의 분별이 아예 없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無心行履’이다. 이러한 경허의 사유구도는 그가 제자나 신도들에게 제시하는 수행관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그는 전문 수행자들에게는 빈틈없는 수행을 요구하면서도 대중을 향한 법문에서는 평이한 용어와 해설을 보여준다. 나아가 경허는 그의 수행관에서도 ‘무념(무심)’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수행의 종지임을 강조한다. 결국 경허의 수행의 완성은 무심이며, 그의 파계행 역시 무심의 행위라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破戒行, 몸과 마음, 無心行履, 修行觀. Ⅰ. 서언 鏡虛惺牛(1846-1912)가 살다 간 구한말의 불교계는 참선과 경학에 천착하기 보다는 기복과 기자를 위한 불공, 왕실의 안위를 위한 의식, 누룩장사 등의 영리행위를 통해 세간의 부를 쌓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조선 전체가 개항 직전의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하면서 외세에 대항하는 의병들의 저항과 사회적 모순에 반기를 든 농민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개화파와 척사파로 분열되어 대립을 계속했으며, 기득권층은 외세를 이용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생의 고난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역병과 민란, 그리고 외세의 침탈로 점철된 구한말의 험난한 역사와 그에 상응하는 한국 불교계의 피폐한 상황은 역으로 경허가 한국 선불교의 선맥을 주도하는 종장이 되는 기회도 제공했다. 경허는 1899년에서 1904년까지 전국의 사원을 누비며 참선결사를 일으키고 선 수행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이 당시의 한국 불교계의 시들어버린 선 수행의 기풍을 부활시키고 전국 사원에 선실을 열게 한 것은 전적으로 경허의 결사운동 덕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1] 본 논문에서는 이처럼 선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선 수행자로서 치열한 모습을 보였던 선사 경허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을 그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인식론적 시각에서 해석해보고자 한다. 선의 종장으로서의 경허의 모습과 그의 일탈에 관한 기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물론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각도의 조명이 존재해 왔지만 본 논문에서는 경허의 저술들을 후대 제자들이 편집한 기록물인 ?경허법어?와 ?경허집?을 중심으로 몸과 마음에 관한 그의 시각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 주로 다루게 될 문제는 도대체 경허는 왜, 승려로서의 당연한 持戒를 무시하고 그러한 행적들을 보였는지, 그의 몸이 행하는 파계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의 마음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의 행적에 대한 세간의 비난 앞에서 어떠한 방어 내지 변명의 자세를 취하는지, 그 변증의 논리 구조는 어떠한 형태인지 등이다. 경허가 남긴 행적에서 드러나는 功過, 전문 수행자인 승려와 민간 신도들에게 제시하는 수행법의 차이, 심지어 그가 몇 년간 선을 부흥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결사운동에 있어서까지 그의 사고와 실천에서는 이원분리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본 논문의 Ⅲ장에서는 그의 시각이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사유 구조에 투영되는 논리를 추적해 보고, 그러한 사유구조가 그의 행적에 발현되는 양상을 차근차근 분석해가는 식으로 서술을 전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Ⅳ장에서는 경허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이원분리적 사유가 그의 수행관에 미치는 영향과, 그것이 실제적으로 수행자들에게 제시하는 수행법에 어떠한 양상으로 발현되는 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결국 본 논문의 목표는 경허가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사유 안에서 그의 파계행을 설명하는 교의적 근거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며, 경허가 발언했던 자기변증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의 사유구조가 제자와 신도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으로 전달되는 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1] 김경집(1996) pp. 364-366. Ⅱ. 경허, 그 논란의 생애 경허는 1846년2] 8월 24일(憲宗 12년, 丙午)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잃은 경허는 1854년 9세가 되던 해에 모친 박씨를 따라 상경하여 廣州 청계사 桂虛大師의 문하에서 사미계를 받음으로써 수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경허의 친형인 泰虛 역시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의 길을 걸었다. 1859년(哲宗 10년) 14세가 되던 해에 청계사에서 여름 한 철을 나던 선비에게 유교의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글을 익히게 된 사미승 경허는 스승 계허의 환속 이후에 동학사의 萬化普善 강백에게 교학을 사사하게 된다. 경학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던 경허는 고종(高宗) 5년(1868) 23세에 동학사에서 대중들에게 불교경학을 강의하는 강백3]의 소임을 시작했다. 강단에 선 경허는 주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2] 경허의 출생연도는 한용운의 1849년설과 漢巖重遠의 1857년설, 김지견의 1846년 설이 있다. 하지만 ?경허집?에 수록된 경허 자신의 육성에 의하면 1846년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고재욱(2001) p. 17. 1879년(고종 16년) 6월, 옛 스승인 계허화상을 찾아뵙기 위해 떠난 길에서 경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하게 된다. 1879년 즈음의 4-5년간 조선사회에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던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한 인적 손실은 전란의 피해보다 극심해서 결국 전통사회를 해체시키고 유랑민을 대량으로 발생시켜서 조선왕조의 해체를 촉진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말기적 참상의 현장에서 경허는 불교의 諸行無常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허가 살았던 1846년에서 1912년까지의 67년간은 1862년 진주 민란에 이은 三南 각지의 민란, 1866년 병인양요, 1884년의 갑신정변, 1892-1894년의 갑오농민전쟁,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체결,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체결로 이어지는 격변기의 한 중심을 통과하는 격변기이기도 했다. 이처럼 경허는 전 생애 내내 조선왕조의 해체와 더불어 찾아 온 식민지배, 그로 인한 구한말의 사회적 불안과 모순을 몸소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절감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적 죽음의 참상과 맞닥뜨린 경허는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제자들까지 모두 돌려보내고 치열한 참선을 시작했다. 1881년에는 자신의 친형인 태허선사가 주석하고 있던 홍주(지금의 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 天藏庵에 머물면서 保任을 행했다. 4] 경허를 20세기 한국 선불교의 종장으로 놓는 원인은 경허의 결사가 구성되면서 일반인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상당부분 고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제자들이 한국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었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Henrik H, Sorenson(1999) p. 128. 경허는 천장암 시절 이후 20여 년 간 천장암과 서산 開心寺, 서산 浮石寺 등지로 왕래하면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또한 이 시기에 경허의 법은 이은 제자들인 만공과 혜월, 수월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천장암 시절의 경허에게서 보조지눌의 ?修心訣?을 배운 수월은 이후 동산, 효봉, 청담 등과 금오태전을 길러냈다.5] 경허와 그가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서 전개된 새로운 선불교 운동은 일 년에 두 차례 하는 정기적인 修禪安居 전통을 회복했으며, 강원과 선원제도를 통해 捨敎入禪의 선풍을 확립했다.6] 또한 圓宗이라는 이름으로 일본불교와 한국불교를 통폐합하려던 일제의 종교정책에 대항하여 한국불교의 선 수행전통을 지키려는 의도로 출발했던 선학원禪學院의 주도적 인물들이 대부분 경허의 법맥에 속한 이들이었다.7] 1898년 나이 53세에 경허는 부산 범어사의 요청을 받고 선원을 설치하기 위해 범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04년 북방으로 길을 떠날 때까지 그는 범어사와 해인사, 송광사, 지리산 화엄사, 실상사 등지를 오가면서 선문의 지도자로 활약했다.8] 경허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글과 자취를 남겼는데, ?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에서는 그러한 행적을 설명해 주는 사상적 배경을 드러낸다. 5] 현대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성립되기까지는 현대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불리는 경허성우 선사의 투철한 禪 체험과 활동이 근현대의 한국 선불교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근현대 한국 선불교의 맥을 이어간 대부분의 선승들이 경허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했거나 그 제자들에게서 사숙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먼저 水月音觀(1855-1928)?(南泉翰圭(1868-1936)?滿空月面(1871-1946)?慧月慧明 "대저 불자가 되어 부처님의 교화를 힘써 행하지 않고 자기의 私心 때문에 훌륭한 법회를 폐지한다면 하늘과 땅의 숨은 벌(冥誅)과 드러난 顯罰이 있을지니 가히 두렵지 않은가? 대저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음에 9]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p. 195-196. 인용문에서 말하는 불자의 ‘사심’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경허가 생각하기에 ‘부처님의 교화를 힘써 행하는’ 것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면, 대중의 교화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승려들의 독선적인 태도와 아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사심 때문에 법회를 폐지했다는 것은 경허가 열성을 보였던 禪會의 부흥을 원치 않는 승려들도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경허의 노력으로 인해 이 시기에 한국불교계에 선풍이 크게 일어나서 한용운의 표현에 의하면 ‘절치고 禪室이 거의 없는 곳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10] 그는 길지 않는 5년여의 기간 동안에 영남의 해인사와 범어사, 호남의 화엄사, 천은사, 태안사, 실상사, 덕유산 송계암 등에서 수선결사와 장경 인출印出 불사 등을 주도하면서 수행자들을 직접 접하고 교육시키면서 구한말의 선을 부흥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 전통 선어록을 망라하면서 조선후기 선학논쟁의 원전을 포함하고 있는 ?禪門撮要?를 편찬하기도 했다.11] 10] 한용운(1992), p. 55. 한용운은 이러한 당시의 참선의 부흥현상이 선을 부흥시키는 본질보다는 선실의 설치를 사찰의 명예나 이익의 도구로 삼는 곳이 많아서 진정한 선 수행자가 드물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각 사찰의 선실을 통합하여 한 두 개의 큰 규모의 선학관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선학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김종진(2004) p. 30. 문제는 경허가 이따금 세속의 비난을 피하기 힘든 파계행으로 인해 선사로서의 그의 자질까지 의심받기까지에 이르기도 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수제자인 방한암 마저도 그의 법화는 받아들이되 行履는 본받지 말라고까지 했던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으로 나뉘는 원인을 제공했다. 먼저 이능화가 경허의 행적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들여다보자.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경허화상은 말재주가 있으며, 그가 말한 法은 비록 옛날의 조사라 할지라도 이를 넘어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음행과 살생을 범하는 일까지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의 禪을 하는 자들이 다투어 서로 이것을 본 받아서 심지어는 음주와 식육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도둑질과 음행도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이를 대승선이라고 말하며 수행을 하지 않는 허물을 가리고자 하는 것을 모두 옳다고 하니, 이러한 못된 풍습은 실로 경허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총림은 이를 지목하여 마구니의 설이라 한다. 나는 아직 경허선사의 깨달음의 경지를 감히 안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만약 불경과 禪書로써 이를 논한다면 옳지 않은 것 같다."12] 12] 世人謂鏡虛和尙, 有辯才, 其所說法, 雖古祖師, 無以過之. 雖然, 蕩無拘檢, 至犯?殺, 不以介意. 世之禪流, 爭相效之, 甚至倡言飮酒食肉. 不?菩提, 行盜行淫, 無妨般若, 是謂大乘禪云云. 欲爲?飾其無行之過者, 滔滔皆是. 蓋此弊風, 實自鏡虛, 始作俑也. 叢林以是, 指爲魔說, 余未敢知, 鏡虛禪師, 悟處見處, 而若以佛經禪書論之, 則似非是. 이능화(1972) pp. 962-963.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능화의 경허의 행적에 대한 비판은 격렬했으며, 경허뿐만 아니라 당시의 선종 일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13] 당시의 경허의 일탈에 대한 비난은 주로 여인에 대한 집착, 즉 그의 淫行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세간의 비난에 대해 경허는 온전히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최병헌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찬동했던 이능화의 성향으로 보아 선의 부흥을 염원했던 경허의 의의를 잘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종에 속하는 승려들이 주도했던 당시의 불교계 상황으로 보아 경허의 불교가 마설로 비난받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한다. 최병헌(2008) p. 67. 경허집에 실린 그의 시 중에는 세간에 대한 원망과 체념을 담은 내용이 가끔 등장한다. 인심이 사납기 맹호와 같아 악독한 기운이 하늘까지 퍼진다. 14] 人心如猛虎, 毒惡徹天飛. 伴鶴隨雲外, 此身孰與歸. 석명정 편(1990) p. 155. ‘호랑이같이 사나운 인심’이나 ‘악독한 기운’이란 경허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비난과 질시를 만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그 피폐한 상황에서 경허가 이룬 참선결사들과 각종 불사들을 보면 그의 저돌적인 추진력의 맞은편에 그와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들 또한 많았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인용문의 구절들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몸담고 있던 불교계에 더 이상 발디딜 수 없게 된 경허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시문 안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들이 언뜻 내비치는 구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대의 鶴子와 梅妻가 은근히 부럽고 주모와 장사꾼들 틈에 섞여 지내니 15] 羨君鶴子梅妻隱, 愧我風裳水佩寒. ?與金淡如金小山吳荷川團會?, 석명정 편(1990) p.220 16] 酒婆商老與之班, 韜晦元來好圓? ?書悔? 석명정 편(1990) p. 205. 앞의 인용문은 벗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벗의 가족들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부끄러워하는 내용이다. 시에 담긴 경허의 의도가 벗을 추켜세워 주는 데에 있다할지라도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하는 고백은 솔직하다 못해 비감한 정서까지 느껴진다. 그 아래의 인용문은 잠시 절을 나와 떠돌던 시절에 잡역부로 일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았던 당시의 심정을 토해낸 구절이다. 그의 명성과 파계행은 양립하기 힘든 것이었고, 당시 불교계의 질서 안에서 수용되기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시정으로 나와 떠돌아야 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의 사찰을 누비며 한국 선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던 경허는 1904년 함경도로 가는 길에 잠시 천장암에 들러 제자인 만공의 補任을 확인하고 전법게를 내린 이후로 한국 불교계에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경허의 결사행적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보조지눌이 말년까지 결사를 이끌며 한국불교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했던 반면에 경허는 5년 만에 결사를 중단하고 아예 불교계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지눌이 당시의 최고 집권자인 崔瑀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경허는 일제하 불교계의 힘겨운 상황과 친일 승려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 불교계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17] 이는 또한 전술한 경허의 여러 파계행으로 인한 불교계 내외의 비난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 불교계는 功過가 공존하는 경허의 존재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편안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7 최병헌(2008) p. 94. Ⅲ. 경허의 몸과 마음 1. ‘몸’이 저지르는 파계, 그리고 경허의 변증 만공월면이 지은 ?경허법사영찬?에는 “착함은 부처님에 지나고, 악함은 호랑이에 지나던”18]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과연 그의 직전제자인 만공이 부처님보다 착하고, 호랑이보다 악하다고 했던 그의 행적은 어떠한 양면성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또한 同書의 간행사에서 만공이 “짐짓 집착에서 무애를 부수고, 무애에서 집착을 부수니, ?兒行과 逆行을 겸하신 대실천보살”19]이라는 대목에서 말하는 ‘영아행’과 ‘역행’은 아마 ‘호랑이보다 악한’ 행적에 해당되는 표현일 것이다. 경허의 행적에서 드러나는 功過의 두 모습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그의 각종 파계행적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의 파계행의 사실 여부에 대한 의심의 반론도 있지만, 그와 가장 가깝다고 해도 좋을 제자들이 경허의 행장을 정리한 책에서 “법화는 배우되 행리는 배우지 마라”20]는 글을 남겼다면 그 사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파계행 중 대표적인 사례를 제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해인사 조실로 있던 경허는 어느 날 몸이 만신창이가 된 광녀를 데리고 와 조실방에서 함께 기거하며, 숙식을 함께 했다. 제자 만공이 보니 그 광녀는 이목구비도 문드러진데다가 지독하게 악취가 심해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경허는 태연하게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다."21]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행적은 그 대상이 몰골이 흉한 광녀였다는 점에서 파계행보다는 무애행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 누구나 탐할 만한 여인이거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경허의 법력을 보여주는 예화로써 자주 거론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①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매일 육식안주에 술을 마신 것 ② 天藏寺 시절에 술을 가져온 방문객에게만 법문을 들려준 것 ③ 모친을 위한 해탈법문을 하는 자리에서 나체가 되어 보인 일 ④ 마을 처녀를 희롱하고 도망간 것 ⑤ 무거운 짐을 들고 빨리 걷는 방법이라며 여인을 희롱하고 도망간 것 ⑥ 상여행렬에게서 술과 고기를 얻어먹은 일 ⑦ 개심사 조실 시절에 시자를 시켜 쌀을 훔쳐서 술과 고기를 사오게 한 일 등이 ?경허법어? 안에 실려 있다. 아울러 ?경허법어?의 편찬주체가 그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내용을 추리고 걸렀을 가능성이 많은데도 이러한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내용을 넘어서는 사실도 많았으리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도 잇을 것이다. 18]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18. 20] 김진성이 번역한 ?경허법어?에서는 방한암이 쓴 행장의 이 부분을 “화상의 법화를 배움은 옳거니와 화상의 행리만을 보고 평론함은 옳지 못함이로다. 이는 다만 그 정법을 결택하여 법안을 갖추지 못함을 꾸짖을 지어다.”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편(1981) p. 688.)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석명정이 번역한 다른 책에서는 “뒤에 배우는 이들이 화상의 법화를 배움은 옳아도 화상의 행리를 배우면 안 되니 사람들이 믿되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석명정 (2004), p. 171.) 번역한 글의 표현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인 맥락은 화상의 행리는 잘 다듬어진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판단을 그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서 섣불리 이해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경허는 선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실제적인 자신의 행적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경허 집 안에 실린 그의 시를 보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귀를 닫고 산 것만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먼저 자신의 무애행 혹은 파계행에 대해 변증하는 경허의 육성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화엄사의 강백이었던 陳震應이 경허에게 안주와 술을 대접하면서 왜 술을 좋아하는지 묻자 이에 대해 답하는 내용의 ?震應講伯 答頌?라는 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돈오하여 이치를 깨달음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22] 頓悟雖同佛, 多生習氣生,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328 인용문의 시를 보면 경허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자신의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술과 탐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행적을 ‘부처님’ 대 ‘다생의 습기’로 대별시키고 있다. ‘폭풍이 잠잠해도 아직 파도는 남아 솟구치듯이’ 자신의 깨달음은 분명하나, 전생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술과 욕망의 습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인용문을 보면 경허는 자신의 깨달음과 習氣가 여전히 배어 있는 몸을 완벽히 분리해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다음의 시에서는 그의 심한 음주 행위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좀 더 선명하게, 현실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술내기 시제로 삼아 질탕하게 마시지만 새 문화 구식이 둘 다 맘에 안 들어 23] 沽酒題詩跌宕多, 風塵鼎沸也將何. 석명정 편(1990) p. 228. 24] 新文舊式兩依微, 痛飮一忘是或非. 석명정 편(1990) p. 229. 인용된 시를 보면 그를 술 취하게 하는 것은 다생의 습기가 아닌, 19세기 말 조선 사회의 현실이다. 세간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그리고 구문화에서 신문화로 가는 전환기였던 당시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힘들어 술을 마신다는 것이 경허의 변명이다. 여기서는 수행자로서의 자기 성찰보다는 불교계에 속한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더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마음과 몸에 대한 경허의 인식을 보여주는 경허의 다른 글을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슬프다, 이 몸은 허망하기가 물거품 같아서 건장한 청년기가 머물지 않음이 달리는 말과 같으며 잠깐 있다가 사라짐이 풀끝에 이슬 같고 금방 꺼져버림이 바람 앞에 등불 같도다. 온갖 더러운 피고름을 싸가지고 있으며 아홉 구멍으로 부정한 물이 흐르나니 그 추악함과 덧없음이 이와 같으니 가히 두렵고 싫증날 일이거늘 밝지 못한 술에 취하여 분별식심의 풍파에 흔들려서 몰려 온갖 정신을 다 써가며 오랜 세월을 죄업을 빚어 오면서도 마침내 반성하지 않나니 슬픈 일이로다." 25] 25] 석명정 편(1990) p. 78. 이 인용문에서도 경허는 자신의 몸에 대해 허망하고, 추하며, 부정하고, 유한한 물질로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나아가 그 혐오스러운 몸이 밝지 못한 술에 취하여, 분별심에 흔들리며, 정신을 소모하고, 온갖 죄업을 만들어내면서도 반성이 없음을 슬퍼하고 있다. 결국 경허는 유한하고, 추하며, 정신을 소모하는 물질로서 몸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덧붙여 분별심에 흔들려 오랜 세월을 죄업으로 빚어오는 주체 역시 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허에게 있어 몸과 마음은 온전히 분리되는 것이었을까. 아래 인용문을 보면 단순히 이원론적 시각으로 인식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물며 병이란 마음으로부터 나는 것인데 마음이란 저 아지랑이 같은 것이다. 이 경허는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추우면 춥다하고 그 밖에는 잠이나 잘 따름이로다."26] 26] 석명정 편(1990) p. 125. 위의 인용문을 보면 ‘병이란 마음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이란 저 아지랑이 같은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한다. 일단 경허가 말하고 있는 병은 육체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몸이 앓는 병의 근원이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경허는 마음과 몸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단지 그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병을 담고 있는 실체로서의 몸에 대해 마음이라는 것은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육체의 현상에 대해 경허는 단지 배고픔과 추위, 졸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듯 온전히 수용할 뿐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파계행 역시 이미 깨달아 있는 상태인 마음이 만들어 내는 욕망들을 추구하는 물리적 현상인지, 아니면 마음의 개입 없이 다생의 습기가 만들어내는 충동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또한 이에 덧붙여 깨달은 마음이 여전히 욕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경허가 보는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마음의 측면을 위주로 하여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2. 경허가 보는 마음, 그리고 無心行履 이제 이 장에서는 경허가 마음의 측면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경허가 지은 한글가사인 ?중노릇하는 법?을 보면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시각이 비교적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중 노릇하는 것이 작은 일이리오.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여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 되어 살고 죽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니, 부처 되려면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 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으로 알고,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되고 귀신도 되어,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을 생각하여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되 보고 듣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고? "27] 27]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148. 인용문을 통해 본다면, 경허에게 있어 ‘중노릇’이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마음을 찾는 일이다. 자신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을 담고 있는 몸을 송장으로 알고, 세상사의 유한성을 알며,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며, 끊임없이 마음이 어떠한 물건인지를 궁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을 찾고 아는 것일 뿐 몸과 관련된 현상은 하찮고 유한한 것이며, 잊어버려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경허는 하찮은 부속물인 몸이 지어내는 현상인 그의 파계행 역시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일 뿐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경허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인식하는 관점은 그가 지은 ?法門曲? 에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허망하다 이 몸이여 더운 것은 불기운, 28]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155-168. 인용문을 보면 경허는 철저하게 몸을 추한 것,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반면에 마음은 몸이라는 허황한 빈 껍질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부처이자, 그 부처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마음으로 인해 언어와 동작을 하고,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으니, 그 마음을 알게 되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모든 곳, 모든 때에 ‘이것(마음)이 무엇인지’ 항상 깊이 의심하고 궁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경허의 생각이다. 또한 경허의 ?布袋和尙歌?에서는 명확하게 ‘마음’ 만이 부처임을 선언하기도 한다. 다만 마음이라고 하는 마음 그 마음만이 부처이니 29] 석명정 편(1990) p. 329. 인용문에서는 마음만이 부처이며, 신령한 물건으로서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가장 진실한 ‘그 놈’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마음은 만법 그 자체이며,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만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전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경허에게 있어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교학의 완성이자, 견성성불 그 자체가 된다. 그렇다면 경허는 그토록 중요한 물건인 마음을 아는 법, 마음을 깨닫는 법에 대해 어떠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까. 다음의 인용문에서 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착한 마음이 좋다 하여도, 또 천당으로 갔다가 도로 떨어져 지옥이나 축생이 되어 가니, 착한 마음도 쓸 데 없고, 일체 마음을 없애고 하면 다른 데로 갈 것 없고, 마음이 깨끗하여 혼곤하지 아니하면 캄캄한 데로 가지 아니하니,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이 부처되어 가는 길이니, 내 마음을 항상 의심하여 궁구하면 자연 고요하고 깨끗하여 지나니, 극칙 고요하고 깨끗하면 절로 마음을 깨달아 부처 되나니라. 돌아가지 아니하고, 곧은 길이니 이렇게 하여 갈지니라."30] 30]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p. 153-154. 인용문에 의하면 착한 마음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더라도 육도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여전하므로 아예 윤회와 인과의 근원이 되는 마음 자체를 없앨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일체의 마음을 없애면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길은 마음을 항상 궁구하고 의심하면 자연스럽게 고요하고 청정해진 상태에서 저절로 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가 곧 해탈로 가는 지름길임을 강조한다. 또한 경허는 선사답게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一切唯心造’의 개념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대개 생사와 열반과, 범부와 성인과, 착하고 악한 일들과, 참선, 주력, 기도, 염불 등 모든 수행이 이 마음 밖의 것이 아니니, 자기 말고는 일지기 아무 것도 없는데,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스스로 자기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물상에만 끄달리는 것은 저 들판에 사시사철 끌려다니는 소와 염소와 같나니, 하물며 나고 죽는 모든 재앙이야말로 그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외다. 대저 한 점 영대가 탁 트이어 더없이 청정하고 짜고 기운 흔적이 없는 본래 경지의 그 자리에 이르게 되면 다시 자기 밖의 것과 분리되거나 이어붙일 필요가 없을 따름이다." 31] 31]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282 인용문에 따르면 생사와 열반, 범부와 성인, 선악, 모든 수행이 모두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動靜의 현상 역시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생사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본래의 마음, 그 근원에 다다르게 되면 외물과 자기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무아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 인용문의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경허가 보여주는 각종 파계와 일탈에 대한 설명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본래 추한 속성을 가진 몸이 다생의 습기를 떨어내지 못하고 술과 다른 욕망을 구한다고는 하나 모든 것이 마음 밖의 것이 아니라면 경허의 일탈 역시 그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굳이 몸과 마음을 분리시킬 이유도 없이 모든 현상들은 경허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맺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욕망과 그것이 발현되어 빚어내는 각종 파계에 대해 과연 경허는 어떠한 방식으로 변증을 진행할 것인가.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뻐꾹새 한 소리에 盡日無心 終夜無心 32]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 516. 이 인용문에 따르면 경허는 모든 현상을 만들어내는 마음조차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자신은 ‘하루 종일 무심하고’, ‘밤새워 무심한’ 무심객이 되어 달과 바람마저도 그와 더불어 무심해진다는 것이 이 시에서 말하는 무심의 경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허의 자기이해 논리에 따르면, 자신의 파계와 일탈의 행위들은 마음 안에서 빚어진 것들이 아닌, 현상을 분별하는 마음이 아예 없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無心行履’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무심행리는 도교적으로 표현하지면 무위진심이며, 이러한 무심행리를 할 수 있는 자신이야 말로 세간을 초월한 ‘出世丈夫’라는 것이 경허의 궁극적인 변증인 것이다. Ⅳ. 대중적 포교사 혹은 치열한 선 수행자 이 장에서는 전 장에서 서술했던 경허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이원 분리적 시각에서 궁극적인 무심의 단계로 통합되는 사유구조가 그가 제시하는 수행관 안에 어떠한 형태로 반영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반적인 경허의 저술들을 보면 그 자신은 불교 교학에 달통한 강백이자, 선 수행에도 철저했던 선사였지만 정작 대중 앞에서 법문을 설할 때는 될수록 평이한 용어와 해설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던 면이 드러난다. 반면에 전문 수행자인 승려들에게는 날선 언어로 치열한 수행의 정신과 실천을 요구하기도 한다. 경허가 1899년 9월 하순에 작성한 ?陜川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에는 수선사 창립의 전말과 한국불교의 선문에 대한 비판의식, 그리고 경허의 수행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요즘은 정법 보기를 흙덩어리 같이 하며 慧命을 계승하기를 아이들 장난처럼 여기고, 심하면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여 더나가서는 못하는 짓이 없으니 슬프도다. 뒷사람들이 비록 正法眼藏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 누구에게 듣겠는가? 이러한 때 수선사를 창건하는 것은 실로 불 가운데 연꽃이 피어난 것이다."33] 33]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p. 250-251. 인용문의 내용은 경허가 당시 교단 안에서 분쟁을 만들고, 안일한 수행태도를 보이는 승려들에게 불가 본연의 임무인 법회의 설치를 통해 대중을 교화하고, 결사를 조직하여 수행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경허의 수행관의 또 다른 모습은 제자인 한암에게 준 글인 ?與法子漢巖?의 첫 대목과 그의 선시 ?定慧寺? 중의 마지막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천성이 세간의 티끌 속에 섞이기를 좋아하고 여기에 더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34] ?????중략????? 사람들아, 장자의 호접몽이 眞如의 일이라면 34] 余性好和光同塵, 掘其泥而又喜乎, 曳其尾者也.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p. 106 35] 諸君莊蝶眞如事, 我亦從今曳尾遊. 김달진(1987) p. 36. 인용문 안의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닌다(曳尾塗中)”는 구절은 ?장자? ?秋水?편에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거북이 죽어서 점치는 데 쓰여 귀하게 되는 것 보다는 살아서 꼬리를 끌며 진흙 속을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산중의 선방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과 함께 세간의 고통 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파계행 마저 서슴지 않았던 경허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36] 하지만 젊은 시절의 경허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치열한 선 수행자였다. 그는 조실 방에 앉아 꼼짝도 안하고 깊은 선정에 들었으며, 졸음이 오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때렸다고 한다.37] 동학사 조실 시절에는 염화실 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앉아 좌선을 하면서 공양만 거르지 않은 채로 다른 여하한 움직임도 없이 정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38] 또한 경허는 선법을 지도하는 禪師이면서 동시에 각 사찰을 돌아다니며 경전을 강의하는 강백이기도 했다.39] 오대산 월정사에서 방장 柳寅明이 경허에게 청하여 3개월 간 화엄경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그 첫 번째 강의에서 경허는 ?大方廣佛華嚴經?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36] 경허의 파계행은 그에게 ‘훌륭할 때는 부처보다도 훌륭하고 악할 때는 호랑이보다도 악하다(善時善過於佛, 惡時惡過於虎)’는 양극단의 평가를 안겨주었다. 큰 지혜에 걸림이 없는 최상승의 경지라고 두둔하는 호의적인 시선이 있는가 하면 당시 계율과 질서가 방만해 있던 불교계에서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많았다. ?경허집?에서는 ‘나중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화상(경허)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옳지만, 화상의 행리(행적)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後之學者人學和尙之法化則可, 學和尙之行履則不可)는 말로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을 대변해주고 있다. 38] 이흥우(1996) p. 85. "大라. 대들보도 대요, 댓돌도 대요, 대가사도 대요, 세숫대도 대요, 담배도 대이니라. 廣이라. 쌀광도 광이요, 찬광도 광이요, 연장광도 광이요, 광장도 광이니라. 40]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p. 619-621. 경허의 이러한 풀이는 ?화엄경?의 고원한 사상체계를 받들어왔던 경학 강사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해석일 수도 있다. 그가 제시하는 낱낱의 구절들은 ?大方廣佛華嚴經?의 제목에 쓰인 본래의 의미는 잘 맞지 않는 그야말로 비슷한 소리글자들의 배열일 뿐이다. 경허의 이러한 파격적인 해석은 대강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나 동석한 동료 승려들의 기대는 무시한 채 철저하게 법회에 모인 일반 대중들을 향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허의 수행관은 교학 역시도 엘리트 학승들이 아닌 대중의 濟度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일상적인 언어로 제목을 해체하면서까지 대중들이 갖고 있는 경전에 대한 거리감을 깨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경허의 이러한 파격적인 ‘유연성’은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경허집?에 실려 있는 ?與藤菴和尙?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경허의 사상적 단초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중략????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최상승법을 설하시면서 “눕지 않고 앉기만 하거나, 하루 한 끼를 묘시에 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 선정과 해탈을 논하지 아니하였고, 계를 지니고, 계를 파하거나 승속?남녀를 논하지 아니하였고, “견성하면 곧 부처가 된다.”고 하였을 뿐이니?????" 41] 41] 석명정 편(1990) p. 120. 특정한 수행법에 매임이 없이 오로지 ‘見性’이라는 절대적 깨달음 하나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경허의 수행관은 승속과 남녀의 차별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법문의 형식이나 수행방편 역시 철저하게 대중성을 지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허 자신이 직접 쓴 한글 가사인 ?법문곡?과 ?가가가음?, 그리고 국한문 혼용체인 ?참선곡?, ?금강산유산가? 등과 순 한글법문인 ?중노릇하는 법? 등이다. 특히 ?가가가음?이나 ?중노릇하는 법? 등은 그 제목에서부터 대중의 흥미를 끌어 당기고, 승려로서의 종교적 권위를 벗어 던지고 있으며, ?참선곡? 역시 불교의 참선을 대중들에게 쉽고 명료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42] 순 한글로 법문을 썼다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는 대상을 전문 수행자나 지식인층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로까지 확대시키려 했던 경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이러한 경허의 글에 대해서 “혹은 술집과 시정에서 읊은 것이긴 하되 저속 하지 않으며, 비바람 눈보라 치는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43] 42]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2009) p. 60. 만해는 한국불교의 혁신을 위해 승려와 비구니의 금욕주의를 폐지할 것을 주창했기 때문에 경허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이나 저술에 대해 관대한 평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Gregory Nicholas Evon(2001) pp. 21-22. 하지만 경허는 이처럼 대중적이고 쉬운 수행 방편은 배움이 없는 신도들에 제한하여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들을 보면 전문 수행자 승려들에게는 화두선과 일심, 그리고 무심의 수행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경허는 ?與藤菴和尙?에서 궁극적 해탈을 위한 길 내지 미타정토에 왕생하는 길을 위한 一心의 수행을 수차례 경전의 전거를 들어가며 강조하고 있다. 경허는 먼저 ?미타경?에서 “하루 이틀 내지 이레 동안 한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이는 왕생한다” 하였고, ?십육관경?에서 “마음을 한 곳에 매어서 그 관하는 것을 역력히 하여 오랜 시간을 또렷이 하면 삼매에 들어 무량수를 성취한다”고 한 대목을 들고 있다. 또한 경허는 화두선을 통한 견성성불뿐만 아니라 정토왕생을 위한 실천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정토왕생을 가능케 하는 세 가지 요소로서, 보리심, 즉 중생들이 날마다 쓰는 신령스러운 성품을 개발하거나, 觀像三昧를 성취하거나, 一心不亂을 성취하는 것을 들기도 한다.44] 아래 인용문을 보기로 하겠다. "만약 이와 같이 온전한 공력을 조사의 參究하는 문 가운데 베풀면 누가 견성성불을 하지 못하겠는가. 화두를 참구하는 문 가운데 말한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히 지니면 반드시 능히 견성하고 염불문 가운데 말한 일심불란은 결정코 왕생하나니 일심불란이 어찌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히 지님이 아니겠는가."45] 인용문에서는 禪門을 통한 견성성불과 염불문을 통한 정토왕생이 같은 의미의 수행이라는 것, 즉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히 지니는’ 수행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염불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상태는 화두선의 猩猩寂寂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허가 보는 정토왕생은 수행의 최고 단계에 이른 보살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개 십지十地 이상 보살도 오히려 보신불의 정토를 전부 보지 못하는데 번뇌에 얽힌 범부가 능히 생사를 해탈함은 그 공덕이 온전히 일심불란을 의지함이다. 만약 일심불란이 되지 않으면 어찌 단번에 벗어버리겠는가."46] 인용문에서 보듯, 십지 이상의 보살도 온전히 볼 수 없는 보신불의 정토를 오히려 범부들이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일심불란의 수행에 의지한 공덕이다.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생사를 해탈한다는 것과 동일하며, 이는 또한 화두선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수행의 완성과도 통한다. 경허는 ‘한 마음도 흐트러지지 않는’ 염불수행도 정토왕생과 생사해탈의 길임을 밝힘으로써 염불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범부들에게도 궁극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허의 대중적인 수행 방편에 대한 고민은 범부들을 위한 염불문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법문곡?에는 일심불란의 염불수행 마저도 힘든 이들의 깨달음과 왕생을 위한 수행의 방편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난다. 44] 석명정 편(1990) p. 23. "오호라 돈 한 푼을 놓고 절을 하든지 밥 한 사발을 놓고 위하여도 복을 한없이 받는다 하시고 이 위의 다섯 가지를 지성으로 하여가면 복이 한없다 하시니라. 47]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pp. 165-168. 인용문에서는 견성, 왕생, 일심불란 등의 용어조차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한없는 복’을 받을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에 대해서만 나열하고 있다. 보시, 愛語, 不偸盜, 利行, 同事 등의 계행과 사섭법을 아주 쉬운 용어로 해석하고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경허가 가사 형식, 즉 노래로 읊조리듯 불교의 교의를 무지한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법문곡?을 썼으며, 불교 수행이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님을 설득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허는 이렇게 쉽고 편해 보이는 ‘복 받는 길’의 이면에서 다시 한 번 수행의 要道를 다짐받는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행을 갖추어 닦더라도 오직 무념으로써 종지를 삼는다’ 하였으니 수행의 요긴함이 결정코 여기에 있음이라. 치우치거나 過不及의 실수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48] 48] 석명정 편(1990) p. 87. 인용문에서 말하는 ‘萬行’은 이른바, 보시, 지계행, 불사 공덕, 선행, 각종 수행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실천들을 다 갖추어 행하더라도 무념無念으로써 수행의 중심을 잡지 않으면 궁극의 해탈에 다가 설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결동수정혜동생두솔동성불과계사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문장으로서, 승려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까지 수용했던 결사라는 점에서 비추어볼 때, 전문 수행자와 일반 신도를 대하는 시각이 달랐던 경허의 이원분리적 수행관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경허는 승속에 상관없이 견성만 하면 해탈할 수 있고, 염불과 선 모두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수행이며, 범부라도 보신불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없이 넓은 문을 열어 보이고 있다. 또한 그는 전문적 수행을 할 여력이 안 되는 민간 신도들에게는 효와 계행이 복받는 길임을 강조하지만, 승려들에게는 화두참구와 일심불란의 염불을 요구한다. 경허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승속 모두에게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심 내지 무념이며, 치우침 없는 무심의 행리임을 강조한다. 결국 경허의 수행관 안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수행자 각자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 스스로에게 맞는 수행법을 골라 실천하면 되고, 각 수행법 간에는 우열의 편차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염불, 참선, 주문, 공양, 보시, 선행 등의 각종 수행법을 다 실천하더라도 현상을 분별하는 마음을 지우는 무념, 무심을 수행의 종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 무심(무념)이 수행의 가장 궁극적인 단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Ⅵ. 결론 경허의 파계행은 그가 근대 한국 불교사 안에서의 그의 무게만큼이나 오랫동안 한국 불교학계의 쟁점 중의 하나였다. 본 논문에서는 ‘무애행’ 혹은 ‘파계승의 일탈’, 그 어느 쪽에도 시선을 두지 않고, 그가 세간과 불교계의 비난 속에서도 스스로 ‘출세장부’ 임을 외칠 수 있었던 근거를 찾아보고자 했다. 먼저, 경허는 몸과 마음에 대한 이원분리적 시각을 갖고 있었으며, 몸=‘본래 청정하지 못하며, 세간의 머무를 수밖에 없는 물건’ 대마음=‘부처이자,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의 사유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경허는 자신의 마음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되, ‘다생의 습기’로 말미암아 욕망의 습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국 경허에게 있어 몸은 유한하고, 추하며, 정신을 소모하는 물질이며, 덧붙여 오랜 세월을 죄업으로 빚어오는 주체 역시 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경허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가 들어 있는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야 하며, 그 마음을 담고 있는 몸을 송장으로 알고, 마음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궁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을 찾고 아는 것일 뿐 몸과 관련된 현상은 하찮고 유한한 것이며, 따라서 그의 몸이 지어내는 현상인 파계행 역시 다 허망한 것일 뿐이다. 오로지 마음만이 부처이며, 신령하고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만법 그 자체이므로,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견성성불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마음이 만법을 지어낸다는 이 논리적 구조는 경허의 일탈을 그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마음이 만법을 지어낸다면 그의 일탈 역시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허의 사유구도에 따르면, 자신의 파계와 일탈의 행위들은 마음 안에서 빚어지는 분별이 아예 없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無心行履’ 가 된다. 결국 경허는 이러한 무심행리를 할 수 있는 자신이야 말로 세간을 초월한 수행자라는 궁극적인 변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허의 이원적 분리→통합으로 귀결되는 사유구도는 그가 제자나 신도들에게 제시하는 수행관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그는 전문 수행자들에게는 빈틈없는 ‘일심불란’ 혹은 ‘성성적적’의 수행을 요구하면서도 대중을 향한 법문에서는 파격적일만치 평이한 용어와 해설을 제시했다. 선 수행을 통한 견성성불과 염불문을 통한 정토왕생이 같은 의미의 수행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법문곡? 류의 한글가사를 써서 대중적 포교를 지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허는 그의 수행관에서도 ‘무념(무심)’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수행의 종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萬行’을 다 갖추어 행하더라도 無念으로써 수행의 중심을 잡지 않으면 궁극의 해탈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경허의 수행관 안에서는 끌리고 분별하는 마음을 지우는 무념(무심)이 수행의 가장 궁극적인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면 그의 몸이 저지르는 일탈은 그의 마음에 의해 끌린 바 없는 무심의 행이며, 따라서 그 모든 행동들은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체인 무심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무심의 행리라는 것이 경허의 자기 확인이자, 변증인 셈이다. 참고문헌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1981), ?鏡虛法語?, 김진성 옮김, 서울, 인물 연구소. 고영섭(2008), ?경허성우의 불사와 결사?, ?한국불교학? 제51집, 한국불교학회. 접수일:2012.7.5 심사수정일:2012.8.17 게제확정일:2012.8.21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