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점을 생활 속에 꼭 융합시켜야 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기준에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선과 악에 대해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두 개의 세력이 세상의 악을 모두 없애겠다고 나설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우리 모두 압니다. “악”에 대한 이 모든 싸움이 정말로 인류에게 선을 행하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의 어두운 구석을 비춰주기 위해 왜 노력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지금 세상이 처해 있는 상황, 그것이 바로 ‘그것(의식, 무한, 하나임, 신, 나의 본성)’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내 의견이나 당신 의견이나 지나가는 한 조각구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구름 안 조각 한 조각 역시 ‘그것’이지요. 당신이든 누구든 영성을 확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 또한 ‘그것’이고요. 내가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환상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줄 절대적인 의무를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그것’입니다. 그러나 환상 속을 헤매는 사람들 또한 ‘그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우리보다 한 치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경계선도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구분을 하러 나서겠습니까? 나에게는 누구도, 아무것도 비판할 도구가 이제 없습니다. 내가 어찌 ‘신’의 창조물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순수한 정적(이것)’뿐이고 여기에는 심판이나 비판을 위한 아무 도구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내게는 완전한 자유로 들립니다. 저 개인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그냥 벌거벗은 자유(naked freedom) 그 자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것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 “남”이라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두 번째 책은 제목을 “빈 집(Nobody Home)”이라고 했습니다. 구분이라는 것은 허상이며, 개별성에 근거를 둔 모든 이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 말 중에는 제가 유리벽 뒤에 앉아서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들리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같은 인류의 고통에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정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구분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아본다고 해서 상대방의 자아를 허상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자아를 허상으로 보게 되고, 따라서 상대방과 나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됨’ 속에 네 이웃 보살피기를 너 자신을 보살피듯 하라는 규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구분이 없으니까요. 어떠한 구분의 감각도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정신적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이웃 도와주는 일을 그만 두게 되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벌어지는 모든 일에 개인적인 목적 없이 스스로를 열어 놓고 임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인식을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 또는 진정한 자비심의 원천을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직 ‘정적’만이 있게 되고, 그 정적 속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하나의 마법의 스냅사진처럼 나타나게 됩니다.
출처 :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THIS IS IT(The Nature of Oneness))", Jan Kersschot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