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것은 죄인가? 아니면 가난은 불편할 뿐인가? 가난을 이야기 하려고 작정했을 때 마음속에서 멈칫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마치 멀리서 찾아온 도반스님에게 “요즘 절의 사정이 어려워서 여비를 못 드립니다”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 사실 ‘수행자는 가난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처음 출가 할 때도 가난한 생활이나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았다. 원효 스님도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지라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지 않으셨던가. 부처님이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신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도 청빈락도(淸貧樂道)의 살림살이 이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를 맡기전 선방에 다니거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내게도 병원비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책을 사고 싶어도 여유가 없어 구입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는 것이 나의 천성이기도 하였고 특별히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지만 그러한 가난은 불편한 것이었지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걷지 않은 산길을 혼자서 걷는 기분처럼 상쾌하였고 ‘수행자의 가난은 복이다’라는 믿음도 있었다. 주지가 되고 나서 주위에서 만나는 주지 스님들이 툭하면 절 살림이 어렵다 호소하기에 나만은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지말자고 다짐 하였다. 어렵다고 한들 누가 도와 줄 것도 아니고 어렵다는 것이 도대체 기준이 없었기에, 모두의 어려움은 모두의 엄살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도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죄가 되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찰에서 선방을 운영하는 것이 벅차서 힘겨울 때, 특히 열심히 정진 하고 떠나는 스님들께 차비를 넉넉하게 드리지 못할 때, 선방에 다니는 반연 없는 사제스님들에게 공양금을 보내지 못할 때, 오랜만에 찾아온 도반스님들에게 차비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죄스럽게 느껴진다.
왜 우리는 가난한 수행자로서 끝까지 살아내지 못할까.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 종단도 가난하고 스님들도 가난하다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종단은 부자인데 그것을 투명하게 관리하지 못하여 일부 스님들은 부자이고 대다수 스님들은 가난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재 승가는 부끄럽게도 사회와 똑같이 부익부빈익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행자의 가난은 종단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왜곡되어 있고 가난한 수행자가 존경받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만 능력없음이 되어버렸다.
이번 동안거에는 일부러 우리절은 어느 사찰보다 가난하니 가난을 미덕으로 아시는 분들만 방부를 들이시라는 ‘안내문’을 각 선방에 보냈다. 설사 나의 편지를 받고 선방에 방부를 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보낸 편지였다. 다행스럽게도 7분이나 방부를 들이셨다. 자발적으로 가난한 사찰을 선택하는 분들을 보니 아직도 선방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선방에 다닌 구참스님이 자신의 소유물은 아끼면서도 사중(寺中)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나는 몇십년 선방에서 수행한 이력보다 뒷방에서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행자가 더 존경스럽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개인사찰이을 가지고 있고 통장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스님으로 불리운다 해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못한다.
“처음 출가할 때는
가난한 생활이나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았다 …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부끄러움이 돼가고 있다”
가난한 것은 죄인가. 아니면 가난은 불편할 뿐인가. 가난을 이야기하려고 하니 마음속에서 멈칫하는 망설임이 있다. 마치 멀리서 찾아온 도반 스님에게 “요즘 절의 사정이 어려워서 여비를 못 드리겠네요”라고 말할 때 느끼는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처럼. 사실 ‘수행자는 가난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처음 출가할 때도 가난한 생활이나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지라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원효스님의 충고를 우리는 출가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주지를 맡기 전 선방에 다니거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 내게도 병원비가 없어서 제때에 병원에 가지 못하고, 필요한 책을 사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구입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때의 가난은 불편한 것이었지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함은 ‘나는 수행자’라는 정체성을 늘 잊지 않게 해주는 도반이 돼주었다. 말사 주지가 되고 나서 주위에서 만나는 주지 스님들이 툭하면 절 살림이 어렵다 호소하기에 나만은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지말자고 다짐했다. 어렵다고 한들 누가 도와줄 것도 아니고 어렵다는 것이 도대체 기준이 없었기에, 모두의 어려움은 모두의 엄살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도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부끄러움이 돼가고 있다. 선방을 운영하는 것이 벅차서 힘겨울 때, 특히 열심히 정진하고 떠나는 스님들께 차비를 풍족하게 챙겨 드리지 못할 때, 평생 선방에만 살아서 신도와 반연 없는 사제 스님들에게 보시를 못할 때, 토굴에 사는 스님이 도움을 청하는 데도 도와주지 못할 때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서 죄스럽게 느껴진다.
왜 우리는 가난한 수행자로서 끝까지 살아내지 못할까. 왜 수행자의 가난이 부끄러워야 할까.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승단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축적된 승가의 공적재산을 관리운영하고 있다. 그 공적재산이 교육과 포교, 복지사업에 사용되고 스님들은 모두 청빈한 생활을 한다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그 공적재산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않아 일부 스님들은 부자이고 대다수 스님들은 가난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재 승가는 부끄럽게도 사회와 똑같이 부익부 빈익빈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가난한 수행자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능력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번 동안거에 “우리 절은 어느 사찰보다 가난하니 가난을 미덕으로 아시는 분들만 방부를 들이시라”는 ‘방부 안내문’을 각 선방에 보냈다. 선방에 방부를 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각오를 하고 보낸 편지였다. 다행히 일곱 분이나 선방에 방부를 들이셨다.자발적으로 가난한 사찰을 선택하는 분들을 보니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엔 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가를 보고 수행자를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를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금방 드러난다. 도와 돈을 같이 추구하는 일은 가능할까. 옛 스님들은 그런 생각으로 도 닦는 사람을 보고 모래로 밥을 짓는 자라고 경책하셨다. 세월이 갈수록 쌀로 밥 짓는 자들이 귀해져 가는 것 같다.
어제부터 회원가입하시는 분이 늘어나길레 이유를 살펴보니 이 글을 진훍속의 연꽃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하셨네요 연꽃님은 어떤법사보다도 더 열심히 글쓰기로 포교하시는 분이고 내가 해야 할일을 대신하고 계셔서 고맙게 생각하는 분입니다 암튼 가난함이 부끄러움이 아닌 자부심이 되는 승가가되기를 염원해 봅니다
첫댓글 _()_
감동입니다.....
어제부터 회원가입하시는 분이 늘어나길레 이유를 살펴보니 이 글을 진훍속의 연꽃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하셨네요 연꽃님은 어떤법사보다도 더 열심히 글쓰기로 포교하시는 분이고 내가 해야 할일을 대신하고 계셔서 고맙게 생각하는 분입니다 암튼 가난함이 부끄러움이 아닌 자부심이 되는 승가가되기를 염원해 봅니다
살림과 공부가 하나로 가는 길
일명 "좁은문"으로 나아가는 당신께
합장 올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