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손곡박씨들의 카페
 
 
 
카페 게시글
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최영장군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689 10.03.25 09: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영(崔瑩)장군 (1316년 ~ 1388년)... 見金如石...최씨 고집의 주인공이다.

 

 

 

 

 

 

 

 

고려말기의 장군이다. 그는 그의 부친인 최원직(崔元直)으로부터  "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 라는 유훈을 받은 후, 자신의 띠에 글씨를 새겨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여당견금여석   汝當見金如石

 

 

 

그는 文臣의 가문에서 태어 났지만, 기골이 장대하여 兵書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장군의 길을 걸어간다. 공민왕 1352년에  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여 이름을 날리게 된다.

 

 

100년가까이 원(元.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는 1354년 원으로부터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지원군의 파병을 요청받는다.  고려 공민왕은 39세의 崔瑩을 대장군으로 하여 병력 2,000명과 함께 출정케 하였다.  元나라에서 대기 중이던 고려인 20,000명을 합류시켜, 지휘하였으나 정작 최영은 전투보다는 대륙의 정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이 쌍성총관부 전투에서 최영은 李成桂와 그의 부친 李子春의 도움을 받는다.

 

 

 

 

 

 

1355년 원정에서 돌아 온 최영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잃었던 땅을 되찾고, 압록강을 넘어 요양의 失地 회복에 나섰다.

 

 

 

 

 

 

 

 

그 후 최영은  北으로는 홍건적...南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모두 막아내어  그 功으로 1388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이듬해 요동정벌에 나섰을 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 그도 生을 마감한다.

  

                                            

 

 

        

  

 

 

 

 

 

 

 

 

                                     이성계의 威化島 回軍과 최영 

 

 

 

 

1388년(고려 禑王) 이인임(李仁任)의 보수 귀족세력은 관료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최영, 이성계 등의무장세력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이후 최영과 이성계는 각각 시중(侍中)과 수시중(守侍中)에 올라 정치를 주도하였다.

 

 

 

 

 

  

 

 

당시 중국을 통일한 明나라가 철령(鐵嶺) 이북이 한때 元나라의 영토이었다는 이유로 무리하게 고려에게 그 반환을 요구하며 서로 대립한다. 이에 최영은 명나라와의 실력대결을 주창하여, 우선 전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요동(遼東)을 점령함으로써 명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반명 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전쟁능력, 시기, 효과 등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4대불가론(4大不可論)을 내세우며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반대하였다.

 

 

 

                                               4大 不可論

 

 

 

이성계는 내세운 이유는 첫째 군량미(軍糧米), 군사 규모 등에서 明나라와 대결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작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以小逆大)은 상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전쟁 시기를 여름철로 잡은 것은 잘못인데, 이 시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농사를 망칠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셋째, 거국적으로 대군을 원정시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倭寇)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다(基虛倭承). 넷째, 당시 장마철이므로 전투하기가 불편하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이성계는 의견을 주창하였지만 최영장군과 우왕(禑王)은 강력한 반론을 내세우며 요동(遼東)공격을 감행하고자 주장하였다. 결국 원정이 단행되어 최고사령관 최영을 8도도통사(8道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1388년 5월 원정군이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이성게는 휘하 장병의 절대적인 지지와 조민수(曺敏修)의 동의를 얻어 회군(回軍)을 단행하였다. 다음은 "태조실록(태조실록)"에 기록된 이성계의 회군선언(回軍宣言)이다.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게 재화(災禍)가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崔瑩)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에게 화(禍)가 되는 일을 하겠는가? 복(福)되는 일을 진실되게 하여 임금의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리라

 

 

 

 

그해 6월에 개성을 점령하고, 최영장군을 체포하여 고양(지금의 일산 부근)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퇴위시켰다. 그러나 조민수(曺敏修)가 이성계파의 탄핵으로 실각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창왕도 폐위 당하고 공양왕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성계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분 (赤墳 .. 붉은 무덤)  그리고 "최씨 고집"

 

 

 

 

최영장군은 고려 우왕(隅王)때 팔도통제사가 되어 만주대륙을 정벌하려다했다가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 회군으로 꿈을 펴지 못하였다. 이성계는 자기의 야망을 펼치는데 장애가 되는 최영장군을 제거한다. 이 때 61세의 최영장군은 출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우왕(隅王)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탓에 출정을 못하였다.  前王인 공민왕이 최영장군이 출정시 암살 당했기 때문이다.

 

마땅한 죄목이없어 겨우 붙인 罪目이 "나라를 위해 세운 공은 크나, 대국(大國. 明나라)에 죄를 졌으니 죽여야 마땅하다. "는 이해 못 할 죄명이었다.   최영장군은 " 내가 죄 없음은 하늘이 알고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 ."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다.  그가 恨을 품고 세상을 떠난 후, 조선조 말까지 그의 묘에는 정말 풀 한포기 나지 않았다고 전해 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 무덤 위에 지금까지 풀이 나지 않는다. (至今塚上不生草) "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까지 붉은 무덤이었슴을 알 수 있다. 지금 잔디가 그의 묘소를 덮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가 亡한 뒤 그의 후손들이 묘소를 단장하면서 새 잔디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 후손은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최남선의 부친 최헌규가 1928년 묘를 새로 단장하였다.

 

 

 

교과서에도 적분(赤墳...풀이 나지 않는 붉은 무덤)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요즈음에도 최씨가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하고, 이후 최영장군의 후손들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최씨 고집 "의 유래가 되고 있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

 

 

 

 

   

           뒷편 최영의 부친 최원직의 묘이다. 비문(碑文)은 최영장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최영장군과 맹사성 

 

 

 

 

 

 

 

이 집은 1330년 (고려 충숙왕 17)에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지은 집이다. 최영장군은 아산에 있는 이 집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장성하여 개성에 가서 벼슬길에 오른다.

  

 

 

 

 

 

최영장군과 조선초기의 문신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은 이곳에서 아래윗집으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맹사성이 어렸을 때, 어는 날 최영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집 앞에 있는 배나무 위에서 龍이 용트림하며 승천하려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 마당으로 나온 최영은 배나무 위에서 놀며 배를 따고 있는 어린 맹사성을 발견하였다. 최영은 "뉘집 자식인고?" .. 맹사성은 조용히 부친의 함자를 대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물러났다. 그 아니의 부친 이름은 맹희도(孟希道) .. 얼마 전에 科擧에 급제하여 최영도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맹희도를 찾아간 최영은 꿈 이야기를 하며 맹씨 집안과의 인연을 만들어 갔다. 그 후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맹사성(孟思誠)은 말년에 이곳 은행나무 아래에서 後學들을 가르치며 지낸다.  

 

 

 

 

 

 

 

 

 

 

 

 

 

 

 

 

 

                                            홍산대첩    鴻山大捷

 

 

 

 

1376년(고려 우왕 2) 7월, 고려말의 국정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는 때마침 여름이라 불어난 강물을 이용하여 왜구(倭寇)가 대규모로 내륙 깊숙이 쳐들어 와 公州를 점령하고, 충남 연산의 개태사(開泰寺)일대까지 침범하여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

 

 

 

 

                                                                 홍산대첩비 .. 충남 부여

 

 

 

이때 고려의 장수 박인계(朴仁桂)가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육도 도순찰사(六道 都巡察使)이었던 최영(崔瑩)장군이 왜구 토벌에 직접 나아가 싸울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으나, 당시 군사가 훈련되지 않았고, 60세이었던 최영장군의 늙음을 염려해 출정을 만루하였으나, 장군은 "지금 왜구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의지는 상하지 않았으니 꼭 보내달라"고  왕에게 간청하였다.

 

 

최영장군은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助戰元帥 강영(姜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험준하고 3면이 절벽인 이곳 태봉산(泰封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수백명의 왜구들이 홍산(鴻山)벌에 몰려들다 워낙 많은 숫자의 기세에 눌려 최영장군의 공격 명령에도 군사들은 겁을 먹고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이에 최영장군은 맨 앞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돌진하자, 왜구가 쏜 화살이 장군의 입술에 꽂혔다. 최영장군은 그 화살을 봅지도 않고 피를 흘리며 달려가 활을 쏜 왜구를 죽인 후에야 화살을 뽑았다.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장군의 모습을 본 군사들은 사기충천하여 敵陣을 덮치자, 왜구들은 순식간에 풍비박산(風飛雹散)되어 서천(舒川)쪽으로 도망갔다.

 

 

이 소식을 판사 박승길(朴承吉)로 하여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어의(御醫) 어백평(魚伯評)을 보내어 상처를 치유케 하였으며, 그가 개성으로 개선(凱旋)하자 왕은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최영장군을 환영하였다.전공으로 벼슬을 내리자 최영장군은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기 전에는 어떠한 벼슬도 받는 것이 옳지 않다 "하며 사양하자, 왕은 부득이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였다

 

 

그 후 왜구(倭寇)가 강화도에 침입하였을 때 왜군은 최영장군은 백수(白首) 최만호(崔萬戶)라 하여 가장 두려워 하였으며, 후에 왕이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를 그리게 하고, 그 찬문(讚文)은 녹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짓게 하였다.

 

  

 

 

 

 

 

 

 

 

 

 

 

 

 

 

 

                                                 최영장군 사당

 

 

 

 

 

 

 

 

                                                  인왕산 국사당

 

 

 

 

 

 

 

 

 

                                        추자도 .. 최영장군사당

 

 

 

 

 

 

 

                                            성계육    成桂肉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개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자신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의하여 개성에 남아있던 최영장군은  급조한 군대로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이성계에게 체포 당한다. 

그는 고양,마산과 청주로 유배다니다가 개성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한다. (1388년 12월)

 

 

최영이 처형 당하자 온 백성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개성의 상인들은 가게를 닫고 시장을 열지 않았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최영장군을 신장(神將)으로 섬기면서 이성계를 저주해 온 것이 지금도 무속(巫俗)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속인들은 2년에 한번씩 음력 3월에 도당굿을 하고,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 최영장군이 제사를 지낸다. 굿이 끝난 다음에는 일명 성계육(成桂肉)이라고 불리는 돼지고기를 씹어 먹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원통하게 죽은 최영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를 죽인 이성계를 저주하기 위하여 돼지고기를 이성계의 살이라 생각하고 씹어 먹는 것이다.

 

 

 

 

 

무속에게 가장 인기있는 영웅신인 최영장군은 무속인들에게는 崔一장군이라고 불리우며, 황해도와 부산(왜구를 물리친..)에 그를 모신사당이 많다. 최일(崔一)장군이라 함은 최씨 가문 중에서 제일가는 장군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아들 담(潭)을 남겼으나..그의 후손들은 초야에 묻혀 숨어 지내면서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500년이었다. 최씨 고집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