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정 성 천
요즈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가 ‘백세인생’이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오랫동안 무명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 노래 하나로 인기를 끌어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백세를 넘어 백 오십 세까지 언급하는 가사도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노래의 곡도 일반 우리 전통 가요와 민요를 섞어 놓은 듯 특이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래가사 중에 반복되는 “-라고 전해라”는 말은 개그맨들이 개그로 방송에서 자주 사용하더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스갯소리로 많이 유행되고 있다.
“-라고 전해라.”라는 말이 유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말에는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남기는 일 없이 그냥 가볍게 소통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심리기저가 깔려 있다. 나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전달하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내가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겠다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와 같은 심보다. 직접 대화하기보다 문자메시지를 더 편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메마른 속성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두께가 너무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두가 잘 먹고 몸이 편하고 의술이 발달하여 평균수명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예전에는 백세노인을 평생 한 번 만나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동네 마다 백세를 넘기거나 백세가까이 되는 노인이 한두 분 계신다. 백세 이상 사시는 노인들의 수가 현재 일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백세인생이 옛날처럼 그런 꿈같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한 인생이 역전 드라마를 이룬 것이나 누구나 백세까지 오래살고 싶은 마음에 그 노래를 즐겨 부르는 일에는 박수치며 환영할 일이나 그 노래의 가사를 되새겨 보면 늙음과 죽음에 대한 실상을 간과하고 장수의 환상만을 부추기는 현 시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한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영상으로 보인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이나 유리처럼 투명하면서도 절연체처럼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해서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 상품을 훔쳐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나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그 것은 텔레비전 화면의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담담하게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이런 사회를 형이상학적 근거를 상실한 ‘환영의 사회’라고 불렀다.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는 것도 늙음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알맹이는 잃어버린 채 오로지 장수의 환영만을 부추기는 현대사회의 거품 같은 현상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내가 아는 지인의 모친도 올해 백세가 되셨다. 하지만 3년간 식물인간처럼 노인 요양소에 누워 계셨다. 삼년동안 모친과 대화는커녕 살가운 눈빛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간혹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미루어 짐작 해 보건데 본인도 고통스럽게 시간을 보내시고 있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모친의 뜻일 것이라고 지인은 진단한다.
지금은 몇 달 째 식음을 못하고 있지만 링거 주사와 산소호흡기로 연명을 하고 있단다. 그나마 어머니에게 붙어 있던 정을 다 떼고, 어머니하고의 아련했던 추억들마저도 다 날려 버리고 고통스럽고 불쾌한 추억들만 남기고 돌아가실 까봐 두렵단다. 노인요양소나 요양병원에서는 노인네가 돌아가시면 그만큼 정부보조금이 줄어들기도 하고 활발하게 거동하시는 노인보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노인이 관리하기가 수월해서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는 것이 지인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산소 호흡기를 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지난 연말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그 법률의 시행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백세인생 노래가사처럼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이유를 대고 연기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핑계와 이유를 대고 죽음을 연장하고 싶은 것은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무거운 욕심 때문이다. 인생 육십을 공자는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육십이 되면 아직 젊다고 욕심 부릴 것이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온갖 이유를 대며 미루어야 할 만큼 두려운 것일까? 살아 있을 때 선불교에 심취 했던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임종 때 “Oh Wow!”를 세 번 말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말은 영어권 사람들이 경이롭거나 감탄할 만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하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살아 온 생을 되돌아보고 감탄해서 하는 말이거나 의식에 비친 생의 저편이 감탄스러울 만큼 훌륭하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니 그 두 가지는 어떻게 보면 동시에 발생되는 것이 아닐까? 생의 매순간을 절실히 살아야 다음 생도 감탄스러운 것이 아닐까? 최선을 다했기에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굳건해지고 더 이상 집착이 없는 삶을 살아야 다음 생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삶의 완성이지 두려워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못해 맞는 패배가 아니다.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 온 것같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라. 당신이 생각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 온 것처럼 동일하게 이번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라. 당신의 죽음도 우주질서의 하나다. 이 세상 생명의 한 부품이다.” 늙음과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핑계를 대며 연기하는 노력대신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내면세계를 다듬는 삶, 즉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근거가 확립되는 삶을 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옛날부터 죽은 사람을 ‘돌아 간 사람’이라 하였다. 죽은 사람을 ‘돌아 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나그네일 것이다. 이 세상의 나그네는 이 세상에 온 손님이다. 손님은 찾아 올 때의 모습이 반갑지만 떠날 때의 뒷모습은 더 반갑다고 했다.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면 삶에 대한 미련으로 구차한 핑계나 이유를 대지 말고 그냥 따라 가라.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다. 그대가 남겨 놓고 가는 시간도 그대가 출생하기 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단풍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나 때가 되면 떨어져야 한다. 한 겨울에도 낙엽이 되어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려 있는 단풍은 을씨년스럽고 추하게 보일 뿐이다.
2016. 0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