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한 에녹(2) / 창세기 5:21~24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의 삶을 배웠습니다.
에녹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살 때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하나님과의 동행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미가 6장 8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 인류의 구주이신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기쁨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름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예수님과의 동행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선이며 허상입니다.
주 예수님과의 동행은 주일에 예배하러 교회 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예배하러 올 때는 삶의 열매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즉, 일주일 내내 주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그 한 주간의 열매를 주일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때 예배는 주님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과의 동행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세상에서도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시간, 삶의 모습과 예배 후 가정과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일 순간마다 주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1년 365일,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하루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5: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에녹은 어디서 믿음을 얻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로마서 10:17절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이 암기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이는 그 누구도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원어로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씀’이라는 원어가 로고스가 아니라 레이마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레이마에서 생겨납니다.
레이마란 개인에게 성령으로 따로 주시는 말씀을 뜻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레이마, 즉 살아있는 말씀으로 인해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각 개인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때 각 개인의 심령 가운데 체험을 통해 믿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특히 공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또는 말씀을 읽는 중에 말씀이 감동되거나 마음에 딱 부딪칠 때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하여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레이마, 곧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으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성령 안에서 읽고 기도하며 깨달아야 할 것이요, 이처럼 예배 시간에 주의 종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유다서 14절을 보기 바랍니다.
(유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에녹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만의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는 장면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에녹이 예언하며 선포합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도다.” 이처럼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은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에녹이 살아있을 때 아담 역시 여전히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에녹이 태어날 때 622살이었습니다. 즉, 에녹이 태어날 때 아담은 한창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아담은 930세에 사망했으니, 그는 에녹이 태어난 후 308년을 더 살았습니다. 즉, 아담과 에녹은 약 308년을 함께 지낸 것입니다.
*** 에녹이 어릴 때 어느 날 아담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아담 할아버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 에덴에서의 삶은 어떠했나요?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거닐 때 그 기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아담은 그 질문을 듣고 약 6백 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을 것입니다. 그는 한때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거닐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아담을 찾던 때가 있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창세기 3:8절을 보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평소에 아담과 늘 에덴동산을 다니셨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 눈에 눈물이 보이며 흐느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에녹아! 우리는 함께 걸었단다. 하나님은 내 곁에서 함께 걸었단다. 우리는 함께 높은 산에 올랐고, 함께 최초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웃고 대화를 나누었지. 우리는 참으로 아무런 막힘이 없는 깊은 교제를 나누었단다.
나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들으며 온 우주가 에덴처럼 될 그날을 바라보았어. 물론 그날이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선악과를 먹는 죄를 짓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했어야 했는데…
이 못난 할아버지가 그렇지 못했단다. 아, 죄와 저주가 들어오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 아름다운 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꿈만 같은 시절이구나. 바로 낙원이었지. 바로 그곳이 천국이었단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셔서 지금은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날 수 있지. 그러나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보며 그분과 동행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나를 속였던 그 마귀가 영원히 멸망하는 날이 되겠지. 너는 결코 마귀에게 속지 말거라.”
이처럼 에녹은 어릴 때부터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으며 어린양의 피로 제사를 지내면서 복음을 알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즉,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이며, 그 말씀을 개인적으로 듣고 믿었으며, 이에 그는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선지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녹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 전부를 통해 에녹처럼 말씀으로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으로 믿음이 장성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깊게 알고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생각하면서 주와 동행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동행은 단지 함께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사실 함께 걷는 동행은 두 인격 사이의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보혈을 흘리시며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까?
왜 우리가 속량함을 받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왜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구원받은 이유에 대해 답변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라고 구원하셨다고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섬김의 방법은 우리와 함께하며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코이노니아)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함께 진정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그들은 좁은 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단 한 번도 진실한 인격적인 교제를 가진 적이 없이 단지 종교를 이용하여 돈벌이나 하고 종교 놀이를 하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남들에게도 십자가의 도를 알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깊은 교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와 하나되어 교제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간절한 기도입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는 주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깊은 사랑의 교제인 것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