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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제 목 : 팝아트와 초현실주의
담당과목 : 크리에트 아트 담당교수 : 김동광 교수님
제 출 자 : 김재영 (동양화1)
학 번 : 12201002
제 출 일 : 2012. 9. 17. 월
팝아트
1.팝아트란? 1950년대 초 영국에서 그 전조를 보였으나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구상미술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술평론가 L.앨러웨이가 1954년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팝 아트가 비평용어로 채택되기 이전에 팝 아트적 징후를 상기시키는 작품이 영국에서 나타났다. 즉 1949년부터 F.베이컨이 작품에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팝 아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나 베이컨은 팝 아트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으며, 1954~1955년 겨울에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공동작품 및 그것과 관련된 토론 가운데 팝 아트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관심 아래 조직된 전시가 1956년에 열린 ‘이것이 내 일이다’이며, 이 전시에 R.해밀턴이 출품한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팝 아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팝 아트는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의 근친성을 보여준다. 영국 작가로 해밀턴을 비롯 P.블레이크, D.호크니, R.B.키타이, E.파올로치 등이 있으며, 특히 해밀턴이 바람직한 예술의 성질로 열거하고 있는 것들, 예컨대 순간적, 대중적, 대량생산적, 청년문화적, 성적(性的), 매혹적, 거대기업적인 것 등은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대로 압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팝 아트의 성격은 미국적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미술에서 더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세대인 R.라우션버그와 J.존스는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각종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활용하였는데, 이들의 작업이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로 불려졌고, 그 외에 신사실주의, 신통속주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미국 팝 아트의 대표적 작가는 A.워홀, R.리히텐슈타인, T.웨셀만, C.올덴버그, J.로젠퀴스트 등과 서부지역의 R.인디애너, M.라모스, E.에드워드 키엔홀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작가가 워홀이다. 그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스타나 저명인사들을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묘사하거나 임의적인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고 예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팝 아트는 텔레비전이나 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 고속도로변의 빌보드와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의 다중적이고 일상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코카 콜라, 만화 속의 주인공 등 범상하고 흔한 소재들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적 구조를 불식시키고, 산업사회의 현실을 미술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발원하는 반(反)예술의 정신을 미학화시키고 상품미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적 대안의 제시보다 소비문화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팝아트 작가들
⓵앤디워홀: 미국의 팝아트의 대표라면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 방법을 이용하여 반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뿐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 꽃,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⓶로이 리히텐슈타인: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는 만화의 형식,주제,기법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값싼 만화가 인쇄되는 제판 과정에서 생기는 망점을 세밀하게 재현하여 사물을 확대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넓은 붓자국을 만화양식으로 변형시킨 대규모 연작을 발표하는데 이는 추상표현주의의 과장된 표현방법을 비웃는 것으로 해석된다.그가그리는 만화는 기성만화의 한컷을 모방한다는 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한쪽은 실물의 제출이요, 또 하녹은 실물의 모사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미니멀의 지우기의 행위로서 징발돤 것이지만, 리히텐쉬타인의 레디메이드는 철저하게 지우기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징발된 사물들이다.성당읩ㄱ화가 중세적인 이념을 상징하는것이라면 그가 그린 만화 한컷은 미국이라는 하나의 이념을 상징하는 하나의 스틸인것이다.
⓷클레스 올덴버그:화가라기보다는 물체를 만드는 작가로서의 클래스 올덴버그는 작품의 크기,재료,질감에서 놀라움을 일으킨다. 1961년에 음식물 모형을 파는 상점을 열었으며 그 후 일상용품을 확대,변형시킨 작품(타자기,욕실용구,선풍기,석고·헝겊으로 만든 대형 햄버거,아리스크림,담배꽁초등)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들이 이례적으로 대규모적이면서도 주제는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속성을 드러내어 해학성과 함께 대중 문화·제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초현실주의
1.초현실주의란?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사조.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의로 고쳤다고 한다.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1924년부터이며, 19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寫實)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 작풍(作風)에도 추상화의 경향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초현실주의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다이즘에서 찾아야 한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기성의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기원을 더 먼 곳에 찾아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입체주의(입체파)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술운동 속에서 야수파나 표현주의 이상으로, 입체주의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파나 표현주의가 원색주의를 택하고 강렬한 감정표현을 주체로 삼았다고 한다면, 입체주의는 종래의 회화를 부정하는 순수한 이념화(理念化)만을 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한 개의 화면을 완벽한 평면으로 보는 관점이며, 일찍이 세잔이 추구한 원근법이라든지 전경 ·후경의 배치와는 별도의 구성, 별도의 공간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초현실주의 공간은 많은 경우, 상상적 공간이며 비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간접적으로 입체주의의 계열을 잇는 공간파악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때까지 빙산처럼 수중에 가리어 있었던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렸다. 즉, 이성(理性)의 반대의 극점, 합리의 반대쪽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술은 이성과 감성, 정신과 마음이 합치는 지점에 그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미 예술은 그러한 조화 ·통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아는 밝음과 어두움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자아의 확대라는 문제에 제일 먼저 눈뜬 것은 낭만주의였다. 여기에 미술사가들이 지적하듯, 낭만주의에서 직접 초현실주의로 맥을 잇는 정신의 계보가 있다. 한 예로서 독일 낭만파의 노발리스, L.티크, W.H.바켄로더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술환상》의 저자인 바켄로더는 끝없이 감미로운 도취상태에 그의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티크는 격렬한 자아의 분열상태 속에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티크의 대표작인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상의, 이 끝없는 동요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나의 마음을 살짝 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그 부드러움이 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려준다면, 나는 행복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게 되고 예술가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억압할 수가 없다. 불가항력이라고나 말해야 할지. 나의 계획 ·희망 ·신념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감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또한 《푸른 꽃》의 저자인 노발리스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꿈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했던 사람이다.
독일 낭만파 문학에서 영향받은 독일 낭만파의 회화는 O.룽게나 C.D.프리드리히의 회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동경을 그 특질로 삼고 있다. 또 그들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초현실주의는 종교감정 대신에 프로이트의 리비도설(說)이 도입된다. 따라서 인간의 숨겨진 부분에 상상력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보아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인 V.위고는 그의 데생에서 이미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여류작가 G.상드가 풍경화 속에다 이끼나 꽃 같은 것을 붙인 것도 일종의 콜라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무형체를 지향하였다. 창조력이란 그것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현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비구상(非具象)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는 자아를 절대시하고, 그것에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했을 때에 비로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의 갖가지 시도는 시 ·회화 ·사진 ·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연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모순된 현실과 결부되어 예술일반의 인식을 비약시키고 20세기 특유의 환상예술을 발흥(勃興)시키게 된다.
특히 미술의 경우 초현실주의는 종래의 공간의식과는 별도의 비현실세계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였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M.레이의 레요니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와 같은 테크닉이 충격의 효과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R.마그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그 밖에 Y.탕기, M.뒤샹, A.자코메티, 레오노르 휘니, J.B.파렝, 투아이앙 등을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운동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하나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의 파괴적인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브르통, L.아라공, P.엘뤼아르, F.수포, A.페레, R.데스노스, 크르베르 등이 《쉬르레알리슴 혁명》지(誌)(1924∼1929)를 통해 문학 운동을 펼쳤다. 영감(靈感)의 발생을 천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힘의 찬양, 자동기술(自動記述)에 대한 깊은 신뢰, 초현실적 사실의 열렬한 탐구와 평행하여 사회생활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모든 것의 금지를 문제삼고 혁명을 통한 자유의 도래를 그려보며 영원히 온갖 제약을 파기하고, 종교적·정치적 신화를 타도하고 사회의 명령에서부터 해방된 개인의 승리를 보장하려 했다. 또한 문학 ·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 ·종교 ·정치의 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주의로서 형성되었다. 1924년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선언》의 발표와 기관지 창간 이후의 수년간, 이 운동의 불길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문체론》, 엘뤼아르의 《고뇌의 수도》, 브르통의 《나자》 등이 이 운동의 실험에 있어서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새로운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이 창간되고, 초현실주의와 초합리주의가 일체를 이루는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공동작 《무원죄수태》, 브르통의 대표시집 《자유로운 결합》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일파의 혁명적 야심은 점차 인간의 미적 ·윤리적 개념의 전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정치면에서의 직접 행동으로 옮아갔으나, 초현실주의의 이론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치에 실패하여, 이 운동은 분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열린 국제혁명작가회의에 참석한 아라공은 소련에서 정치시(政治詩) 《적색전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후일 이 시가 프랑스에 전해지자 이른바, ‘아라공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택한 아라공은 다음해 이 그룹에서 제명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J.위녜의 《쉬르레알리슴 소시선(小詩選)》, 브르통의 《새벽》,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시집 《민중의 장미》, 화가인 S.달리의 《비합리의 정복》이라는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나옴으로써, 문학·회화 양면에 걸쳐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초현실주의는 국제선전운동으로 나타나, 36년에는 런던에서, 1938년에는 파리에서 브르통, 엘뤼아르가 중심이 되어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이 열렸다. 그 사이 브르통의 《미친사랑》, 엘뤼아르 시집, 로트레아몽의 《전집(全集)》이 출판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브르통은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이래로 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엘뤼아르와 드디어 결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재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과 신화의 인식과의 방향으로 쏠렸다. 대전중에 브르통, 베레, 달리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에서 초현실주의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1947년 귀국한 브르통이 파리에서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을 열고 공산당과 실존주의자들에 대한 집단선언서 《즉시결렬》을 발표하였다. 이 방향에서 나타난 전후의 대표적 작품은 브르통의 시집 《샤를 푸리에에게 주는 오드》가 있다. 유파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일단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미학적인 면에서의 영향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크다.
2.초현실주의 작가들
⓵르네 마그리트 : 가장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 1898~1967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긴 벨기에 화가입니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팝아트와 그래픽 디자인 등 현대미술 장르에 큰영향을 준 르네 마그리트입니다~
⓶살바도르 달리:1904년 스페인의 피게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1년 전 죽은 형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세 때 미술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였으나, 1924년 퇴학당했다. 그는 초기에는 인상파나 점묘파에서부터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조를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받아 환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표현하기 시작했다.1928년에는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초현실주의파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러나 10여 년 후에는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아 다시 고전주의로 회귀하면서, 초현실주의파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행위예술에도 관여하였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부뉴엘과 합작으로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을 촬영했으며, 히치콕과 <스펠바운드>를 제작했다. 1982년 스페인의 후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독창적이고 기괴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 <기억의 집념>이 있다.
⓷막스 에른스트:1948년 막스 에른스트는 자서전의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막스 에른스트는 1914년 8월 1일에 죽었다. 1918년 11월 11일, 그는 마술사가 되어 그의 시대의 중요한 신화를 찾기를 원하는 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그는 1914년에 죽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프로타주와 콜라주, 그라타주, 데칼코마니 같은 기법들을 새롭게 고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4년 동안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경험 덕분에 에른스트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새 '로플로프'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른스트에 따르면 로플로프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인간과 새의 혼동과 또 그것이 연상시키는 탄생과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전쟁에 혐오를 느낀 미술가들이 그 전쟁을 가져온 시스템들, 예를 들면 논리학, 언어, 회화 작품 같은 것들을 비판했다고 말했다. 1920년에 그는 장 아르프와 요한네스 테오도르 바르겔트와 함께 제1회 '쾰른 다다이즘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폐회되고 말았다. 에른스트의 몽환적인 유화 작품 <셀레베스>(1921)는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1922년에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기기 이전부터, 재현된 대상들이 비논리적으로 병렬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콜라주는 음울하고 초현실적인 콜라주 소설 『친절 주간』(1934)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적 이미지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처음에는 팸플릿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른스트는 애인이었던 레오노어 캐링턴과 함께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독일인임이 발각되어 프랑스 군에게 붙잡혔으며, 나중에는 나치 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는 미술애호가이자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했다. 에른스트는 구겐하임과 1942년에 결혼하지만 2년도 안 되어 헤어지고, 영국 화가인 도로시 태닝을 만나 1946년에 결혼했다. 둘은 애리조나에서 살다가 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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