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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시 정라동장 최 영 우 대영웅 이사부 해양진출 21세기 해양강국 초석 ■ 이사부 역사문화축전 성황리에 열려 지난 2011년 8월 5일부터 8월 7일까지 삼척시와 강원도민일보가 공동 주최하여 삼척항 이사부 광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8개 분야 50여종의 프로그램(대회와 공연 전시 체험) 등이 다채롭게 열려 뜨거운 열기와 폭발적인 인파로 38,525제곱미터 광장의 잔디밭을 가득 메웠다. 특히 내년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땅으로 편입 1,500주년이 되는 해양강국의 위상을 다지고, 대영웅 이사부의 국가표준영정을 확정한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정도에 넘는 침탈행위가 계속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삼척시민은 독도사랑 열기와 영토수호 의지가 표출되어 축전 개막식에 7,000여명이 참여해 그들의 영토 침탈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30여명의 학자들이 전국 해양문화 학자대회를 열고, 축전기간 3일 동안 수 만 명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참석하였다. 이사부 역사문화축전은 매년 8월 초에 삼척 정라항 이사부 광장에서 열린다. ■ 해양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 삼척의 대표 브랜드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환동해 주변국은 해양진출전략을 본격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끊임없는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도발적 행위는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 간의 잇단 분쟁사례로 적지 않은 경각심을 준다. 대영웅 이사부의 선양사업은 해양의 역사성을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하고, 주권의지를 확고히 하는 일이다. 21세기 해양시대를 열어가는 창조적인 역할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확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해양문화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여 삼척의 대표 브랜드로 육성한다면 삼척 정라항 일원은 환동해 해양개척 선구자 대영웅 이사부에 대한 성역화의 중심 지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삼척은 동서남북의 군사 요충지 삼척포진은 수군의 기지이다. 현재 오분리 고산성과 정상리 육향산 주위가 그 위치이다. 이 곳은 오십천 하구에 위치하여 수백 척의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자연항구이다. 이 지역은 동해안의 중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함흥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되고 또한 오십천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과 교차하는 동서남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와 고구려는 삼척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마침내 신라가 실직국을 복속시키고 울릉도를 정벌할 때에도 그 출항지가 바로 삼척포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우산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삼척포진이 있는데다가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 항구였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는 이곳에 실직정(悉直停)이라는 군단을 두고 국방에 임했고, 고려시대 우왕 10년(1384)에는 요전산성을 토성으로 축조(주위 1,870척. 약566.6m)한 후 삼척포진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라는 수령을 두어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삼척포진의 만호는 수령이 겸하였으나 조선 태조 6년(1397) 만호를 첨절제사(僉節製使)로 승격시켜 단독 진장을 두었고, 태종9년(1409)에 다시 부사가 겸직하게 되었다가 세조12년(1466)에 다시 분리되어 진장(鎭將)을 두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병제(兵制)의 많은 변혁을 겪으면서 인조5년(1627) “영장”이라는 직을 만들어 전문적인 무장이 삼척포진의 책임자가 되게 했으며, 현종13년(1672)에는 삼척포진의 영장으로 하여금 영동 9개 읍의 군사권을 관장하게 했다. 다음 해인 1673년에는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토포사를 겸하게 하여 철원지역까지 수사권이 확대되었다. 숙종 20년(1694)에는 울릉도를 수토하기 위해 삼척영장과 울진 만호(萬戶)가 매년 교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동해안의 해상방위와 치안의 본산이었던 삼척포진영은 고종35년(1898) 영장 김범구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지금은 진영의 성곽 남단에 자리 잡고 있던 육향산 정상에 1662년 부사 허목이 남긴 척주동해비와 대한평수토찬비만 남아있다. 삼척포진영의 위치는 신라, 고려, 조선 초 세조 때까지 오분리의 요전산성이었으며 육향산 아래로 옮긴 것은 중종 초기인 1510년 전후였다. 1898년까지만 해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밑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남아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동해를 지키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시대의 삼척포진성 자리이다. 이 진영의 성 동쪽 문루를 진동루, 혹은 안해루 또는 세병루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중종 6년인 1511년 삼척부사 이함(李函)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척포진의 아사(衙舍)는 고종35년(1898) 화재로 소실했다. 그 후 1916년 삼척항을 축조할 때 삼척포진성을 허물었다. 선조 때의 대학자였던 성암 김효원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진동루라는 현판을 썼고, 임진왜란 중에는 부사 안종록이 근덕면 영은사에 있던 8백근짜리 불종을 이 누각에 매달아 위급할 때 종을 쳐 주민을 모아 적을 막아냈으며 후에 불종은 영은사로 돌려보냈다 한다. 그리고 숙종 37년(1711) 삼척부사로 온 이성조는 글씨 잘 쓰는 선비로서 안해루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고, 죽서루에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써 남겼다. 이 진동루는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왔으며 고종 24년(1887)에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소남 이희수가 다시 [진동루] [토포아문]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고 한다. 이처럼 명사들의 현판글이 많았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으며, 소남 이희수의 [토포아문]이란 현판글은 십 년 전까지 삼척지방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했던 김영경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3년 전에 삼척시에서 구입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동대지(東臺池) : 삼척포진영의 둔전(屯田)을 이용하는 제언(堤堰;저수지) 동대지의 서쪽고개를 동대현(東臺峴;동대고개)이라 했는데 지금은 [동두구비]로 속칭되고 있음. 동대지의 서북쪽 골짜기를 가사곡(袈裟谷)이라 하며 호대사(虎大寺)라는 절이 있었음. 지금의 정라초등학교 자리. ※참고자료 : [삼척시지] [삼척군지] 선조 원년(1567) 삼척포진영의 군비(軍費)를 충당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둔전 위쪽에 동지(東池)라고 하는 소택(小澤)이 있다”하였으니 동지는 동대지로 정라초등학교 아래 쪽에 있던 동대제언을 가리키며, 둔전은 봉황산 북쪽 골짜기였음. 성종 원년(1470) 강원도 병선(兵船) 수는 소맹선(小猛船)14척 중 삼척포 4척, 울진포와 고성포에 각각 3척, 월송포 안인포에 각각 2척 배치 성종8년(1477) “삼척에는 수철(水鐵)이 나오므로 삼척포 수군 90명 중 40명을 동원 채취하여 염부(鹽釜;소금가마)를 만들어 사용토록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90명의 수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성종 12년(1481) 해안에 봉수대(烽燧臺)와 후망(?望;해안초소)설치 ㆍ 봉수대(5개소) : 가곡산 임원산 초곡산 양야산 광진산 ㆍ 후망(5개소) : 개곡 궁촌 덕산 굴암(추암) 냉천(찬물내기) ■ 이사부는 누구인가? 이사부는 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를 신라 땅으로 만든 장수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공적을 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막 커가던 신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사부는 지혜로웠으며, 그 지혜로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는 방법을 알았다. 신라를 키운 ‘리베로’ 이사부(異斯夫)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사기]가 선두에 선다. [삼국사기]는 열전에 이사부를 설정하고 그의 생애를 간추려 소개하였다. 성은 김 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이라고 하였다. 그가 살았던 지증왕과 진흥왕 때의 활약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변경의 관리가 되어 가야국을 빼앗았다. 둘째, 우산국을 병합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이 가운데 우산국 병합 사실은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6월 조에, 도살성과 금현성의 함락 사실은 진흥왕 11년 3월 조에도 각각 기록되었다. 그리고 가야를 빼앗은 일은 열전의 사다함 조에 더 자세히 나온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야국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때 나이가 십오륙 세인 사다함은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낭도 가운데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 이렇게 본다면 이사부는 지증왕과 진흥왕을 거치는 동안 한참 커가는 신라의 정복 전쟁에서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신라가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격을 갖춰 나가는데, 이사부 같은 이가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를 키운 리베로였다. 그의 발끝에서 시작한 정복 전쟁의 공이 굴러, 마지막으로 김춘추라는 스트라이커에게 골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다만 한 가지. 이사부의 주요활동으로 소개한 세 가지 일이 모두 지증왕과 진흥왕 때 벌어진 점이다. 가운데 법흥왕 때를 건너뛰고 있다. 병부령이 되고 국사를 편찬하자고 제안한 일도 진흥왕 때이다. 거기에 혹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머리를 써서 이기는 전쟁 어쨌건 그 활약상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먼저 정리해 보자. 이사부는 힘만 지닌 장수가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대체로 꾀를 써서 이긴 싸움이었다. 진흥왕 11년(550)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물고 물리는 상황,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 생각했다. 곧 이사부에게 명령하였다.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어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뒤늦게야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도리어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물론 이사부 혼자의 작전이 아니라 진흥과 이사부의 합작품이라 하겠지만, 이 같은 정보와 아이디어를 낸 이는 이사부였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싸움은 더 놀라운 지략의 한 판이었다. 지증왕 13년(512)이었다. 이사부는 아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나, 꾀를 써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으로 다가가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고 알렸다.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는 이 싸움이 있기 7년 전에 나라 안의 주, 군, 현이 정해졌고, 이때 설치된 실직주에 이사부가 군주로 앉았다고 적었다. 실직주는 지금의 울진, 삼척 일대인데, 군주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예이다. (신라본기, 지증왕 6년) 아마도 그런 다음 아슬라주의 군주로 옮겼던 것 같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섬사람들이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신하된 도리를 하지 않’자, 왕이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라고 썼다. 성과 이름이 다르고, 결말에 ‘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백(州伯)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싸움에 공을 세워 군주가 된 것처럼 썼다. 김이 박으로, 박이 김으로 다른 예는 박제상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박제상으로, [삼국유사]는 김제상으로 썼다. 여기서는 그 반대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차이만 넘어간다면 결국 이사부가 새롭게 일어서는 신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임을 강조했다 하겠다. 지소태후의 남편이자 세종공의 아버지 공을 세운 이로서 그 공적이 부각된 데 그친 위의 두 자료를 떠나 [화랑세기]에 오면 이사부는 아연 살아있는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의 다른 이름을 태종(苔宗)이라 하였다. 이 이름으로 [화랑세기]를 뒤져보자. 태종의 아버지는 아진공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이다. 그런데 태종을 둘러싸고 이들보다 중요한 인물이 부인인 지소태후이다. 지소는 본디 이름이 식도부인이고 법흥왕의 딸이었다. 처음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나중의 진흥왕을 낳았다. 법흥왕의 유명(遺命)으로 영실(英失)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화공주를 낳았다. 아마도 입종이 먼저 세상을 뜬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영실과 헤어지고 이사부와 결혼한다. 이사부와의 사이에서는 세종을 낳았다. 6세 풍월주인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 되었다.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지소와 이사부 사이에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로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殿君 : 세종을 말함)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화랑세기]에서) 이때는 진흥왕이 왕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진흥을 낳은 지소부인은 태후가 되었는데, 영실의 후손인 미실을 며느리로 들인 것인지 태종 곧 이사부와 의논하는 대목이다. 지아비로서 태종을 존경하는 말투이고, 영실을 생각하면 미실을 곱게 볼 수 없는데, 태종은 전후 사정을 들어 냉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라 권하고 있다. 그러자 태후는 그의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매우 정중한 태도이다.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지소부인의 태종에 대한 태도를 보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재혼한 영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를 이어 남편이 되었을 이사부에게는 깍듯하기까지 하다. 이사부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영웅에서 신으로까지 이사부를 둘러싼 왕실의 복잡한 혈연관계는 이로써 끝이 아니다.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에 낳은 딸이 숙명공주이다. 숙명은 태후 못지않은 문제적 인물이다. “(4세 풍월주)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중략) 그때 황화, 숙명, 송화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했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여기서 왕은 진흥왕이다. 그래서 숙명을 일러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태후가 숙명을 총애하는 것은 숙명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이사부에 대한 애정의 깊이와 연관되는 듯싶다. 이로써 태후 덕분에 숙명의 콧대는 한참 올라가 있다. 드디어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은 것 같은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자료이다. 숙명의 권세는 동복이부(同腹異父) 간인 진흥왕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결국 태자가 된 사도황후의 아들 동륜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리에 오르기가 더뎠던 것은 바로 숙명 때문이었다. 상상(上相)은 상대등으로 보이는데, 이사부의 위치가 만만치 않고, 지소태후의 입김까지 워낙 거세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숙명은 이화랑과 결혼하여 원광(圓光)과 보리를 낳았다. 원광은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린 사람이요, 보리는 12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광에게 이사부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숙명이 자기 아버지 이사부를 얼마나 끔찍이 존경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숙명공주가) 한번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화랑세기]에서) 이사부는 영웅을 넘어 신으로까지 올라갔다. 물론 숙명이 딸인 마당에 딸은 아버지를 그 이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부인과 딸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는 이사부는 정말 멋진 사내였던가 보다. 대체로 밖에서 멋져 보이는 남자란 실상 안에서는 구실 못하는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이사부가 권력의 중심이었던 한 때 이사부와 그의 부인 지소 그리고 딸 숙명을 놓고 그려보는 삼각편대는 막강한 권력의 구조로 보인다. 부인의 사랑은 애틋하고 딸의 존경은 지극하다. 부인은 전남편의 아들인 진흥왕을 꽉 잡고 있고, 숙명은 이부(異父)간인 왕에게서 아들을 낳은 다음 당대 풍월주와 결혼하였다. 어머니와 딸의 행보가 어쩐지 닮아 있다. 그 중심점의 이사부는 상대등 또는 각간이다. 게다가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에게서 아우라는 말을 들었고, 끝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적어도 진흥왕이 실권을 행사하기 이전까지 신라 왕실은 이렇게 이사부 중심으로 움직인 듯하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를 배하여 병부령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대 일을 맡도록 하였다”(신라본기, 진흥왕 2년)는 대목은 그 하나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에 제기한 의문점 하나가 풀릴 것 같다. 지증왕 대까지만 해도 이사부는 외직으로만 돌고 있었다. 그나마 공적이 있어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지만, 법흥왕이 다스리는 26년간은 공적도 지위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다 법흥왕의 딸 지소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이사부는 핵심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리라. 병부령이 된 일 뒤에는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이사부의 권한은 적어도 진흥왕 6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해 7월, 이사부는 제2위인 이찬의 지위에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사를) 정리하여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으로 살피겠습니까” 하자, 왕은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국사]가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에게서 성을 빼앗기까지 한다. 비록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한 자료의 정리여서 그 한계는 있지만, 이사부는 신라 땅에서 권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았던 처음 사람이었다. 참조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 대영웅 이사부 재조명 이사부 심포지엄·전국 해양문화 학자대회 (강원도민일보사 2011년 08월 05일 금요일) ‘우리 땅 독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로 만든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가 한국해양문화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강원도민일보와 삼척시, 울릉군, 동북아역사재단, 강원발전연구원,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등은 한국이사부학회와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의 주관 아래 4∼5일 이틀간 강원대 삼척캠퍼스에서 ‘이사부 역사문화축전 심포지엄 겸 전국 해양문화학자대회’를 개최, 독도와 이사부를 비롯 해양민속·문화 전반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첫날인 4일에는 김대수 시장과 최선도 강원대 부총장,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고석규 국립 목포대 총장, 김중석 강원도민일보 사장, 손승철 한국이사부학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회의(심포지엄) 기조연설과 주제발표, 토론 등이 이어졌다. 이틀째인 5일에는 해양사와 민속, 문학예술, 사회인류 등 8개 분과회의를 열고 논의를 더욱 진전시킬 예정이다.
‘바다 진출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해양 진출은 역사적으로 국가 발전과 직결된다.
‘이사부 우산국 편입과 삼척 출항’심포지엄 (삼척시·강원도민일보 주최·한국이사부학회 주관 2010년 08월 02일 월요일) “이사부 역사축전 전국축제로 부상시켜야” 이사부 출항지 규명과 지역민 역할(손승철 한국이사부학회 회장) 이사부(異斯夫)는 505년, 신라 지증왕 6년에 실직(悉直)의 군주(軍主)로 처음 사료에 등장한다. 이사부의 우산국 출항지를 논하는데는 항로, 수군시설로서의 항포구의 입지조건, 우산국과의 역사적 관계 입증 등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동해안 지역과 울릉도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른 어느지역보다도 삼척이 관계가 깊었다. 고려말 왜구 출현 이후 조선 초기에 들어 시작된 울릉도 주민 쇄환 정책과 숙종 이후 보다 적극적인 수토정책이 시행됐을 때 안무사나 경차관, 수토관의 울릉도 출항에 관한 기록들은 대부분 삼척을 근거지로 하고 있고, 수토군의 편성 또한 삼척인들이 중심이었다. 삼척이 울릉도로 출항하는데 최적지였다는 것에 더욱 설득력을 갖게하는 사료들이다. 앞으로 이사부 역사문화축전은 ‘전국 축제’로 부상시켜야 한다. 또 김인덕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 4월 서울프레스센터에 ‘이사부 우산국 편입 1500주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 제안한 ‘박물관 건립’에도 주목해야 한다. 21세기 해양시대를 열어가는 ‘이사부와 동해 박물관’테마 박물관으로 건립해 문화·관광발전을 더욱 촉진시켜야 한다.
“실직(삼척)은 신라시대 해군 중심도시” 이사부의 동해안 진출과 우산국 정복(강봉룡 목포대 역사학과 교수) 신라의 주는 실직주(505년)→하슬라주(512년)→비열홀주(556년)로 옮겨 간다. 그런데 524년에 건립된 울진봉평비에 실지(悉支·실직)군주가 등장하는 것은 의외다. 여기서 태종 5년(658년)에 실직정(停)을 폐하고, 하서정을 설치했다는 삼국사기 직관지 기록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하서는 하슬라를 지칭하므로 주를 옮긴 후에도 실직에 주력부대인 정이 남아 있었고 또 하나의 군주가 임명됐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봉평비에 나오는 실지군주의 관등은 이사부보다는 낮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를 통해 주력부대(실직정)를 통솔했다고 한다면 출항지 문제는 속단키 어려운 것이 된다. 고고학적 뒷받침 아래 꾸준히 탐색돼야 하는 문제이다. 덧붙인다면 그 당시 하슬라는 동해안의 중심도시적 성격이 강하고, 실직은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또 신라가 이사부를 실직군주로 임명한 해에 선박의 이용에 관한 제도를 정비한 것도 7년 뒤 우산국 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십천 인근서 출항 가능성 가장 높아” 유적과 유물로 본 출항지 검토(이상수 관동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사부 출항지 문제 해결과 관련해 필수적인 요건이 대규모 신라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포구와 그에 수반되는 성곽의 존재성 등 이라고 할 때 삼척 오십천 하구는 주변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커 자연항구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오화리 산성 또한 하천의 하구에 가장 가까이 소재하고 있는데다 입지나 규모 면에서 훨씬 뛰어나고 압도적이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임명되는 해(505년) 11월에 신라는 주즙(舟楫)이라고 하는 선박 이용에 관한 제도를 만들었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7년여 동안 있으면서 수군을 육성하고, 병선을 건조했을 가능성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산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더 이뤄져야 겠지만, 오십천 하구의 입지조건, 지표조사를 통해 출토된 다수의 신라유물, 고려∼조선시대 삼척포진의 역사성 등을 고려할 때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오화리 산성 우산국 정벌군 주둔지” 삼척지역 일대 성곽 및 수군유적 연구(유재춘 강원대 박물관장) 오화리 산성과 오십천 하구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해 가장 중요한 기항지로 여겨지고, 우산국 정벌에도 주력군의 주둔지와 기항지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삼척 요전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도 제기됐다. 신라는 진흥왕 때 주요군단인 정(停)을 실직(삼척)에 설치했다가 100년정도 지난 무열왕 때 강릉에 하서정을 설치하면서 옮겨갔다. 또 무열왕 때 실직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삼국통일 전쟁 막바지에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삼척에 설치한 것이다. 당시 신라가 삼척지역을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장 중요한 군단인 정(停·실직정)을 곧바로 옮기지 않은 것은 이사부의 관할 아래 건설해놓은 군사거점을 옮기지 않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울릉도와 최단거리 항 대부분 삼척에 위치” 항·포구 자연환경 입지로 본 출항지 검토(장동호 공주대 교수) 현장조사 및 문헌조사를 실시하고 GIS기법을 이용해 출항 후보지를 분석했다. 출항지의 정확한 항만 입지를 분석하기 위해 해수면 복원자료를 중심으로 6세기 경의 해수면을 복원한 결과 현재의 해수면보다 약 1.1m가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울릉도와 동해안의 최단거리 및 동위도를 이용한 최단거리 분석 및 지형·경사 분석에서는 삼척 후진항∼고포항 사이 11개소∼17개소의 항구가 최단거리 및 동위도상 최단거리, 경사도 분석에 의한 입지요건을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배후산지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대상으로 3차원 정보분석을 통해 실시한 울릉도 가시권 분석에서는 정라진 봉황산, 오분진 고산성, 임원진 무명봉 등에서 모두 육안 관측이 산술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를 통해 울릉도와 가까운 곳은 거의 대부분 삼척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 출항지는 삼척… 강릉·울진은 공조” 삼척 동해지역의 해항도시적 성격과 이사부 선단 출항지 검토(윤명철 해양문화연구소장) 부두시설이 구비되고, 대외항로와 쉽게 연결되면서 군사력과 해양방어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 항구도시의 요건이라고 할 때 삼척지역은 해항도시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삼척은 특히 해항도시의 가장 핵심조건인 부두 입지조건에 적합하고, 이로인해 조선말까지 수군기지로 활용됐다. 두타산, 청옥산, 덕항산, 응봉산, 근산 등의 산세도 발달해 육안으로 섬의 윤곽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인거리도 양호하다. 삼척과 울진, 강릉지역은 모두 항해에 적합한 해양환경을 갖추고 있다. 신라군은 음력 6월에 우산국 공격을 단행했다. 이 때는 한여름 무풍에 가깝거나 남동계열의 바람이 불어 돛을 이용하기 보다는 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하면, 당시 사용된 선박에 대한 연구 검토가 더욱 필요하다. 출항지는 삼척을 주력항으로 삼고, 북의 강릉지역과 남의 울진지역에서 공조 역할을 한 공동작전일 가능성도 많다. ■ 울릉도와 독도 연혁
울릉도 면적 72.56㎢, 인구 1만 398명(2009)이다. 북위 37°29′, 동경 130°54′에 위치하며 독도와는 87.4km 떨어져 있다. 오각형 형태의 섬으로 동서길이 10km, 남북길이 9.5km, 해안선 길이는 56.5km에 이른다.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이사부가 독립국인 우산국을 점령한 뒤 우릉도(羽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리다가 1915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고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섬 전체가 신생대제3기에서 제4기 초에 걸쳐 화산작용에 의해 형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지질은 조면암·안산암·현무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의 중앙부에는 최고봉인 성인봉(984m)이 있고, 그 북쪽 비탈면에는 칼데라화구가 무너져내려 생긴 나리분지·알봉분지가 있다.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이므로 평지는 거의 없고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기온 12.3℃, 연평균강수량은 1,236.2mm(평균값 기준)이며, 특히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총경지면적은 전체면적의 15%에 불과하고 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전에는 주로 옥수수·감자·보리·콩 등을 재배하였으나 지금은 미역취·부지깽이 같은 산채와 천궁·더덕·작약 같은 약초를 많이 재배해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주민의 절반 가량이 어업에 종사하며 관광산업도 점차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식생은 향나무·후박나무·동백나무를 비롯해 65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39종의 특산식물과 6종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또 흑비둘기 등 62종의 조류(텃새 24종, 철새 38종)가 서식하여 동식물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근해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조경수역으로 오징어·꽁치·명태 등이 많이 잡히며, 특히 오징어는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교통은 강릉공항과 울릉구암헬기장을 부정기적으로 오가는 헬리콥터와 포항·후포·묵호 등으로 정기운항되는 여객선에 의해 육지와 연결되고 해안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지방도로가 있다. 예로부터 도둑·공해·뱀이 없고, 향나무·바람·미인·물·돌이 많다 하여 3무(無) 5다(多) 섬이라고도 한다. [출처] 울릉도 [鬱陵島 ] | 네이버 백과사전
독도 독섬이라고도 하며, 면적은 18만 7,554㎡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한다. 동도·서도간 거리는 151m로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6m, 면적 73,297㎡이고, 서도는 해발고도 168.5m, 면적 88,740㎡이다. 삼국사기에는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술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왕국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독도가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과 무릉 두섬은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71년 삼봉도(三峰島)와 1794년 가지도(可支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이라 칭하고 울릉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하도록 정하였는데, 석도는 '돌로 된 섬'이라는 뜻의 '돌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전라도 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 하여 전라도 남해안 출신의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은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으며,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행정지명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로 알려져 있다. 한편,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 '호넷(Hornet)'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한 뒤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한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2005년 3월 16일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정하는 조례안 가결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같은해 3월 17일 일반인에게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출처] 독도 [獨島, Dokdo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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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척은 대영웅 이사부를 해양문화 관광 콘텐츠 개발 로 삼척의 대표 브랜드화 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어질것 같습니다 ㅎ 기암절벽과 바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삼척 ㅎ
미사님 ! 이사부는 대영웅입닌다. 이글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삼척오시면 연락 주십시오. 감자 떡 고마웠습니다.
바다와 함께 하는 노래방에 가서 바닷가의 오두막 집을 그리는 노래 많이 부르고 왔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ㅎ 읽고 또 읽어도 좋은 글입니다 .예쁜 일식집 풍경이 가끔 행복하게 살아옵니다 ㅎ 감사합니다
바다와 친구되어 즐거운 시간가지셨네요 ㅎ 영채시인님 카페가 그바닷가가 보고싶어집니다 ㅎ
삼척시가 지혜롭고 씩씩한 기상으로 널리 성장되기를 기원드립니다 .
그리고 달이뜬 깊은밤 물동이를 이고 와서 이신비한 기가있는 우물의 물을 떠서 물을 우물에 넣으면 물이옮겨진 우물에도 효혐이 있다하여 ..... 이웃 마을에서 달뜬밤 물을 홈치러 오곤했다는 전설이 있는 바닷가의 우물을
복원해서 신비한 물의 효험을 많은 사람들이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ㅎ
아름다움은 창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삼척의 정라항은 파도가 높고, 남자처럼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의 사랑을 저에게 주기도 한답니다.
네
기암절벽의 바닷가에 바닷가 바로앞에 작고 신비한 우물이 있습니다 ㅎ 바닷가 바로앞에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ㅎ 동네분 말씀이 에전 아주오래전부터 마을분들 모두 이작고 신비한 우물의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ㅎ 단한번도 끊 긴적없고 항상 그정도로 있었다고 합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ㅎㅎ
미사님 마음과 같네요.
그 우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해 준다면
바다친구와 같이 늦은 시간에도 이야기 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졸리네요. 안녕히주무십시오.
좋은 꿈 꾸세요 ㅎ
아! 미사님이 누군지 알것같구요...최영우 시인님! 올려주신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원고가 너무 많은 페이지라서 전부 읽기에 시간이 걸리었을 텐데 아무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