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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거제대교 |
통영과 견내량을 잊는 다리로 1965.5.30 기공하여 1971.4.8 존공하였다. (10m☓18m, 740m) 현대건설 기술진이 건설했으며 박정희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
신거제대교 |
1992.10 기공하여 1999.4.22일 개통. 총길이 940m, 폭20m, 높이 20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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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거가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유일한 육지와의 통로는 거제대교이다.
거제대교라고 하면 견내량(見乃梁)이 떠 올린다.
한산대첩을 이해하려면 견내량(見乃梁)을 알아야 한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 반도가 만들어낸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400 내지 600m의 좁은 해협이다. 이 해협은 부산, 마산, 진해 방면으로 항해하는 선박과 통영, 남해, 여수, 삼천포로 항해하는 많은 선박으로 붐비는데 해협 양쪽 입구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하고 물살이 거셀 뿐 아니라 바다 밑에 암초가 많아 옛날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견내량이라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지명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見乃梁은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는 바다이며, 고성에서는 여기를 건너야 本縣에 들어오게 된다’ 는 글을 보더라도 일찍부터 견내량은 육지에서 우리 섬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것 같다.
견내량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기에 고려시대부터 귀양을 오던 곳이며 또한 왜구의 침입이 번번하자 거제도 전역은 군사요새하 하였다. 그 중심지에 견내량이 있었다.
견내량은 육지와 접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하여 예부터 군사요충지로 고려현종9년(1018년) 진을 설치하였다. 1170년에는 고려 의종이 무신의 난으로 거제 둔덕에 피난처를 삼기 위하여 이곳을 건넜다 하여 '전하도'라고도 한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1274~1281)하려고 출항한 곳이 이곳 견내량이다.
1396년에는 삼도 수군 체찰사 이종무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대마도 정벌군을 파병하면서 이곳 견내량에다 함대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592년 7월에는 한산도 대첩 발원지이다. 이렇게 큰 해전이 있을 시에 견내량을 이용한 이유는 견내량은 해협이 좁고 물살이 세워서 쿠로시오해류를 타면 쉽게 일본이나 한산도 방면으로 쉽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이러나 포로소용소가 거제도에 설치되자 견내량은 물자를 실어나르는 도선장이 되었다. 1970년초 양대조선소가 결정되자 육지와 연결이 급선무가 되어 거제대교가 건설되었다. (1971년)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1999년 4월22일에 신거제대교를 완공하고 이어서 2010년12월13일 거가대교 완공으로 거제는 이제 섬이 아니라 육지나 다름없는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좋기도 하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푸른 물결과 싱싱한 고기가 뛰놀고 순수함이 서려있는 고향산천이 그리워진다.
~거제대교 답사기~
거제도 오량- 거제수산물 유통센타-오량초등학교-견내량마을-영생약방-신촌마을(대교)-구거제대교-장평리 신촌마을-연기마을-원평리 견유부락-통영삼거리길-통영타워-신거제대교-거제도 오량
고현에서 출발하여 오량에서 거가대교를 타지 않고 오른쪽으로 (둔덕)빠져나가 수산가공센타를 지나니 바로 오량초등학교다. 몇 발을 가니 견내량마을이다. 견내량이란 이곳은 조수간만 때에 조류가 냇물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갯내’다. 즉 바다의 물의 흐름이 냇물과 같이 흘러 내려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의 냇물이라는 뜻이다. 이 ‘갯내’가 견내량이 되었다. 또 고려 의종(1170년)이 정중부의 경인란으로 거제도로 추방되어 오면서 건넜다 하여 전하도(殿下渡) 또는 견하도(見下渡)라 한다.
거제도는 일본과 인접해 있는지라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500여 차례의 침략과 노락질을 하였다. 물론 1389년 경상도원사 박위의 대마도정벌과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왜군은 잠잠해 지는 뜻 했으나 1592년 4월13일 풍신수길의 지령을 받은 코니시 유키나카가 167,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를 진격하여 이틀 만에 부산과 동래는 함략되고 말았다. 일본군이 북진하자 선조는 4월29일 의주로 도망가고 우리나라는 풍전등하의 길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도 않은지 1592년5월7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함대가 일본 함대를 격파하고 우리의 첫 승리를 안겨져 해상뿐만 아니라 육상에서도 승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차 옥포해전과 2차 당포, 당항포 해전 그리고 3차 해전이 그 유명한 한산도 학익진을 통한 승리이다. 그런데 일부 자료에 보면 한산도 대첩을 견내량 전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거제도 견내량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견내량인가? 1419년 이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도 그렇고 한산대첩의 출발지도 그렇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고성 통영쪽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이다. 이러한 곳은 대개 물살이 세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류에 의해 물살의 방향이 바뀐다. 썰물을 기다렸다가 그 물살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이런 해류를 이용한 것이 이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과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해전이다.
이런 역사가 숨 쉬는 견내량 마을을 지나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대교이다. 그런데 정식마을 이름은 신촌이다. 거제대교가 개통되어 통영과 거제시내버스의 정류장이 있고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신촌이라 부르고, 거제대교가 들어섰다고 줄여서 대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1999년 새거제대교가 건설되자 이곳은 관광의 변방으로 물러나고 이따금씩 시내버스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작가 옥치섭님의 작품, 은성사 쉼터에서 바라본 거제대교
♥ 시래산 전망대 : 견내량마을 입구에 보면 (구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중간지점) 견내량 마을표지석이 보이고 은성사란 팻말이 보인다. 그곳으로 임도를 다라 차로 3분정도 가면 은성라란 절이 있고, 그 옆에 사진촬영장소가 있다. 거제대교와 석양의 아름다움을 촬영하는 곳이다. 거제 10대 사진 촬영지에 포함된다.
♣견내량 최약국: 견내량마을 표지석이 있는 바로 옆이다.
거제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위급한 병이나 불치의 병이 걸리면 하다가하다가 안되면 견내량 최약국집을 찾는다. 최약사는 6.25전쟁당시 중공군 개입으로 평양이 함몰되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육지는 길이 막히고 유일하게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하게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는 화물선으로 정원이 59명이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피난민을 어쩔 수가 없어 승선인원의 230배인 14,000여명이 타고 거제도로 왔다. 여기에 탑승한 한사람이 최약사이다. 최약사는 북한에서 의학전문학교3학년에 다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을 와서 견내량에 자리를 잡고 시골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전문적인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나 의학전문하교에 다닌 경험을 살리며 의학서적을 보면서 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올해 83세인 최약사(최정의)는 정식 약국은 아니지마는 옛 경험을 살려 오늘날까지 약방을 하고 있다. 지금도 불치의 병이 걸리면 이곳을 찾는이가 있다고 한다.
약방(藥房)이란 약을 조제하지 못하고 매약(賣藥)만 하는 곳으로 병원에서의 조제처방전도 조제하지를 못한다. ↔약국(藥局)
구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중간에 있는 식당임.
최약사가 일생을 바쳐 운영하는 약방
견내량 마을의 벚꽃
대교버스정류소 앞에서 토박이 한분을 만났다. 부동산하는 분이라고 하였다. 아저씨 이곳 토박이예요. 예, 그렇수다. 경기도 좋지 못하고 인구도 줄어드는데 살기가 힘들죠? 아니예요. 여기는 주변에 청포일반산업단지가 예정이 되어 있어 부동산 값이 상승하고 내방객이 많아 살만합니다. 산업단지는 금년 10월에 착공하여 2015년에 완공할 예정인데 20개 업체 8,000여명의 종업원이 상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35만평의 부지에 4,118억을 투자한다니!!!!
‘아자씨, 여기 맛있는 식당이 없나유ㅠㅠㅠ.’
‘저 밑에 복국 잘하는 집과 국밥 잘하는 집이 있으니 찾아가보슈.’
구다리 밑에는 차량들과 쉼터이고 부두에는 굴껍질이 싸여져 있다. 해안쪽으로 조금가니 광리왜성이 나오고 저 넘어 해간도 다리가 보인다. 이곳이 우리들이 어릴 때에 보니 죽방멸치잡이 하던 곳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 여기 있는 성은 왜성인데 임란 때 지어진 것인데, 뭐 소유주가 진해시라나?? 어이가 없다.
다시 발길을 돌려 견내량 도선장을 갔다. 마을 앞 해안가에 있는데 지금은 옛날 그 명성은 어디가고 빈 배 몇 척만 견내량 물결에 당랑거리고 있다.
확산리 대교(신촌)마을에서 본 거제대교
구거제대교 차를 올렸다. 오른쪽으로는 신거제대교와 고개도가 눈앞에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 표지판을 보니 1971.4.8이 완공 하였으며 건설사는 현대건설이다. 표지석에는 박대통령의 글씨인 ‘거가대교’라 적혀 있고. 다리 입구에는 검문소가 있는데 지금은 폐쇄되고 흉악스런 낡은 건물이 그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닷가로 나가니 전경이 멋이 있다. 청각을 말리는 아낙내를 만났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
옛 검문소 , 아, 옛날이여ㅕㅕㅕ.
다리가 낡고 오래되어 하중을 제한하고 있다.
‘아주머니 이거 어떻게 먹나요?’
‘이렇게 햇볕에 말려서 저장하였다가, 갈아서 먹기도 하고 냉국, 무침, 된장국을 끓이는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조금 사가실라요?.’
‘ 다음에 사려 올께요’
거짓말을 하고 다시 해안길을 따라 나선다. 남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해간도이다. 거제 광리에서 보는 모양과는 다른 형상이다. 반원형으로 세워진 다리는 그 모양이 아름답다. 이쪽에서도 찍어보고 저쪽에서도 직어 보니 그 아름다움이 마음을 적혀온다. 먹이 찾는 왜가리는 겁도 없이 바닷가를 노닐며 먹이 찾기에 여념이 없다. 다시 돌아 나오니 연기마을이다. 이곳의 미역은 물결이 세고 깨끗하여 예부터 임금님 진상에 오르니 천하일품 해산물이라고 적혀있다.
통영시 연기마을 해간도다리에서 본 거제대교
해안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찰각 찰각 셔터를 눌러댄다. 가을 뭉게구름이 배경을 장식하니 거제대고의 아름다운 풍경이 더욱 가치를 바란다. 통영군 용남면 장평리 연기부락에서 신촌마을을 지나 신호부락을 지나 원평리 견유부락까지 해안가를 돌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다시 충렬여자고등학교 앞으로 나와 신거제대교로 행한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가다보면 통영타워가 나온다. 여기서 발걸음을 멈춘다.
통영시 장평리 신기부락에서 본 거제대교
통영타워에서 본 구거제대교
통영타워에서 본 신거제대교, 시래산 중간에 사진 촬영하는 곳이 있다.
통영에서 거제대교입구에 보면 구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이 있다.
주위를 둘려보니 ‘해병대 처음 상륙한곳’이라는 석각(石刻)이 보인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해병은 첫 승전고를 울린다. 1950년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교착상태에 빠진 북괴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거제도를 점령하기 위해 통영을 침공하였다. 이에 우리 해병대 이곳 통영 장평리에 상륙하여 북괴군을 쳐부수어 ‘귀신 잡는 해병’ 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시게가 오후2시를 가르킨다. 배가 고프다. 식당이 있길래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 식사 시간이다. 사실 나는 곰탕과 설렁탕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전에 한번 찾아보았다. 곰탕 단백한 것이고, 설렁탕 껄적지근한 것이고, 전골은 볶은 음식아라 이젠 대충 알겠군!!!
곰탕을 시키니 계란을 한 개준다. 이것을 풀어먹는 모양이다.
‘아줌마 작년과 올해 비교하면 손님은 어때요?’
‘뭐, 작년에는 거가대교 개통으로 홍수를 만났지만 금년에는 가뭄이라우ㅜㅜㅜ.’
고성공룡엑스포 때문인지? 여수엑스포 때문인지는 몰라도??/
통영타워 한편에 세워진 비석
신거제대교를 건너 오량에 있는 거제관광안내소에서 잠시 커피 한잔하고 답사를 끝냈다. 이곳 오량관광안내소는 엣날 오량성이 있던 곳으로 그 흔적이 대부분 남아 있고, 오량역과 귀양 오던 분들이 잠시 휴식을 취며 말을 갈아타던 곳이다.
곰탕 |
소의 고기와 뼈를 진하게 푹 고아서 끓인 국. 쇠고기 고기만으로 국물을 내것으로 국물 맛이 단백하다. 나주곰탕 |
설렁탕 |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다리 부분 따위를 국물이 뽀얗게 되도록 푹 고아서 만든 국. 여기에 밥을 말고 소금, 고춧가루, 파 따위를 넣어 먹는다. 서울설렁탕 |
전골 |
쇠고기 ·돼지고기 ·내장 등을 잘게 썰어 양념하여 채소를 섞어서 냄비나 전골틀에 담고, 국물을 조금 부어 즉석에서 볶으며 먹는 음식. 부엌에서 아주 볶아서 담아 올리면 ‘볶음’이라 하고, 국물을 잘박하게 붓고 미리 끓여서 올리면 ‘조치’ 또는 ‘찌개’라고 한다. 전골은 주재료에 따라 조개전골 ·내장전골 ·도미전골 ·생치전골 ·송이전골 ·낙지전골 ·두부전골 ·닭전골 ·고기전골 ·곱창전골 ·각색(各色)전골 등 여러 가지로 나뉜다. |
~ 역사의 현장을 한번 둘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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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