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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18 ~ 3:7
제 목 :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본 문 : 창세기 2:18 ~ 3:7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 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 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 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 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 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 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 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 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 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 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 로 삼았더라
1. 하나님 / 사람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니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최종 목적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이전에 천지간 모든 만물을 먼저 만드신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이후에야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에 들어가시며, 완성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천지창조의 최종 목적은 사람의 창조였다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니라’라고 받아들여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창세기 1:1]을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니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 바로 성경의 기록 목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 사람의 언어로 기록한 하나님의 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즉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독자는 사람, 그 중에서도 성도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독 사람에게만 성경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여겨주신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설령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인이 되더라도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항상,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 사람에 대한 그릇된 편견, 성경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많은 세상 속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사람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죄인 된 사람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의 오해입니다. ‘죄인’의 의미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죄인’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주종관계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모르니까,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니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마저도, 그리고 기독교인마저도 이러한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의 기초 위에서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런 기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얼핏 들어서는 신실한 기도 같지만 잘못된 기도입니다.
왜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존재지요?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사람은 그런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사람에게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거저 주어진 것은 갚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방식에 딱 들어맞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난해도 우리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가 우스운 모습으로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자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삶을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영화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조금 더 영화롭게 해드리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조금 더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며,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존귀하게 대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도와 성도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고, 그 삶을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영화롭게 해주었구나, 너희가 나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구나’라고 여겨 주시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반대로 갑니다. 내가 힘들더라도, 내가 시간이 없더라도, 내가 형편이 어렵더라도 먼저 시간을 내야하고, 먼저 일을 해야 하고, 먼저 전도를 해야 하고, 먼저 헌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이것을 은연중에, 아니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도는 점차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성도로서 존귀함은 사라져 갑니다.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확인 할 길이 없습니다. 성도라는 것,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별로 기쁘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일까요?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성도의 삶일까요?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2.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 [창세기 2:25]을 보겠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을 읽어보거나 설교를 들어보면 이 내용을 부부관계 또는 하나님의 가정 창조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반대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부부관계 혹은 가정 창조 이상의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놓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19] 아담이라고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요? 사람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흠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결핍한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신 것이고,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지어진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아무 흠 없고, 아무 부족한 것이 없고, 완벽하면서도 거룩한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세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라고 기록된 것처럼 또 하나의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습니다. 이 사람도 역시 아무 흠 없고, 아무 부족한 것이 없고, 완벽하면서도 거룩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지어진 아담과의 차이점은 재료가 다르다는 것과 여자라는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똑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드디어 맺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두 남녀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인 상태인데도 서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관계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남자들의 경우 많은 학생들, 특히 공부 조금 한다는 학생들은 대통령 혹은 국회의원 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공부 조금 하는 학생이었던지라, 저의 희망도 한때 정치인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정치인이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 벌거벗겨지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거 때가 되면 모든 후보는 경쟁 후보를 벌거벗겨 놓습니다. 장관이 되기 위해서는 몇 번이라도 대중 앞에서 벌거벗겨져야 합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행적에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적나라하게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행적, 배우자의 행적, 배우자 부모님의 행적, 친인척의 행적, 심지어 자식의 행적까지 모든 것이 만천하에 공개 되어 버립니다. 소재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성장과정, 건강관계, 학력관계, 병역관계, 재산형성관계, 이성과의 관계 등 자신을 포함한 주변인의 과거사, 현재사가 낱낱이 공개됩니다. 차라리 옷을 벗고 알몸 한번 보여주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과연 견디어 낼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대충 모든 것이 마무리됩니다. 주일 강대상에서 할 표현은 아니지만 다 그 놈이 그 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에서 벌거벗었다는 표현은 조금 전 예로 들었던 내용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모든 것을 밝혀내기 위해 사람을 낱낱이 드러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럽다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부끄럽다’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입니다. 반대말로는 당당하다, 떳떳하다, 자랑스럽다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에 의하여 최초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아무리 흠을 찾으려고 해도 서로에게 당당한 관계, 떳떳한 관계, 자랑스러운 관계라는 것입니다. 남녀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자의 몸을 빌려 여자가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아무 흠이 없는 완벽한 관계, 온전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담아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기준 되심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 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존재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당당하고,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존재, 즉 벌거벗었어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귀하게 여겨 주셨지만, 사람끼리도 서로 존귀하게 여겨주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도 멋있으신 분이지만 사람 또한 얼마나 멋있습니까? 세상 그 무엇에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당하고 떳떳하며, 자랑스러워하는 존재, 정말 멋있는 존재 아닙니까? 동의하시면 모두 아멘 하시겠습니다.
중, 고등학교 학생 시절 늘 암송하던 시가 한 구절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정말 멋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를 지을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멋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정말로, 진실로, 분명히, 확실히 멋있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멋있는 존재였던 사람에게 위기가 다가옵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던 존재였던 사람에게 큰 시련이 다가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가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해로운 것을 공급하시면 안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기준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두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두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억압하고, 강제하기 위해 두신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배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여겨 주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 또는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 하나님이 정한 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기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한 바를 사람이 선택해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 주 사훈, 교훈, 급훈, 가훈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재미있는 급훈 중에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 할래’가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시험하거나 협박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학생들을 향한 담임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이 축약된 표현입니다. 즉 ‘너희들은 지금 학생이니까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대학에 들어가면 아주 낭만적이고 즐거운 캠퍼스 생활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결국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정말 힘겨운 노동을 해야 할지도 몰라’라고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담임선생님이 정한 기준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인정한다면 학생은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은 학생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학생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의 결과가 반드시 학생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학생에게 좋은 결과가 임할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쁜 결과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와 담임선생님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 본분입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셨고, 사람에게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며, 옳으신 뜻입니다.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의 결정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 안 된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뜻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하나님을 수용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한 바를 선택하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바를 무시하고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부인이며, 사람에게 주어진 본래의 위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은 먹지 말라고 정해졌습니다. 이제 선택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사람이 스스로 기준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사람이 먹은 행위를 가지고 ‘죄를 범하였다’ 혹은 ‘범죄 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범죄, 죄인과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4. 선악을 알리라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행위는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범죄이며,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사람이 스스로 기준이 된 것, 즉 죄인이 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죄인이 된 배경에는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뱀이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판단 내리기가 아주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라합이라는 기생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때 그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준 여인이 라합입니다. 여리고 군사가 정탐꾼들을 찾기 위해 라합의 집을 찾았을 때, 라합은 그 정탐꾼들을 숨겨놓은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여 여리고 군사들을 따돌립니다. 그리고 그 공로로 여리고 성이 함락되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했을 때,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살아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라는 계명을 라합이 어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한 라합을 오히려 살려주심으로써 하나님 스스로 자기 모순을 드러냈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요?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조금 전 살펴본 라합의 행위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선이지만, 여리고 입장에서는 분명 악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예.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 기준 되심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이시고 하나님 이외의 것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하나님 이외의 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이시고 하나님 이외의 것은 불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하나님 이외의 것은 사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과 같지 않은 것은 틀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도덕, 윤리, 관습, 전통, 양심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선이 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고, 세상에 악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는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구별하고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아신다’는 의미도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하고, 분별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악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선악을 아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악을 안다는 것도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뱀이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선악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람 스스로 자신들이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사람의 삶의 원리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한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5.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렇게 말씀 드리면 그 심각성이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한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라면서 사춘기라는 것을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가 이성에 대해 눈을 뜨는 시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춘기의 가장 큰 특징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가장 왕성하게 원하는 시기입니다. ‘내가 이제는 알아서 다 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충고나 조언이 간섭으로 받아들여지고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로 인해 부모, 자식 사이에 갈등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갈등이 극대화 되면 자식이 집을 박차고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이 싫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에게 임한 결과가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사람의 기준으로 살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집을 나갔습니다. 가장 충격을 받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 충격은 내가 아이에게 저버림을 당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보다는 아이가 고생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 심각성을 잘 모릅니다. 그냥 좋습니다. 부모가 어떤 생각을 할 지 큰 관심도 없습니다. 내게 찾아 온 자유가 마냥 좋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고, 집 나온 아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초반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당당한 관계, 떳떳한 관계, 자랑스러운 관계였습니다. 그랬던 관계가 이제 부끄러워하는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고, 사람과 사람 서로에게도 부끄러워하는 관계로 변화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이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 들어 있던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죄의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기준, 죄의 가치에 근거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당당한 모습, 떳떳한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사람은 초라한 존재, 나약한 존재, 추악한 존재, 불쌍한 존재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뿐인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하냐고 물어옵니다. 맞습니다. 맞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같은 상황을 당했을 때 다 똑같이 아담과 하와와 같은 반응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인류의 범죄가 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기준, 죄의 가치, 죄의 원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주셔서 위로하시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 사람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회복된 사람을 우리는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과 제가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회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서로에게 떳떳한 자가 되었습니다. 당당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설령 죄의 유혹이 우리를 공격한다 하여도 그 죄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담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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