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 보신각종>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보신각종이 일년에 한번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날이 일년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 종이 매일 울렸다고 한다.
서울은 도성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도성에는 네 대문(四大門)과 네 소문(四小門)이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숭례문이 제일 정문이었다. 숭례문을 들어서서 성안의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오늘날의 남대문로이다. 옛 서울의 성안의 큰 가로(街路)로는 남대문로 외에 흥인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가로가 있었다. 흔히들 이 가로를 운종가(雲從街)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는 가로라는 뜻일 터이다.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지점에 종루(鐘樓)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와 모양은 차이가 나지만 오늘날의 종각(鐘閣)―보신각(普信閣)이 그것이다.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오행(五行) 사상에서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五方)에 각각 목(木), 금(金), 화(火), 수(水), 토(土)의 오행과 유학사상의 오상(五常)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연결시키는 관념이 있다. 이에 따라 서울 도성의 4대문 이름을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북대문은 약간의 변화를 주어서 숙정문(肅靖門) 하는 식으로 '인', '의', '예', '지'를 따서 지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신각은 그 중앙 '신'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보신각은 서울의 중앙이라는 뜻이다.
조선초기 1396년(태조 5)에는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이 무렵에는 그 종루에 누기(漏器), 곧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오늘날처럼 집집마다 개인마다 시계를 갖고 있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이 종루의 종소리는 하루 일상 생활의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밤이 되었다, 하루 생활을 마감하라, 성문을 닫는다'는 뜻으로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를 따라 28번을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밝는다, 하루 생활을 시작하라, 성문을 연다'는 뜻으로 불교의 33천(天)에서 따와 33번을 치는 파루(破漏)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소리였다. 상상해 보시라. 궁궐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광화문 앞을 비롯해 몇 군데서 그것을 받아 종루에 알리고, 다시 종루의 종소리를 받아 사대문을 비롯한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서울의 새벽과 저녁을. 그 시대에는 오늘날같은 소음이 없었으므로 그 소리들은 은은하게 서울의 하늘을 채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1440년(세종 22)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의 2층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 층으로는 인마를 다니게 하였다. 이 종루는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아 서울의 상징이 되는 장엄한 것이었다. 그 종루의 어간(御間)(즉,중앙 간)은 아무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왕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1459년(세조 5)에는 새로운 종각(鐘閣)을 광화문 앞에 지었다. 이는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치 못하여 궁궐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는 기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종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거기 달려 있던 종은 깨어진 채 흙속에 묻혔다. 임진왜란의 와중에는 그 종을 녹여 다른 데 썼다. 그후 광해군 때 종루를 다시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전처럼 장엄하게 2층의 누각을 짓지는 못하고 단층 종각으로 지었다. 그것을 몇차례 고쳐 지으면서 그 모습으로 전해 왔다. 1895년(고종 32)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사액 (賜額)을 내렸다.
이것이 1915년 길을 넓히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렸었다. 그 종각은 6.25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뒤로 조금 더 물러 중건하였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에 중건한 것으로 철근콘크리트조로 된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오늘날에는 종루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종각이라 하지만, 종루와 종각은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촐한 집이거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鐘閣)"이 아니라 "종루(鐘樓)"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래된 역사도시인 서울시내에 눈에 띄는 건축물인 4대문과 함께 종로거리에다 커다란 종루를 설치하고 하루에 한두차례 종을 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역사유물도 재현하고 볼거리도 제공하여 문화와 관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끝>
첫댓글 1975년도 년말 정도로 기억되는데,방학 때 TIME지 영어 공부한다고 서울에 있으면서 종각에 나가 본 경험이 떠오르는구나.
종각 4거리를 중심으로 사방 보도에서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새끼줄 같은 무슨 줄을 쳐 놓았고,
가로수 위에다가는 대형 앰프를 설치하여 크게 틀어 놓은"조국찬가"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 생각나네.
때 맞추어 이런 글을 올려 주는 우리 재춘이 친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