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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잉카 문명 (1998년, 2013년)
* 여행 팁
위치 : 남아메리카 중부 시차 : -14시간차 수도 ; 리마
언어 : 아이마라어, 에스파냐어, 케추아어
인구 : 29,546,963명 (2010), 전체 순위 39위
면적 : 1,285,216㎢, 전체 순위 20위
기후 : 아열대성기후, 열대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81%
종족 : 아메리카원주민 45%, 메스티소 37%, 백인
정체 : 중앙집권공화제 의회형태 : 다당제&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화폐단위 : 누에보솔(nuevo sol/S/.)
공식 이름은 페루공화국이며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나라다. 북서쪽은 에콰도르, 북동쪽은 콜롬비아, 동쪽은 브라질·볼리비아, 남쪽은 칠레, 서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 피웠다. 1438년경 잉카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으로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으로 페루를 탐험했다.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왕 아타우아이파를 살해하고 스페인 통치권을 강화하여 약 300년간 통치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 의회와의 대결,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정국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정권연장을 기도하는 중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칠레를 거쳐 페루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루고 있다. 페루에는 아직까지도 후지모리 지지자들이 많다. 현재도 후지모리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제1야당을 이끌면서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머나먼 여정(旅程) 남미 페루로 (1998년)
오래 동안 꿈꿔오던 가슴 설레는 여행이었다. 불가사의(不可思議) 문명, 남미 페루(Peru)의 잉카문명을 찾아서 떠나는 대장정(大長程)의 길이었다. 이번의 여행은 떠나기 전 부터 걱정이 나를 긴장시켰다. 비행시간이 꼬빡 하루를 넘겨야 하고, 또 그곳은 치안이 허술하다는 소문도 있고, 특히 스페인어를 쓰는 곳이기 때문에 언어 소통도 걱정이 되었다. 여러 방법을 통해서 페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출발은 언제나 홀가분한 마음이다. 2월의 쌀쌀한 겨울 날씨이지만, 여름철의 날씨인 그곳을 생각하면서 공항으로 행했다. 직항로가 없어서 JAL을 타고 일본 도쿄에 가서 그곳에서 BARIG로 환승했다. 태평양을 넘어 미국 LA에 기착한 후 페루 리마로 향했다. 중간 기착시간을 합하면 총 24시간이 넘는 비행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0시 30분에 리마공항에 내렸다.
공항 안내소에 가서 다음의 일정인 태양의 도시 쿠스코에 가는 항공 스케쥴을 체크했다. 쿠스코행 비행기가 새벽 6시에 있었다. 새벽 5시까지는 공항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숙소에 들어갈 여유가 없어서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다음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공항대합실을 둘러보니 공항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였다. 나도 편안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눈을 감고 아침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국내선 청사가 바로 옆에 있었다.
새벽 4시가 되어서 항공권 매표소가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서 쿠스코 행 비행기표를 살려고 하니 비행기표는 이미 예매가 끝나 있었다. 시작부터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우선 일정을 조정한 후, 다음날 쿠스코 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서 대기자 명단에 1번으로 올려놓고, 탑승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운이 좋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국내선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내려오더니 창구로 와서 ‘미스터 김’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에 여석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다행히도 스케줄의 변경 없이 쿠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국내선 중형 비행기는 구름이 첩첩이 싸인 고산 지역을 향해서 약 1시간 동안 날아서 해발 3,400m의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태양의 도시,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내려앉았다.
쿠스코에 내리니 심신이 매우 피곤했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간이 식탁의 물컵이 쓰러질 정도로 비행기요동이 심해서 힘이 들었고 또 잠을 설치면서 계속해서 고산 지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리마의 어느 대학교수와 함께 적절한 숙소를 물색했다. 우리가 찾은 숙소는 인정이 넘치는 소박한 숙소였다. 짐을 풀고 잠시 쉬는 동안 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또 페루의 산간 도시 푸노(Puno)에서 여행 온 여학생 마가리(Magaly)와 자넷(Zanet)을 만났다. 순박한 여학생들이었다.
넉넉지 못한 방문 일정 때문에 그 날 오후부터 바로 투어를 시작했다. Magaly와 Zanet을 데리고 쿠스코 시내에 있는 여행사를 찾아가서 쿠스코시티투어를 신청했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온 방문객들과 함께 쿠스코 지역의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태양의 도시 쿠스코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질서 있게 들어서 있는 이 도시를 보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날아온 느낌이었다. 이곳은 옛날 잉카제국의 수도로 태양신을 숭배한 잉카인들의 우주관의 중심을 나타내는 곳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으로 잉카인들은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이곳을 정복한 후 잉카의 초석 위에다 스페인식의 교회나 집을 지었다. 양 문화가 대조를 이루면서 오늘날 쿠스코가 더욱 특성 있는 도시가 되었다. 쿠스코 근교에는 잉카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돌 구조물은 그 정교함이 대단했다. 그 당시에 건조되었던 다리, 터널, 관개용 수로 등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서 그 기술의 우수함을 새삼 느끼게 했다. 사라진 잉카의 숨결이 지금도 생활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쿠스코의 중심에는 아르마스광장이 자리 잡고 있었고, 광장 옆에는 서구 양식의 대성당이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한 후 태양의 신전에 있는 금(金)은 본국으로 가져가고, 신전의 자리에 스페인식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페루는 지진대에 속해 있어서 지진 때마다 스페인 사람들이 세웠던 교회 건물들은 무너졌어도 잉카의 돌 구조물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잉카문명은 태양의 문명이고 돌(石)의 문명이었다. 건물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구축되어 있으면서 방향은 태양을 기점으로 하여 배열되어 있었다. 성벽에 사용된 돌의 크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바위를 잘 다듬어서 작은 바위들과 섞어서 빈틈없이 쌓아 성벽을 구축해 놓았다.
쿠스코 외곽에 있는 ‘탐보마차이’ 에는 우기나 건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일정량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다. 그들은 이곳을 성스러운 샘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잉카시대에는 목욕탕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물이 어디에서 흘러오고 있는지 근원을 찾아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쿠스코에서의 첫날은 힘든 일정이었다. 장거리 비행에다 계속해서 고산 지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무척 피곤했는데도 정해진 일정을 그대로 진행시켰다. 오후의 시내 탐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몸이 좀 이상했다. 말로만 듣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두통이 시작되면서 속이 니글거리고 숨이 가빴다. 그러나 치료에 대한 지식을 미리 익히지 못해서 심호흡과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물만 자주 마셨다.
▲ 쿠스코, 인디오와 알파카 ▲ 쿠스코 아르마스(Armas) 광장
여행의 목적은 삶의 현장을 체험해 보는 것이기에 쿠스코에서의 숙소도 배낭여행자들이 주로는 평범한 곳으로 정했다. 이틀을 머물면서 정말 값지고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가졌다. 비록 말은 통할 수가 없지만 감정의 교환으로 체험한 그곳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 생김새가 우리와 닮아서인지 어느 외국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따사로운 정이 그들과의 이별을 더욱 슬프게 했다. 우연히 만난 그곳의 학생 Magaly 와 Zanet 은 시내여행을 같이 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나를 도와주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평생의 숙제가 될지도 모르는 약속이었다.
공중 도시 마추피추(Machu Picchu)
쿠스코에서 2일째의 날이다. 아침 일찍 불가사의 공중도시 마추피추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그때는 마추피추행 기차역이 쿠스코에 있었는데 지금은 우르밤바로 옮겼다.) 예쁘게 단장한 마추피추행 아담한 협궤열차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숨이 차는 듯 기적 소리를 길게 뿜으며 산 위를 향해서 지그재그 철길로 올라갔다. 쿠스코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그림 같은 계곡을 약 4시간을 달려서 깍아지른듯한 산봉우리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역에 와서 닿았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열 구비 이상의 지그재그식 도로를 따라 산꼭대기로 올라가니 돌담만이 남아 있는 공중도시, 잃어버린 도시 마추피추가 나타났다. 이곳은 잉카 사람들이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서 도망치면서 복수를 준비하기 위해서 산 위에다 만든 비밀 도시라는 추측도 있다.
▲ 협궤열차(지금은 바뀌었음) ▲ 마추피추 주변의 산세
어느 날 잉카 사람들은 이 도시를 불태우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폐허가 된 채 신비의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11년 미국인 하이람 빙검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마추피추는 높이 솟아 있는 산들과 절벽 그리고 무성한 산림에 둘러싸여 아래에서는 볼 수 없고 공중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여 공중 도시란 이름이 붙여졌다.
▲ 마추피추 전경 ▲ 잉카의 석조물과 계단 논
공중에서 본 마추피추의 총면적은 약 5평방km이며 절반가량이 경사면으로 되어 있다. 주위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든 건축물은 돌로서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다. 경사면은 식량을 생산하는 계단식 밭이 조성되어 있고, 시가지에는 양수장, 목욕 터, 묘, 태양의 신전, 궁전, 기술인 거주지, 일반인 거주지, 중앙 광장, 태양의 문, 독수리 신전, 감옥 등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들이 잘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정복한 후 다른 도시들은 모조리 파괴당했지만 이곳만은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그 귀중함이 더해진 곳이다.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마추피추의 시가지를 걸을 때에는 이상야릇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 돌았다. 경사진 곳의 계단식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잉카의 농부들, 정교한 기술로서 석벽을 쌓는 기술자들, 태양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의식, 목욕 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뇌리를 스치면서 역사의 의식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러한 저력을 가진 잉카인들이 왜 그들의 제국을 보존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을까? 그들은 이곳을 버리고 또 다른 찬란한 비밀 도시를 어디엔가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기술이 어느 정도였기에 그 옛날에 이렇게 웅장하게 또 정교하게 석조물을 건조했단 말인가? 의문의 꼬리가 계속 이어졌다.
고산 지대이어서 일기의 변화가 심했다. 치솟은 산봉우리에 안개구름이 감아 돌더니 빗방울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한 골목이라도 더 다녀 보기 위해서 비를 맞으면서 부지런히 다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서둘러 귀로를 재촉했다. 여행은 만나고 기억하고 헤어지는 삶의 연속이다. 숨 가쁘게 산기슭을 오르는 열차 속에서 칠레에서 왔다는 부녀(父女)와 어렵게 의사를 통하면서 우정의 시간을 엮었다.
쿠스코에서 마지막저녁, 고산병의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데도 내일이면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Magaly와 Zanet을 데리고 쿠스코 시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아르마스(Armas)광장으로 갔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감정을 주고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쿠스코의 밤을 구경하면서 선물도 사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 굳바이 소년(Good Bye! Boy)
기차를 내려서 마추피추 에 오르려면 열두 구비의 지그재그 길을 버스를 타고 올라야 한다. 마추피추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탈 때에 10대의 소년들이 같이 차에 올랐다. 그들도 구경을 하기위해 가는 것으로 알았는데 마추피추 탐방을 끝내고 내려오는 버스를 탔는데 함께 올라갔던 한 소년이 버스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그 소년은 qtm에서 내려 지름길로 뛰어 내려갔다. 버스가 지그재그 길을 돌아 다음 지그재그 길 출발 지점에 다다르니 그 소년은 먼저 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들면서 굳바이(Good Bye)!를 외치고 다시 지름길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버스가 다시 다음 지그재그 지점에 다다르면 또 그 소년이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우리가 탄 버스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Good bye!를 외치고 다시 지름길로 달려 내려갔다. 열두 구비마다 그렇게 Good bye!를 외치고 마지막 종착 지점에도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버스가 멎으면 버스에 올라 공손하게 Good bye! 인사를 했다. 그래서 이 소년들을 Good bye! Boy라고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소년에게 팁(tip)을 주었다.
쿠스코를 떠나던 날
쿠스코를 떠나는 날이다. 아쉬움이 가슴에 가득 찼다. 그러나 다음 일정인 불가사의(不可思議) 유적 ‘나스카 라인’의 탐방을 위해 리마로 내려가야 했다. 리마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새벽 6시여서 일찍 서둘렀다. Magaly와 Zanet은 이른 새벽인데도 공항까지 나를 동행해 주면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공항에서 고개를 숙이며 '아디오스(Adios!)'하며 아쉬워하던 모습이 잊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 Puno의 학생 Magaly, Zanet ▲ 쿠스코 공항에서
신비에 싸인 나스카 라인(Nazca Line)
리마에서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거의 사막으로 이어진 평원을 7시간 정도를 달려서 다다른 곳이 수수께끼의 지상 그림으로 알려진 나스카(Nasca)라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도시에 들어서니 얼마 전에 일어난 지진에 의해 파괴된 흔적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고, 부서진 집들을 다시 세우는 작업들이 한창이었다.
버스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청년과 함께 숙소를 정한 후에 지상그림의 현장으로 갔다. 경비행기를 타고 사막 위로 날아오르니 사막의 평원에는 신비에 싸인 갖가지 거대한 그림들이 광대한 대평원에 그려져 있었다. 직선, 삼각도형, 동물, 새, 물고기, 곤충, 식물 등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들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 설로는 우주인설, 하늘을 나는 사람 설, 성좌를 나타내는 달력 설 등이 있다.
그림은 돌이나 모래를 치워서 흰색의 지면이 나타나도록 하여 그려져 있는데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지역이어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그림의 크기는 다양해서 큰 것은 그 길이가 300m 이상이며, 그 수는 200여개로서,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거대한 대지의 캠퍼스에 그려져 있다. 지상 그림 중 크게 부각된 것들은 고래, 길게 뻗어 있는 이등변 삼각형, 외계인의 모습, 개, 원숭이, 독수리, 벌새, 거미, 도마뱀, 나무, 펠리칸, 앵무새, 물고기 등이다. 활주로 모양으로 뻗은 많은 선들은 무엇 때문에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선들의 끝부분이 동남부의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스카 지방에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 900년 정도에 걸쳐 다양한 문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지상 그림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9년 폴 코소크 라는 학자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사막의 평원에 새겨진 선들이 단순한 도로의 유적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항공기로 확인해 본 뒤에 지상 그림을 발표했다. 그 이전에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항공 측량을 했었지만 그림의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몇 개의 그림은 손상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나스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곳은 비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사막 속의 공동묘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따가운 모래벌판을 한참 동안달리니 하얀 모래 위에 유골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곳에 도착했다. 얼마나 긴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굴된 묘지에는 머리카락과 더불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갖가지 미라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 옛날의 천을 두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나스카라인 경비행기 ▲ 사막의 미라
나스카에서의 이틀 간, 그러나 무척이나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 신비에 싸인 잉카인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마음은 수수께끼에 싸인 지상 그림을 보면서 점점 더해졌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발달한 기술을 가졌을까? 지식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왜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까? 등등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나스카에서 언어 소통에 힘들어하는 나를 도와주던 이탈리아 청년,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해주던 덴마크 아가씨들 모두가 아련한 추억의 장면이 되고 있다.
리마를 둘러보면서
리마 탐방은 페루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다 배정했다. 며칠간이지만 페루에 좀 익숙해진 후에 수도인 리마를 둘러보고 싶었다. 시골의 도시보다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곳이기에 긴장이 되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어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먼저 숙소를 정할 때 위치와 가격 면에서 적당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운 좋게도 내가 생각한 것에 걸맞은 도심에 있는 중급 호텔을 하나 찾아냈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서 휴식을 좀 취한 후, 걸어서 호텔 주변의 중심가를 돌아보고, 또 큰 호텔의 로비에 가서 영어가 통하는 카운터 직원에게 부탁하여 다음날의 시내 관광을 예약하고 돌아왔다. 이곳은 특급 호텔이 아니면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리마는 남미로 가는 북쪽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시가지는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현대식 건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가지를 둘러볼 때에는 이상하게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우람한 식민지 풍의 건물들과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로 형성된 시가지에는 곳곳에 정복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동상들의 사이를 그들과는 모습이 다른 인디오들과 메스티조들이 밝지 않은 표정으로 오가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그들의 표정에는 무언가 한스러운 감정이 서려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곳 리마는 사계절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는데 5월이 되면 약간의 안개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들은 이것을 잉카의 눈물이라 부르고 있었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도시들은 모두 중심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아르마스광장의 뜻은 군대의 집결지라고 한다. 리마도 구시가지의 중심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중심인 산 마르틴 광장이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정부청사, 시청사, 대성당, 중앙우체국 등이 있는 관청거리였다. 광장은 낮에는 관광객들로 메워지고 저녁이 되면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곳 관청거리의 특징은 정부청사 주변이라는 권위적인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공공기관의 건물 앞 광장에는 저녁이 가까워지면 시민들이 휴식을 위해 모여들었다.
아르마스 광장의 한구석에는 이곳을 정복한 피사로의 동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장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 대성당의 위용은 식민지 시대의 권위를 상상케 했다. 많은 교회 중에서도 특히 산프란시스코 교회는 주 성전, 많은 예배실, 카타콤베 라는 지하 묘지, 수도원, 종교 예술 박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관과 내부의 장식이 아름다웠고, 또 그림, 책, 조각 등 많은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었다. 교회 지하에 있는 묘지는 유골들을 개방된 관에다 질서 있게 보관해 두어 관광 코스가 되고 있었다.
리마에는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 황금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설 박물관인 황금박물관에는 잉카시대는 물론이고 잉카 이전의 유물들, 특히 황금 부장품과 도자기로 빚은 인간상들이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전시품들은 찬란했던 잉카문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미라의 머리 유골 표면의 일부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당시의 의술을 짐작해 보았다. 또 도자기로 빚은 인간의 형상에 나타난 성(性)의 표현은 그 당시의 성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 황금박물관 정문 ▲ 다정다감한 인디오 후예들
다정다감한 인디오의 후예(後裔)들
숙소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던 직원들, 숙박객도 아닌데도 여러 가지로 도와주던 쉐라톤호텔의 여직원,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어려워하면서도 항공권 확인을 해주던 여행사 직원, 박물관 견학을 친절히 안내해 주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안내인, 모두가 그립다.
이번의 페루 방문은 색다른 감회를 안고 왔다. 여행이 끝난 후에 이렇게 아쉬워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어떤 지역을 여행할 때보다도 페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고, 비록 말은 통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으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는 있었다. 그들의 외모와 감정에서 우리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어서 그들과 대하면 그렇게 생소하지가 않았다.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때 한국에서 왔다는 말은 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꼬레아 최고라는 표현을 해줄 때에는 고맙기도 할 뿐더러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포장마차에서 그곳의 전통 음료를 사서 먹을 때 반잔을 더 부어 주는 인심에 이곳이 우리의 시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워하며 언제 또 오느냐고 물을 때에는 차마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내년에 또 오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대답으로 그 들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쿠스코에서 고산병 증세로 먹지도 못하고 두통을 앓고 있을 때에 낯선 거리를 안내하면서 시간을 같이해 주던 학생들, 버스에서 만난 인디오 여인은 글자를 적어주는데 내가 알지를 못하니까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면서 버스에 내려서도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떠나지 않던 어느 인디오 여인, ... 국경을 초월한 인정을 느꼈다. 그 여인이 적어준 글자를 후에 뜻을 알아보니 자기 동생이 한국에 일하러 가 있다는 뜻이었다.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옷에 흘렸을 때 보자기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서 닦아주며 미소를 짓던 시골 아주머니가 잊어지지 않는다.
순탄치 않은 역사를 가진 페루, 그러나 이제는 정복자의 오만도 인디오의 한스러운 과거도 모두 옛날의 흘러간 역사 속에 묻어 버리고, 낙후된 이 나라가 하루빨리 발전하기를 기원해 주었다.
페루 2차 방문 (2013년)
세계여행을 하면서 가장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온 곳이 페루(Peru)였다. 순진한 학생들에게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이 평생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 학생들과 한 동안은 소식이 오가면서 서로의 안부를 교환했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e-메일이 불통이 되어버렸다. 그 후 메일을 계속 보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서 그 학생들과 소식도 끊어져서 버렸다.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답신 메일에 나의 페루 방문 일정을 상세하게 적어 보냈다. 리마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리마(Lima) 공항의 재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출발해서 페루 리마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 밤 9시였다. 리마공항에 내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15년 전에 혼자서 잉카문명 탐사를 왔던 곳이어서 그 때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출국장을 나서면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Magaly가 옛날처럼 긴 머리에 검은 눈망울을 굴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15년 전 쿠스코에서 만난 학생 Magaly의 소녀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엄마와 동생도 같이 와 있었다. 긴 세월 속에서도 잊어지지 않던 추억이 현실로 살아났다. 15년 전 쿠스코에서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쿠스코 유적지 답사를 하던 때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말은 통할 수가 없어도 반가움은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서 있는 모습에서 15년전 모습이 되 살아났다. 여행사 버스를 같이 타고 숙소까지 와서 호텔 로비에서 그동안의 기다림의 정을 나누었다. 그날은 너무 늦어서 페루를 떠나는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 15년 전을 회상하면서 Sheraton Lima Hotel에서
쿠스코(Cusco)의 추억
쿠스코는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개인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여행팀과 행동을 같이 했다. 리마에서 1박 한 후 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마추피추(Machupichu)가 있는 쿠스코로 행했다. 쿠스코는 해발 3,400m에 위치한 도시로서 ‘태양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아내와 함께 다시 찾은 쿠스코는 나에게 새로운 추억의 장을 안겨주었다.
쿠스코에 도착한 후 아르마스광장을 중심으로 잉카시대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15년 전 혼자서 이곳을 찾았을 때 고산병 증세를 참아가면서 푸노에서 여행 온 어린 학생들과 잉카문명을 탐방하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쿠스코 시내 탐방을 마치고 내일의 ‘마추피추’ 탐방을 위해서 마추피추행 열차가 출발하는 역이 있는 ‘우루밤바’로 향했다. 과거에는 마추피추행 열차가 이곳 쿠스코에서 출발하여 지그재그로 산을 넘어 갔는데 이제는 그 길을 없애고 ‘우루밤바’로 내려가서 마추피추행 열차를 타게 되어 있었다.
버스가 어둠을 뚫고 우루밤바를 향해 달리는데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속이 메시꺼워지기 시작했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고산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도 비껴가지 못했다. 버스가 우루밤바에 있는 숙소 성 오거스틴 우루밤바에 도착하니 이곳의 고도가 2400m이어서 고산병 증세는 가시기 시작했다.
▲ 마추피추 길목 우루밤바 ▲ 마추피추 전망대
마추피추(Machupichu)
아침이 상쾌했다. 우루밤바의 ‘올란타이 탐보’역에서 마추피추행 기차를 탔다. 마추피추 역인 아구아스 카리엔테스역에 도착해서, 버스로 갈아타고 산길을 지그재그로 오르면서 산정에 도달했다. 공중도시, 마추피추 답사에 들어갔다. 마추피추의 지정학적 위치, 도시의 구조, 주변 봉우리와의 조화, 석축 구조의 과학적 짜임새, 산정의 수로, 주거지역, 계단 경작지 등은 언제 보아도 감탄을 자아냈다. 태양의 신전, 해시계, 콘돌신전, 제단, 감옥, 등을 둘러보았다.
쿠스코 근교에 있는 푸카푸카 요새로 갔다. 훼손이 많이 되었지만 석축으로 이루어진 요새가 가랑비 속에서 우리를 맞았다. 켄코요새를 거쳐 ‘삭사이만’요새로 갔다. 잉카의 거석(巨石)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성곽은 거대한 바위들로 빈틈없이 맞추어져 있었다. 일 년 내내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신비스러운 탐보마차이 요새는 시간이 부족해서 들리지 못했다.
파라까스(Paracas), 이까(Ica)
리마로 내려와서 점심식사를 한 후 파라카스로 향했다. 바다에 접해 있는 분위기 있는 호텔에 도착하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해변의 경치를 조망하면서 여독을 풀었다.
아침에는 서둘러 ‘이까’로 이동했다. 와카치나 사막의 오아시스마을에 도착해서 사막투어 특수 지프차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갔다. 사막의 언덕을 오르내릴 때에는 숨이 멎을 정도로 스릴 만점이었다. 특히 샌드 스라이딩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 와카치나사막의 오아시스 ▲ 샌드 스라이딩
사막투어를 끝내고 오아시스 마을로 내려왔다. 오아시스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음료수로 목을 적신 후에 다음 스케쥴을 위해 다시 파라카스로 돌아왔다.
파라카스 해상 보호지역
파라카스로 돌아와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파라카스 해상보호지역 탐방을 위해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무인도에는 물개와 바다 새들이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었다.
▲ 파라카스 선착장 바다새 동상 ▲무인도 바위의 물개들
빠듯한 일정이다. 바다 투어를 마치고 부두로 나와서, 리마로 이동했다. 리마에 가서 전 날에 하지 못했던 시내 투어를 일부나마 해보기로 했다. 비교적 교통체증이 덜한 신시가지로 갔다. 해변에 나스카 지상그림을 모형화해서 꾸민 공원에 가서 모형으로 지상그림을 감상하고, ‘사랑공원’으로 가서 사랑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다운 해변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페루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Magaly의 가족들이 선물꾸러미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에는 너무나 반가웠는데 오늘은 섭섭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쉬웠다. 호텔 로비에서 차를 마시면서 또 선물을 건네면서 서투른 영어로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섭섭함을 달래면서 아디오스(Adios)를 계속하면서 숙소를 떠났다. 돌아가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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