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화해
‘너의 첫 해외여행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서 염려되는 점도 있다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 너는 어려서부터 야무지고 사리판단 분명한 아이였으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 잘해내리라 믿는다. 그동안 쌓인 피로도 풀고 세상 구경 많이 하고, 많이 느끼고 즐기다 오너라.아빠가. ’
여행 떠나기 전날 밤, 가방을 챙기는 딸아이에게 얼마의 용돈과 함께 건넨 글의 내용이다. 마음 같아선 꼭 안고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었으나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이 오히려 아이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이 글을 화해의 의미로 썼다. 그 날 이후 아이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대하지만 내 마음이 불편한데 저라고 좋을 리 없을 것이었다. 하필이면 여행 며칠을 앞두고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 생각해도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일의 발단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일요일. 아내와 나는 서울 큰누나 병문안을 다녀오기로 돼 있었다. 기차로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버스가 좋겠다는 아내의 말에 표까지 예매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딸아이가 끼어들면서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이의 주장인 즉 승용차를 타고 가 새로 생긴 역 주차장에 주차한 후 기차를 타면 편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아이의 말이 백번 옳았으나 버스를 타고 가자는 아내의 의견을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겠다는 생각으로 알아들었던 나는 중간에 끼여 잠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딸아이에 대한 대답인들 곱게 나왔을 리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속상했던지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고 나는 또 그런 딸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강압적으로 나무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집안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의 형국이 되어 나는 목소리를 높인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마음이 불편하니 잠인들 편할 리 없다. 이튿날 아침, 나는 결국 화해의 문자를 썼다. 이어서 도착한 딸아이의 답장, ‘아빠, 어제는 죄송해요. 제 마음도 그런 게 절대 아니니 노여워 마시고, 앞으로 제가 더 잘할게요.’
아, 나는 왜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을 겪고 나서야 후회할까. 다시 한번 밀려드는 자괴감.
“어때, 기분이?”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길을 운전하며 나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비 온 후 땅이 굳어진다더니 옆에 앉은 아이가 오늘따라 다정하게 느껴진다. “응, 지금까지 좋았는데 막상 비행기 탈 생각을 하니 긴장되네.” 픽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아이는 나쁜 점만 이 아빠를 빼닮았을까. 고소 공포증이라면 나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아이는 나보다 훨씬 심하다.
사실 아이의 이번 여행을 두고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착지에 친구가 나온다고 하지만 비행기라면 제주도 국내선 잠깐 타 본 일이 전부였던 아이에게 장장 12시간 넘는 이번 여행은 부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걱정 끄세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아무려면 당신만 할까?”
왜 이럴 때 아내는 나를 끌고 들어가는지 모르겠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외국 여행이라면 여행사에서 쥐여 주는 비행기 표 한 장 달랑 들고 이리저리 따라다녔던 일이 전부인 내가 아내의 눈에는 아이보다 무엇 하나 나을 것이 없어 보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여권과 카드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설마 무슨 일을 당해도 살아올 테니.” 아이의 한 마디에 나는 참았던 긴장감을 날려버리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
6시 40분. 마침내 인천공항행 기차가 들어오고 아이와 함께 나도 움직인다.
“ 잘 다녀올게요.” 차에 오르기 전 아이는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나는 다른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말했다. 잠시 후 자리를 찾았는지 아이가 창 쪽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활짝 웃는다. 웃는 얼굴 위로 손을 흔든다. 나도 따라 흔든다. 그러다 멈춘 아이의 손바닥에 살며시 내 손을 포개본다. 차가운 유리의 느낌밖에 없지만 손을 맞잡은 듯 온기가 느껴진다. 마음이 짠해 온다. 그러다 눈물이 핑 돈다. 주책이다. 아이가 눈치챌까 급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아이는 계속 몇 마디 말을 했으나 들릴 리 없다. 입 모양으로 보아 어서 들어가시라는 것, 그리고 운전 조심하시라는 말일 게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 멀어지는 아이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2018. 2.4
첫댓글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 같습니다.^^ 딸이어서 아무리 야무져도 엄청 걱정되실 것 같아요~ 보내는 이에게도 용기가 필요하겠습니다.^^ 선생님을 닮아 예쁜 따님이리라 생각해봅니다.
옛날 한국영화중 연인간의 이별은 항상 기차 플렛폼에서 이루어졌지요. 헤어지면 다시는 못만날 것처럼 애잔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댓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과 따뜻한 정이 묻어납니다. 착한 따님을 두신 강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저도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윤선생님은 아드님만 둘이어서 그런 생각도 드시겠네요. 아들은 믿음직한 맛으로, 딸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느낌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
딸아이를 여행 보내는 그 마음 이해되네요. 패키지 여행도 아닌 자유여행이라면 더욱 그러하시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얼마나 똑똑한데요. 아빠 선물 사들고 활짝 웃으며 돌아올겁니다~~~~^^*
맞습니다. 함께 섞여가면 걱정이 없을텐데 많이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계속 소식을 전하니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많이 춥지요? 건강 조심 하세요~
부녀간의 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강선생님께서 자상하시기 때문이겠지요. 부럽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편지 속에서 따뜻한 강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박선생님, 강추위에 어찌 지나시는지요? 요즘같은 날씨에 노모님 건강이 가장 신경 쓰이시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