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이순자
6월이 오면 부산으로 피난 가던 생각이 난다. 내 나이 8살 큰 남동생이 6살 막내 남동생이 3살 때.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28살 엄마가 어떻게 기차 꼭대기에 짐을 싣고 피난을 갈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나이에 결혼 3년 차 딸을 낳고 학교생활 하며 쩔쩔맸는데.
아버지는 일본으로 돈 벌러 가서 소식이 없고 다행히도 외할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약간의 지참금을 가지고 기차 꼭대기에 짐을 싣고 피난 갈 수 있었다.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다 타서 우리는 기차 꼭대기에 이불 보따리로 둥그렇게 둘러치고 그 안에서 일주일을 살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먹을 것은 기차 꼭대기에서 돈을 종이에 싸서 아래로 던지면 김밥을 아래에서 기차 위로 던져 주어 그것으로 연명하면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그때 기차가 떠나면 기차 위에서 김밥을 받다가 떨어지는 사람이 허다했다. 터널을 지나면 콧구멍이 새까맣게 되어서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때는 석탄으로 기차 연료를 사용하던 때였다. 우리는 철이 없어 서로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부산 도착해서는 피난민들은 초량에 천막을 치고 텐트 옆에 냄비를 걸어 놓고 밥을 지어 먹었다. 어떤 날은 시청 앞에서 줄을 서서 꿀꿀이죽을 받아먹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어린 나이에 광복동 거리에 앉아 좌판에 담배 사탕 껌 등을 팔기도 했다. 엄마는 국제 시장에 나가서 일본 배에서 나온 양키 물건을 받아다 팔아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다.
초량 천막촌에서 아버지 친구분을 만나서 그의 문간방으로 이사를 가 3년을 그곳에서 살다 영도에 하꼬방(판자촌)을 지어 내 집이란 명목으로 살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서 한국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 장교로 한국전에 투입되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와세다(일본)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었다. 그런데 겨울 전투 중에 길을 잃어 사흘을 눈 덮인 산야에서 헤매시다 동상을 입고 제대하여 부산 집으로 오셨다.
6살 때 멋진 가방을 사주고 일본으로 가신 아빠가 상이군인으로 집에 오신 것이다. 참으로 인테리 이었던 아버지가 흰 붕대를 감고 부상병으로 돌아오신 것을 나는 무서워서 피했다. 내가 이럴 진데 동생들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엄마는 그 어려운 삶의 무게를 잘도 견디어 내셨다.
정부가 환도하는 바람에 우리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다행히도 나는 6살에 1학년에 입학하여 6.25 전쟁 중 부산 피난살이에도 학교는 중단 없이 다녔다. 천막 교실에서 가마니 깔고 긴 의자를 책상 삼아 공부했다.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간 것은 아빠가 일본 가시면서 똑똑하다고 국민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시켜주신 것이다. 그대로 잘 따라가는 바람에 일찍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는 부산 토박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 하면서 놀려서 설움도 많이 받았다.
환도 후 서울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 인현동에서 세를 들어 살았다. 중 1 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서울 사범 병설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을 할 때 1등을 했으나 사범학교 입학금을 낼 돈이 없어서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 사범에 들어갔다. 그때 사범학교는 전국에서 수재들만 들어가는 특차였다. 나라에서 학비를 대주기 때문에 비율이 높았다. 두뇌는 좋으나 학비가 없어서 경기여고나 이화여고에는 원서를 낼 형편이 안 되었다. 무척이나 가고 싶었지만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나였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교에 대한 열망이 있어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결혼을 하고서 가정이 안정되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딸이 고3일 때 나는 대학원 논문을 썼다. 배움의 갈망이 나를 이렇게 이끌었다. 그리고 내 나이 55세가 되자 명예퇴직 제도가 처음 생겼다. 나는 주저 없이 신청했다. 남편은 65세 정년을 앞두고 지금 그만두는 것이 후회가 안 되겠냐고 수차례 물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는데 결혼 전에는 가정환경 때문에, 결혼 후에는 학교생활로 꿈을 키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정년까지는 10년 남았는데 그 때 퇴직 하지 않고서는 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되어 남편의 동의를 얻어 학교생활을 접고 자유로이 내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녔다. 노래 교실, 붓글씨, 수영, 문학 강좌 등 요일별로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영, 노래교실과 문학 활동은 이어 오고 있다.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책도 5권 내고 문학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제 3년이 지나면 80이 되는데 명예퇴직한 것에 대한 후회는 한 점도 없다.
결혼 전에는 나 자신이 아닌 누구의 딸이나 누나 노릇으로 열심히 살았고 결혼하고서는 시부모님 모시고 30년 생활하고 남편 보필 잘하고 아들딸 잘 길렀으니 이제는 내길 을 가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희수다. 퇴직하고 22년이 지났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나다. 이제는 남편 요양 병원에 매일 나들이 가지만 그렇게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열심히 보필하기에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건강하게 내일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6월이 오니 왜 그렇게 잊고 살았던 지난 시간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미워했던 아버지도 이해가 되고 불쌍한 엄마도 자꾸 생각난다. 90세까지 사셨으니 미국에서 잘 계시리라 믿는다. 다만 무덤에 찾아가서 인사드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아버지 어머니는 큰 남동생이 미국에 살아 그곳에 묻히셨다.
여자의 일생이 그런 것인가! 시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는 20년을 찾아뵈었는데. 친정 부모는 멀리 계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서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6월이 오면 마음 한구석이 싸하다.
(2019. 6. 18 )
나의 소확행
이순자
요즈음 신문이나 드라마에서 소확행( )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소확행이란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이라 한다. 이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며 그의 에세이(링겔한스 섬의 오후)에 처음에 등장한 언어이다.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대단한 일이 아닌 일상에서 흔히 접하고 느끼는 것들이 아닐까.
우리의 삶 속에서 소소한 행복은 누구나 쉽게 찾고 잡을 수 있게 가까이 있지만, 마음껏 누리기가 쉽지 않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마음 맞는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그것이 바로 작은 행복을 누리는 일이리라.
내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행복에 관한 내용이 스마트폰에 들어오고 있다. 딸 만나러 미국에 간 친구가 “Time to say good bye” 배경 음악에 당신은 나의 길동무, 어느새 해가 바뀌는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눈감으면 떠오르는 동무.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이었을까. 처음처럼 오늘도 당신과 인생의 길동무가 되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귀한 인연을 준 당신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글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소확행이 아닐까.
나 역시도 일상의 행복들을 가벼이 지나치지 않고 즐기면서 행복으로 충만한 한 해를 장식한다.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트리를 해 놓고 카드를 쓰고 리스를 달고 가족들과 함께 선물교환을 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소확행 이다. 카드를 쓰는 동안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일 년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서 카드 쓸 사람이 하나 줄었다. 그러나 나는 영정사진을 보면서 말로 대신한다. “여보, 당신이 곁에 계시지 않아도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니까 카드 받지 못한다고 섭섭히 생각하지 말아요. ”또한 당신이 해마다 주던 카드를 올해는 저도 못 받겠네요. 해마다 카드를 써 주던 대로 하늘나라에서 저에게 써 보내세요. “적극적인 표현은 못해도 당신 마음을 제가 아니까 그것으로 만족해요.
소확행 또 있지요. 수영하는 친구들과 수영 끝난 후 점심 먹고 수다 떠는 것도 벌써 20년이 지났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내 연금으로 살아가니 삶이 궁핍하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이 가시면서 유족연금까지 주셨으니 당신을 만날 때까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내고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소확행이 아닌가요. 팔순에 또 한 권을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당신이 아픈 1년 반 동안 여행을 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친구들과도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떠나렵니다. 젊어서는 해외여행이었지만 이제는 국내 여행으로 가려고 합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교우들과도 매주 만남을 이어가고 성지 순례도 다니고 동창들과도 한 달에 한 번씩 수다 떨고 정담을 나누고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과도 얼굴을 마주 보며 옛이야기를 하고 추억을 떠올리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소확행 속에 빠져 보렵니다.
(2019. 12. 19 )
약력: 수필과 비평 등단
국제펜클럽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문학秀 운영위원. 한국수필가협회이 사. 문학미디어이사, 문학의집.서울회원.
수상: 동포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김소월문학상, 문학미디어 문학상, 청양문학상
저서: <고운 여자> <둥지를 떠날 때> <웃음 꽃> <삶, 그 아름다운 추억>
<8인의 문학향기> 타래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