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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준권의 판화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화각인김준권
제 1 장 서양 판화의 출발
1-1. 중국인들의 종이 발명
A.D.100년이 조금 지나서, 중국인들은 유목생활에 필요한 텐트나 옷감 만드는 기술을 적용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식물 이파리 등을 잘게 찢어, 섬유질(felt)을 걸러낸 것으로 처음에는 일종의 천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이것이 더욱 얇게 퍼지면서 벨럼 페이퍼(Vellum Paper), 또는 워브(Wove)라고 하는 반투명 종이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종이도 이같은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워브 종이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갈대나 대나무의 가늘고 긴 줄기를 이용한 여과기로 섬유질을 걸러내어 현재와 같은 종이를 만들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751년 당나라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공격할 때, 당나라 제지기술자 한 사람이 아라비아인에게 잡혀 종이 만드는 법이 이슬람 세계에 보급되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시기는 훨씬 후인 1150년 스페인에, 1295년에는 이탈리아로, 1390년에는 독일로 전달된다. 이때9부터 유럽에서는 양피지나 천을 대신하여 종이를 사용하게 된다. 이탈리아인들은 동양의 부드러운 식물성 풀대신에 강력한 동물성 아교나 젤라틴을 종이에 먹이기 시작했고, 동양의 수공 과정 대신 수력을 이용한 풍차나 기계로 종이 생산량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종이는 인쇄를 자극하고, 판화를 제작하게 하여 대중 속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종이는 예부터 무엇인가를 찍어내는 기술을 확산시켰다. 바빌로니아 인들은 벽돌에 왕의 이름을 새겼고, 로마시대 포도주 판매상은 도자기위에 상호와 자신의 이름을 새겼는데, 로마인들에게는 비록 거치나 양피지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파피루스를 사용하였다. 비록 이것도 너무 비싸 실용화되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판화의 시작이다. 멕시코에서도 B.C.1000-800년경 원주민 올메크(olmec)인들은 자신의 몸이나 나무껍질에 같은 모양을 되풀이 찍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판화기법을 위하여 부조로 무늬가 새겨진 진흙판을 구웠다. 그러나 원시 맥시코인들은 무늬가 새겨진 둥근 진흙판을 만들었으나 종이가 없어서 의사소통을 위한 인쇄나 그림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에반해 중국인들은 종이를 만들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진흙판이나 나무에 여러 가지 글자와 형상들을 새긴후 종이에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도장이나 신발 밑바닥 무늬와 같은 것에 물감을 칠하여 종이 위에 누른 것이다. 이런 방식을 유럽인들은 중세 말기 이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국인들은 8-9세기 불경을 위한 목판이 만들어지고 종이로 찍어내는데 유럽인들은 이들보다 훨씬 늦은 14세기 경이 되어서야 나무판에 그림과 글을 새긴다.
중국보다 1000년이 지나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인들이게 전해진 종이 제지법중 여과기 사용은 갈대나 대나무를 사용하는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철사를 이용 하였다. 유럽에서 첫 번째 종이위에 나타난 무늬는 1282년 프랑스 파방(Faban)과 독일의 볼로냐(Bolagna) 지방에서 만든 것으로 단순한 십자표시가 있었다. 십자 무늬는 제지소의 상표나 제지 공장의 규모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1600년대 후반의 프랑스 제지소에서 만든 광대모자 무늬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고급품질의 제지이다.
1440년경 네덜란드의 활판인쇄 시작과 같은 해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 인쇄술 발명으로 유럽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면서 판화의 획기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1450-1500 사이에 만들어진 종이의 양은 서적생산량을 추정하여 산출해낼 수 있다. 유럽의 236개 도시에서 10,000-15,000종류의 책이 인쇄되었는데, 그것은 재판, 삼판까지 합치면 총 천오백만권에서 이천만권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곧바로 책을 찍어내기위한 조판(assembling cast type)의 기본 형식을 사용하고 그림을 삽입하기 위한 목판과 인그레빙 동판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쇄술을 연구하는 중국학자들은 구텐베르그를 단지 기름잉크(oil ink)와 조판을 위한 주형틀(the nold casting type)을 발명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대중적인 의사표현과 전달의 지배적인 수단은 자신들이 훨씬 일찍 발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누가 먼저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하였는가보다 이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를 비교해볼 때,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지며 15세기 이후의 동서양 문명을 비교하는 척도가 된다.
1-2. 가장 오래된 유럽의 목판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의 목판은 138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1898년 동프랑스의 무너진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이 판은 양면에 조각된 것이였으나 한 면은 지워지고 다른 한면에만 <십자가의 그리스도>(Crucifixion)장면이 남아있고 인쇄도 가능할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갑옷은 1370-90년정도의 프랑스 버건디(Burgundy)지방에서 만들어진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 목판의 원래 크기는 가로 세로 2피트 정도로 중세의 어느 종이보다 컸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같은 목판은 제단 앞이나 혹은 독서대에 걸어두는 린넨천으로 된 깃발에 인쇄하기 위한 것이 확실하다. 선이 굵고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천의 질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옷감에 무늬를 찍는 플럭인쇄(Flock print)방법이다. 아교풀을 칠한 천에 잉킹을 하고 그 끈끈한 곳에 인쇄되도록 선과 면을 두텁게 만든다. 플럭인쇄로 찍혀진 판은 마치 천으로 말하면 벨벳(velbet)에 가깝다. 후에 이같은 방법으로 종이에는 두꺼운 장정본 표지나 상자, 가구 등에 글씨와 줄을 긋기 위한 방법으로도 쓰인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비슷한 년대로 1395년 독일 볼로냐(Bologna)지방에서 종교적 내용의 목판이 제작되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태리에서 제작된 1410년판이다. 당시 이태리인들은 독일보다 1세기 앞서 종이를 만들었고, 르네상스 미술로 전 유럽을 석권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목판으로 인쇄한 최초의 유럽인이지만 목판화를 책표지용으로 사용하였을 뿐, 독일인처럼 상자에 넣어 보관해놓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많은 초기 목판 조각판은 독일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 가운데 15세기 초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유명하다. 부드러운 자세와 소용돌이 물결모양인 옷주름 표현이나 우아하나 고딕 양식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엄숙하게 하늘의 여왕처럼 그려졌으나, 요셉은 불옆에 앉아서 달걀을 조리하고있는 평범한 인물로 그려진다. 유럽의 대부분이 전쟁에 휩쓸려 있음에도,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신에대해 생각했고, 삐걱거리는 거대한 교회조직은 영원한 형상을 대중화하고자 판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분열의 위험에 놓이게 되고 이당시 독일 울름에서 만들어진 <베일위의 그리스도 얼굴>은 찡그려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기 판화들은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독일에 있는 <마돈나상>은 1418년 표기가 찍혀있으나, 현존하는 인쇄물은 너무 두껍게 수정되고 색이 칠해져있어 원래의 연대를 알 수 없다. 다음으로 연대를 알 수 있는 1423년 남독일의 <성 크리스토퍼 (Saint Christopher)>는 북유럽적 고딕 표현으로 옷자락이 직선이고 각이 져있다.
종이에 찍혀진 것으로 연대 측정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유럽 판화는 이탈리아 베니스 근교에서 발견된 <불속의 마돈나>가 있다. 이 작품은 한 시골 교회 벽에 붙어있던 것으로 1428년 작으로 표기되어있으며 발견된 신비한 경위로 오늘날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목판화 <마돈나>는 어느날 이 교회가불이 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누렇게 되어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 때문에 이 판화는 불길속에서 나와 날아다니다가 군중들 손에 펄럭거리며 내려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적”으로 마돈나가 새겨진 판화가 발견되어진 것이다. 이 작품은 곧바로 성당으로 운반되어 1636년 그를 위해 특별 전시가 봉헌되었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아마 최초로 가장 훌륭한 판화 전시실이 아닌가한다. 그곳에서의 마돈나 모습은 황금색 청동액자를 배경으로 형상을 뚜렷이 보여주며 잘 보관됨을 알 수 있다. 금색 청동액자는 일년에 한번 온 마을에 종이를 울리면서 위로 들어올려질 때 이외에는 직사광선으로부터 판화를 잘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불속의 마돈나>는 1428년 베니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베니스는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곳으로 일찍 목판화가 제작된 곳이다. 목판 제작은 구약 성서의 내용으로 중세 모자이크 기법과 연관이 깊다.1204년 비잔틴 전역에 유행된 모자이크 풍경과 이콘화는 베니스에 전파되면서 목판화로 대체된다. 즉 이태리 조판사들은 십자가 옆에 무릎을 꿇고있는 <막달레나의 수태고지(Annunciation)>등 중세 비잔틴의 이콘화처럼 성서의 내용을 기록하는 형식과 같이 판을 새기게 된다. 비잔티움의 모자이크 장식 양식을 이어받은 목판화는 비록 딱딱한 건이지만 명쾌함이 흐른다. 그래서 이 마돈나 판화는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베니스 목판화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당시의 목판화는 대부분 손으로 색칠한 채색목판화이다. 어린이의 색칠공부 그림책과 같이 손으로 색칠하는 목판화(Hand-colored woodcut)는 형태를 나타내는 선만을 제공하였고, 각 출판사가 부분에 따라 물감으로 색을 칠하였다. 때로 색이 방금전에 칠하여 말린것 같은 상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기도 하며, 몇몇 초기 채색판화들은 책에 붙여셔저 중세의 세밀화(miniature)처럼 생생하게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색이 빨리 없어졌고, 한두가지 색채의 흔적만 남긴다.
1-3. 초기 판화의 기능과 역할
a) 기념 성화물 제작
14세기 전후 초기 판화는 대부분 목판화였다. 이러한 목판화 제작의 목적은 지금처럼 예술성 추구보다 현실적인 여러 가지 기능과 역할에 따라 만들어진다. 첫째는 기념 성화물로서 목판화 제작, 둘째는 귀족과 군인, 일반 서민들을 위한 놀이용 카드제작이었다. 그 후 대량의 성서제작이 필요로 하면서 인쇄술 발달과 함께 성서의 삽화를 위한 판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첫 번재 판화의 기능인 기념 성화 제작은 교황들이 남불 아비뇽(Avignon:1309-76)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곳에서는 순례자를 위한 기념 성화를 목판인쇄로 찍어내어 산업의 하나로 발전시켰다. 독일 뉴렘베르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창끝이 보관되어 순례자의 성지로 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성한 보물이었다. 이것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창에 찔린 심장의 하트모양을 그린 목판 인쇄물을 샀다. 이 특별한 인쇄는 건강을 보장하는 부적으로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만들기 위해 양피지 위에 인쇄되었다.
기념 성화들로서의 판화는 사용하는 용도가 다양하였다. 일차적으로 단순한 기념품역할을 비롯하여 주술적 부적과 같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재 기념 성화물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그 일부는 기도서에 실려있고, 시테를 덮는 수의로 사용되어 무덤에서 발겨되기도 하였다. 린넨천 위에 인쇄된 것 가운데 일부는 상처위에 싸매는데 사용되기도 하였고, 또는 성찬(미사용 밀떡)의에 덮여졌으며, 어떠한 것들은 아픈 사람들이나 병든 가축들에게도 먹여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1520년 종교새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는 순례자에게 기념품이나 작은 인쇄물(print)을 팔기위해 정신없고, 교회안에 앉아있는 몇사람의 수도자 이외에 수도원은 그 임무를 저버리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처럼 종교 개혁가들은 카톨릭측의 허례 의식과, 극장과 같은 장식의 교회와 성화로 민중에게 감동적으로 보이도록 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성물을 강경하게 반박하고 조롱한다.
그러나 성화물은 계속해서 대중에게 파고들었다. 특히 목판화로 만들어 대량 생산된 성화 그림이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다.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순례성지 안에 있는 성직자들은 판화를 안트워프, 아우스부르그, 뉴렘베르그 등에 있는 전문적인 판화가와 기업적인 인쇄공방이나 조판사들게게 의뢰하였다. 16세기 초에는 점차 수도원 자체내에서 맡기게 된다.
후에 이런 기업적 공방과 조판사들은 목판 성화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한 놀이용 카드를 만들기도 하여 신과 악마 양쪽 모두에게 봉사하는 역할을 하여 많은 고객을 갖게 된다. 목판성화는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전쟁와중에 그리고 다음으로 나폴레옹 시대 전쟁 이후 거의 사라진다. 그러나 1840년과 50년대에 철도건설로 순례자들이 전에 없이 효율적으로 조직되어 성지를 돌아다니게되면서 석판으로 인쇄된 성화가 등장한다. 석판으로 만든 성화는 19세기 중엽부터 지금가지 프랑스 루르드(Lourdes)와 파티마(Fatima)같은 새로운 성지에서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
b) 놀이용 카드 제작
기념 성화물 제작과 함께 가장 중요한 초기 목판화 목적은 그림과 글씨가 있는 놀이용 카드 제작이다. 행운을 알아 맞추는 고대 중국인들의 종이 주사위(paper dice) 영향으로 1100년 경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는 카드놀이가 유행한다. 현재 이곳 민속박물관에는 1400년 경에 만들어진 손으로 색칠한 완전한 한 벌의 카드가 남아있다. 서양의 놀이용 카드는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처음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카드에 칼이나 창, 컵, 동전 그림등이 이쓴데 여기에 나타난 형태는 이슬람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것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에 이른다.
종이 보급으로 대량 생산되던 카드제작은 도박과 놀이에 빠져 1378년 콘스탄스황제가 법으로 금지할 만큼 일반화 되어 있었다. 15세기 초 값싼 목판카드는 대중을 만족케 하였다. 반면 중류계급은 세밀한 그림의 동판 인쇄카드를 요구했으며 왕족들은 색이 칠해지고 금박을 입힌 뛰어난 솜씨의 예술품 같은 판화작품을 요구하였다. 놀이용 카드 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립된 그림을 여러장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복제된 형상들을 요구하였으며 종이의 질도 책표지와 같은 딱딱한 고급의 품질 위에 인쇄되어져야 했다. 유럽에서 제일 먼저 카드를 만들었던 베니스는 1441년은 반대로 독일로부터 프린트된 옷감과 놀이용 카드를 너무 많이 수입하게 되어 금지령을 내려 목판 인쇄업자를 모호하였다는 기록을 남긴다.
16세기 초 왕과 왕비를 비롯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가 만들어지면서, 카드는 떠돌이 군인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카드는 음악부호처럼 그려지고 스릴과 긴장감을 주는 놀이로 사람들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될 수 있도록 형태화 되어져야 했다. 초기 목판 조각가들은 귀족의 모습을 전문적으로 일반화 시켰다. 현재의 왕과 왕비가 그려진 카드에서도 확고하게 중세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표준 카드는 1465년 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50가지 교훈적인 그림을 가진 5벌(five suit)이 나타났는데, 그것에서 혹성과 구(sphere)는 A라고 쓰고, 미덕에 관한 것은 B, 예술과 과학에는 C, 아폴로신과 음악에는 D, 교황에서 농부까지의 인간의 지위에는 E라고 썼다. 이같은 중세우주관의 카드는 62, 78, 혹은 97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50장은 아니다. 젊었을 때 뒤러는 20개의 원본(original set)을 베꼈는데, 그의 간략하고 명확한 묘사력은 이것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도한 카드는 교육용으로 만들어 진다. 1644년에 프랑스 재상 마제랑은 지리, 우화, 왕가의 초상등이 그려진 카드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는 소년기의 루이 16세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에칭 기법으로 만들어진 4질의 카드도 있다. 그 후 카드는 놀이용 뿐만 아니라 상업용으로도 만들어져 뒷면에 장점의 주소, 결혼, 세례, 장례의 알림을 쓰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책의 목록(catalogue)으로도 사용되며 1690년대 초에 프랑스인들은 오늘날의 명함(calling card)과 같이 임기응변으로 카드에 그들의 이름을 적어 넣고 사용하기도 한다.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나 풍경, 정물 등을 그려넣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같이 인쇄된 판화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c) 성서와 기타인쇄물
끝으로 초기 판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책을 만드는 데 있다. 특히 15세기 인쇄술의 발달과 종교개혁 이후 성서의 대중화는 많은 책을 만들게 하며 삽화를 나타내기 위하여 판화로 그림을 그려넣게 된다. 책의 형태는 동양과 다른 모습을 갖춘다. 즉 고대 동양에서는 긴 두루마리의 한쪽면만을 이용한 책을 만들었다. (Volume은 감는다의 뜻의 Volvere로부터 왔다.) 아코디언같은 주름이 잡힌 책이나 나비날개처럼 접었다 폈다하는 방법에서 중세 이후 서양의 새로운 책은 현재와 같이 오른손으로 넘길 수 있도록 만들고 그림을 판화로 찍어넣게 만든다.
1400년경 유럽인들은 목판 인쇄책을 만드는데, 한편엔 그림을 넣고 다른 한 편엔 글씨를 인쇄하여 마주보게 접는 그리이스 전통에 따랐다. 목판화를 만드는 방법은 중국인처럼 유럽에서도 얇은 종이 위에 그림과 글씨를 쓰고, 그것을 목판에 마주 붙여 조각사가 붙인 종이를 통해 보이는 선 양쪽의 나무를 파냈다. 인쇄공은 물감을 양각된 목판에 칠한 다음 종이를 덮고, 잉크가 스며들도록 문지르고, 때로는 종이를 조각된 홈속으로 눌러넣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책을 나누어 필사하는 습관이 있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였으나 점차 그 수요가 급증하여 필사본으로는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베니스롸 네덜란드 활판인쇄업자들은 구식 목판에 새겨진 글자들을 파내고, 금속활자로 된 페이지에 그림을 맞추어 넣는 깃으로 목판을 재사용하여 부수를 늘리게 된다.
목판 인쇄를 이용한 성서의 제작은 사악함을 구제하고자 수도승들에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최초의 대중적 성서로 1100년 중기에 만들어진 프랑스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서(The Boble of the Poor)>가 있다. 소위 <Bible of the Poor>라 불리우는 이 성서는 구약의 예언들이 첨가되며 수태고지부터 시작된다. 1300년 이후에 이 책은 신학교 학생의 필독서로 오스트리아와 남독일에서도 가장 잘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1400년대 중반에는 좀 더 짜임새있고, 선명한 그림이 들어있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목판 인쇄본이 승려들과 일반인들을 위해 만들어진다. 이같이 정밀하게 묘사된 목판책은 독일과 네덜란드를 북유럽 출판 중심부로 되게 하였고, 마스터 E.S와 숀가우어(Martin Schonauer)라는 최초의 북유럽 전문 판화가를 탄생시킨다.
성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자속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삽화는 죽음에 관한 내용이였다. 목판화 역시 죽음에 관한 것으로 1414-17년에 콘스탄스 회의의 몇몇 대표자에 의해 씌여졌던 300여권의 필사본 속의 그림들이 유명하다. 대부분의 목판화는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천사들이나, 의심, 절망, 분노, 오만, 욕심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들을 보여주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악마의 유혹과 시험을 통과하며 은통속에 죽는다. 우리 모두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같은 장면들은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데려갈는지 모를 재난을 당했을 때 혹은 그것이 코앞에 닥쳤을 때 모든 사람의 공통의 관심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그림이 있는 책들을 싫어하였으나 많은 삽화는 책을 읽도록 대중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건축가나 기계설계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들은 글과 함께 그림으로 설명된 인쇄의 발명으로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축적하였다. 해부학 판화들이 르네상스 미술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은 미술사에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구텐베르그의 활자는 글자의 규칙성과 삽화를 돋보이게 하였다. 이당시 조판사들은 1457년 출판한 시편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은 펜이나 조각칼 없이, 인쇄라는 발명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어졌다.”고 기록할 만큼 놀라운 발명이였다. 또한 이때부터 인쇄업자의 표식이 나타난다. 1515년에 화가인 홀바인은 스위스 출판업자들을 위해 책의 디자인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제목을 가장자리에 인쇄업자 표식과 그림의 조화였다. 인쇄업자의 표시은 18세기 후반까지 매우 다양했다. 오늘날에도 출판사의 표시인 펭귄, 사냥개, 문자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